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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일어나 걸으라 (행 3: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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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김철 목사 (대구감리교회)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2)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문에 두는 자라 3)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4) 베드로가 요한으로 더불어 주목하여 가로되 우리를 보라 하니 5) 그가 저희에게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6)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7)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8)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니 9)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및 하나님을 찬미함을 보고 10) 그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의 당한 일을 인하여 심히 기이히 여기며 놀라니라

과학에서 말하는 변화는 일반적으로 두 가지를 이야기 합니다. 물리적 변화와 화학적 변화, 그 두 가지 입니다.

물리적 변화란 성분의 변화 없이 상태나 외형만 바뀌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나무가 책상이 되고, 야구 방망이가 되고, 마루가 되는 것처럼 모양이 바뀌지만 여전히 나무인 것을 가리켜서 물리적 변화라고 합니다.

그에 반하여 화학적 변화는 전혀 새로운 것으로 바뀌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똑같은 나무이지만, 단순히 자르는 것만이 아니고, 갈기도 하고, 새로운 첨가물을 넣기도 해서 얇게 펴 놓으면 종이가 됩니다.

카바이트에 물을 넣으면 아세틸렌이란 가스가 나옵니다. 이 가스는 용접할 때 쓰기도 하구요, 포장마차에서 어둠을 밝히는데 사용하기도 합니다.

병에 넣은 매실에다 설탕을 뿌려 놓고 마개를 잘 닫아 놓은 후 한 3-4개월 지나가면 매실이나 설탕이 아닌 전혀 다른 것이 나옵니다. 이거 잘 못 마시면 취해서 헤롱거립니다.

이런 변화를 화학적 변화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 한 변화된 사람이 나옵니다. 변화된 후에도 여전히 사람이라는 측면에서는 물리적 변화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는 사람에서 사람으로 변화된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이 사람의 상황을 조금 더 살펴봅시다.

1. 그는 날 때부터 앉은뱅이었다.

행 3:1~2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2)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문에 두는 자라

행 4:22  이 표적으로 병 나은 사람은 사십여 세나 되었더라

그는 태어날 때부터 앉은뱅이로 태어나 40여 년 간을 그렇게 살아 왔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장애인은 사회에 적응하면서 살기가 쉽지 않은 상황입니다. 어릴 때에는 그래도 부모가 보호해주니 크게 문제될 것을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점점 커 가면서, 부모님은 돌아가시고, 형제들도 제 앞가림 겨우 하는 정도라면, 이 장애인은 할 수 있는 최대의 일, 바로 구걸에 나설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을 것입니다.

다른 곳보다 비교적 인심 좋은 이 성전은 구걸하기 최적의 장소일 것입니다. 감추어져 있던 인정이라 할지라도, 최소한 이 곳에서는 그 인정이 드러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전에 와서 예배하는 사람들에게 동정을 구하는 이 장애인은 대단히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그러나 사실 안타까운 면이 있습니다.

이왕 성전 미문에 와 있다면, 그가 조금만 움직이면 그 인정을 베풀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예배하고,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누릴 수 있었는데, 지금 이 사람은의 관심은 오직 구걸에만 있습니다.

비록 성전에 와 있어도 이 사람의 관심은 온전히 구걸입니다. 누가 내게 인정을 베풀어 동전 한 닢이라도 넣어 줄까 기대합니다.

거룩한 모습을 띤 제사장이 지나갑니다. 그러나 그는 이미 강도 만난 자를 버려둔 족속입니다. 서기관이 지나갑니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장소를 잘 선택한 듯 합니다. 때때로 사마리아 사람이 지나가면서 그에게 사랑을 베풀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의 관심이 조금 더 성숙해졌다면 그는 진정한 복을 누릴 수 있었는데 전혀 모릅니다.


2. 혹시 우리의 모습이 그러하지 않습니까?

교회를 다닌지 여러 해 또는 수 십 년이 되면서 구원 받은지 꽤 오래 된 것 같은데, 여전히 일어서지 못하고 누가 던져 주는 동전만 바라보고, 제 발로 걸어보지 못한 신앙이 아닌지요.

예수 그리스도를 등지고, 참된 구원의 소식에는 관계없이 성전 밖에 서 있으면서 세상이 던져주는 동전같은 지식이나, 아니면 교양의 폭이나 넓히고, 아침에 출근했다 오후 예배도 미쳐 마치지 못하고 퇴근하는 그런 삶은 혹시 아닌지요.

이것은 참 신앙이라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대신에 우리의 원하는 것에 우리의 모든 관심이 기울어져 있는 것는 아닌가 살펴 보시기를 바랍니다.

생명이 약동하고 감격과 희열이 넘치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만남 대신에 형식적인 종교생활에 익숙해져서 “이대로가 좋다” “그냥 대강 대강 살자” 하는 동안에 발목과 무릎에 힘을 잃고, 홀로 설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3. 어떻게 일어설 수 있겠습니까?

행 3:6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은과 금 싫어하는 사람 있습니까? 은과 금 없이 사는 사람 있습니까? 물질없이 살아갈 수 없습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과 또한 살아갈 터전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아십니까? 바로 그 필요한 은과 금 때문에 사람이 썩어갑니다. 사회가 썩어갑니다. 교회가 썩어갑니다.

은과 금을 바라는 교회와 교인, 그리고 목사들 때문에 기복 신앙이 성행하고, 복 받으라는 외침과 그 외침에만 귀 기울이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보면 볼수록 보암직하고, 그 맛을 보면 맛을 볼수록 먹음직해 보여서, 다른 것은 안중에도 없어집니다.

그러다 보니 시간이 지날수록 썩는 변화밖에 더 기대할 것이 없어집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요한에게는 이 썩어질 것으로 변화되는 은과 금이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있었던 것이 하나 있어서 그 장애인에게 주려 합니다.

행 3:6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이것을 바로 복음이라고 합니다. 이 두 사도를 통해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집니다. 그의 몸은 분명히 성전마당까지 들어 왔지만, 그의 관심은 은과 금에 있었습니다. 그의 마음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는 시도조차도 하지 못했습니다.

성전에 와 있지만 와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을 선포 하신 후에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원하고 마음 속으로 그 말씀을 듣는 자는 일어설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앉은뱅이 상태로 평생 살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자 그 사람에게 변화가 생깁니다. 물질이 있고 없고의 상태가 아니라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납니다. 화학적인 변화 정도가 아니라 생 자체가 거듭납니다.

행 3:7~10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8)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니 9)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및 하나님을 찬미함을 보고 10) 그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의 당한 일을 인하여 심히 기이히 여기며 놀라니라

그는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걷게 됩니다. 이제는 펄쩍 펄쩍 뜁니다. 그리고 “한 푼 줍쇼” 하면서 사람을 향하여 사람의 동정심을 모으던 그 입술이 하나님의 찬양합니다.

지나간 40년의 고통과 눈물, 수모, 한탄의 세월이 지나갑니다.

고후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그야말로 새 사람이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변화를 갈망하십니까?

신세타령만 하고 살고 싶은 분은 아마도 없겠지요.

앉은뱅이로 평생 살기 원하시는 것 아니겠지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여러분들은 일어나시게 될 것입니다.

귀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구원은 그냥 믿는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초대교회 시절에는 믿는다는 고백 자체가 생명을 담보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자들만이 할 수 있었던 고백입니다.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걸으라는 말씀을 들으시고 일어나 걷기도 하며, 뛰며, 주님을 찬양하며 증거하시는 살아 있는 하나님의 생명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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