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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잘한 사람 & 잘못한 사람 (삼하 6: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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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장흠 목사 (독립문교회)

성경을 읽으시다가 이 사람은 좀 억울하다 라고 생각되는 사람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누구입니까? 신약 사도행전에 나오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입니다.(행전 5:1~11)

재산을 50%나 바쳤습니다.  누구라도 자기 것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 있습니까? 사람이 돈에는 약한 것입니다.  그것 돈을 받으면 영향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돈은 힘이 있습니다.  돈으로 안 되는 것 많지 못합니다.  돈은 좋은 것입니다.  돈을 보면 뱃속에서 나오지 않으려 하던 어린애도 신속하게 나온답니다.  그런 귀한 재산을 반이나 바쳤는데 부부가 한 날 같은 장소에서 죽어 장사 지내게 됩니다.  처음부터 약속이나 하지 말 것이지.  그것이 은혜 받은 장소에서는 마음이 그렇게 움직였는데 집에 돌아가 생각하니 내가 잘못했구나.  생각하면서 부부가 의논하여 결론을 냈습니다.  우리가 은혜 받았는데 그냥 말수는 없지 않아요.  반이라도 드립시다라고 부부가 합의 본 것입니다.  자기 의 전 재산 중에 50%나 드렸습니다.  사람들의 관심사가 무엇입니까? 돈입니다.  결혼하겠다는 딸의 말을 들은 아버지가 잠시 뒤에 딸에게 묻습니다.  그 사람 돈 좀 있니 라고 하였습니다.  그때 딸이 하는 말 남자들이란 모두 비슷하군요.  그 사람이 아버지에 대해 알고 싶어하는 것도 바로 그 부분이던데 남자들 뿐 아닙니다.  여자들의 관심사도 물질입니다.  그런 물질을 드렸음에도 잘못한 것으로 인정되어 큰 화를 당한 것입니다.

본문의 내용은 다윗이 남북 왕조를 병합하여 통일 왕국을 세우게 됩니다.  엘리 제사장 때에 블레셋과의 아벡 전투에서 블레셋 사람들에 의하여 빼앗겼던 법궤가 유다 남방의 변경인 기럇여아림에 방치된 지 70여년이 지났습니다.(주전 1075-1003년)  그 법궤를 옮겨오는데 일어난 사건입니다.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시면서 예루살렘은 종교와 정치의 중심지가 된 것입니다.  명실공히 천도의 사건입니다.  이 귀한 일을 하는 과정에서 웃사라는 이가 죽게 됩니다.  그러면 웃사는 그렇게 죽을 만큼 문제가 되는 겁니까? 1) 그의 집에서 법궤를 모셨습니다.  아비나답의 집에서 나오는데 사무엘상 6:3절 그 아비나답은 누구인가 웃사의 아버지라고 말합니다.  조상 때부터 법궤를 모신 것입니다.  2) 그렇다면 형제들과 함께 법궤를 운송하는 중대한 사명을 수행한 것입니다.  자기가 해야 할 사명을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죽어야 합니까? 3) 그것도 새 수레를 만들어서 누가 보아도 멋있게 아름다운 모습으로 법궤를 옮기는데 왜 죽어야 합니까?

그런데 10절을 보세요.  오벧에돔이라는 인물이 나옵니다.  그는 자기  집에 법궤를 옮겨다가 모십니다.  석 달만에 하나님은 그 온 집에 복을 주셨다고 하였습니다.  같은 법궤인데 웃사는 아버지 아비나답 때부터 모셨고 법궤 운송의 사명을 다하다가 죽고 오벧에돔은 석 달만에 큰 축복을 받게 되었나요? 웃사는 “잘못함을 인하여” 라고 7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벧에돔은 잘하였다는 말입니다.  잘하는 사람은 복을 받습니다.  같은 일을 해도 잘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왜 웃사는 잘못했습니까?

1.  방법의 문제입니다.

사람들은 목적만 달성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목적이 분명해야 하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목적이 삶을 지배하게 됩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중에 목적 없이 사는 이들이 있습니다.  목적은 방향입니다.  방향을 잊어버리면 가고자 하는 길을 갈 수 없습니다.  교회도 목적이 끌고 가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프로그램에 의하여 움직여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건강한 교회는 목적이 분명하다고 말합니다.  전 성도가 사역자가 되는 것과 신앙 안에서 어른스러운 아비 된 신앙인이 된다는 목적이 있어야 합니다.  선교와 불신앙인들을 사랑한다는 목적이 있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방법이 선해야 합니다.  웃사는 법궤를 옮긴다는 목적은 좋았었는데 방법이 잘못되었습니다.  원리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문제의 원인은 원칙을 벗어나기 때문에 생깁니다.  법궤를 옮길 때에는 레위 지파 사람 중에 고핫 자손들이 어깨에 매고 옮겨야 하는 거였습니다.  이것이 원칙입니다.  그럼에도 자기 자신이 이 일을 행하였습니다.  그것도 맨 것이 아니라 새 수레를 만들어 끌고 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조심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모든 일은 내가 해야 한다는 생각이 위험이었습니다.  죄가 무엇입니까? 영어로 죄는 sIn입니다.  영문의 Sin인데 가운데 I 가 대문자로 표시해 보면 이것이 죄라는 말입니다.  내가 중심이 되어 있습니다.  나 중심입니다.  왜 문제가 생기던가요? 내가 중심이 되어 있을 때입니다.  나를 위해달라고 나를 왜 몰라주느냐 라고 말하기 시작하면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내가 좋으면 할렐루야이고 내가 손해 볼 것 같으면 이럴 수가 있나? 라고 불평을 합니다.  이기주의, 나 중심 이것이 없어져야 합니다.

뉴욕대학교 국제경영학교수 조지 데이비드 스미스와 하버드 대학원의 연구원을 역임한 프레드릭 댈줄이 지은 책 『위대한 기업가들에게서 배운 경영불변의 법칙』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첫째가 모험을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성공은 모험할 때에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들은 모험을 선택하면서 또 다른 문제를 만들고 다시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면서 변화에 익숙하게 대응할 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둘째는 경쟁을 두려워 말라는 것입니다.  셋째는 관리를 들고 있습니다.  관리가 경쟁이었다는 것입니다.  넷째는 리더십이 시대를 만든다는 것입니다.  큰 기업으로 성공한 사람들이 우연히 된 게 아닙니다. 기업의 원칙이 있었습니다.  잘하려고 하면 성경의 원리대로 믿고 살아야 합니다.

운동경기를 해도 원칙이 있습니다.  원칙대로 하지 아니하면 퇴장도 시킵니다.  운동하는 이들에게도 적어도 세 가지 원칙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기본 자세를 잘 닦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둘째는 꾸준히 연습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셋째는 선수들이 운동하는 것을 보아야 한답니다.  적은 것을 해도 원리가 있습니다.

다니엘서를 보면 포로가 되었던 다니엘과 세 사람의 친구들이 바벨론 왕궁에서 훈련받는 소년들이었으나 뜻을 정하고 왕이 주는 진미와 포도주를 금하고 채식을 하였습니다.  이후에 다니엘은 총리가 되었습니다.  그 후에 다리오 왕은 30일간 어떤 신에게도 기도하지 못하게 금령을 내렸으나 다니엘은 하루에 세 번씩 창문을 열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기도합니다.  원칙에 충실한 사람들은 반드시 잘되고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았습니다.

신앙생활 하는 이들이 착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열심히 있으면 그것이 무슨 큰일을 하는 것같이 생각합니다.  열심도 있어야 합니다.  우선권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기는 이미 오래 전에 이 교회에 나왔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잘못을 범하는 결과를 낳습니다.  주님을 섬기는데 정성을 다하면 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최선을 다하는 것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게 원칙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법궤을 모시는데 원칙이 있습니다.  첫째, 고핫 자손이 그것도 어깨에 메어가야 합니다.  그런데 새 수레를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웃사의 방법입니다.  오벧에돔은 메어 갔다고 하였습니다.(삼하 6:10)  메어 가는 게 원칙입니다.  웃사가 이것을 몰랐다면 무지입니다.  비극을 가져오는 무지입니다.  이런 무지는 죄입니다.  만일 알고도 그런 방법을 사용했다면 몇 가지 잘못이 있습니다.  하나는 편의주의 때문입니다.  메는 것보다는 끌고 가는 게 편합니다.  그러니까 편한 방법을 동원하였습니다.  편하다고 좋은 것이 아닙니다.  원칙대로 하여야 합니다.

편하게 예수 믿겠다는 것이 현대인의 생각입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편리주의입니다.  삶은 편하게 살아도 예수는 원리대로 믿어야 합니다.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따르고 싶은데 십자가를 질 수 없다는 생각이 문제입니다.  이것이 안일주의입니다.  편의주의입니다.  어렵게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하여 기꺼이 동의합니다.  그러나 예수를 따르는 우리는 십자가를 반드시 지고 가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설 때에 주님이 물으십니다.  네가 지고 올 십자가는 어디에 있느냐? 물으실 때 우리는 정색을 하면서 아니 아직도 도착하지 아니하였습니까? 오래 전에 택배로 부쳤거든요? 이상하다 아직도 도착하지 아니하였다면 발송사고 아닌가? 그러실 분들이 있는지 모릅니다.

두 번째의 문제는 새 수레를 만들어 옮겼다는 것인데 이는 이방인들이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방인들이 하는 습관을 따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왜 세속적인 방법을 따르게 되었을까요? 세속적인 삶을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영적이라는 말을 할 때 무엇을 두고 말합니까? 그 사람의 가치관을 말하는 것입니다.  육적인 사람은 가치관이 육신에 있습니다.  육신적으로 편하고 즐겁고 좋은 것은 다 좋은 거라고 생각합니다.  먹고 즐기자의 삶입니다.  영적인 가치관을 가진 이들은 세상적인 즐거움보다는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더 할 일은 없는가? 나는 힘들고 어려워도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따라 살려고 합니다.  좋은 목적으로 시작하고 좋은 방법으로 일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좋은 방법이 성경에 있습니다.  성경대로 믿고 성경대로 살면 되는 것입니다.  세속적인 방법을 교회 안으로 끌고 들어오지 않아야 합니다.  원리대로 하는 것입니다.  생활은 편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영적생활은 편안해서는 안 됩니다.  대영국사를 쓴 영국의 철학가 흄은 말년에 경제적인 풍요를 누렸는데 이것이 그의 인생에 있어서는 해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가 너무나 편한 생활을 하다 대영국사 속편을 쓸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안타까워 친구들이 권면 했더니 그때 흄은 변명하기를 내가 집필하지 않는 이유는 첫째, 내가 너무 늙었고, 둘째는 너무 살이 쪘으며 셋째, 너무 게을러졌고, 넷째 너무 돈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라고 말하더랍니다.  힘들어도 우리는 사명을 수행하며 본분을 다 해야 하는데 성경적인 방법으로 실천함으로 잘하는 복된 분들이 되어지기를 바랍니다.

셋째는 교만 때문이었습니다.  내가 하는 일은 잘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잘되던 사람이 마지막에 초라한 인생을 사는 이들을 보게 됩니다.  바로 교만한 사람들입니다.  웃시야가 그러하였습니다.  역대하 26:~을 보면 5절에서 16세에 왕이 되었을 때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며 하나님의 묵시를 밝히 아는 스가랴의 사는 날에 하나님을 구하였고 저가 여호와를 구할 동안에는 하나님이 형통하게 하셨더라고 기록하였는데 16절에는 저가 강성하여지매 그 마음이 교만하여라고 기록합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렸습니다.  그에게 귀한 말씀을 전하여 주는 사람을 무시합니다.  그가 성전 안에서 향단에 분향하려고 했습니다.  그로 인하여 그는 문둥병으로 하나님이 치셨다고 했습니다.(대하 26:16-18)  교만하면 하나님을 잊어버립니다.  주의 종들의 가르침을 듣지 아니합니다.  월권 행동을 합니다.  자신의 자리를 잘 지켜야 합니다.  분수는 알아야 합니다.  교만이 원칙을 어기는 결과를 가져 온 것입니다.

넷째는 불순종입니다.  교만하면 자연히 따라오는 게 있습니다.  순종하지 아니합니다.  예수를 잘 믿고 싶으십니까? 순종하세요.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싶으십니까? 순종하세요.  순종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놀라운 축복을 받습니다.  정당한 이유가 있더라도 불순종하면 풍랑입니다.  하나님의 원리를 따르지 아니함은 불순종입니다.  결과는 하나님이 치시고 웃사는 죽고 말았습니다.  원리대로 성경대로 믿고 살아가는 잘하는 신앙인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내용의 문제였습니다.

다윗이 법궤를 운송하는데 최선을 다한 모습이 보입니다.  1) 우선 전국에서 유명한 3만 명을 뽑아 동원하였습니다.(대상 13:1-5)  2) 전 국민의 관심 속에서 여호와 신앙의 부흥을 기대하는 행사였습니다.  지난번 다윗의 즉위식 때 35만 명이 모였었는데(대상 12:23-24) 그 다음으로 큰 행사였습니다.  3) 모든 악기를 동원하였습니다.  수금, 비파, 양금, 제금으로 노래하며 춤추며 행진하고 있었습니다.  누가 보아도 잘하는 법궤 운반 행사입니다.  그런데 법궤가 흔들릴 때를 위하여는 준비가 되지 않았습니다.  근본적인 준비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건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소홀하였다는 것입니다.

흔히 우리 문화를 포장문화라는 말을 합니다.  겉을 아름답게 한다는 말입니다.  사람이 옷을 잘 입었다고 인격이 훌륭하다고 말하지 아니합니다.  그 사람의 인생관 가치관이 어떠하냐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입니다.  말이야 겉보다는 속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실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을 볼 때 마음은 보이지 않습니다.  우선 외모가 보입니다.  얼굴이 잘생겼나? 키는 얼마인가? 인상은 좋은가? 처음 대하는 사람의 얼굴을 봅니다.  먼저 미소 지을 줄 아는 사람이 좋아 보입니다.  중국의 격언대로 미소가 없는 사람은 기업을 경영하고 사람을 지도할 자격이 없다는 말처럼 미소는 힘이 있습니다.  노사코 네이코 라는 이는 웃음은 빙산이라도 녹인다고 하였습니다.  다른 이들을 향하여 웃어줄 수 있는 여유가 있는 게 얼마나 좋은 겁니까? 그리고 친절하게 말 잘하는 사람이 좋아 보입니다.  쉽게 말을 부치고 대화의 내용이 풍성한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이는 30분 동안 같이 있어도 말을 하지 못합니다.  묻는 말에도 대답도 분명하지 않습니다.  답답하게 보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화제 거리가 풍성하고 상대방에게 호감을 줄만큼 칭찬도 하고  듣기 좋은 말을 하는 사람이 좋아 보입니다.  거기에다가 열정이 있어 보이는 사람이 믿음직스럽게 보입니다. 

열정은 차를 달리게 하는 기름과도 같은 것입니다.  아무리 험하고 힘든 고개 길이라도 기름이 있으면 갈 수 있는 것 같이 사람도 열정이 있는 사람은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어도 견뎌 낼 수 있습니다.  문제는 내용입니다.  겉은 그런 대로 되어 있는데 내용은 어떠한가 하는 것입니다.  내용 있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웬만한 교회는 열린 예배 혹은 구도자 예배를 드립니다.  손을 들고 눈물을 흘리면서 세상말로 하면 광적인 예배를 드리는 것을 열린 예배라고 합니다.  우리가 생각해볼 게 있습니다.  영성이 있어야 합니다.  겉으로만 손을 흔드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껍데기 포장이 문제가 아닙니다.  내용이 더 중요합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고 교회생활을 잘 하고 직분도 받았습니다.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그건 껍데기이고 내용은 세상의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겠다는 다짐과 함께 예수에게 참가치를 두고 사는 것입니다.  형식적으로 하는 일은 힘듭니다.  기쁨도 재미도 없습니다.  마음으로 중심으로 하는 것은 의미가 있고 즐겁습니다.  예를 들어 예배 한 시간을 드리는데 의무적으로 드리면 시간이 지루합니다.  듣는 것이 힘듭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며 예배를 사모하며 드릴 때에는 모든 순서가 다 은혜가 됩니다.  그렇게 좋습니다.  내용이 없는 형식은 하나님께 잘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였습니다.  마음으로 중심으로 하는 일들이 하나님께 잘하는 것입니다.  진실로 주님을 마음에 모시고 그분의 뜻을 따라 사는 삶이 잘하는 것입니다.


3.  만지지 않아야 할 것을 만졌습니다.

법궤 운반의 책임을 맡은 웃사가 흔들리면 쓰러지는 법궤를 잡았습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이 웃사의 잘못함을 인하여 진노하사 저를 그곳에서 치시니 저가 거기 하나님의 궤 곁에서 죽으니라 (삼하 6:7)  소들이 뛰므로 넘어지려는 법궤를 잡았는데 하나님이 진노하시고 잘못함을 인하여 하나님이 치시므로 죽었다라는 설명이 깁니다.  상황 윤리적으로 보면 전혀 잘못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 앞에 바른 행동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법궤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레위 자손 고핫 사람이라도 법궤는 만지지 말라고 하였습니다.(민 4:15) 아무도 들여다보지도 말라고 하였습니다.(민 4:20)  법궤를 움직일 때에는 완전히 싸서(민 4:5) 채를(Pole) 궤의 고리에 꿰어 운반하게 되어 있습니다.(출 25:14)  그런데 웃사는 법 궤를 붙잡음으로 신성 모독의 잘못을 범함으로 큰일에 실패자가 되고 비극적인 마지막을 맞게 된 것입니다.

1)하나님의 명령을 소홀하게 여겼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법은 지켜야 하는 줄 알면서 하나님의 법을 소홀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손대서는 안 되는데 왜 손을 댑니까? 세상의 모든 것은 지켜야 할 선이 있습니다.  이것을 벗어나면 해를 받습니다.  깡패의 세계에도 영역이 있다고 합니다.  그 영역을 침범하면 피나는 싸움을 하게 된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지켜야 할 말씀입니다.  듣고 알고 있다면 다 된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2)거룩함을 침해한 것입니다.

    왜 법궤에다가 손을 댑니까? 우려하는 마음으로 충성 된 마음으로가 아닙니다.  신성모독이었습니다.  손대서는 안될 게 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저버리는 것은 안 됩니다.  왜 하나님의 것 십일조에 손을 댑니까? 신앙생활에서 내가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세계를 안다면 거룩한 부분에는 손을 대지 않아야 합니다.  왜 주님의 날에 손을 댑니까? 주일은 거룩하게 지켜져야 합니다.  웃사는 잘못했습니다.  그런데 잘한 사람이 있습니다.  오벧에돔입니다.
잘합시다.  그는 법궤를 메어 갔습니다.  원칙대로 한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집에 모셨습니다.  누가 뭐라 해도 원리대로 하면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습니다.  잘한 오벧에돔 같이 하나님께서 그와 온 집에 복을 주시니라의 주인공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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