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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선함과 의로움 (빌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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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이용호 목사 (영천교회)

설교내용  시험문제 정답은 하나뿐입니다. 또 하나이어야 합니다. 지난 번 대학입시 수능시험 때 복수정답 때문에 논란이 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복수정답을 인정했을 경우 45만명의 수험생들에게 영향력이 미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1점이 중대한 결과를 초래하는 것입니다. 만약 대학입시를 했을 때 1점이 모자라서 떨어졌다면 그것은 1점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학생의 장래와도 밀접한 연관을 가집니다. 1점 때문에 인생행로의 방향이 바뀔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정답은 하나이어야 합니다. 답이 2개이면 모든 면에 혼선이 일어납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진리의 정답을 배우고 그 진리의 정답을 붙잡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진리는 정답뿐이고 오직 한가지입니다.

  사도의 목회기도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두 가지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빌립보교회를 위한 기도이지만, 이것은 사도가 모든 지상에 있는 교회를 위한 기도입니다. 9-11절에 보면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고 말씀합니다. 사도 바울이 기도하는 두 가지 주제는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는 것”과 “의의 열매가 가득하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여기 나오는 ‘선’과 ‘의’의 두 가지 주제는 오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진리의 말씀입니다. 선을 분별하라. 의의 열매가 있으라고 했습니다.
 
선과 의는 개념이 구별됩니다. 이 세상에서는 선을 강조합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도덕률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도 선하게 살 수 있습니다. 교육현장에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교사들이 학생들에게 선을 가르칩니다. 얼마든지 선을 말할 수 있고 선을 가르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의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에게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이교도는 선을 강조합니다. 불교, 힌두교, 유교에도 모든 종교에는 선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의를 강조하는 진리는 기독교 밖에 없습니다.

  의는 선과 함께 하지만 이것은 매우 영적인 개념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매우 선하신 하나님입니다. 의로우신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도 선해야 하고 의로워야 합니다. 기독교는 선과 의를 분리하지 않습니다. 그만큼 선과 의는 하나이면서도 구별이 있습니다. 선은 우리의 내면을 강조합니다. 성도의 내면은 선함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 악이 있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악함을 품어서는 안 됩니다. 선함을 지녀야 합니다. 그러나 의는 외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이웃을 향하여, 남을 향하여 정상적으로 관계를 가지고 남에게 유익을 주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의입니다. 선함은 나 혼자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의는 타인과의 관계입니다. 이웃이 있어야 의롭게 살 수 있습니다. 나 혼자서는 의롭게 산다는 것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관계가 있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의는 영적인 것입니다.

  동양은 선을 강조합니다. 명심보감에도 선을 강조합니다. 견선여갈(見善如渴)은 선한 일을 보거든 목마른 것처럼 빨리 행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선과 의를 함께 강조합니다. 도덕적인 선, 이 땅위의 인간이 말하고 있는 선은 전적으로 순수하지 않습니다. 선하다고 하는 그 사람을 우리가 가까이 가서 보면 전부 선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 땅위의 선은 선하지 않는 선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사람을 속이는 선이 많이 있습니다. 이것을 이론적으로 두 가지로 말합니다.

  이 땅의 선

  하나는 목적에 따른 선입니다. 여러분 사기꾼들은 좋은 목적을 내세웁니다. 사기꾼들이 내세우는 조건은 전부 화려합니다. 그 아름다운 목적을 가지고 나쁜 짓을 합니다. 목적에 따른 선입니다. 자선단체를 운영하는 책임자가 기부금을 착복했다고 해서 법의 심판을 받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좋은 목적을 가지고 악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공산주의는 이상국가를 제시합니다. 인민들의 평화, 안녕, 지상천국을 약속합니다. 그러나 그 아름다운 목적을 가지고 인민들을 억압합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 그 화려한 사랑의 목적을 가지고 상대방을 취하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목적에 의한 선은 믿을 수 없습니다. 끝까지 봐야 합니다. 조건, 목적이 좋다고 해서 끝까지 좋은 것이 아닙니다.

  또 하나는 결과론적인 선이 있습니다. 가출한 한 학생이 후에 성공을 했습니다. 목재소 사장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금의환향 했습니다. 그렇다고 그 사람의 가출이 선이라고 규정할 수 없습니다. 현재 성공을 했으니 그 사람의 모든 과거가 선은 아닙니다. 이 땅위의 목적에 의한 선과 결과에 의한 선은 하나님 아버지가 말하는 선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그런 선을 가지고 미혹합니다. 결과를 가지고 과정, 동기를 감춥니다. 목적을 가지고 모든 수단을 동원합니다. 이것이 땅위의 선입니다. 그러므로 선한 목적으로 시작한 일들이 우리를 패망으로 이끌어가고, 기개를 가지고 시작한 일들이 우리를 좌절시키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로마서 8장 28절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성구를 오해하면 안 됩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은 매우 깊은 진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선과 악을 섞어서 선을 이루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오해하면 안 됩니다. 우리가 죄를 지으면 우리의 죄 지음도 하나님 앞에 선을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시험 당할 때 그 시험 중에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도하고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는 믿음을 가지고 불신앙과 구별이 될 때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이 될 줄 믿습니다. 고난 자체가 선을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고난 중에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답게 구별되라는 것입니다. 그 고난을 대처하는 것이 믿음으로 구별되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속에 불신앙을 철저히 구별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지만 우리 불신앙을 가지고 의를 이루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불신앙에서 구별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땅위의 선은 이기적입니다. 자기에게 초점을 맞춥니다. 내게 유익하면 선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두고 기도하실 때 “아버지여 할 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선과 의는 아버지의 원대로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은혜라는 말도 내 자신에게 초점을 두고 사용하기 쉽습니다. 예배를 드리고 나가는 성도가 “목사님 오늘 예배를 통해서 은혜를 받았습니다” 라는 이런 인사는 듣기 좋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오해를 하지 않아야 합니다. 은혜가 무엇인가? 내 맘에 든다고 은혜입니까? 그것이 은혜의 본질이 아닙니다. 나의 약점을 책망해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아멘이 나와야 합니다. 그런데 내 약점을 꼬집는 이 한마디 때문에 안색이 변하고, 교회관이 비뚤어지는 이런 상태에서는 은혜가 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은 은혜 받았다는 말을 정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예배를 드리고 은혜 받았다 하는지, 아니면 내 기분에 만족하니까 은혜를 받았다고 하는지 평가해 보시기 바랍니다.

  선악과 원리

  하나님은 에덴동산에 선과 악을 구별하는 나무를 두셨습니다. 선악과입니다. 뱀이 하와에게 와서 유혹을 합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더냐?” “아니야 동산나무의 모든 실과를 먹을 수 있지만 동산 중앙에 있는 선과 악을 구별하는 이 나무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고 했다” “아니야 먹으면 네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는 거야. 먹어 봐.” 이 유혹 앞에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이 금한 선악과를 먹고 범죄하고 말았습니다. 여기서 선과 악이 생겨났습니다. 선과 악이 대립하게 되었습니다. 이 에덴동산의 선악과 원리는 에덴동산에서 끝난 원리가 아닙니다. 선악과는 에덴동산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가정에도 있고 내 개인생활에도 있고 오늘 우리 교회 안에도 선악과가 있습니다.

  저는 이 선악과 원리를 모든 면에 적용합니다. 불의 재물은 선악과 원리입니다. 선악과는 하나님이 금한 것입니다. 여러분, 공짜 돈을 쉽게 생각하지 마세요. 불의 한 재물, 이것을 먹고 나면 선악과를 먹은 것과 같은 결과가 초래되는 수가 많습니다. 요즘 뉴스의 주인공들이 불의한 재물을 먹고 다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불의한 재물은 선악과입니다. 한 남자와 한 여자로 가정을 이루게 하신 하나님의 혼인법은 선악과 원리입니다. 하나님이 허락지 않는 여자,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는 남자와 관계를 갖는 이것은 에덴동산을 실낙원으로 만드는 것과 같이 가정을 파괴시키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허락지 않는 것은 손대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금하는 것을 범하면 선악과의 원리처럼 재앙이 오는 것입니다.

  저는 주일도 선악과의 원리라고 생각합니다. 주일은 성경의 명칭이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안식 후 첫날입니다. 안식 후 첫날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지키는 주일은 예수님의 부활을 축하하고 경배하는 날입니다. 이 주일은 그냥 휴일이 아닙니다. 주일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입니다. 4월 달만 부활절이 있는 달이 아니고 우리 교회 예배는 주일마다 부활절입니다. 주일마다 작은 부활절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우리 예배가운데 찾아오시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오늘 우리 예배를 받으십니다. 그러므로 주일예배는 부활절입니다. 아주 중요한 날입니다.

  또 하나는 주의 날입니다. 사도 요한이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Lord’s day라고 말합니다. men's day 또는 my day가 아닙니다.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날이 아닙니다. 주님의 날입니다. 여러분, 주일은 주님의 날입니다. 이 날을 내 맘대로 범하면 안 됩니다. 이 날은 구별된 날이고, 예배하는 날이고, 하나님이 복 주신 날입니다. 이 주일을 함부로 범하면 엿새 동안의 축복을 잃어버립니다. 선악과만 손을 대지 않았으면 에덴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실과를 다 먹을 수 있는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손대는 바람에 에덴동산의 모든 생명나무 열매를 다 잃어 버렸습니다. 에덴동산 자체를 잃어버렸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내신 진리의 원리입니다. 여러분은 주의 날을 바로 지키면 엿새 동안 복 받을 줄 믿습니다. 저는 십일조도 선악과의 원리라고 봅니다. 열 개 중의 하나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구별된 것입니다. 손대면 안 됩니다. 손대면 선악과를 건드리는 것과 같습니다. 십의 일조를 신실하게 드릴 때 나머지 아홉을 주실 때마다 하나님의 축복이 임할 줄 믿습니다. 그러나 그 하나를 손대면 아홉 개의 축복도 잃어버립니다.

  하나님의 계산법이 있습니다. 언제 합니까? 우리가 주님 앞에 서는 그날에 하나님은 정확한 계산을 하십니다. 한 달란트 받은 사람처럼 아무것도 남긴 것이 없는 이런 인생이 많을 것을 성경은 경고하고 있습니다. 아무것도 남기지 못한 인생, 어두움에 던져질 인생이 많다는 것을 성경은 경고합니다. 우리가 선악과를 범하고도 복 받기를 원한다면, 이 진리의 선악과의 영역을 침범하고도 복을 받기 원한다면 계산 착오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계산하지 않습니다.

  의의 열매

  사도 바울은 오늘 우리에게 두 가지 기도를 했습니다. "너희들이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할 줄 알라" 그리고 의의 열매가 가득하기를 바란다. 의라는 말은 매우 고상한 말입니다. TV의 많은 말속에 우리가 의롭게 살자는 말을 하는 아나운서도 없고, 그 말을 가르치는 교수도 없습니다. 의를 말하지 않습니다. 의는 성경만이 말하고 있고, 교회 오면 설교자의 입을 통해서 들을 수 있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의의 열매를 요구합니다. 그것도 의의 열매가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의의 열매가 가득한 삶을 바울이 구했는데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향한 소원입니다. 영천교회가 의의 열매로 가득한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에 의의 열매가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의인이라야 의를 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했습니다. 인간 중에 의인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람 가운데 의를 행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누구도 의를 행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죄인은 의를 행할 수 없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로 우리의 죄가 사함을 입습니다. 우리는 죄인입니다. 원죄를 타고났습니다. 이 죄가 사함을 받으려면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가 그 예수의 피의 권세가 우리의 죄를 사합니다. 나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의 속죄를 믿을 때에 우리가 의롭다 함을 받습니다. 성령으로 우리를 의롭다 하십니다. 우리의 죄가 용서 받습니다. 그 때부터 하나님이 우리를 의인으로 불러 주십니다. 그리스도의 속죄를 입은 사람만이 의를 행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족해도 예수님을 구주로 믿었다면 우리는 의로움을 입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예수의 이름으로 행하는 모든 행위가 의를 행하는 열매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원리입니다. 하나님은 의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그 사랑의 열매는 우리에게 죄 사함으로 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함께 할 수 없지만 죄인은 사랑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자리에 어떤 죄인이라도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를 믿고 죄 사함 받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죄인이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의인이 된 것은 사랑의 열매입니다. 아가페의 열매입니다. 우리가 제법 그럴 듯해서 예수 믿은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저의 설교나 기도를 들으면 ‘목사님은 성전건축에 대해서는 걱정하는 것도 없고, 두려워하는 것도 없고 그런가 보다’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사실 제가 그런 걱정하지 않고 설교합니다. 그러나 저도 인간이기 때문에 성전건축을 두고 이것, 저것 생각하면 걱정이 태산 같습니다.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이렇게 조건이 맞지 않고, 계산이 맞지 않고, 공사의 어려움이 있으면서도 교회가 성전을 건축하고 있는 대단한 자부심, 밖에서 성전건축 한다고 수고한다는 격려의 말을 들을 때마다 대단한 자부심이 마음에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자세히 생각해 보면 잠이 오지 않는 압박이 있습니다. 여러분,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 압박을 붙잡고 기도를 하니까 하나님이 이런 위로를 주십니다. ‘그래, 성전을 지으면서 걱정도 안 되고, 압박도 안 되고, 염려도 안 되고, 척척 다 맞아 가는 성전건축을 하면 네가 얼마나 교만할거냐?’ 하나님은 저를 낮추고 있습니다. 예배당 하나 짓는다고 자랑할까봐 낮추고 있습니다. 여러분, 힘든 것은 우리를 낮추기 위함입니다. 우리를 하나님이 연단시키고 있습니다. 성전건축의 압박감을 느끼지 못하는 성도는 연단을 받지 못합니다. 성전건축 때문에 잠이 오지 않고 하나님께 부르짖는 자리로 나아가기 바랍니다. 거기서 여러분을 다듬으십니다. 여러분을 복된 성도로 다듬으십니다.

  ‘의’라는 것은 그렇게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은혜가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은 의인은 영원하다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한 의, 그 나라와 그의 의는 영원하다고 했습니다. 시편 112편에 보면 “재물은 복이다” “자손은 복이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복이다” “복이다” 라고 했지 영원하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자손의 복은 영원하다고 성경에 말하지 않았습니다. 무엇이 영원한가?

  맺는 말

  시편 112편에 1-3보면 세 가지 복이 나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도에 행하는 자는 복이 있다” 예수 믿고 사는 것은 복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후대가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부유와 재물이 그 집에 있다고 했습니다. 부유와 재물, 믿는 사람의 재물이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 구절이 중요합니다. “그 의가 영원하리로다.” 이 ‘의’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것입니다. 재물이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그 재물로 하나님의 일을 할 때 그 의가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우리 자손들이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 자손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 때 그것이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의의 열매가 가득하기를 구하는 것은 성령의 기도제목입니다. 성령께서 오늘 우리를 위해 기도를 하는데 무엇을 구합니까? “선을 분별하고 의의 열매가 가득하기를 구하노라” 이것이 사도의 기도이면서 성령의 기도입니다. 우리 교회를 향한 성령의 기도입니다. 나를 향한 성령의 기도입니다. 그러므로 의로움과 선함으로 무장된 신실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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