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추수할 일군 (마 9:35-38)

  • 잡초 잡초
  • 324
  • 0

첨부 1


- 설교자 : 이용호 목사 (영천교회)

어느 택시기사가 영업을 하는데 한 손님이 탔습니다. “기사님, 빨리 좀 가 주세요.” 그래서 정말 급한 일이 있는가 보다 싶어 빨리 가는데 한참 가다보니 뒤에 택시가 한 대 따라옵니다. 그런데 뒤따라오는 택시의 기사가 주먹을 쥐고는 서라는 신호를 하는 것입니다. “이봐요 손님, 뒤에 택시기사가 서라고 하는데요?” “아니에요. 뒤차를 좀 따돌려 주세요.” “그런데 왜 차가 따라오는 것을 따돌리라고 합니까?” “사실 제가 아까 그 택시를 탔는데 택시비가 없어서 도망을 왔거든요.”    지금 우리 세상은 수고를 했는데 수고한 만큼 대가가 없기 때문에 많은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임금체불을 받은 해외 근로자들이라든지 그 외에도 임금을 못 받고 있는 사람들의 고통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수고를 했는데 수고한 만큼 대가를 못 누리는 것, 이것이 우리  사회의 큰 고민으로 다가옵니다.

  혼란 속의 기회

  사람이 날 때와 죽을 때는 별 차이가 없습니다. 고급 병실에서 태어난다고 태어난 아이가 ‘아, 행복하다’ 그렇게 태어난 아이가 없습니다. 또 죽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안실이 고급이라고 시체가 더 편합니까? 사람이 나고 죽는 것은 차이가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는 것입니다. 살아가는 과정이 문제가 있습니다. 살아가는 과정을 연구한 이론을 보면 사람이 나서 생물학적인 존재로서 일생을 사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저 먹고 마시고 자고 하는 일종의 사욕적 존재입니다. 우리가 돼지를 키울 때 보면 그 돼지가 아무리 잘 먹은들, 아무리 살이 찐들 종말은 마찬가지입니다. 그와 같이 의미없이 먹고 나고 살고 하는 이런 생물학적인 존재에 지나지 않는 인생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성취적 존재가 있습니다. 하고 싶은 공부를 한다든지, 하고 싶은 예술을 한다든지, 하고 싶은 일을 자기 나름대로 해보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존재, 즉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형상에 그 가치를 누리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고 분류를 합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아주 의미깊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추수할 것이 많다고 했습니다.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사 저희가 목자없는 양과 같이 고생함에 이르려 함이라 이에 제자들이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은 적다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군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 여기에 우리가 세 가지 아주 흥미있는 관찰을 보게 됩니다. 첫째, 이 시대를 보신 주님은 추수할 게 많다고 했는데 추수라는 것은 농사의 결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예수님이 사신 그 시대를 보시면서 지금은 파종의 때다,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추수의 때다,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할 때가 되었다” 주님의 역사관, 주님이 보신 이 세상은 추수의 때라는 것입니다.

  이 관점이 왜 중요하느냐 하면 신앙생활과 밀접한 관점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은 언제나 그 시대를 볼 때, 상황을 볼 때 추수의 개념으로 봐야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래 가지고는 끝났다, 여기 무슨 기대할 게 있느냐’ 그렇게 생각하는 그 상황을 추수의 개념으로 보라는 것입니다. 절망의 역사 속에서 추수의 개념으로 보라는 것입니다. 그만큼 우리들에게 있어서 이 역사의 관점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두 번째로 말씀하신 것은 추수할 일군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또 한 가지 굉장한 관찰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사 이는 저희가 목자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고 말씀합니다. 추수의 개념으로 역사를 보면서도 이 백성들을 볼 때는 고난의 백성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 시대의 사람들을 볼 때 분명히 예수님 당시에 유대의 환경이나 시대는 매우 혼란스러웠습니다. 백성들은 불쌍합니다. 목자잃은 양과 같습니다. 고생하며 유리하는 그들을 주께서 보신 것입니다. 그런데 고생하며 유리하는 그 무리들을 보면서, 그 고통의 시대를 주님이 보시면서 그 속에서 지금은 추수할 것이 많다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어느 성도 한 사람이 사업을 아주 잘해서 돈을 많이 벌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성도는 국내에서도 물론 돈을 벌지만 수시로 해외에 나간다는 것입니다. 안 보여서 물어보면 브라질에 갔다 하고, 또 물어보면 러시아에 갔다 하고, 물어보면 아르젠틴에 갔다 하고 이렇게 일년 중 국내에 있는 시간보다 해외에 나가있는 시간이 많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디 갔다고 하는데 보면 별로 가 볼만한 나라가 아니고 경제적으로 어렵고, 경제적으로 혼란이 있고, 인플레가 100%, 200%씩 뛰는 그런 나라에 이 사람이 가서 사업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한번 물어보았습니다. “집사님은 사업을 잘 하시는데 러시아에는 왜 그렇게 자주 갑니까? 나도 러시아에 가보니까 그 나라는 형편없는 나라이고 경제적으로 혼란이 많던데요. 어떻게 그런 나라가서 사업을 합니까?” 그 때 이 분이 하는 말이 “목사님, 목사님은 목회 전문가이고 저는 경제 전문가입니다. 저는 장사 전문가인데 사실은 안정된 나라가서는 돈을 못 법니다. 인플레가 있고 혼란이 있는 그런 나라에 가 보면 돈 버는 길이 굉장히 많이 보입니다. 거기 가서 틈을 타서 사업을 하고 투자를 할 때 돈이 벌리지 안정된 나라에서는 돈을 못 법니다.” 그 분은 그런 지혜를 가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고생을 하는 그 백성들을 보고는 추수할 것이 많다고 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할 때는 이 예수님의 관점을 바로 본받아야 합니다. 어렵기 때문에, 고생스럽기 때문에, 그 속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추수거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어렵다고, 고난스럽다고, 고통이 있다고 해서 여기서는 하나님의 역사가 끝났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우리들에게 어떤 절망이 있어도 그 절망의 그 자리에서 추수할 게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농사

  우리는 하나님의 포도원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포도원입니다. 우리의 직업이나 가정도 다 하나님의 포도원입니다. 이 역사는 하나님의 농사입니다. 우리의 인생살이는 내가 내 인생을 사는 것 같지만 사실은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서 자기 농사를 짓는 것입니다. 우리 가정, 우리 직업, 이것은 하나님의 농사입니다. 농부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위대한 농부입니다. 우리는 그 농장에 부름받은 품군에 지나지 않습니다. 욥이 인생을 말할 때 “품군”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혹시 품군으로 일해본 적이 있습니까? 저는 자랄 때 공사판에 가서 일을 한번 해보았는데 그것은 친구들끼리 어울려서 취미로 가서 해보았습니다. 요즘 말하면 아르바이트를 해보았습니다. 그것도 한 3일해서 용돈을 좀 벌었습니다. 그런데 거기 가서 일해 보니 오후 한 세시쯤 되니까 빨리 해가 지기를 기다려집니다. 빨리 해가 져야 일이 끝나기 때문입니다. 품군은 날이 저물기를 기다립니다. 욥이 그렇게 말했습니다. “품군은 날이 저물기를 기다리고 인생은 베틀의 북보다 빠르다” 그렇게 욥이 인생을 노래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농장에 부름받은 품군입니다. 우리 인생살이는 하나님의 농사를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언제나 이 추수라는 개념을 가지고 우리 인생살이에는 언제나 거둘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거둘게 없어서, 마진이 없어서, 소득이 없어서 이 세상은 탄식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관에는 언제나 거둘게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보라 추수할 때가 되었다” 내일도 오늘도 우리가 사는 이 삶 속에는 거둘게 있고 하나님께 영광 돌릴 일이 날마다 있다는 것입니다. 하루도 추수가 불가능한 날이 없다는 것입니다. 매일매일 추수거리를 발견하고 추수하는 인생을 사시기 바랍니다. 저녁이 되면 추수거리를 붙잡는 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

  농사라는 개념으로 성경의 진리를 말씀하신 대목은 매우 많습니다. 사도 바울도 농사를 가지고 신앙생활을 비유했습니다. 농사라는 것은 간단한 원리입니다. 농사는 세 가지 과정입니다. 첫째가 심는 것입니다. 심지 않고는 농사가 안됩니다. 두 번째는 가꾸는 것입니다. 농사는 가꾸지 않으면 안됩니다. 방치해 놓으면 농사가 안됩니다. 세 번째는 거두는 것, 추수입니다. 그러니까 심고 가꾸고 거두는 게 농사의 과정입니다. 이 세 과정 중에 하나라도 놓치면 농사가 실패합니다. 심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종자입니다. 건강한 종자를 제 때에 심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농사를 신앙생활에 비유할 때 분명하게 심어야 됩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안 심고 물만 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 기도도 씨를 심어놓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여호와 하나님 앞에 꿈을 심어놓고 기도해야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 앞에 우리는 씨를 심어야 됩니다. 그리고 기도해야 됩니다. 가꾸고 심어야 됩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심어야 됩니다. 심는 과정이 있어야 됩니다.

  다음에 가꾸어야 합니다. 가꾸는 수고는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계속해야 합니다. 결과가 있을 때까지 해야 됩니다. 그리고 추수해야 됩니다. 추수없는 농사는 아주 허망합니다. 농사는 심을 때 반드시 추수를 기대하고 심습니다. 추수를 잊어버리고 심는 농부가 없습니다. 무엇이든지 심을 때는 추수를 기대하고 심습니다. 그만큼 심고 가꾸고 거두는 이 농사법은 우리의 신앙생활에 하나도 놓쳐져서는 안됩니다. 우리 주님 앞에 분명하게 심으십시오. 소원을 심으십시오. 꿈을 심으십시오. 여호와 하나님 앞에 희생하십시오. 심으십시오. 축복의 씨를 심어야 됩니다. 그래야 가꾸고 거두는 때가 옵니다. 추수라는 것은 그냥 오늘 당장 가서 추수하는게 아닙니다. 여러 사람이 함께 심은 그 수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벼 농사를 예로 듭시다. 모내기 할 때 같이 심고, 더운 그 여름에 가꾸고 수고하고 땀 흘려서 오늘 우리가 추수를 하는 것 아닙니까? 이 추수가 당장 오늘 형성된 추수가 아닙니다. 이 추수를 위해서 많은 사람의 땀과 수고와 고난의 세월이 있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예수믿고 편안하게 교회를 섬기는 오늘 우리의 이 축복은 이 일을 위해서 우리 믿음의 조상들이 복음을 위해서 수많은 핍박을 감수하고 피를 흘리고 얼마나 수고를 많이 한 그들의 심고 가꾼 결과에 의해서 오늘 우리의 신앙생활에 추수가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 이렇게 편안하게 나와서 예배드리는 이것은 엄청난 우리 믿음의 선진들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누리는 이 복이 가능한 것입니다.

  추수와 또 파종

  우리 교회의 성전건축은 하나의 추수이면서 또 다른 파종입니다. 우리가 성전건축을 하는 이게 엄청난 추수입니다. 오늘 우리가 성전건축을 하게 된 것은 지난 50여년 동안에 오늘의 이 교회를 만들기 위해서 수고하고 기도하고 희생했던 그 분들의 그 농사가 있었기 때문에 오늘 성전건축이라는 추수를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성전건축은 우리 후대를 향한 또 다른 축복의 파종이 되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심었기 때문에 오늘의 추수가 있는 것입니다. 또 오늘 우리가 심는 이 파종은 미래의 하나님 나라에 위대한 추수로 나타날 그 날이 올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수고와 희생이 있었기에 오늘 우리가 성전건축을 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설립되어 당장 성전건축을 하는 게 안됩니다. 오늘의 이런 건축을 위해서는 예배당을 몇 번 짓는 과정이 있었습니다. 몇 번 지어지는 그 과정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의 예배당을 짓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요구하시는 관점이 무엇이냐 하면 “추수할 일군을 보내달라”고 하셨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나라에 예수님께서 제시하신 답은 일군이라는 것입니다. “추수할 것이 많다 주인에게 청하여 일군을 보내달라 해라” 이 일군의 몫이 바로 우리의 몫입니다. 추수는 일군이 있어야 합니다. 일군이 추수합니다. 이 추수를 할 수 있는 일군의 몫이 우리의 몫이고 이것이 교회의 몫입니다. 이것이 제자들이 몫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일군이라고 한 이 일군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 대상입니다. 제자들이요 앞으로 자기 몸을 버려서 세울 이 땅의 주님의 교회를 염두해 두고 이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추수밭에 부름받은 일군의 자세로 살아야 됩니다. 일해야 됩니다. 참여해야 됩니다. 일군으로 살아야 됩니다. 우리 성도가 어려운 일이 있을 때 그 현장에 가 보면 옆 성도들이 와서 도와주는 것을 흔히 봅니다. 구역원으로서 도와주는 분도 있고, 여전도회 회원으로 도와주는 분도 있고, 평소에 친분이 있어서 이렇게 어려운 일 당하는 사람을 도와주는 그게 바로 추수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어려움 당한 이웃의 고난의 현장에 함께 참여하는 그 사람이 바로 추수군이라는 것입니다. 일군은 일터로 가야 일군입니다. 일터를 외면하면 일군이 안됩니다. 일을 발견하면 그 일을 집중할 수 있어야 됩니다. 일군은 일에 집중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일군을 부릅니다. 이 일군의 영역이 바로 우리의 영역입니다. 우리는 추수밭을 염려할 것 없습니다. 추수밭은 주인이 염려하는 것입니다. 추수밭을 예비하는 것과 일군을 불러서 추수하게 하는 것은 주인이 몫이고 그의 추수밭에 부름받아서 일하는 것은 일군의 몫입니다. 우리의 몫입니다. 우리의 몫은 오직 일군입니다. 우리는 추수밭의 일군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하고 일군의 몫을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일군은 열심히 일한다고 해서 일군이 아닙니다. 일군은 주인의 뜻을 따라 일을 해야 됩니다. 부름받은 자의 뜻을 따라서 일을 해야 됩니다.

  요즘 여러 가지 연구를 많이 합니다. 이게 학문의 발달이고 또 시대의 다원화된 체제이고 지식의 발달이기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 온갖 분야의 연구가 많은 그런 연구 중에 이런 연구가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100대 재벌을 조사했습니다. 100대 재벌끼리 혼사를 어떻게 했나 하는 것을 조사해보니까 100대 재벌 가운데 62명이 서로 혼인관계에 얽혀 있다는 것입니다. 100대 재벌 중에 62개의 재벌이 혼인관계에 서로 얽혀 있다는 것입니다. 사돈, 팔촌, 겹사돈 이렇게 다 얽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나라의 재벌구조는 겉으로는 뉴스를 타야 되고 정부 앞에서 제스처도 하면서도 내면으로는 서로 도와주는 게 많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돈이 지금 넘어지기 때문입니다. 결국은 끼리끼리 많이 얽혀 있다는 것입니다.

  후대를 위한 파종

  이런 연구도 요즘은 시행이 됩니다. 그 중에 38명은 신흥재벌이라는 것입니다. 이 신흥재벌끼리는 혼인이 아직 없다는 것입니다. 40대, 50대에 재벌이 된 사람들은 아직 혼인관계가 복잡하지 않은데 대대로 이어온 우리나라의 재벌구조는 대부분 끼리끼리 사돈이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집단이 형성하고 있는 영향력은 우리 사회에 막강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재벌들이 또한 고관들과 사돈을 맺고 있는 확률이 굉장히 많다는 것입니다. 이런 귀족사회가 우리 사회에도 주도를 해 나가고 있습니다. 거기서 긍정적인 것도 있지만 또한 문제도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상류층 가운데 48%가 강남권에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택정책을 하는 열쇠를 쥔 사람들이 대부분 강남에 살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일차적으로 자기 재산에 손해가 오는 그런 영향을 가진 사람들이 정책을 입안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외국의 대통령이야기를 하면서 우리 스스로를 위로받는데 미국의 34대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우리에게 이런 교훈을 남겨주고 있습니다. 그가 재임 시에 미국이 크게 발전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이젠하워 재임 시에 미국교회가 크게 발전하고 해외선교사 파송도 절정기에 이르렀다고 평가를 합니다. 물론 아이젠하워가 교회에 가서 예배를 신실하게 드렸다고 전합니다. 한번은 자기를 공격하는 언론인들을 모아놓고 만찬석상에서 이런 연설을 했습니다. “존경하는 언론인 여러분, 저는 늙은 소와 같습니다. 대통령으로서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미국을 위해서 다 주고 저는 퇴임을 하겠습니다.” 이런 연설을 했습니다. 모든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기립박수를 보냈습니다. 아이젠하워는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미국을 위해서 다 바치는 대통령이 되겠다 그렇게 선언하고 그것을 실천했습니다. 미국 역대 대통령 중에 퇴임 후에 가장 깨끗한 대통령이 아이젠하워라고 평가를 합니다. 아이젠하워에 대해서 뒷말이 있은 적이 없습니다. 아이젠하워에 대해서 무슨 구질구질한 뉴스를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우리들의 지도자들은 다 가지고 떠나는데 저런 나라의 사람들은 주고 떠나는 그런 모습으로 우리 앞에 다가옵니다. 그는 정말 미국을 위해서 추수를 제대로 한 일군이었습니다.

  맺는 말

  추수는 거두어들이는 것입니다만 내가 다 소유하는 개념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추수는 주인에게 돌려드려야 된다는 것입니다. 주인을 의식하고 주인의 뜻대로 추수를 해야 됩니다. 추수의 결과를 가지고 주인을 기쁘게 해야 됩니다. 대통령의 주인은 국민입니다. 국민을 위한 대통령일 때 그 대통령은 올바른 추수군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철학이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런 철학으로 추수하는게 아닙니다. 오직 추수해서 내가 움켜쥐자는 것입니다. 거기서 비극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추수군의 자세가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일을 하는 일군의 자세가 잘못된 것입니다. 추수군은 불러준 주인을 소중히 생각해야 됩니다. 주인의 의도를 따라 일을 해야 됩니다. 우리의 포도농사, 이 농장에 부름받은 우리들은 농장주 되는 하나님 앞에 신실한 일군으로 일해야 됩니다. 추수가 있는 신앙생활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추천인 1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