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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랑이 무엇입니까? (요 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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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이한규목사 (분당샛별교회)
     
< 따뜻하고 부드러운 삶의 축복 >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강한 것을 좋아합니다. 자기가 책임을 지고 부담을 지는 ‘자부심(自負心)’이 강한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자기만 귀한 줄 아는 ‘자존심(自尊心)’만 강하면 문제입니다. 자존심이 강하면 자존심이 상하는 상황을 참지 못합니다. 그래서 돈과 지위가 있다가 없어지면 희망까지 잃어버리고 한강을 찾습니다. 그러나 영혼이 강한 사람은 어떤 어려운 상황을 만나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속으로는 엄청난 뚝심이 있지만 겉으로는 아주 따뜻하고 부드럽습니다.

이솝 우화에 나오는 얘기입니다. 나무는 갈대만 보면 비웃고 왕따 시킵니다. “이 바보야! 너는 바람 앞에서도 굽실거리냐? 나처럼 꼿꼿해 봐라!” 그러던 어느 날 큰 태풍이 불자 나무는 뿌리째 뽑혔지만 왕따 당한 갈대는 바람 속에서 노래를 불렀습니다. 결국 온유하고 따뜻하고 부드러운 것이 진짜 강한 것입니다. 자존심만 강해서 망한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사사기 8장을 보면 이스라엘의 12지파 중에서 자존심이 강한 지파가 나옵니다. 바로 요셉의 장자권을 얻은 에브라임 지파입니다. 그들은 기드온이 미디안과의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올 때 시비를 걸었습니다. “왜 전쟁에 나갈 때 우리를 부르지 않았나? 우리를 이렇게 대접할 수 있느냐?” 기드온이 전쟁에 나오라고 할 때는 들은 척도 하지 않다가 막상 전쟁에 이기고 돌아오니까 그렇게 시비를 건 것입니다.

그러자 기드온이 부드러운 말로 달랬습니다. “내가 한 일이 너희의 한 일과 비교되겠느냐? 너희의 끝물 포도가 우리의 맏물 포도보다 낫다”고 달랩니다. 그러자 에브라임 사람들의 화가 풀어졌습니다.

그런 비슷한 일이 사사기 12장의 입다 때에도 생겼습니다. 입다가 암몬과의 전쟁을 위해 군대를 모집할 때 에브라임 사람들은 시큰둥하다가 전쟁에 이기고 돌아오니까 시비를 걸었습니다. “왜 전쟁에 나갈 때 우리를 부르지 않았나? 우리가 너와 네 집을 불살라버리겠다!” 그러자 불같은 성격을 가진 입다는 “전쟁 때는 모른 척 하다가 전쟁에 이기니까 이제 와서 시비냐?”고 에브라임을 쳐서 그때 에브라임 사람 4만 2천 명이 죽는 비극이 일어났습니다.

자존심을 지나치게 고집하면 결국 비극이 생깁니다. 오늘날 사회 곳곳에서 왜 갈등이 생깁니까? 왜 지역갈등이 생깁니까? 고집 때문입니다. 선거 때 보면 동고집과 서고집이 대단합니다. 인물론, 정책론, 의정활동론, 비전론이 다 소용없습니다. 내편 같으면 무조건 좋고, 상대편 같으면 무조건 싫어합니다. 그처럼 동고집과 서고집이 서로 섞여서도 이렇게 잘 사는 것을 보면 “우리는 정말 단일민족이구나! 하나님이 우리 민족을 정말 사랑하시는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최대한 온유하고 따뜻하고 부드럽게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삶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런 예수님의 모습을 우리에게 잘 보여줍니다.

< 사랑이 무엇입니까? >

10절에서 예수님이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고 하자 본문 11절에서 베드로는 곧 그물을 육지로 끌어올렸습니다. 그리고 보니까 그물에 가득히 찬 큰 고기가 일백 쉰 세 마리였습니다.

여기에서 ‘153마리’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줍니까? 그물에 가득한 물고기를 어부들이 한 마리 한 마리 자세히 세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본문처럼 그렇게 고대하던 주님을 만났을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그러면 누가 고기를 153마리라고 정확히 세었고, 성경은 왜 굳이 153마리를 기록했을까요? 그 숫자는 그 당시 상황과 분위기를 말해줍니다.

누가 고기를 세었습니까? 11절 말씀을 보면 베드로가 세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왜 베드로가 고기를 세었을까요? 베드로는 자신의 잘못을 생각하면 주님의 얼굴을 볼 낯이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먼 산을 바라볼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 어색한 상황을 모면하려고 베드로는 마음은 주님에게 가 있으면서도 딴청을 피우며 고기를 하나씩 셌을 것입니다. “하나, 둘, 셋, 넷.... 백 하나, 백 둘, 백 셋, 백 넷....”

그 모습을 주님은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계셨습니다. 그 장면을 보면 우리는 사랑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사랑이 무엇입니까?

1. 사랑은 이해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베드로가 딴청 피우는 모습 속에서 주님을 향한 열망을 읽고 그 마음을 이해하셨습니다. 그처럼 사랑은 이해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부부가 어려움을 겪는 가장 큰 이유는 이해심 부족 때문입니다. 이해심이 없으면 사납게 되고, 이해하면 부드럽게 됩니다. 어떤 남편은 세상에서는 한없이 약하고 아내에게만 한없이 강합니다. 아내가 한 마디 하면 “쥐뿔도 모르면서 그래!”라고 윽박지릅니다. 세상이 바뀐 줄 모르고 그러니까 요새 황혼 이혼이 는다고 합니다. 사람이기에 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우리는 최선을 다해 이해하려고 해야 합니다. 그런 노력이 없으면 나중에는 돌이키기 힘든 상황이 생기게 됩니다.

어느 날, 시골의 한 천주교회에서 주일 미사 때 신부님을 돕던 소년이 실수해 성찬용 포도주 그릇을 떨어뜨렸습니다. 그때 신부님이 소년의 뺨을 때리며 버럭 소리쳤습니다. “너는 하나님께 큰 죄를 졌다. 다시는 제단에 나타나지 말라.” 그 후, 소년은 평생 교회에 발을 딛지 않고 공산주의에 심취했습니다. 그가 바로 유고의 티토 대통령입니다.

반대로 어떤 교회에서는 똑같은 상황에서 신부님이 떠는 소년을 위로해주었습니다. “얘야! 괜찮다. 하나님도 이해해주실 거야! 나도 어릴 때 실수가 많았어!” 그 소년이 나중에 훌톤 쉰이란 유명한 대주교가 되었다고 합니다. 사람은 이해를 받을 때, 결국 그 이해하는 사람의 기대 이상으로 쓰임 받는 재목이 될 것입니다.

2. 사랑은 묵묵히 후원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베드로가 침묵 중에 고기를 세고 있는 모습을 주님은 조용히 지켜보셨습니다. 둘 사이에 흐르는 침묵은 주님이 얼마나 제자들을 사랑했고, 제자들도 얼마나 주님을 사랑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사랑이 깊어지면 소리는 오히려 잦아들고, 그윽한 눈길과 소리 없는 헌신과 보이지 않는 곳에서의 기도만 남게 됩니다.

사람이 주님을 영접하면 나름대로 여러 가지 변화된 모습이 생깁니다. 저도 주님을 알고 나서 변화된 한 가지 뚜렷한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믿기 전보다 말수가 줄고 말소리도 줄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사랑에는 고백도 필요하지만 때로는 조용히 지켜보고 후원하는 모습이 더 사랑하는 모습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런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대개 침묵 중에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가끔 아이들의 노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면 너무 사랑스럽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그렇게 바라보고 계실 것입니다. 부모의 진짜 사랑도 대부분 조용하게 펼쳐집니다.

어떤 분이 어렸을 때 놀다가 팔이 부러졌습니다. 그리고 집에 왔는데 엄마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습니다. “얘야! 괜찮다! 팔도 부러져봐야 튼튼하게 자라게 돼!” 그 말을 듣고 엄마가 얼마나 잔인하게 보이는지 “내 엄마 맞아!”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에 잠자다가 몸이 괴로워 조용히 눈을 떠보니까 엄마가 자기 팔을 만지며 울면서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이 바로 어머니의 마음이고 예수님의 마음이십니다.

가끔 아이들이 속이 상해서 슬픈 표정으로 오면 겉으로는 “괜찮아!” 하지만 속으로는 마음이 아파 간절히 자녀를 위해 기도합니다. 그처럼 사랑은 침묵 속에서 더 깊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침묵 중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어야 하고, 또한 말보다 조용한 행동으로 우리의 사랑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3. 사랑은 기다리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주님은 베드로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베드로가 딴청 피우며 고기 153마리를 다 셀 때까지 기다리셨습니다. 성미 급한 사람은 “챠라! 지금 고기 셀 때인가?”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성급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는 것입니다.

목회하면서 가장 힘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했던 사람이 내 곁을 떠나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사명 때문에 떠나고, 어떤 분은 비전이 달라 떠나고, 어떤 분은 이사를 가면서 떠납니다. 그러면 얼마나 마음이 아픈지 모릅니다.

어떤 목사님은 믿기 전에 ‘대전 브루스’를 참 좋아했습니다. MT 할 때나 어디에서 “한번 노래 해봐!” 하면 항상 부르는 것이 ‘대전 브루스’였습니다. “잘 있거라 나는 간다. 이별의 말도 없이....” 그런데 그분이 나중에 목회하면서 사랑하는 성도가 자기 곁을 떠날 때마다 가끔 “내가 옛날에 대전브루스 좋아해서 이런 일이 생기나?” 하는 생각이 든다고 합니다.

떠나는 사람은 좋은 곳으로 떠난다는 생각이 있으니까 좋겠지만 남은 사람은 얼마나 서운합니까? 그때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것 같아도 속은 시커멓게 탑니다. 그럴 때마다 속이 상해 기도하면 예수님의 위로의 음성이 들립니다. “뭘 그걸 가지고 그래! 나는 내 목숨까지 주었지만 감사하다는 말 한 마디 듣지 못했다.”

사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얼마나 많이 실망시켰습니까? 그래도 예수님은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사랑은 기다리는 것입니다. 사실 그 사랑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잘 살고 있는 것입니다.

저도 가끔 저의 과거를 생각하면 정말 부끄러운 모습이 많습니다. 그렇게 부족해도 하나님이 주신 좋은 교회, 좋은 성도, 좋은 가정, 좋은 친구들을 생각하면 나를 참고 기다려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게 됩니다. 주님의 사랑은 한결같습니다. 그 사랑이 우리의 삶을 지탱하는 기초이고, 희망의 기초입니다. 아무튼 인내하고 손해 보는 일은 없습니다. 우리가 힘써 참고 기다리면 반드시 우리 앞에 최상의 길이 펼쳐지게 될 것입니다.

< 풍성하신 하나님 >

드디어 베드로가 고기를 다 세었습니다. 다 세어보니 그물에 가득히 찬 큰 고기만 일백 쉰 세 마리였습니다. ‘153마리의 큰 고기’는 무엇을 상징합니까? 우리를 위해 준비해놓으신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축복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축복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성경은 우리가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보다 더 넘치게 주신다고 했습니다(엡 3:20). 그런데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풍성하심이 채워질 수 있도록 나를 깨끗하고 빈 그릇으로 만드는 일입니다. 사람은 말씀과 기도가 없으면 자꾸만 자기 안에 자기가 채워집니다. 그러므로 말씀과 기도로 계속 자신을 비워가야 합니다.

요새 날이 갈수록 점점 느껴지는 것은 “내가 작구나!” 하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내가 노력하면 세상을 바꾸고 교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나 자신만이라도 바꾸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너무 왜소한 생각 같지만 자신을 크게 보지 않을 때 오히려 마음에 하나님의 풍성하심이 차오르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자신을 키우려는 삶에는 불안이 찾아오고, 자신을 비우려는 삶에는 평안이 찾아옵니다.

불행의 이유는 ‘능력과 지위와 배경과 소유의 부족’에 있지 않고 ‘자기를 비우는 삶의 부족’에 있습니다. 행복은 ‘자기 비우기’에 탁월한 사람의 것입니다. 자기를 잘 비우는 삶에는 감사와 감동과 감격이 넘칩니다. 오늘날 가장 그리운 친구는 '자기를 높여 무한 경쟁 시대에 앞선 친구'보다 '자기를 비워 나눔의 시대를 열어 가는 친구'입니다.

아르스의 성자 비안네는 사람들이 자신을 비난할 때 “그 사람들이 나를 잘 아네!” 하고 반응했다고 합니다. 그처럼 자기가 부족한 줄 알고 하나님을 자신의 전부인 줄 알면 하나님께서는 그의 인생 그물에 소중하고 풍성한 것들을 가득 채워주실 것입니다.

< 받은 축복을 잘 간직하십시오 >

그런데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미 받은 축복을 잘 간직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그물에 가득히 찼어도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고 기록합니다. 그물이 찢어져버리면 고기를 천 마리 잡아도 남는 것이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고기를 얻는 것도 축복이지만 그물이 찢어지지 않는 것도 축복입니다.

어떤 분이 트럭 한 대를 사서 일을 나가기 전에 꼭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오늘도 일거리가 많게 해주세요" 그 기도 때문인지 어느 정도 저축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실수로 택시를 들이받고 그 동안 저축한 돈을 몽땅 날려 버렸습니다. 그 뒤로부터는 기도의 내용을 바꿨습니다. “하나님! 오늘도 무사하게 해주옵소서.”

아무리 죽도록 돈을 벌어도 그물이 찢어지면 터진 웅덩이에 물 붓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축복을 받는 것보다 이미 받은 축복을 잘 간직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면 축복을 잘 간직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합니까?

1) 범사에 감사해야 합니다.

새문안교회를 담임하셨던 김동익 목사님은 3년 동안 암 투병하시다가 하늘나라로 가셨는데 투병 중에 매일 아침 일어날 때마다 이런 고백을 하셨다고 합니다. “하나님! 오늘 아침에도 눈을 뜰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자세히 보면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감사한 일입니다. 자녀를 생각할 때에도 공부를 좀 못하고, 효도를 많이 못해도 자녀가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큰 감사거리입니다. “범사에 감사한다”는 말은 “삶 자체를 감사한다”는 말입니다. 그처럼 모든 삶의 순간들을 감사의 제목으로 여기면 축복의 그물은 결코 터지지 않을 것입니다.

2) 하나님께 드릴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아무 것도 받은 것이 없다면 드릴 생각도 없을 것이고, 많이 받았다고 생각하면 하나님께 되돌려 드리려고 할 것입니다. 이제까지 받은 것이 없다고 생각하면 앞으로도 받을 것이 없을 것이고, 이제까지 받은 것이 많다고 생각하면 앞으로도 받을 것이 많을 것입니다. 우리는 받은 은혜를 생각하며 기쁘게 우리 것을 하나님께 돌려드릴 줄 알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잔치 때 주로 돼지를 잡게 된 유래가 있습니다. 어느 날, 한 목장 주인의 막내딸이 결혼하게 되어 가축들이 회의를 열었습니다. 그때 제일 연장자로서 임시 의장으로 선출된 소가 말했습니다. “여러분! 이제 곧 주인의 따님이 결혼하는데 누가 잔칫상의 제물이 되겠습니까? 제 생각으로는 주인을 위해 할 일이 없는 동물이 죽으면 좋겠는데 여러분들의 의향은 어떻습니까?” 그 제의에 다 “그렇게 하자!”고 했습니다.

먼저 소가 말했습니다. “나는 주인님을 위해 농사도 하고, 짐도 날라야 되니까 죽을 수 없소.” 곧 이어 나귀가 말했습니다. “나는 주인님을 태우고 다녀야 되고, 이번에 결혼식장으로 따님을 모시고 가야 됩니다.” 이번에는 개가 말했습니다. “나는 도둑을 지켜야 합니다.” 고양이도 말했습니다. “나는 쥐로부터 식량창고를 지켜야 합니다!” 닭도 말했습니다. “나는 새벽마다 주인님을 깨워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돼지 차례가 되었습니다. 돼지는 할 말이 없어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습니다. “나는 주인의 것을 먹기만 하고 이제까지 한 일이 없으니 내가 죽겠소!” 그리고 눈물을 뚝뚝 흘리며 노래했습니다. “늘 울어도 눈물로써 못 갚을 줄 알아 몸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 그 후로 잔칫상에는 항상 돼지머리가 올라갔고, 돼지도 자기가 한 일에 보람을 느껴 잔칫상의 돼지머리는 항상 웃는 표정을 한다고 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받기는 좋아하지만 드리기는 싫어합니다. 그러나 드림으로 자기를 비우지 않고는 더 좋은 것이 채워질 수 없습니다. 자기를 드림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누군가에게 기쁨을 주면 인생의 보람은 더욱 커질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 무엇입니까? 항상 마음속에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갚을까?” 하고 생각하며 사는 삶입니다. 그런 마음을 가질 때 축복의 그물은 터지지 않게 될 것입니다.

3) 이웃과 나눌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공평하신 분입니다. 공평은 하나님의 성격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공평을 좋아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려고 하면 공평을 실천해야 합니다. 궁극적인 공평은 하나님이 이루시지만 우리는 공평의 조력자가 되어야 합니다.

행복은 ‘드림’과 '나눔‘을 통해 주어집니다. 주는 삶이 없으면 받는 삶도 없습니다. 나의 높은 부분이 깎여 너의 낮은 부분을 메우고, 너의 높은 부분이 깎여 나의 낮은 부분을 메울 때 주님이 재림하실 길이 닦이고 또한 평탄한 행복의 대로가 활짝 펼쳐질 것입니다. 이웃을 것을 빼앗으려고 하면 축복의 그물은 터집니다. 그러나 이웃과 나누려고 하면 축복의 그물은 견고해집니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나고 어떤 고백을 했습니까? “주님!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과 나누겠습니다. 누구 것을 빼앗은 일이 있거든 4배로 갚겠습니다.” 그 고백을 듣고 바로 주님은 “오늘 이 집에 구원이 이르렀다”고 선포하셨습니다(눅 19:9)

구원의 증표가 무엇입니까? ‘소유와 기쁨’에서 기쁨을 찾지 않고 ‘나눔과 비움’에서 기쁨을 찾는 것이 증표입니다. 우리들에게는 이런 증표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선교와 구제는 우리의 축복의 그물을 견고하게 만드는 초석이 됩니다. 항상 사랑과 헌신으로 올이 튼튼한 축복의 그물을 소유한 영혼의 부자들이 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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