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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기도는 희망의 숲을 만든다 (막 9: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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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전병욱 목사 (삼일교회)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세명의 제자들과 산위에 올라가 기도하는 동안 산밑에 있는 제자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남은 아홉명의 제자들은 벙어리 귀신 들린 아들을 고쳐달라는 어떤 아버지의 부탁을 받았지만 고쳐주지 못하자 예수님이 내려와 고쳐주는 장면입니다.

성도와 교회도 과거에는 곧장 능력을 보였지만 이같이 지금은 안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제자들에게 “기도 외에는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는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도 기도의 필요성은 알면서도 막상 행하지 못합니다.그 이유가 무엇인지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잘못된 열등감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스스로 무한한 잠재력이 있는 줄 알지만 그 잠재력과 능력을 믿지 못합니다. 그 첫째 이유는 잘못된 열등감 때문입니다. 산 밑의 아홉명의 제자들도 예수님과 함께 기도하러 올라간 세명의 제자들에게 열등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완벽한 평등이란 없습니다. 제자들이 열등감 가지게 된 것은 예수님과의 관계가 깨졌기 때문입니다. 믿음과 의는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의는 신뢰관계입니다.

의는 올바른 행동이 아니라 올바른 관계입니다. 창세기 15장 6절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의로 여기시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상 최초로 의가 등장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의 유일한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것을 십자가의 의라고 합니다. 이같이 의는 행위가 아닌 관계의 회복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관계의 회복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너희 의가 바리새인보다 크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갈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리새인의 의는 무엇입니까? 열심입니다. 그러나 참된 의는 관계의 회복이며 회복후 그 관계에서 나오는 것이 열심이 되어야 합니다. 로마서는 처음 8장 까지 십자가의 관계회복을 역설합니다. 그리고는 관계 회복 이후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행위에 관한 명령이 12장 이후에 나옵니다.

성경의 의를 완벽하게 이해한 사람이 어거스틴이며 칼빈입니다. 20세기에는 마틴 로이드 존슨입니다. 어거스틴은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은 항해술이 아니라 사랑하는 관계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이를 더 나아가 말하면 “하나님을 사랑만 하라 나머지는 네 맘대로 하라”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제자들이 기도하지 못한 이유는 예수님과의 관계가 깨어졌다는 열등감 때문었습니다. 우리는 인격의 열등과 어느 부분의 열등을 구분하여야 합니다.

누구나 열등감 가지고 있지만 그것이 자신의 전인적인 인격의 열등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면 그 열등감에서 회복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부분적으로 열등한 것이 있지만 하나님이 주신 부분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것이 무엇인지 돌아본다면 그 열등감에서 회복될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에서 열등감 크게 느낀 인물을 들자면 야곱의 두 아내 중 레아입니다. 그는 동생 대신 야곱의 첫번째 아내가 되었습니다. 정말 자존심 상하고 죽을 맛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기도로 극복하였습니다.

8명의 아들을 낳았을 뿐만 아니라 이름도 모두 성경적으로 지었습니다. 둘째 아들 시므온은 “하나님이 들으신다” 유다는 “찬송하리로다”라는 뜻입니다.

반면 라헬은 예쁘고 아름다웠지만 창세기 30장 1절 말씀과 같이 아들 못낳자 펄펄 뛰었습니다. 그리고는 그 여종 빌하를 남편에게 넣어 아들을 낳게 했습니다. 그렇게 난 아들의 이름조차 단은 “나의 한을 풀었다”는 의미로 지었습니다. 야곱은 결코 라헬로부터 위로를 얻지 못했습니다. 야곱이 죽고난 후 레아가 그와 합장되었습니다.

우리도 누구나 레아같이 열등감이 있고 연약한 부분이 많을 것입니다. 그런 우리는 하나님과 연합해야 합니다. 밑에 있는 9명의 제자들도 자신들이 준비되지 못해 쓰임 못받는구나 회개하고 기도함으로써 더 크게 쓰임 받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바로 레아의 인생입니다.

우리는 열등감 때문에 분노로 돌아가서는 안됩니다. 시기 질투 가지고서는 기도가 되지 않습니다. 시기 질투는 하나님에 대한 원망입니다. 열등감 때문에 기도 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망하는 길로 가게 될 것입니다. 


                  잘못된 안도감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6장 7절에서 제자들도 귀신 쫒아낸 경험있었습니다. 그러나 29절에서 못하자 예수님은 기도 안하니 그렇게 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제자들은 현실 안주하다가 능력 다 잃어 버렸습니다. 머리 짤린 삼손과도 같은 모습입니다.

귀신 한번 고친 것을 획득한 능력으로 오해하고 기도 않았습니다. 유로 2000 축구대회에서도 전통 강호들이 다 떨어졌습니다. 현실 안주 때문입니다.

제자들도 거짓된 안도감 때문에 기도 않다 능력 다잃었습니다.  기도가 흘러 가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한사람의 기도가 너무나 중요합니다. 기도하는 한사람이 기도 않는 한민족보다 강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20세기 프랑스의 3대 작가 중 한사람으로 장지아르라는 작가를 들고 있습니다. 그가 쓴 “나무를 심는 사람들”이라는 책이 있는데 120여국에 번역되어 읽히고 있습니다. 그 책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주인공 엘지아르는 프로방스 지방의 양치기 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 지역의 나무를 벌목하고 마구 자연을 다룸에 따라 지역이 황폐화되어 갔습니다. 엘지아르는 1913년부터 3년간 도토리 10만개를 심었습니다. 그 중 2만개가 살아났습니다.

1946년 그 지역에 갔을 때 울창한 수풀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생동감과 활력이 넘치고 만명의 인구가 그 지역에 살고 있었습니다. 죽은 황폐한 마을이 활력이 넘치는 산악도시로 변해 있었다는 줄거리의 잔잔한 감동을 주는 작품입니다.

이렇게 심어서 열매 맺는 것이 비단 나무 뿐이겠습니까? 복음과 기도와 사랑일 수 도 있숩니다. 우리도 짧은 인생 살면서 가치있는 일 하나에 무언가를 투자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무엇이라도 좋습니다. 하나에 10년간만 투자해 보십시오.

1999년 10울에 LA 에서 한 명의 장례식이 열렸습니다. 52세 된 홍정복 여사의 장례식이었는데 그는 슈퍼에서 히스패닉 강도에게 죽음을 당하였습니다. 장례식에는 캘리포니아주 지사를 비롯한 지역 유지가 모두 참석해 애도를 빌었습니다.

홍여사는 15년 전 이민와 불쌍한 흑인과 못사는 사람을 도왔습니다. 다인종 도시의 갈등과 미움이 있는 곳에서 희망과 사랑을 심었습니다. 100년 간 한인 기독사회가 이룬 모든 업적보다 홍여사 1명의 역할이 더 컸다고 모든 사람이 칭송하였습니다.

지금 우리가 뭘 심는가에 따라 미래가 결정됩니다. 나무 심으면 나무가 열매 맺고 기도 심으면 기도의 열매 복음 심으면 복음의 열매 맺습니다.

잘못된 안도감 때문에 기도의 자리 떠났으면 어리석은 자입니다. 기도 통해 하나님의 능력 심는 자들이 되기 바랍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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