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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다윗의 일생(7) : 아름다운 동행 (삼상 18:1~4, 삼상 23: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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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문수 목사 (신반포교회)

여러분에게 질문을 하나 드립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는 데 가장 빠른 방법은 무엇일까요? 예전에는 고속버스, 자가용, 새마을호, ... 이렇게 말했겠지만 요즘은 좀 달라졌죠. 비행기, 고속철 ... 아마 이렇게 대답할 겁니다. 지난번 고속철이 개통됐을 때 TV 뉴스를 보니까, 기자들이 두 팀으로 나눠서 비행기 이용하는 것과 고속철 이용하는 것 중 어느 쪽이 빠른지 시합을 하더군요. 공항을 오가는 시간을 따져도 역시 비행기가 조금 빨랐습니다. 그런데 정답은 그게 아닙니다. 정답은 ‘좋은 친구와 동행하는 것’입니다. 난센스 퀴즈 같지만 이 가운데 중요한 교훈이 들어 있습니다.

흔히 우리 인생을 길로 혹은 여행으로 비유합니다. 그런데 그 인생길이 어떻습니까? 외롭습니다. 위험합니다. 고달픕니다. 막막합니다. 그래서 동행이 필요합니다. 특별히 좋은 친구와 동행하면 마음이 든든하고 인생 여정이 늘 즐겁고 복될 것입니다. 이런 말이 있죠. “친구와 동행하면 기쁨은 두 배로 늘어나고 슬픔은 절반으로 줄어든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누구라도 인생을 혼자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인간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다 하시고 아담을 위해 여자를 만들어 주셨습니다.(창2:18 이하) 그래서 인간이 가정을 이루고, 사회를 이루고 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가정과 사회 가운데 살아도 그 가운데 인생길에 동행할 참 친구를 갖지 못한다면 그것은 정말 불행한 일입니다.

감사하게도 다윗은 좋은 친구를 많이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행복한 사람이었고,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그 친구들 가운데는 사울의 핍박을 피해 망명 생활할 때 그를 따르던 4백 명의 추종자들, 그리고 왕이 된 후 충성했던 측근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친구들을 다 합쳐도 비교가 안 될 만큼 정말 좋은 친구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가 없었다면 다윗의 위대한 생애는 없었을 겁니다. 누굽니까? 요나단입니다. 정말 부러운 친구입니다. 그런데 한편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할 또 하나의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인간 친구는 아무리 좋아도 여전히 한계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불완전합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이별합니다. 우리에게는 완전한 친구, 영원한 친구가 필요합니다. 다윗은 그런 친구도 갖고 있었습니다. 누굽니까?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정말 행복한 인생이었고, 위대한 인생을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요나단과의 아름다운 동행, 하나님과의 아름다운 동행! 이것이 다윗의 인생을 승리케 한 중요한 요인입니다. 아무쪼록 저와 여러분에게도 이런 아름다운 동행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정말 복되고 아름다운 승리의 인생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1] 다윗과 요나단의 동행 : 아름다운 동행

성경을 보면 다윗과 요나단의 우정이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기록만 봐도 두 사람의 우정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습니다. 어떻게 저럴 수 있었을까? 하고 감탄이 절로 나올 정도로 아름다운 동행입니다.

요나단은 다윗이 골리앗을 이기는 것을 보고 첫 눈에 반했습니다. 그것은 다윗의 인간적인 능력을 본 게 아니라, 그 가운데 하나님의 섭리와 뜻을 본 것입니다. 다윗이야말로 하나님의 종으로 이스라엘의 왕 될 인물을 알아 본 겁니다. 사실은 아버지 사울을 이어서 자기가 왕이 되는 게 당연한데 다른 사람을 왕으로 인정한다는 게 말이 됩니까? 그런 일이 생긴 겁니다. 기인한 일이죠. 그렇습니다. 요나단과 다윗의 우정은 인간의 사사로운 감정이나 이해관계로 맺어진 게 아니라 신앙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맺어진 특별한 우정입니다.

삼상18:1 보면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에게 연락되었다고 말합니다. ‘연락된다’는 말은 히브리어 ‘카솨르’의 수동형입니다. 그 단어는 본래 ‘묶다’ ‘매다’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에게 마치 밧줄로 꽁꽁 묶인 것처럼 하나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요나단이 다윗을 자기 생명처럼 사랑했다고 말합니다. 인간은 다 이기적인 존재인데 자기 자신처럼 사랑했다는 겁니다. 이 말은 3절에서도 반복됩니다. 삼상18:3절 보면, 언약을 맺었다고 했는데, ‘언약’이란 단어가 중요합니다. 히브리어로 ‘베리트’인데 ‘자르다’의 뜻을 가진 동사 ‘바라’에서 파생된 단어입니다. 그 당시 배경을 알아야 이해가 됩니다. 고대 근동 사회에서는 계약(언약)을 맺을 때 짐승을 두 조각으로 자릅니다. 그러면 피 흘리고 죽겠죠. 그 두 조각을 사이를 내어 떼어 놓습니다. 그리고는 계약 당사자 둘이 그 사이로 지나갑니다. 그러면 계약이 체결되는 겁니다. 그런 행위는 계약을 파기할 경우 죽게 된다는 계약의 엄격성을 상징하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요나단과 다윗은 변치 않는 맹약을 한 것입니다. 정말 그들은 평생토록 그 언약을 파기하지 않고 성실하게 지켰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황태자와 목동이 평생의 친구로 언약을 맺는, 정말 희한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삼상18:4을 보면 더욱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요나단이 겉옷을 벗어 다윗에게 입혀줍니다. 겉옷은 신분을 나타내는 옷입니다. 그러니까 황태자의 복장입니다. 그것을 선뜻 벗어서 입혀주었다는 것은 자기가 승계할 받을 왕위를 넘겨준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요나단은 군복과 칼, 활과 띠도 넘겨줍니다. 이것은 생명을 다윗에게 맡긴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순복하는 신앙의 결단입니다. 굉장하죠?

요나단은 그 후 사울이 다윗을 미워하고 핍박하자 감싸주고 보호합니다. 그리고 갈수록 그 핍박이 심해지고 노골적으로 죽이려 들자 하는 수 없이 다윗에게 망명을 권합니다. 두 사람이 작별하는 장면이 삼상20:41~42이 나오는데 아주 감동적입니다. “다윗이 곧 바위 남편에서 일어나서 땅에 엎드려 세 번 절한 후에 피차 입 맞추고 같이 울되 다윗이 더욱 심하더니 요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우리 두 사람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영원히 나와 너 사이에 계시고 내 자손과 네 자손 사이에 계시리라 하였느니라 다윗은 일어나 떠나고 요나단은 성으로 들어 오니라” 슬프지만 너무 아름답고 감동적인 장면이죠. 이같은 우정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에서 우러나온, 마음과 진실이 통하는 참 사랑이었습니다.

그 이후 다윗의 망명 생활이 10여년 지속되는데, 그 기간 중에는 단 한번 두 사람이 만난 기회가 있었습니다. 삼상23:15~18에 그 기록이 나옵니다. 그 후에는 다윗은 계속 망명 생활을 하고, 요나단은 전쟁터에서 전사함으로 영영 만날 수 없었었습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쫓기다가 십 황부지에 은거하고 있을 때입니다. 그 정보를 들은 요나단이 은밀히 찾아갑니다. 다윗도 위태롭지만 요나단 역시 목숨을 걸고 간 겁니다. 그 때 요나단이 다윗을 위로하고 용기를 북돋워주는 장면은 정말 감동적입니다. 결코 다윗은 죽지 않고 왕이 될 것임을 분명하게 말해줍니다. 어쩌면 이때 다윗이 오랜 도피 생활로 신앙이 흔들리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럴 가능성이 많죠. 그도 인간인데 ... 그런데 때마침 요나단이 와서 격려해준 겁니다. 삼상 23:17 “곧 요나단이 그에게 이르기를 두려워 말라 내 부친 사울의 손이 네게 미치지 못할 것이요 너는 이스라엘 왕이 되고 나는 네 다음이 될 것을 내 부친 사울도 안다 하니라”
정말 대단한 일이죠? 다윗의 신앙도 훌륭하지만 요나단의 신앙과 우정이 정말 놀랍습니다. 이런 친구를 가진 사람은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다윗도 요나단의 아름다운 우정을 평생 마음 속게 간직하고 살았습니다. 그리고 최선을 다해 그 사랑에 보답했습니다. 물론 요나단이 요절하는 바람에 기회가 별로 없었지만 말입니다. 요나단의 전사 소식을 들은 다윗은 그를 추모하며 눈물로 노래합니다. 삼하1:26 “내 형 요나단이여 내가 그대를 애통함은 그대는 내게 심히 아름다움이라 그대가 나를 사랑함이 기이하여 여인의 사랑보다 승하였도다” 그리고 다윗이 왕이 되고 좀 안정되자 요나단의 자손이 혹시 남아 있나 조사합니다. 므비보셋이란 아들이 하나 남아 있었는데, 다리를 저는 장애인으로 초야에서 쓸쓸히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를 데려다 왕궁에서 자기 아들처럼 돌봅니다. 삼하9:11 “ ... 므비보셋은 왕자 중 하나처럼 왕의 상에서 먹으니라”

그런 생각을 해 봅니다. 만일 다윗에게 요나단 같은 좋은 친구가 없었다면 과연 어떻게 됐을까? 왕이고 뭐고 중도에 포기했을지도 모릅니다. 혹은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댄다고 애매하게 고통을 당한 나머지 복수심에 불타 사울 왕에게 반기를 들고 무력 대항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모든 게 끝나는 거죠. 그런데 요나단의 신앙적 격려와 지지가 있었기에 다윗은 고난과 역경 가운데서도 끝까지 인내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다윗의 인생 가운데 요나단과 동행했다는 사실은 가장 귀한 인생 자산 중의 하나였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인생 여정에 좋은 친구와 동행할 수 있다면 그것은 인생에 큰 자산입니다. 영국 수상을 지낸 2차 대전의 영웅 처칠의 이야기입니다. 그가 어린 시절 시골에 살 때 한번은 연못에서 헤엄을 치다 익사 위기에 처했습니다. 그때 가난한 집 아이가 뛰어 들어가 구조해 줬습니다. 그 일을 계기로 둘이 친한 친구가 되었습니다. 하루는 어린 처칠이 친구에게 소원이 무어냐고 물었습니다. 친구는 머뭇대다가 런던에 가서 의학 공부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처칠은 아버지에게 말씀을 드려서 그 친구가 공부할 수 있도록 도와 줬습니다. 그 친구가 페니실린을 발견한 유명한 플레밍입니다. 그런데 묘한 일이 있었습니다. 페니실린을 발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처칠이 폐렴으로 위독한 상태에 빠졌다는 소식을 들게 됩니다. 플레밍은 페니실린을 들고 급히 달려가 그 친구를 간신히 살려냈고 그 후 처칠은 수상이 됩니다. 두 사람 모두 너무 소중한 친구를 갖고 있었던 겁니다.

최근 연쇄 살인범이 붙잡혔죠. 밝혀진 것만 22명을 죽였다고 하니 어이가 없고 치가 떨립니다. 어떻게 인간이 그토록 잔인할 수 있는지 ... 그런데 본문 말씀을 묵상하다가 한편으로 이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자업자득이기는 하지만, 그의 주변에는 참 친구가 없었습니다. 가족도 있고 알고 지내는 사람들도 더러 있겠죠. 그런데 정말 염려해주고 속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참 친구가 없었던 겁니다. 만일 그에게 믿음의 좋은 친구가 옆에서 동행해 주었다면 그 정도까지 인생이 망가졌을까? 그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비슷한 예가 역사 속에 있었습니다. 유대인 6백만을 학살한 히틀러의 이야기입니다. 그의 측근 가운데 ‘엘버트 스피어’라는 인물이 있었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을 히틀러와 함께 보냈고, 나중에 내각의 참모로 일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히틀러는 진정한 우정을 거부했다고 합니다. 카리스마로 사람들을 지배했을 뿐, 예를 들어 함께 체리 열매를 먹으며 즐기는 작은 기회조차 그는 거부했다고 합니다. 참 친구가 없던 히틀러가 그렇게 괴상한 인간이 됐다는 게 이해가 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에 필요한 게 여러 가지 있겠지만, 일평생 동행할 좋은 친구가 꼭 있어야 합니다. 배우자도 좋고, 부모 자녀도 좋습니다. 우리 가족들이 좋은 친구로 서로의 인생에 동행이 되면 얼마나 좋을까! 가족인데도 한 솥 밥을 먹고 한 이부자리에 잠을 자도 남남처럼 답답하게 사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가만히 보면요, 가족도 신앙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아름다운 동행이 가능합니다.

가정 외에 사회에서 동료나 선후배 가운데서도 좋은 친구가 있으면 좋겠죠. 그런데 신앙을 떠나서는 이런 관계가 참 힘듭니다. 신앙이 있어도 성숙하지 않으면 어려운데 말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중요합니다. 비록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모여 있지만, 그래도 동일한 하나님과 동일한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에 서로 통하는 게 있습니다. 좋은 친구를 사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모이다 보니까 서로 인격적인 접촉이 잘 이뤄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게 소그룹입니다. 흔히 셀(cell)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교회를 인체로 비유할 때 작은 모임은 마치 세포외 마찬가지입니다. 구역이나 각종 소그룹이 있죠. 그런 모임 가운데 마치 요나단이 다윗에게 마음이 끌렸듯이 어쩐지 마음이 끌리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 분들끼리 서로 연합하고 협력하면 풍성한 사랑과 은혜를 나누고, 사명도 효과적으로 감당할 수 있습니다. 우리 인생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 모릅니다. 전4:9~12 말씀을 보면 더욱 이런 관계가 절실하게 느껴집니다.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저희가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혹시 저희가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 하느니라” 두 사람이 동행하면 넘어져도 일어설 수 있습니다. 따뜻합니다. 승리합니다. 그런데 둘 이야기를 하면서 갑자기 삼겹줄 이야기가 나오는 건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는 두 사람의 관계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지 않으면 진정으로 하나 되는 게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다윗과 요나단처럼 인생길에 동행할 좋은 친구들을 사귀는 여러분, 그래서 늘 즐겁고 복된 인생길을 걸어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2] 다윗과 하나님의 동행 : 가장 아름답고 완전한 동행

너무도 아름다운 다윗과 요나단의 사랑과 우정! 물론 요나단의 사후에도 다윗의 마음속에 살아 있었던 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요나단이 떠난 게 사실입니다. 다윗으로서는 아까운 동행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원치 않는 가운데 사랑하는 사람들과 이별하게 됩니다.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할 때가 닥쳐옵니다. 나쁜 경우지만 이런 때도 있습니다. 친구인 줄 알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배신하는 경우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버리지도 떠나지도 않으십니다. 우리가 천국 가는 그 날까지, 아니 영원토록 우리와 동행해 주십니다. 이것은 완전한 동행이요, 가장 아름다운 동행입니다. 다윗은 요나단과의 우정도 중요시 여겼지만 궁극적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신앙의 사람이었습니다. 환란과 풍파를 많이 만났지만 궁극적으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신앙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그의 이런 신앙을 반영한 시가 여러 편 있는데 그 중에서 몇 구절을 인용해 봅니다.
시3:5~6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천만 인이 나를 둘러치려 하여도 나는 두려워 아니하리이다”
시27:9~10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시고 주의 종을 노하여 버리지 마소서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나이다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시여 나를 버리지 말고 떠나지 마옵소서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
시139:7~10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길에 늘 동행해 주시고 우리를 완전하게 보호하시고 축복하실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 그분만이 우리에게 완전한 보호자가 되십니다.(시121:4~8 참조) 그런데 놀랍게도 그 하나님이 그분이 우리에게 친구라고 불러주십니다. 나 같은 죄인도 하나님의 친구가 된다는 겁니다. 출33:11에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친구처럼 말씀하셨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사41:8에서는 아브라함을 가리켜 ‘나의 벗’이라고 부르십니다. 그들에게만 그러시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 모두에게 그렇게 하십니다.

예수님도 우리를 친구라고 불러주십니다. 요15:13~15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그러기에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십니다.(요13:1) 우리가 아직 죄인일 때 십자가에 피흘려 죽으심으로 사랑을 보여주셨기에 허물이 있어도 우리를 여전히 사랑해 주십니다.(롬 5:8) 그리고 우리를 영원히 버리지도 떠나지도 않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히13:5 참조)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만 모시고 살면, 예수님만 모시고 살면 인생에 거칠 것이 없습니다. 외로우면 위로해 주십니다. 힘들면 새 힘을 주십니다. 위험하면 감싸주시고 지켜 주십니다. 방황하면 갈 길을 인도해 주십니다. 답답하면 상담해주십니다.

언젠가 우리나라에도 방문해서 콘서트를 가졌던 스웨덴의 가스펠 가수 레나 마리아 이야기입니다. 그분은 태어날 때부터 두 팔이 없었던 중증 장애인입니다. 그런데도 수영 선수도 했고 별의 별 것을 다합니다. 그 비결이 뭘까? 그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어보면 압니다. 하루는 어린 레나가 밖에 나갔다 들어왔는데 시무룩합니다. 어머니가 조심스럽게 무슨 일 이 있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불쑥 대답을 합니다. “엄마, 나는 왜 친구가 없는 거죠?” “친구가 없다니 ... ” “정말 친한 친구 말이에요.” 속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친구가 없다는 뜻이었습니다. 아마 겉으로 그냥 다정하게 대하지만 가까이 하는 친구는 없었나 봅니다. 마음이 짠해진 어머니는 레나를 꼭 안아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친한 친구가 없긴…. 레나에게는 레나를 지켜주는 친구가 있는 걸.” “누구요?” 그녀는 레나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바로 예수님이셔. 늘 레나와 함께 계시고 레나를 지켜주시는 분이란다. 그 말이 어린 레나의 가슴 속에 박혔습니다. 그 후로는 아주 밝은 아이가 됐습니다. 지금도 그분의 사진을 보면 표정이 얼마나 밝은지 모릅니다. 찬양도 아주 밝은 곡들입니다. 이제는 오히려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좋은 친구로 소개해 주고, 용기와 희망을 주는 사람이 된 겁니다. 하나님을, 예수님을 친구로 모시고 동행하는 사람은 이처럼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아름다운 동행이 있습니까? 일평생 다윗과 요나단처럼 서로를 위해 주고 섬겨주는 믿음의 친구가 있습니까? 그리고 살아계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좋은 친구로 모셨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행복한 분들입니다. 그러나 혹시 아직도 아름다운 동행이 없다면 불행한 사람입니다.

함석헌 선생의 시 「그 사람을 가졌는가」를 읽어드립니다. 이 시를 잘 들으면서 스스로에게 대답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아름다운 동행이 있습니까? “만리 길 나서는 날 / 처자를 내맡기며 / 맘 놓고 갈 만한 사람 /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 온 세상 다 나를 버려도 /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 ‘저만이야'하고 믿어지는 /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 탔던 배 꺼지는 순간 / 구명대 서로 양보하며 /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 할 /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 불의의 사형장에서 / ‘다 죽어도 너희 세상 빛을 위해 / 저만은 살려 두거라' 일러줄 /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떠나려 할 때 /
‘저 하나 있으니' 하며 / 빙긋이 웃고 눈을 감을 /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부디 “나는 요나단 같은 친구, 다윗과 같은 친구를 가졌노라!” “나는 날 위해 목숨을 주신 예수님을 침구로 가졌노라!” 이렇게 외칠 수 있는, 그래서 아름다운 동행이 있기에 행복한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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