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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빗나간 예배, 받으시는 예배 (요 4: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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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재신 목사 (양정교회)

  영국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한 교회에서 유명한 헨리 워드 비쳐 (Henry Ward Beecher) 목사를 청하여 집회를 하기로 하였습니다.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예배당을 가득 메웠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비쳐 목사님에게 사정이 생겨서 그 집회에 올수가 없어서 무명의 한 순회 목사를 대신 보냈습니다.
  예정된 시간에 그 순회 목사가 강당위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비쳐 목사님이 올 수 없게 된 사정을 설명하고 설교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기대했던 비쳐 목사가 설교를 하지 않는 다는 것을 안 몇몇 사람들이 자리를 뜨려고 했습니다.
  그때 순회 목사는 설교 강단 위에 올라서서 말했습니다.
  "헨리 비쳐 목사님을 경배하러 이곳에 온 사람들은 다 교회에서 나가 주십시오. 그렇지 않고 하나님을 경배하러 온 사람들은 그대로 앉아 계십시오"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마음이 찔려 아무도 나가지 않았습니다.

  오늘 누구를 예배하러 왔습니까?
  당연히 하나님을 예배하러 왔다고 대답하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역사 이래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은 많았습니다. 지금도 주일이면 전세계에서 수억의 사람들이 예배합니다. 우리나라에서만 해도 수백만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예배하러 교회에 모입니다. 그런데 예배는 다 드려도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는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느라” 라고 했습니다. .
  “이렇게” 라는 단어가 말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의미합니다. 아무렇게나 예배하는 자를 받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그중에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사람을 찾으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예배하는 사람들을 두 종류로 구분하여 보고 계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서 예배를 드려도 하나님은 두 종류로 바라보시고 있습니다.

  <빗나간 예배자입니다>. 

  첫째는 빗나간 예배자들이 있습니다. 빗나간 예배란 예배의 의미와 목적에서 빗나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초점이 맞추어지지 않고 자신에게 맞추어진 예배를 의미합니다.
  구약에서 예배라는 말은 본래 노예나 고용된 종들이 주인을 섬기기 위해 일하는 노동을 의미하는 단어였습니다. 즉 예배는 종이 주인을 섬기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예배의 온전한 목적이 있습니다. 성도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 그것이 예배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드려져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의 예배 모습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을 경배하고 섬기기 위함이라기보다는 인간 자신이 어떤 위안으로 받고 하나님이나 예수님을 수단으로 하여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켜보자는 의도를 깔고 예배를 드립니다. 이런 빗나간 예배의 형태는 다음과 같이 네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① 처음부터 끝나는 시간에 맞추어 드리는 예배
  언제부터 우리의 드리는 예배가 정확하게 몇 시 몇 분에 끝나야 한다고 정해져 있습니까?
  여러분 예배의 목표를 끝나는 시간에 맞추지 마십시오. 오직 끝내기 위해서 예배를 시작한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예배의 내용이야 어떻든 짧으면 은혜가 되고 길면 은혜가 안 되는 것은 무엇인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설교가 시작 되자마자 시간에 쫓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의 마음속에 이쯤이면 끝나야 한다는 목표 설정을 다해 가지고 예배에 참석합니다.

설교를 하기만 하면 사람들이 졸거나 자꾸만 시계를 보면서 딴청을 부리는 교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주일 날 목사님의 설교가 무지무지 길었는데도 교인들은 시선을 돌리지 않고 목사님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목사님은 너무나 감격하여 예배를 마친 후 사모님에게 “여보 오늘 설교는 괜찮았나 봐! 교인들이 모두 나를 뚫어지게 보더군”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사모님 왈, “누가 강대상 뒤에 시계를 걸어놨어요”
  강대상 뒤에 시계가 없어도 예배 시간에 시간을 의식하지 않고 예배드릴 수 있는 수준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참 된 예배는 성령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성령이 주관하는 예배라는 것입니다. 끝나는 시간은 성령님에게 있습니다.

  ② 기념식과 같은 예배
  기념식 같은 예배가 어떤 예배입니까? 예배 시간의 순서에 성심으로 참여하지 않는 것입니다. 목사는 열심히 설교하는데 경청하지 않습니다. 경청하려는 의지와 노력 없이 결코 설교에 은혜 받을 수 없습니다.
  설교시간에 주보를 읽으면서 어떻게 은혜가 되고 깨닫는 것이 있겠습니까? 예배는 태도가 중요합니다. 말씀을 경청해보십시오. 말씀을 경청하지도 않고 지루하다고 생각합니다. 예배는 거룩한 하나님을 대면하는 것입니다.

  예배 시간만 되면 잠을 자는 할머니가 계셨습니다.
  그것도 목사님 강대상 바로 앞에서 설교 시간마다 주무시니 목사님이 너무나 신경이 쓰여 설교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참다못한 목사님이 옆에 있는 자매에게 할머니를 깨우라고 했습니다.
  옆에 있던 자매가 "할머니 그만 일어나세요. 목사님께서 일어나시래요." 라고 흔들며 말하자 할머니 하는 말이  “아니, 잠은 누가 재워놓고 남보고 깨우래” 라고 했답니다.
  그래요 교인이 졸면 목사도 책임이 있어요.
  그래서 저는 우리교인들 졸면 안 깨워요.
  그러나 생각해보십시오.
  오늘날 우리의 예배가 어떤 기념식 같이 졸아도 괜찮고 딴보아도 괜찮은 예배가 되어서야 되겠습니다.
 
  ③ 형식적인 예배, 민방위 교육과 같은 예배
  아마 여자 분들은 민방위 교육 시간이 어떤지 잘 모르실 것입니다.
  의무감에서 참석하기는 했지만 전혀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말이 교육이지 절대로 교육이 안되는 것이 민방위 교육이고 말이 훈련이지 절대로 훈련안 되는 것이 예비군 훈련입니다. 그럼 왜 민방위 교육에 나가고 예비군 훈련장에 갑니까?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민방위 교육이나 예비군 훈련은 가서 시간만 때우면 OK입니다. 그런데 그때 써먹던 버릇을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에도 써먹으려고 하니 문제입니다.
  민방위 교육의 특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시작은 될 수 있으면 늦게... 그러나 끝나는 시간은 정확하게 .... 단 몇 분이라도 늦게 끝나면 큰일 납니다. 불평이 쏟아집니다. 교육의 내용에는 절대로 관심이 없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 하나님께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는 데 우리의 예배가 민방위 교육처럼 되어서야 되겠습니까?
 
  ④ 영화 관람 같은 예배
  순전히 구경꾼으로 오는 것입니다. 자신은 구경군이고 앞에서 사회 보고 기도하고 설교하는 예배 인도자들이 배우입니다. 우리는 예배를 보는 자들이 아니고 예배를 드리는 자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든 예배에 참여자가 되어야 합니다. 영화 구경은 재미있어야 갑니다. 예배를 재미로 드리면 빗나간 예배입니다. 예배는 나의 재미를 위함이 아니고 하나님을 섬기기 위함입니다. 예배시간에 재미를 추구하면 영은 죽습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은혜를 받으면 진정한 재미가 생깁니다.

  어떤 장로님이 있었습니다. 그는 늘 목사님 설교를 못마땅해 했습니다. 말씀을 들으면 은혜받을 생각은 안하고 비평하기 일수였습니다.
  "우리 목사님 설교에는 예수님의 보혈이 빠졌어."
  그러던 어느 날 목사님이 외지로 출타 할 일이 있어서 이 장로님에게 설교 부탁을 했습니다.
  장로님은 이제야말로 나의 진가를 보여줄 기회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준비해서 강대상 앞에 섰습니다.
  설교 제목은 “그리스도의 피” 였습니다.
  본문을 읽고 제목을 말하고 설교를 시작하려고 하는데 그는 갑자기 당황하기 시작했습니다. .
  대중 앞에 처음 서는지라 얼굴이 달아오르고, 등에는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하고 원고 글씨는 아물아물했습니다. 말도 나오지 않고 앞이 캄캄했습니다.
  한참 동안 멍하니 서 있다가 기어들어가는 작은 목소리로 더듬거리며 “소피, 닭피, 개피, 돼지피 보다도 그리스도의 피가 최곱니다” 라고 했습니다.
  영화를 보고 재미가 있었네, 어쨌네 비평하듯이 예배를 평론하지 마십시오. 예배는 내 자신이 제물이 되어 바쳐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참된 예배자들>

  둘째로 참된 예배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① 성령으로 예배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자는 신령으로 예배하는 사람들입니다. 본문에서 신령이란 직역하면 성령이라는 의미입니다. 성령으로 드리는 예배는 하나님의 인격과 나의 인격이 만나는 예배입니다.
  인격 대 인격의 만남은 변수가 있습니다.
  만나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예측하지 못합니다.
  끝나는 시간 정해놓고 드리는 예배는 인격이신 하나님을 무시하는 행위입니다. 예배 드리는데 성령이 강하게 역사 하시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께 어떤 의무적인 행위만 생각했지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고 반응하실 하나님의 행동에 대하여는 전혀 계산에 없는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② 진리로 예배하는 사람들입니다.
  진정이란 말은 직역하면 진리라는 의미입니다. 예배에 있어서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하는데 하나님의 말씀은 설교에 의해 대변됩니다. 
  여러분 오늘날 설교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설교라는 말은 기독교 용어입니다. 하나님이 그의 성도들에게 말씀하시는 수단으로서 설교가 사용되어집니다. 그러나 설교에 대한 인식이 어떠해졌습니까?
  듣기 싫은 훈계를 말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흔히 쓰는 말 있지 않습니까?
  “설교하지마......”
  그래서 설교는 따분한 것, 고리타분한 것, 맨 날 하는 소리,

  설교가 하나님 말씀이라고 겉으로는 모든 교인들이 공감하지만 속으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항상 설교해도 듣지 않고 변하지 않는 것 아니겠습니까?
  성령은 말씀과 함께 역사하십니다.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려질 때 거기에 성령의 역사가 나타날 것입니다. 예배가 하나님 존전에 서있는 것으로 느껴질 때 그곳에서 우리는 모든 은혜를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이런 자들을 찾고 계십니다.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려지고 예배가 하나님의 면전에 서 있음으로 느껴지는 사람들을 말입니다.

  ③ 삶을 드리는 예배자들입니다.
  진정한 예배는 평소의 삶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뜨겁게 찬양해도 평소의 삶이 뒷받침해주지 못하면 그가 드리는 찬양과 예배는 공허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가 찬양할 때 입만 보시는 것이 아니라 평소 우리 생활을 같이 보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드리는 찬양과 예배에 걸 맞는 일상의 삶이 함께 가야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 1장 11-17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케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업을 버리며 악행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공의를 구하며 학대받는 자를 도와 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

  여기에 나오는 구절을 보면 제사(예배)와 관련된 용어들입니다.
  제물, 숫양의 번제, 살진 짐승의 기름, 수송아지, 어린 양, 숫염소의 피, 분향, 월삭, 안식일, 대회 성회, 절기 등 전부 예배에 관련된 것들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대상인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배를 정기적으로 드렸던 자들입니다. 제물을 많이 바치기도 했습니다. 기도도 많이 하고 예배도 많이 드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드리는 예배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아주 끔찍한 표현을 쓰셨습니다.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왜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이 드리는 예배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을까요?
  도대체 하나님께서 이러한 무서운 말씀을 하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13절에 보면 그들이 “성회(예배)와 아울러 악을 행하기 때문” 이고 15절에 보면 “너희 손에 피가 가득하기 때문이다” 이라고 했습니다. 피가 가득하다는 것은 어려운 사람들을 착취하고 무고한 사람들을 자기의 이익 때문에 괴롭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예배드리지만(찬송하지만) 평소의 삶이 악하기 때문에 그들이 드리는 예배가 아무리 그럴싸해도 받지 않으신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평소의 삶과 직업이 우리에게 참 중요합니다.
  교회 안에서 찬양하고 예배하는 것만큼 일상적인 삶이 하나님을 향한 예배로 드려져야 합니다. 인도의 테레사 수녀는 자신이 거리에서 고아를 도왔을 때, 또 목마른 아이에게 시원한 물 한 컵을 주었을 때 자신은 "주님을 예배하고 있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삶을 예배로 드리는 사람은 평소 예배가 기다려집니다.
  어떤 교인은 주일을 손꼽아 기다리다가 주일 아침 즐거운 마음으로 교회에서 분주하게 하루 종일 지내면서도 별로 피곤해하지 않고 밝은 얼굴로 보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주말이 되면 또 어느새 일요일이 돌아왔는가 하면서 짜증스러워하기도 합니다.
  어느 기독교 가정이 있었습니다. 부인은 신앙심이 있고 열심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남편은 믿음이 없습니다. 매주일 아침이 되면, 지혜로운 남편은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둘 중에 오늘은 당신이 대표로 예배를 드리고 오구려."
  그런데 어느 날 밤 남편이 꿈을 꾸었습니다. 그는 자기 아내와 함께 죽어 하늘나라에 이르게 되었습니 다. 천국의 문지기가 "당신들은 부부지요?" 라고 물었습니다. 둘은 고개를 끄덕였답니다. 그러자 문지기는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당신들 둘 중에 부인만 대표로 천국에 들어가시오."

  예배가 짜증스럽습니까?
  사랑하는 애인을 만나러가는 사람이 축 처진 어깨에 무거운 발걸음으로 느릿느릿 가겠습니까? 시간에 늦을까 봐 부리나케 달리고 서둘지 않겠습니까?
  예배는 “믿는 자로서 마땅히 치루어야 할 의무” 가 아닙니다. 예배는 의무이기 전에 하나님께서 그의 사랑하는 자들에게 대해서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은혜의 방편입니다. 나를 가장 사랑하는 주님과의 만남의 순간입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를 드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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