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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음의 발자취를 남겨야 합니다. (시 2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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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오주철 목사 (영신교회)

우리가 걸어가는 믿음의 길에는 하나님이 숨겨놓은 놀라운 축복의 기회로 가득 차 있습니다.  문제는 언제나 우리의 믿음입니다.  한 겨자씨 만한 믿음이 없는 것을 우리는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내 안에 한 겨자씨 만한 믿음이 있다면 하나님의 역사는 오늘도 우리의 삶 속에 일어납니다.

세찬 바람과 함께 눈보라 속에서 자라나는 생명체를 보십시오.  세찬 눈보라를 이기고 올라오는 강한 풀잎은 정말로 존경스럽고 사랑스럽지 않습니까?  사람도 그렇습니다.  편안하고 안락한 시절에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 수가 없습니다.  역경에 처했을 때에 비로소 한 인간의 진가가 드러납니다.  저는 우리 모두가 역경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붙들고 믿음의 터널을 통과하여 여러분들의 진가를 드러낼 수 있는 복을 받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여러분은 한 생애를 살면서 누군가를 일평생 기억되도록 사랑의 강한 포옹을 해본 적이 있습니까?  남편이든 아내든 친구든 자식이든 연인이든 그 분이 일평생 잊을 수 없는 내 내면의 강력한 불꽃을 가지고 포옹을 해 본적 있습니까?  이 시간이 그 시간이고, 이 날이 그 날입니다.
우리가 사람의 품에 안기는 것이 얼마나 아름답고 귀한 일입니까?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품에 안겨본다고 하는 것은 평생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될 것입니다.  오늘 저는 우리 모두에게 이런 아름다운 성령에 생포되는 은혜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축복합니다.

돌아온 탕자를 안아주었던 아버지의 포옹이 어떤 것일까요?  이 아들에게는 일평생 잊을 수 없는 강력한 포옹이었을 겁니다.  그것이 아버지가 기다리는 마음입니다.  사람에게는 왜 두 팔이 있습니까?  어느 분이 말하기를 사람에게 팔이 두 개인 것은 사랑하는 사람을 뜨겁게 안아주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참으로 좋은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보십시오.  한 손 가지고 어떻게 안습니까?  안아도 쉽게 빠져 나가버리지 않습니까?  두 팔은 안기 위해서입니다.  꼼짝 못하게, 도망가지 못하게, 숨막히도록 사랑하고자 두 팔로 부둥켜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시간 옆에 있는 사람을 두 팔로 꼭 안으시면서 “오늘 당신을 만나서 너무 행복합니다”라고 축복의 말을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는 크고 작은 문제들을 가지고 이 땅에서 삽니다.  내가 당한 문제들이 때로는 남들이 당한 문제들 보다 큰 것 같아서 밤을 샐 수도 있고 아픔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세상과 자신을 다르게 볼 수 있는 내 안에 거룩한 능력만 회복되면 세상의 문제들은 쉽게 변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내 자신과 사람들을 다시 볼 수 있는 거룩한 능력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하나님의 사랑의 줄기를 붙들고 그 큰사랑의 능력으로 세상이 얼마나 꼬였든지, 내 자신이 얼마나 꼬였든지 세상을 다시 볼 수 있는 하나님의 거룩한 힘들이 여러분들 속에 용솟음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믿음이라는 것은 내 마음을 뒤집는 작업입니다.  그래서 올 때의 믿음과 갈 때의 믿음이 달라지게 하십니다.  올 때의 시각과 갈 때의 시각이 달라지게 하십니다.  은혜를 받기 전의 심령과 은혜를 받은 후의 내 심령이 달라지게 하시는 것입니다.  모든 행복과 불행이 어디에 있습니까?  마음을 뒤집느냐, 못 뒤집느냐에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든지 하나님 앞에 오면 희망이 있고 살 길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품에 안기면 새로운 길이 열립니다.  제가 분명하게 확신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집에 들어온 사람들은 그 미래가 과거와는 분명히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탕자의 비극이 어디에서 왔습니까?  탕자의 고통이 어디에서 왔습니까?  아버지의 품을 떠난 데서 온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연약한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다는 것이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모든 생명, 모든 삶 속에는 하나님의 인도가 절대로 필요합니다.  꼭 있어야 됩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신다고 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지키지 않으시면 파수꾼의 지킴이 다 허사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저와 여러분 모두가 전능하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는 믿음의 인생길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그가 사는 날 동안 함께 하는 인생은 정말로 복 받은 사람입니다.  그의 평생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고 산 인생은 정말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협이나 칼이라도 넘어뜨리지 못할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 중에 다윗만큼이나 힘들고 어려운 삶을 살았던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는 참으로 인간으로서는 견디기 어려운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와 같은 역경과 어려움을 잘 이겨내고 결국 후손들이 가장 존경하는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당신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말씀하실 만큼 훌륭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다윗은 후손들에게 아름다운 믿음의 발자취를 남긴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어떻게 그 힘들고 어려움은 삶의 역경과 난관들을 다 물리치고 그처럼 훌륭한 삶의 승리자가 될 수 있었겠습니까?  무엇이 다윗에게 그와 같은 승리를 가져다주었겠습니까?  그것은 한 마디로 믿음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 하나로 그 엄청난 시련을 극복하고 훌륭한 삶의 승리자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경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직 믿음”입니다.  믿음 하나만 있으면 누구나 언제나 어디서나 능히 살 수 있습니다.  승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겨자씨 만한 믿음만 있다면 산을 명하여 바다에 던지우라 하여도 그대로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믿음에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힘과 능력이 있습니다.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합니다.  거꾸러트림을 당하여도 넘어지지 않고 살 수 있는 힘이 믿음에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지금 우리가 당하고 있는 엄청난 어려움과 난관을 이겨 승리하게 할 수 있는 힘도 믿음에 있습니다.

다윗의 시편 23편은 우리가 참으로 좋아하는 말씀 중에 하나입니다.  그러나 이 시편이 참으로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서 기록되었다는 것을 사람들은 잘 알지 못합니다.  성경학자들은 다윗이 삶의 어떤 상황에서 이 시편을 기록했느냐를 가지고 논란을 벌립니다.  그러나 오늘 많은 학자들은 이것은 다윗이 그의 아들이었던 압살롬이 반역을 하고, 그래서 아들의 반역 때문에 쫓겨다녔을 때에 기록했다는 사실에 대해서 동의를 하고 있습니다.
만약 다윗이 정말 아들의 반역을 경험하고 아들에게 쫓겨다니는  비참한 상황 속에서 시편 23편을 기록했다면 이 사람은 정말 굉장한 사람입니다.  솔직히 그런 비참하고 절박한 상황에서 이렇게 아름다운 고백이 나올 수 없는 것이 아닙니까?  최소한 우리의 입장에서는 말입니다.

본문에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는 말의 시제는 미래형입니다.  그것은 다윗이 지금 이 시편을 무엇이 많이 부족한 상태에서 쓰고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으로 인도 하시리로다 라는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윗은 푸른 초장과 쉴 만한 물가와는 정 반대되는 상황에서 이 시편을 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와 원수의 목전이라는 표현을 보면 그가 당하고 있는 고난과 어려움이 얼마나 심각한 것이었는가를 어렵지 않게 알아 낼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다윗이 이 시편을 쓸 때의 삶의 자리였던 것입니다.
성경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 시편은 사실 가장 아름답지 못한 삶의 환경 속에서 기록되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다윗이 이 시편을 쓸 때의 형편은 지금 우리가 당한 형편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힘들고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 상황과 형편에 사로잡히지 아니하고 이와 같이 훌륭하고 아름다운 시편을 기록할 수 있었습니다.

다윗은 그와 같이 힘들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이와 같이 아름다운 시를 썼을 뿐만 아니라 결국 그가 자신의 시편에서 이야기한 그대로의 삶을 쟁취하였습니다.  그는 성공한 것입니다.  승리한 것입니다.  무엇이 다윗에게 그와 같은 승리를 가져다주었습니까?  그것은 믿음입니다.  여호와가 나의 목자라는 믿음.  여호와께서 나의 목자이시기 때문에 비록 지금은 부족하지만 결국은 부족함이 없게 하실 것이며, 지금은 눕고 쉴 수 없으나 결국은 눕고 쉴 수 있게 해 주실 것이며, 지금은 비록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한 가운데를 지나고 있으나 결국은 아무런 해도 받지 아니하고 벗어날 것이며, 지금은 비록 원수의 목전에서 수치를 당하고 있으나 결국은 그 원수의 목전에서 하나님이 베풀어주시는 잔치를 벌이게 될 것이라는 믿음이 다윗에게 있었습니다.  결국은 그 믿음 그대로 되었습니다.  다윗은 바로 그와 같은 믿음으로 승리하고 성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내 인생에서 선하신 목자이심을 믿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세상은 어렵습니다.  우리가 처한 상황은 참으로 비관적인 것입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도저히 뚫고 나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무능하고 무지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선한 목자가 되어 주시는 하나님은 우리처럼 무능하신 분이 아니십니다.  무지하신 분이 아니십니다.  그는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으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에게는 난관이 있으나 하나님에게는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불가능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으나 하나님에게는 불가능이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모든 역경과 난관에서 능히 구원해 주시고 의의 길로 인도해 주실 수 있으십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믿으실 수 있으십니까?
우리가 편안할 때 입으로 시인 하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막상 어려움을 당하여 앞이 캄캄할 때 그것을 시인하고 믿기는 쉽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편안할 때 하나님을 자신의 목자라고 시인하고 믿은 것이 아니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가는 것과 같은 때에 하나님을 자신의 목자라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때문에 자기에게는 부족함이 없을 것이며 결국 자신의 삶은 푸른 초장 쉴 만한 물가에서 눕게 될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힘들고 어려울 때 믿는 것이 참 믿음입니다.  앞이 캄캄하고 낙심이 될 때에 믿는 것이 참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하나님을 믿어 드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얻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혹여 여러분이 생각하시기에 내가 지금 어려움을 당하여 모든 것이 부족해진 상황에 처해 있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잠시도 편히 쉴 수 없는 거친 사막과 같은 지경에 놓여있다고 생각하는 분이 계십니까?  원수의 목전에서 수치를 당하며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가는 것과 같은 상황에 처해 있다고 생각하는 분이 계십니까?  인간적으로 모든 소망이 끊어지고 차라리 죽는 것이 사는 것보다 나아 보이는 그런 지경에 있다고 생각하는 분이 계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 있는 힘을 다하여 아니 죽을 힘을 다하여 하나님이 나의 목자라고 믿고 고백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어떠한 일이 자신의 마음속에서부터 일어나는지를 한 번 지켜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솔직히 그와 같은 암울하고 처절한 상황에서 하나님이 나의 목자라고 고백하는 것은 쉽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믿음의 고백을 할 수만 있다면 그 다음은 쉽습니다.  여호와가 나의 목자라는 고백만 할 수 있다면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실 것이라는 것, 그리고 원수의 목전에서 잔치를 벌이게 될 것이며, 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아무런 해 없이 무사히 통과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믿고 고백하는 것은 자동적으로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입니다.  다윗은 믿음으로 바랐던 모든 것들을 실상으로 쟁취했습니다.  그는 정말 부족함이 없는 삶을 살게 되었고, 푸른 초장 쉴 만한 물가에 눕게 되었습니다.  원수의 목전에서 잔치를 벌이는 승리의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의 믿음은 모두 실상으로 구현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과 같이 힘들고 어려울 때에 하나님을 더 열심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꿈을 꾸시기 바랍니다.  그 모든 믿음 안에서의 꿈이 반드시 실상으로 구체적인 증거로 나타나게 될 줄을 믿습니다.
본문 6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6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선한 목자의 돌보심을 받고 있는 인생은 어떤 일이 생겨도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있을 것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선한 목자의 돌보심 아래 있는 사람은 어떤 환경과 어떤 조건 속에서도 걱정하거나 두려워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왭니까?  목자되신 하나님께서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시기 때문입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은 한 달이나 두 달이 아닙니다.  1년이나 2년이 아닙니다.  나의 평생에 라고 했습니다.  선한 목자 되신 주님께서는 한 순간도 우리를 떠나지 아니하시고 평생동안 선하심과 인자하심으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여러분, 솔직히 말입니다.  솔직히 주님을 나의 선한 목자로 삼고 실제로 이렇게 생각하고 믿는 분이 우리 가운데 몇 분이나 되시겠습니까?  우리 삶 속에 어려운 일이 일어나도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나를 따르고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계시는 분이 몇 분이나 되시겠습니까?  물론 우리가 생각하고 계획한 일들이 기대 이상으로 잘 될 때, 모든 일이 형통할 때에 이렇게 말하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내 건강이 좋고, 수입이 넉넉하고, 가족마다 평안하고, 내 친구들이 다 나를 좋아하고, 사회에서 어디를 가나 인정받는다면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라고 말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내 몸에 심각한 병이 들었을 때에 뭐라고 말할까요?  사랑하는 남편이, 사랑하는 아내가 고통 속에서 죽어가고 있는 것을 볼 때에 뭐라고 말할까요?  뜻밖에 직장을 잃고 가족들은 가난 속에 시달리게 될 때에 나는 뭐하고 말할까요?  양심적으로 말해 나는 다른 사람을 중상모략한 일이 없는데 사람들이 나를 멀리하고 돌아서니 나는 뭐라고 말해야 하겠습니까?

이처럼 나의 성이 무너지고, 기대와 소망이 수포로 돌아갈 때, 그래도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이 말은 터무니없는 속임수입니까?
여러분, 신앙을 이론적으로 믿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철학적으로 믿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믿는 이 신앙은 실제적이고 체험적인 것이어야 합니다.  막연히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내 삶에서의 구체적인 것이어야 합니다.
내 평생에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나에게 흘러 들어오는 것과 같이,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나를 따라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어디에 가든지 다른 사람에게 선과 인자를 남겨야 합니다.

양을 치는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양의 거름은 다른 가축의 거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좋다고 합니다.  양들이 목장 전체에 퍼져 있으면 양의 거름을 통해서 토양이 비옥해 진다고 합니다.  그래서 고대 문헌에는 양을 가리켜서 ‘황금발굽의 가축’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양들이 가는 곳에는 풍요와 번영이 뒤따랐습니다.  왜냐하면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양들을 따르기 때문입니다.  양들이 걸어간 곳에는 비옥한 목초지가 뒤따랐습니다.  양들이 살았던 곳에는 아름다움과 풍성함이 남아 있었습니다.

겨울에 눈이 옵니다.  눈이 왔던 날 밤에는 발자국이 남습니다.  그 발자국을 보면 지난 밤에 어떤 짐승이 자나갔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소가 지나 갔으면 소발자국이 났을 것입니다.  개가 지나갔으면 개 발자국이 났을 것입니다.  양이 자나 갔으면 양의 발자국이 났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가 지나간 길에 하나님의 자녀, 그리스도의 제자됨의 발자취가 났습니까?  우리가 다녀간 길 뒤에 축복과 은혜를 남겨두었습니까?  알프렛 테니슨 경이 남긴 시에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한번은 두 친구가 동부로 가는 길에 제 집에 들려 며칠을 지내며 일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저 더러 동부에 같이 가자고 했습니다.  같이 가던 중 한 친구가 모자를 잃어버린 것을 뒤늦게야 알았습니다.  그 친구는 자기 모자를 우리 집에 두고 온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제게 부탁했습니다.  집에 편지를 써서 모자를 찾아 보내 달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얼마 후 내 아내에게서 답장이 왔습니다.  아내의 답장 중에는 잊을 수 없는 문장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 문장은 저에게 너무나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저는 당신의 편지를 받고 집안 구석구석을 다 뒤져보았습니다.  그러나 손님의 모자는 흔적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분들이 여기 남겨 두고 가신 것은 오직 큰 축복 하나뿐입니다.”]
저는 이 대목을 생각하면서 저 자신을 한번 돌이켜 보았습니다.  나는 목사로서 어떤 발자취를 남기고 있는가?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어떤 발자취를 남기십니까?  슬픔의 흔적을 남기십니까?  아니면 기쁨의 흔적을 남기십니까?  다른 사람들이 우리들에게서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기대할까요?  그렇지 않으면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고 차라리 잊어버리고 말까요?  우리는 우리 뒤에 축복을 남깁니까?  아니면 잊고 싶은 추억을 남깁니까?  우리를 아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 기쁨이 될까요?  아니면 우리를 아는 것이 귀찮고 고통스러운 일 일까요?
이사야 52장 7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하는 자의 산을 넘는 말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

여러분, 이 시간 우리 한번 스스로에게 물어 봅시다.  “나는 어디에 가나 화평을 남겨두는가?  아니면 불화를 남겨두고 있는가?”  “나는 누구에게나 용서를 남겨두는가?  아니면 원한을 남겨두고 있는가?”  “나는 만족을 남겨 두는가?  아니면 불만을 남겨두는가?”  “나는 어디를 가나 희망을 남겨두는가?  아니면 좌절을 남겨 두는가?”  “나는 누구에게나 사랑을 남겨두는가?  아니면 미움을 남겨두는가?”
어떤 사람은 가는 곳마다 불결한 흔적을 남겨두기 때문에 그의 발자취를 차라리 가리고 싶어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되면 큰 일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발자취가 이렇게 중요합니다.  발자취를 보면 양이 지나갔는지 이리가 지나갔는지 알 수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발자취를 보면 성도가 지나갔는지 사기꾼이 지나갔는지 알 수 있습니다.  나를 알려고 하는 사람에게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것을 보여 준다고 하는 것은 정말로 중요한 일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의 발자취는 어떻습니까?  내가 나를 아무리 선전해도 다른 사람이 내 발자취를 보고 판단할 것입니다.  아프리카에는 리빙스톤과 슈바이츠의 발자취가 있습니다.  그들이 밟았던 검은 대륙의 숲과 평야와 마을에는 그들의 발자취의 영향이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그곳의 원주민들은 리빙스톤이나 슈바이츠는 한평생 주님의 인자하심과 선하심이 뒤따른 하나님의 사람이었다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 주어야 합니다.  오늘의 교회를 무미건조하고 미지근한 기관으로 전락시키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책임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뜨거운 사랑을 받았으면 우리도 뜨겁게 이웃을 사랑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렇지 못할 때 사람들은 사랑을 받기 위해 교회를 찾지만 우리의 미지근한 태도 때문에 실망하고 떠나갑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축복을 가져다주실 수 있는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다른 사람에게 그것을 보여 줄 때에 그 사람에게도 은혜가 된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 되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요, 그리스도의 제자로 인정받게 될 것입니다.

목자로서는 양이 잘 자라고, 왕성하게 번식하는 것을 보는 것이 기쁨입니다.  양들이 만족해하는 것을 보는 것은 목자의 한없는 기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우리의 목자가 되시는 주님께서 이런 만족을 찾고 계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우리를 따르는 동안 주님은 우리를 계속 바라보고 계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줄뿐만 아니라 주님에게도 기쁨으로 드릴 동일한 선함과 인자를 보고 싶어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의 목자이심을 믿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의 삶을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해 주실 것임을 믿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을 푸른 초장에 눕게 해 주실 것임을 믿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의 영혼을 소생시켜 주시고 의의 길로 인도해 주실 줄로 믿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아무런 해 없이 무사히 건져 주실 줄을 믿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원수 앞에서 잔치를 베풀어주심으로 저와 여러분의 수치를 단번에 씻어 주실 것임을 믿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 모든 믿음이 다 실상으로 나타나 시편 23편의 증인이 되는 복을 다 받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하여 하나님을 여러분의 진정한 목자로 고백하시고 오직 그만 의지하고 그만 따르시기를 바랍니다.  그의 음성에 귀 기울이시고 그의 말씀에만 순종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입으로만 주여 주여 한다고 이 놀라운 믿음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없이 살길이 없다고 생각이 되시거든 하나님께 매달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만 매달리시기 바랍니다.  그 믿음으로 구원을 얻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본문에서 다윗은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라는 말씀으로 마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실 때에 그 은혜를 잊지 않고 평생 하나님과 하나님의 집을 섬기겠다는 약속입니다.  이 약속도 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중요한 것은 다윗이 걸어갔던 이 아름다운 발자취를 오늘 저와 여러분들도 이웃과 후손들에게 남길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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