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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공동체를 깨뜨리는 것들 (약 3: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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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정근두 목사 (울산교회)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함께 복된 예배의 자리로 나오신 사랑하는 이웃 여러분, 다시금 여러분을 뵙게 되어서 기쁩니다. 저는 지난 한 주간동안 선교지 몽골을 잘 다녀왔습니다. 도착하자마자 꽉 짜여진 일정을 따라서 선교지를 돌아보는 일을 감당하고 왔습니다.

썸머타임 관계로 시차는 없었지만 밤 10시나 되어야 해가 떨어지고 비로소 어두워지는 관계로 하루가 무척 길었고 그 긴 시간들을 다 일로써 채워놓아서 열심히 다녔습니다. 최빌립, 김사라 선교사님이 개척한 교회 일곱 교회 가운데 여섯 곳을 직접 방문하고 지난주일 오후에는 7개 교회 연합예배로 모여서 많은 성도들과 말씀의 교제를 나누고 돌아왔습니다.

몽골은 가능성이 있는 선교지 였습니다. 아직도 글 없는 책이나 사영리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문이 활짝 열려있는 곳이었습니다. 동네에 나가서 사람들을 초청하면 반응을 보이고 사영리를 들려주는 사람만 아니라 지나가던 사람들도 기웃거리면서 함께 둘러서서 그 말씀을 다 듣고 약속된 장소에 나와서 하나님 말씀을 듣고 구원 초청을 하면 예수를 믿겠다고 자리에서 일어서는 모습들을 보면서 아주 감격했습니다.

우리의 관심과 기도가 더욱 필요한 나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최 장로님의 사역을 인계받아 사역하기 위해서 들어간 최성봉 목사님 역시 몽골 교회에 대한 남다른 사랑을 가지고 있는 분입니다. 앞으로 몽골 사역에 대해서 우리가 기대를 가져볼 만한 합니다. 여러분들의 기도에 이 분들의 이름이 꼭 기억되길 부탁합니다.

이제 오늘 본문으로 들어가겠습니다. 한 권의 책을 택해서 연속적으로 강해 설교를 하다보면 때로는 의아한 표정을 지을 수도 있습니다. 혹시 오늘 설교 제목을 보면서 “공동체를 깨뜨리는 것들”이런 제목이 뜨니까 혹시 교회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 아닌가 하고 지례 짐작을 하시는 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특별한 일이 일어난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일이 없을 때 미리 들어두면 문제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어서 좋고 아무도 오해할 사람이 없어서 설교하는 사람도 부담을 가질 필요도 없어서 좋습니다. 그러나 잘 들어보면 오늘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 틀림없이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연속 강해설교의 장점 가운데 하나입니다.

사랑하는 울산교회 성도 여러분, 본문에서 야고보 선생은 신앙 공동체의 미성숙한 모습으로 인해서 고민한 흔적이 있습니다.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 있는 자가 누구뇨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찌니라 그러나 너희 마음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스려 거짓하지 말라”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야고보가 편지를 써서 보내는 신앙 공동체는 그렇게 이상적인 모습은 아니었든가 봅니다. 어른이 없는 집안은 시끄럽습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을 의식하지 못하는 교회는 요란합니다. 거룩한 주님의 임재를 의식하면 시끄러운 분위기가 조용해집니다. 마치 아이들끼리 떠들고 싸우다가 부모가 오는 기척이 나면 조용해지는 것과 같습니다.

초대 교회라고 해서 문제가 없던 교회는 아니었습니다. 꼭 우리 같은 사람들이 모여서 교회를 구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거기도 잘못할 여지가 있었습니다. 그들 가운데도 잘난 척 하는 사람도 있었고 온유함 보다는 그 마음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을 가지고 있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 선생은 신앙 공동체의 시끄러운 모습을 보면서 지혜롭고 총명한 사람 없음을 안타까워하고 있습니다.

지혜롭고 총명한 사람, 그 삶에 온유함으로 특징 지워진 사람이 있다면 시끄러운 공동체를 면할 수 있을텐데 하고 아쉬워하는 것이 13절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14절에는 공동체를 깨뜨리는 것들이 무엇인지 지적해 줍니다.

그러면 1. 공동체를 깨뜨리는 것은 무엇입니까? 마음속의 독한 시기심과 다툼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의 신앙 공동체를 깨뜨리는 것임을 지적합니다. “그러나 너희 마음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슬려 거짓하지 말라.”

독한 시기심, 그것은 언제나 공동체를 깨뜨립니다. 독한 시기심이라는 것은 다른 사람의 의사를 꺾고 자기 의견을 내세우려는 강한 욕구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딴 사람의 의사를 한마디로 꺾고 자기 뜻대로 하려는 것입니다. 그것은 공동체에 금이 가게 만드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남의 의견을 꺾으니까 표면적으로는 조용해지는 것 같지만 그러나 자기 생각이 꺾인 사람은 마음에는 상처가 생기게 됩니다. 그래서 교회는 보이지 않게 금이 가게 됩니다.

다툼, 역시 공동체를 깨뜨리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다툼을 “이기적인 야심”이라고 다른 성경에는 번역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다툼이라는 것은 마치 정당에서 당권을 장악하기 위해서 다투는 그런 다툼을 말합니다.

편당을 짓는 마음이고 자기편을 만들려는 욕망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정당을 만들려면 자기 입장을 옹호해 주는 사람을 찾아서 자기 뜻을 따라줄 사람들을 모으는 일을 하게 되고 그것은 결국 공동체는 깨뜨리게 됩니다.

이런 수준의 사람들은 교회의 지도적인 위치에 서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사람은 진리에 귀를 기울이는 대신에 자기주장을 내세우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보다는 자기 뜻대로 공동체를 움직이려고 들기 때문입니다. 주어진 은사대로 공동체를 섬기는 대신에 자기 기분대로 되면 싱글벙글 하다가도 자기 기분대로 안 되면 뽀류퉁 해서 모든 사람을 피곤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함께 세워야 할 몸 된 교회를 무너뜨리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연말에 자치기관 총회를 하게 될 때에 이런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각급 주일학교 부장을 선출 할 때도 누가 온유한 사람인가 마음에 두어야 되겠습니다. 잘난 체 하는 사람이 아니라 온유한 사람을 일꾼으로 뽑아야 합니다. 온유하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 말씀을 들으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사모하는 사람들은 공동체의 다른 사람의 말에 대해서도 귀를 기울이는 사람입니다.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뭐든지 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 아니라 형제자매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노력하는 사람, 그가 신앙 공동체의 지도적인 위치에 설 수 있는 사람입니다. 

모든 교회 일을 할 때는 그냥 기분에 따라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하면서 결정해야 합니다. 독한 시기심과 이기적인 야심을 따라서 편당을 짓는 사람보다 하나님이 주신 지혜 때문에 온유한 사람, 겸손한 사람이 일을 하도록 하는 분위기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에는 두 가지 지혜가 있습니다. 하나는 위로부터 오는 것이고 하나는 밑에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세상적인 영리함이 있을 수 있고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움이 있습니다. 영리한 사람과 지혜로운 사람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2. 그러면 영리한 사람의 지혜는 어디서부터 나온다고 본문 15절이 말합니까?

첫째로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위로부터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하늘로부터, 빛들의 아버지로부터 나오는 지혜가 아닙니다.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지혜가 아닌데도 잔꾀를 내어서 처신할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독한 야심과 시기심은 하나님의 성품하고 어울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시기심을 가지고 있다는 말씀을 들어보셨습니까? 야심을 가지고 있다고?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그런 마음을 갖지 않았기 때문에 세상에 오셔서 우리의 구주가 되셨습니다. 당신 몫을 다 챙기려고 들었다면 예수님이 세상에 오실 이유가 없습니다. 모든 권능과 영광과 존귀에 있어서 아버지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시지만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서, 아버지의 뜻을 이 땅에 이루기 위해서 세상에 오신분입니다. 자기 의견, 자기주장, 자기 영광을 내세운다고 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교회를 세워 나가는데 걸림돌 역할을 하게 될 것입니다.

성탄은 자기를 낮추시고 섬기러 오신 왕을 맞이하는 절기입니다. 독한 시기와 다툼은 예수님의 마음이 아닙니다. 독한 시기와 다툼에도 지혜가 있어야 하지만 그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오는 지혜가 아니라고 성경이 말씀합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그것은 세상적이라고 말합니다. 세속적인 욕망이라고 규정짓고 있습니다. 그 시작부터 세상에 속한 동기에서 나옵니다.

비록 하늘의 것을 논할 수 있지만 그 동기가 세속적일 때는 잘못될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 일을 논해도 마음의 동기가 세속적일 수 있습니다. 질서를 내세울 수도 있고, 절차를 논할 수도 있지만 마음의 동기가 무엇인지를 잘 살펴야 되는 것입니다.

독한 시기와 야심을 가진 이들은 동기가 세속적인 동시에 그 관심의 범위도 세상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혼자서 생각하는 것이나 만나서 나누는 이야기를 들어봐도 알 수가 있습니다.

세상적인 것만 이야기하는 사람은 아직도 관심이 세상에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세상에 관한 일만 즐겨 이야기한다면 그런 사람은 신앙 공동체의 지도적 위치에 서기에 이른 사람입니다.

물론 처음부터 교회에 나오자마자 성숙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출생하는 것은 순간적이고 자라는 것은 계속적으로 시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영적인 세계도 마찬가지 입니다.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고 여러분이 그분을 여러분의 마음속에 영접하는 순간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신앙 안에서 자라가기 위해서는 봄, 여름, 가을, 겨울 시간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자라는 데는 시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은 교회 직분자로 세우지 말라고 성경이 말하고 있습니다. 왜? 성숙해 가는 데는 누구나 할 것 없이 세월을 필요로 합니다. 여러분 중에 태어나서 1년 만에 지금처럼 자란 사람은 아무도 없지요? 다 몇 십 년 세월이 흘러가야 자라게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성숙한 다음에 교회에 나오도록 할 수는 없습니다. 같이 예배를 드리고 있지만 영적인 성숙도는 천차만별일 수 있잖아요?

나온 지 얼마 안 되는 사람도 있고 햇수는 좀 되었는데 기껏 나온다는 게 주일날만 왔다 갔다 해서 신앙이 별로 자랄 기회가 없었습니다. 20년 교회 나왔는데 성경책도 한번 안 읽어본 사람이 신앙이 어떻게 자랄 수 있습니까? 그러니까 늘 신앙생활 하는 게 들쑥날쑥해서 이교회 나가다가 저 교회 나가다가, 어떤 때는 나가다가 어떤 때는 들어앉아 있고 언제 신앙생활 할 수 있습니까? 안됩니다. 아이 낳아 키워보면 어떤 놈이 잘 커요? 잘 먹는 놈이 잘 커요. 그렇죠? 열심히 젖이든 이유식이든 돌아서면 배고픈 것처럼 잘 먹는 아이가 잘 큽니다.

최성봉 목사님 큰아들 준혁이가 제일 자주 하는 말이 배고프다고 그러더라고요. 밥 먹고 나서 돌아서면 또 배고프데요. 음식점에 가서도 어른 1인분을 시켜야 됩니다. 초등학교 1학년입니다.

주일날 예배도 나오고 새벽기도도 나오고 성경도 읽고 QT도 하고 신앙에 관한 책도 읽고 이러면 신앙이 성장하게 되어있어요. ‘먹는 놈 한테는 못 당한다’그러잖아요? 그러나 교회 왔다 갔다 한지는 꽤 세월이 흘렀는데 그저 뭘 먹어도 입에 께작께작 하는 것처럼 말이죠 그렇죠? 맛있다 소리 별로 안하고 늘 까탈 부리는, 설교를 들어도 은혜만 받으면 될 건데 꼭 ‘오늘은 이래서 어쩌고 저래서 어쩌고’그러면 영적으로 자라지를 않습니다. 그래도 자라고 난 뒤에 교회오라는 소리는 못하지 않습니까? 와야지, 와서 들어야 되니까. 그렇지만 그런 사람들은 신앙공동체의 앞자리에 세워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입맛이 없어서 불평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뒤에 조용하게 있도록 해야 됩니다. 안 그러면 이 여름에 땀 흘려 밥 해 놓았는데 처음 시작하는 사람이 밥 맛 없다고 하면 뒤에 사람이 다 그렇게 생각한다니까요. 처음 먹는 사람이 맛있다고 먹으면 뒤에 사람도 맛있는가보다 하고 잘 먹는데 말이죠.

처음 나와서부터 성숙하지는 않지요. 그렇지만 성숙하지 못한 사람이 지도자 노릇을 하도록 해서는 안 됩니다. 일반 성도라고 해도 마찬가지 입니다. 신앙의 일에, 하늘의 일에 관심이 가져야 되는데 늘 생각하고 말하는 것이 온통 세속적인 것 밖에는 없어요. 그런 사람은 아직 신앙이 어린 사람이니까 배워야 되지 그런 사람들이 여기 와서도 좌지우지 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은 공동체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신앙인도 땅의 일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관점이 하늘의 관점에서 말해야 옳지를 않겠습니까?

위로부터 나지 않는 지혜는 세상적일 뿐 아니라 정욕적입니다. 정욕적이라는 말씀은 비영적이라는 말씀입니다. 자연적이요 육에 속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육에 속한 자연인의 관심은 항상 땅의 것에 있습니다.

하늘의 것을 볼 수 없기 때문에 하늘의 것을 말할 수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 성격상 영적인 통찰력이 결여되어 있고 영적인 포부와 영적인 열망이 부족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일수록 세상일 하는데 보면 열심이 특심합니다. 동창 모임에 갈 때는 열심히 갑니다. 친척들 결혼식이라면 한 달 전부터 달력에 표시해놓고 안 빠져야 될 것을 생각합니다. 주일날 겹치면 주일날 예배 가는 것을 제끼고 거기 가는 거예요. 그런 사람들은 교회 나와도 아직은 어리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나는 그런다고 교회 나오지 마라 그러지는 않아요. 그래도 와야 됩니다. 한달에 한번 빠져도 세 번은 나와야, 말씀을 들어야 자랄 것 아닙니까 그렇죠? 그러나 그런 사람은 자기가 아직 영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단계에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주일날 예배에 참석하는 일에는 그런 열심이 없습니다. 더우면 덥다고 불평하고 추우면 춥다고 이야기 하고 힘들어합니다. 교회 일은 그만큼 열심을 내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일에는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있습니다.

그런 수준의 사람들도 저는 환영합니다. 왜냐하면 오셔야 믿음 가운데 성숙하게 되지 그렇다고 안나오게 되면 정말로 문제가 커집니다. 그러나 그런 수준의 사람은 공동체에서 배워야 할 사람이지 이끌어야 할 사람은 아닙니다. 세상일에는 정열을 가지고 하면서 성도의 할 일에는 뒷전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아직까지 공동체에서 지도적인 위치에 이르기에는 이른 것입니다.

성령의 영향 아래 있지 않는 모든 사람들은 그 하는 일이 모두 정욕적이라고 성경은 표현하고 있습니다. 무슨 일이든지 자기 욕심에서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지시하심에 전혀 무감각한 사람일수록 자기 욕망 추구에는 열심입니다. 그러므로 열심을 어디에 두는지 살펴보면 한 사람의 영적 성숙도를 알 수가 있습니다.

저는 이번에 몽골에 가서 한 사람 만났는데 정말 최복만 장로님은 자나 깨나 전도하는 것 외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선교사로 가서 지내보면 외국이지 않습니까? 외국이면 자기 의식적으로는 생각을 못하는데 외롭다는 생각을 다 가지고 있어요. 그래서 어떤 사람 두 가정이 자주 만나면 그것 때문에 마음이 불편해집니다. 그러고 신경을 많이 쓰게 되고요. 무슨 말 하는지 굉장히 신경을 곤두세웁니다.

그런데 내가 가서 보니까 몽골에 있는 선교사 중에서 한사람 최복만 장로님은 전혀 그런 일에 신경을 안 쓰더라고요. 다른 사람이 자기를 어떻게 볼까도 전혀 신경을 안 써요. 오로지 전도하는 일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청년들 수고했다고 하루 같이 나가서 말을 탔는데 우리는 말에서 안 떨어지는 것만 신경 썼는데 당신은 말 타고 쫓아다니면서 옆에 있는 집들에게 전도한다고 갔다 와서 열 집 전도했다고 합니다. 세상에 그 연세에 말을 많이 타본 것도 아닌데 전도 하고 싶은 소원 때문에 말까지 타니까 진짜 빨리 전도하더라고요.

여러분들 적게 왔다고, 장로님들 권사님들 안 왔다고 상당히 섭섭하게 생각하는데 그러면서 나보고 부탁하기를 우리 장로님들 다 은퇴하기 전에 한 2년 동안에는 선교지로 보내달라고 그러셨습니다. 이름 딱 찍어가지고 권수현 장로님 빨리 보내주라고 그러더라고요. 여기 있어서 특별히 중요한 일들도 없는 사람은 빨리 보내라는 것입니다. 그쪽 가서 할 일이 많으니까.

밥 먹는 것도 신경을 안 쓰는 것 같아요. 밝은 미래학교 당신은 5월에 교장 그만뒀는데도 아직도 자기가 교장인 것처럼 그 학교 짓는 일을 위해서 혼자 금식하고 있더라고요. 점심때 마다. 그래서 김순예 권사님 말이 “저 양반 안 미우면 사람이 아니다"그러더라고요. 점심때 맛있는 것 사먹는데 남편이 안 먹으면 속상하잖아요. 그 학교에 속한 젊은 사람들은 금식하는 것을 다 끝냈는데 당신 혼자만 건물 지을 때 까지 금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밥시간 되어도 교회 가서 교장 그만둔 다음부터는 새벽기도 인도한다고 교회 가서 자는 것입니다. 이불도 가져가지 않고.

보다 못해서 슬리핑백 가져가라고 했더니 슬리핑백 안에 들어가서 따뜻하게 자다가 그날은 굴러 떨어졌다고 하더라고요. 이런 좁은 의자에서 자니까. 정말 밥먹는것, 잠자는 것은 누가 무슨 말을 하나 신경을 안써요. 오로지 전도하나만.

그래서 지난주일 오후에 보니까 한 300명 복음 받은 사람, 95명 그동안 세례주고 모아놓은 성도들 보니까 진짜 나 스스로 “나는 울산교회에서 9년 동안 무슨 일했나?”생각이 들더군요.

나는 혼자 일 한 것도 아니고 우린 여기 신학공부 다 끝마친 사람, 장로님은 신학공부도 안했잖아요? 준비된 사람들 18가정, 19가정가지고도 못 하는데 당신은 한 가정 가서 5년 만에 그렇게 사람들을 모아놓은 것을 보니까 정말 대단해 보이더라고요. 어디에 관심을 가지고 살고 있는지 그게 영적인 성숙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유다는 이런 경고를 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미리 한 말을 기억하라 그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마지막 때에 자기의 경건치 않는 정욕대로 행하며 비웃는 자들이 있으리라 하였나니 이 사람들은 육에 속한 자들이며 성령은 없는 자니라.”

유다는 신앙 공동체를 향해서 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말세가 되면 사도들이 미리 말했던 대로 자기의 욕망대로 따라 사는 사람들이 있으면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들을 비웃는 그런 일들이 나타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육에 속한 사람들이고 성령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신앙공동체 내에 그런 사람들이 들어 올 것에 대해 미리 말합니다. 그러면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하며 성령으로 기도하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키면서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

믿음, 사랑, 소망을 말하면서 “성령으로 기도하라”고 첨가하고 있습니다. 믿음, 사랑, 소망 그렇게 나가도 될 것인데 거기 또 성령으로 기도하라고 그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성령으로 기도하면서 자기를 지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독한 시기심과 다툼이 있는 배후에는 궁극적으로 말해서 마귀적인 지혜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세상적이요 정욕적인데 궁극적으로 말하면 마귀적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마귀가 좋아하는 일들만 하기 때문입니다.

시기와 다툼에 있어서 분쟁이 일어나면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습니다. 그런 가정에 그런 구역에, 그런 교회는 누가 기뻐합니까? 마귀가 박수를 치고 있습니다. “잘 놀구나. 그래그래”이러잖아요. 안 믿는, 중생하지 못한 사람, 하나님의 성령이 그 안에 없는 사람들은 물론 마귀의 정예부대들이죠. 졸개들이죠. 그러나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도 깨어있지 않으면 마귀에게 놀아날 수 있어요.

베드로 보십시오. 금새 고백했지 않습니까? “당신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해놓고 나서 예수님이 “내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할 거다”하니까 그건 자기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이 아니거든요? 듣고 싶은 말이 아니니까 “아이고 주님 그럴 수가 없습니다.”그러니까 주님이 뭐라고 그랬어요?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멋진 신앙고백을 하는 베드로도 다음 순간에도 보니까 사단의 앞잡이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교회 오래 나갔다는 것이, 집사, 장로, 목사가 되었다는 타이틀이 여러분을 지켜주지 못합니다. 영적으로 깨어있지 않으면 우리는 누구든지 다 하나님의 일을 하기 보다는 마귀의 하수인 노릇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집에 가서도 마찬가지지요. 남편을 세워주고 아내를 사랑하고 하는 일을 하도록 한 가정을 이루도록 했는데도 꼭 한마디로 상대방을 긁어버리는, 그래서 화를 나게 만드는 그런 순간에는 우리가 집사 맞지만 집사노릇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일은 “잡사”입니다. 그렇죠? 세상에 집사가 어떻게 배우자의 마음을 그렇게 상하게 할 수 있습니까? 상한 사람을 치유하는 일을 하기 위해서 여러분에게 직분 주셨지 여러분이 받은 직분가지고 그런 일을 하면 안 됩니다.


3. 마지막으로 시기와 다툼 낳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을 16절은 말합니다.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시기심과 야심이 있는 곳에는 -요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니라.”

시기와 다툼의 필연적인 결과는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일들이 속출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들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들이 아니라 하나님이 섭섭하게 생각하는 일들을 하게 되어요. 시기심과 다툼이 있는 곳에는.

독한 시기심과 이기적인 야심이 있는 곳에는 요란함이 있습니다. 혼란이 오고 질서가 파괴되며 불협화음이 생겨납니다. 거기는 문제꺼리가 생겨나며 불안정하게 되고 궁극적으로 공동체의 평화가 붕괴되는 것이 이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말씀에 비추어서 가정을 한번 살펴보십시오. 우리 가정은 이 여름에 어떤 분위기를 가지고 있는지. 날씨 덥다고 덩달아 짜증내는 가정입니까? 그러면 여러분은 아직도 영적으로 성숙하지 못합니다. 날씨가 더워도 시원한 한마디 말로서 상대방에게 힘을 주고 격려를 하고 용기를 줄 수 있습니다. 구역은 어떻습니까? 덥다고 방학으로 쉬기는 했지만 여러분의 구역은 여러분 때문에 분위기가 살아나고 있습니까? 아니면 여러분만 갔다면 사람들이 모두 눈을 내리뜨고 여러분만 한마디 했다면 사람들이 입을 다물고 앉아있고, 여러분이 소속된 전도회, 선교회를 한번 살펴보십시오.

여러분 한사람이 그 모임에 가입하므로 불화대신에 평화가 와야 됩니다. 여러분이 함께함으로서 거기에 섬김의 기쁨이 나타나야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예배하는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고 평화의 하나님이십니다.

독한 시기심과 이기심이 지배하는 곳에는 모든 악한 일이 뒤따른다고 지적합니다.  모든 악한 일은 서로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일들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일들이고 사람들이 볼 때 눈살을 찌뿌리는 일들입니다.

공동체를 통해서 영광 받으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일들 그것이 모든 악한 일들입니다. 일일이 다 거론하기에 힘드니까 뭉뚱거려서 모든 악한 일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볼 때에 여러분의 마음에 평화가 사라지고 여러분의 마음에 기쁨이 없어지면 모든 악한 일들 가운데 그것들을 포함시켜도 됩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주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부디 하나님을 아는 지혜의 온유함으로 처신하십시오.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겸손한 사람, 온유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모인 곳에는 자기 이익과 자기 유익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주신 지혜의 온유함으로 처신하지 못하게 되면 시기와 다툼은 필연적입니다. 자기주장을 내세우는 곳에는 분란이 있게 마련입니다. 악한 경쟁심이 설치는 곳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행위가 연출되는 것은 당연지사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악한 데는 어린아이가 되십시오. 자기주장을 내세우지 마십시오. 파당을 만들지 마십시오. 교회를 어지럽히지 마십시오. 지혜에 있어서 성숙한 어른이 되십시오.

우리 가운데 있는 하나님이 평화의 하나님이십니다. 서로 화목하십시오. 공연히 잘난 체 하므로 공동체를 깨뜨리고 자신을 파멸로 몰아넣고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히는 그런 일들을 멀리 하십시오. 겸손히 온유한 삶을 살아가십시오.

또 온유한 사람들을 존귀하게 여기는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위로부터 난 지혜를 사모하십시오. 그래서 공동체를 깨뜨리는 독한 시기와 다툼으로부터 벗어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믿고 지금 예배하는 하나님은 평화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마음에 시원함을 주시고 우리의 마음에 평강을 주시고 기쁨을 주시는 하나님이 우리가 예배하는 하나님입니다. 이 평화의 왕을 예배한 사람답게 세상을 살아가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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