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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복음을 전파하라 (막 16: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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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영기 목사 (진주제일교회)

강단에서 아무리 강조해도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곧 복음을 전파하라는 것입니다.
창세기 1.2장에서 하나님과의 백성의 관계는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세상이었습니다. 주 하나님께서 동쪽에 있는 에덴에 동산을 일구시고 당신께서 지으신 사람들을 거기에 두셨습니다. 그리고는 말씀하셨습니다.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는 네가 먹고 싶은 대로 먹어라.”

그러시면서 남자에게 여자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성경은 이 남자와 여자의 관계를 아름답게 표현합니다. “주 하나님이 남자에게서 뽑아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여자를 남자에게 데리고 오셨다. 그 때에 그 남자가 말하였다. ‘이제야 나타났구나! 이 사람’ 뼈도 나의 뼈 살도 나의 살 남자에게 나왔으니 여자라고 부를 것이다.”
“남자와 그 아내가 둘 다 벌거벗고 있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런데 창세기 3장. 주 하나님께서 만드신 모든 들짐승 가운데 가장 간교한 뱀이 사람을 꼬드겼고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명령이 불순종하는 죄를 지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을 피해 숨었습니다. 하나님의 저주가 사람들과 땅에 떨어졌고, 사람들은 에덴동산에서 추방 되었습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은 먹어서는 안 된다.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는 그 말씀처럼 사람에게는 죽음이 찾아왔습니다.
죽음, 그것은 곧 하나님으로부터 떠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더 이상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돌보지 아니하시고 내버려두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1장 24절,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마음의 욕정대로 하도록 그대로 내버려 두시니 서로의 몸을 욕되게 하였습니다.”
26절, “이런 까닭에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부끄러운 정욕 속에 내버려 두셨습니다.” 그래서 성적인 문란이 생겼는데 성경은 그것이 그들의 잘못에 대한 대가를 스스로 받은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28절, “사람들이 하나님을 인정하기를 싫어하므로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해서는 안 될 일들을 하게 타락한 마음자리에 내버려 두셨습니다.” 그래서 생긴 것들이 있는데, 온갖 불의, 악행, 탐욕, 악의,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적의, 수군거리는 것, 중상하는 것, 하나님을 미워하는 것. 불순한 것, 오만한 것, 부모를 거역하는 것 등등, 사람들이 그 같은 일을 하는 자들은 죽어야 마땅하다고 하는 그런 일들이 생겨났습니다.

여기 24, 26, 28절에 공통적으로 들어가는 말씀은 “내버려 두시니”입니다. “더 이상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돌보지 않으시어”, 하나님께서 돌보시지 아니하시면 사람의 삶은 고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 그 백성을 돌보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 돌봄에서 벗어나 자기 마음대로 했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1장 2-3절에, “내가 내 자식이라고 키웠는데,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다. 소도 제 임자를 알고, 나귀도 주인이 저를 어떻게 먹여 키우는지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구나.”
그래서 그들은 수많은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들이 고통당하는 것은 그들이 지은 죄의 결과입니다.
그들이 지은 가장 큰 죄는, 하나님의 손길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호하심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한 걸음 나아가시면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몇 발자국 뒤로 물러섰던 것입니다. 그들의 고통은 하나님 없이 살 수 있다고 생각하며 살았던 삶의 결과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오너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빛과 같다 하여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며, 진홍빛과 같이 붉어도 양털과 같이 희어질 것이다.”
사랑의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오너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죄로 인해 고통당하는 우리를 향해 “오너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오너라! 내가 너를…….”
“오너라! 오기만 하면 내가 너를…….”
그런데 어디로 어떻게 가야합니까?
“oo로 모여라” 그러면 그리로 가면 됩니다. “부산으로 오라” 그러면 부산 가는 길로 들어서면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오너라” 하셨을 때는 어디로 오라는 겁니까? 어떻게 그곳으로 갈 수 있습니까? 그래서 사람들의 우왕좌왕합니다. “여기다. 저기다” 그리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그분의 외치심은 이렇습니다.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하나님께서 “오너라!” 하셨고, 사람들은 “어떻게 가야 하나요? 가는 길이 어딘데요?” 하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예수그리스도, 그분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인 것입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의 죄가 주홍빛 같다 하여도 눈과 같이 희게 진홍빛 같이 붉어도 양털같이 희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믿었기 때문에 예수 믿으셨습니다. 맞지요?

이 구원의 길은 온 인류에게 열려 있는 길입니다. 누구나 갈 수 있는 길입니다. 배움에 관계없이, 가난하든 부자든, 대통령이든 거지든, 병들었든 건강하든, 어른이든 아이든, 누구나 갈 수 있는 길이고, 누구나 그 길로 나아가면 죄 용서와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것을 알지 못합니다. 세상 사람들, 그들도 그 길을 찾고 있습니다. 진정한 평안함과 행복과 기쁨을 찾고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 구원을 찾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 길을 알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 그 길을 알아요?
그래요. 바로 여러분과 저는 그 길을 알고 있어요. 그렇다면 그 길을 저들에게 가르쳐 주어야 해요. 복잡할 것 없습니다. 어려울 것 없습니다. 음식점, 혹시 여러분이 가서 먹고 보고 맛있다고 경험 했다면, 혹 누가 무엇을 먹고자 할 때 그 집을 소개합니다. 바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전도 못하는가?
우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구원의 확신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가는 이 길이 분명하지가 않다는 겁니다.
“신앙생활 해도 그게 그거더라”고 말하는 사람 그 속에 예수그리스도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없다”는 말은 생명이 없다는 말입니다. 구원이 없다는 말입니다. 평안과 기쁨도 없다는 말입니다. 말하자면 음식점에서 음식을 먹었는데 영 맛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이 그 음식점을 다른 이에게 소개할 수 있을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주어지는 은혜가 없는데 어떻게 남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할 수 있을까?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수님은 제자들과 3년 동안 함께 계셨습니다. 가르치고, 보여주고, 실제로 해 보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 가르치심을 배우고, 보고, 듣고, 실제로 해 봐야 합니다.
도움 받는 사람은 도울 줄 알아야 합니다.
놀랍게도, 받는데서 기쁨을 얻는 것이 아니라 주는데서 기쁨을 얻습니다. 누군가 내게 1만원 줄 때 그것이 기쁜 것 같아도, 내가 누군가에게 1만원 줄 때 더 큰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도움 받기만 하는 사람 기쁨이 없습니다. 감격도 없습니다. 오히려 불평과 원망만 있습니다. 도와주면 “치사하다” 하여 자신의 신세를 한탄합니다. 안 도와주면 “왜 안 도와 주느냐?”고 불평하고 원망합니다.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기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함으로 다른 사람에게는 구원의 길은 제시할 때 그것은 더 큰 기쁨입니다.
하나님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은 “내가 너로 복의 근원이 되게 하겠다. 그래서 너로 하여금 온 민족이 복을 받게 하겠다.”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복이 이웃과 온 민족에 전해지는 그 시작이 되었습니다. 마치 샘이 되듯이…….
강원도 태백시, 그 곳 이름이 “황지”입니다. 그곳에 가면 황지라는 못이 시내에 있습니다. 그 못이 낙동강의 근원입니다. 그곳의 물이 흘러서 낙동강이 되는 것입니다. 그 못 깊이는 알 수 없습니다. 땅 속에서 물이 솟아오릅니다. 조그마한 옹달샘이 아니라 아주 큰 샘입니다. 그 솟아오른 물은 못을 가득 채우고, 그리고 흘러서 낙동강을 이루게 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황지 못과 같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복이 솟아올라서 그의 삶을 가득 채우고, 그리고 흘러 넘쳐 온 땅에 나누어지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흘러넘치지 않게 되었습니다. 어떤 때?
더 이상 물이 솟아나지 않을 때와 주변의 둑을 자꾸 쌓아 올려서 넘치지 못하게 했을 때입니다. 어떤 이유든 그것을 곧 그 의미와 가치를 상실한 것입니다. 못은 있지만, 샘은 있지만 이미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 그 속에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이 더 이상 넘쳐나지 않는다면 그 신앙은 죽은 것입니다. 또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은 계속 솟아나는데 자기 욕심의 둑을 자꾸만 높이 쌓아 흘러넘치지 못하고 고이게만 한다면 그것 역시 그 신앙은 죽은 것입니다. 흘러넘치면 손해 보는 것 같아도 흘러 넘쳐야 날마다 순간마다 새롭게 솟아오르는 은혜를 체험하게 됩니다.
따라서 전도 못하는 이유는, 자신이 은혜를 체험하지 못하니까 구원의 확신이 없기에 그렇고, 자신의 욕심이 전도하는 것을 방해하니까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말씀을 가까이 하자 주님의 말씀 귀 기울이고 그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반드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전도하지 못하는 이유 중 또 하나는, 스스로 결정하는 겁니다. “나는 못해” “저 사람은 전도해도 안돼”
포도밭을 지나던 여우가 먹음직스러운 포도송이를 보고 침을 흘렸습니다. 포도나무 밑에 갔지만 키가 닫지 않아, 여우는 높이 뛰어 보았습니다. 그러나 역시 포도송이를 딸 수 없었습니다. 몇 번 시도해 보았지만 실패한 여우가 말합니다. “저 포도는 굉장히 실 거야.” “설사 내가 딴다 하더라도 굉장히 시어서 못 먹을 거야. 그러니 안 따기 잘했지.”
어쩌면 우리는 이 여우만도 못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여우는 시도라도 했습니다. 몇 번 뛰기라도 했습니다. 그런데 우린 시도도 안 해 보았습니다. 만나는 사람 붙들고, “예수 믿으세요.” “교회 나갑시다.”라고 몇 번이나 말해 보았던가?
전하는 것은 우리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성령의 역사입니다.
요나서를 봅니다.
“니느웨로 가서 내 말을 전해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요나는 도망갔습니다. 그것은 무서워서가 아닙니다. 그의 생각에 갈등이 생겨났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인 요나의 입장에서 보면 니느웨는 철천지원수인 겁니다. 요나는 니느웨 성과 그 안에 있는 자기 백성의 원수들이 다 망하는 것을 보기 원하였던 겁니다. 니느웨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자격조차 없는 사람들인 겁니다. “그런 니느웨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니, 죽으면 주었지 난 못한다.” 그리고 요나는 하나님의 낯을 피해 도망한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요나를 붙드셨고 니느웨로 보내셨습니다. 요나는 니느웨에 도착하자마자 외쳤습니다. “40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요나가 외친 그 말에는 희망이 없습니다. 오직 심판 오직 멸망만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 요나의 외침은 니느웨 백성들에게 사랑으로 전달되었습니다. 마치 호랑이를 피해 나무 위에 올라가 있는 남매에게 내려온 생명의 동아줄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니느웨 백성들은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무론 대소하고 굵은 베옷을 입고 회개하였습니다. 이 소문이 왕에게 전달되자 왕도 굵은 베옷을 입고 제에 앉아 회개하였습니다. 그리고 온 백성의 금식을 선포하고 악한 길에서 떠날 것을 명령했습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 니느웨를 살려 주신 것입니다.
요나의 생각은, “니느웨는 망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니느웨도 살아야 한다.”는 겁니다. 생명을 주시는 말씀,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의도는 멸망이 아니라 생명이다 그것의 살리는 일인 겁니다.
어떻든, 복음을 전하는 자 스스로 결정해서는 안 됩니다. “이 사람은 예수 믿을 사람 같으다.” 그래서 전도하고, “이 사람은 예수 믿을 사람이 아니다.” 그래서 안 한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뜻, 성령의 역사를 무시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겁니다. 결과는 성령께 맡기고 우리는 전하기만 하면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에 좋은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가난한 사람에게 먹을거리를 주는 것도 좋은 일이고, 직장 없는 이에게 직장을 마련해 주는 것도 좋은 일입니다.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을 석방해 주는 것도 좋은 일입니다. 좋은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무엇보다 좋은 것은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는 것입니다. 그 보다 좋은 일이 어디 있습니까?
복음증거는 죽은 자를 살리는 운동입니다. 교회는 바로 그 일을 위해 여기 있는 겁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가 도울 줄 모른다.”고 불평합니다. 그런데 사실 “돕지 않는다.” 불평하는 사람 대부분은 자기가 도움 받으려는 사람들입니다.
분명한 것은 교회는 구제기관이 아닙니다. 구령기관입니다. 요한 웨슬리 목사님의 말씀처럼 “영혼을 구원하고 삶을 변화 시키는” 목적으로 서 있는 곳이 교회입니다.
좀 심하게 비유하면, 때로 구제하는 일에는 만원을 쓰지 못해도, 한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는 몇 십 만원이라도 써야 하는 곳이 교회인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에서 도움 받으려 하지 마십시오. 도움 받으려고 하면 기분 나빠집니다. 자존심 상합니다.
예배 후 식사합니다. 줄을 섭니다. 그 때 “그것 한 끼 얻어먹자고.” 그러면 기분이 상합니다. 교회는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 후 식사 역시 시간을 나누고, 노력을 나누고, 사랑을 나누고, 그래서 만들어 놓은 것을, 그것을 함께 먹으면서 또 사랑을 나누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한 끼 얻어먹는다는 치사한 생각도 자존심 상하는 것도 없습니다. 사랑만 있는 겁니다.
그런 사랑을 나누기 위함이기에 희생하고, 헌신하고, 봉사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 하는 일이 기쁘고, 자랑스럽고, 보람되는 겁니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도 도와주었다 생각지 마십시오. 함께 나누어 쓰는 거라 생각하십시오.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었노라 생각하십시오. “내가 도와주었다.”는 생각을 가지면 결국 대가를 요구합니다. “내가 저를 위해 얼마나 애썼는데”, “내가 교회를 위해 얼마나 헌신 했는데” 그런 마음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것은 곧 자기 욕심을 쌓아올리는 겁니다.
전도 역시 그냥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는 것입니다.
도와주면 도와주는 사람도 힘들고, 도움 받는 사람은 자존심 상합니다. 가난 한 사람에게 뭔가 주는 것은 “도와주었다” 보다는 “함께 나누어 쓴다.”고 생각하십시오. 바쁜 사람의 일을 거들어 주는 것 역시 “도와주었다” 보다는 “함께 나눈다.”고 생각하십시오. 복음 증거도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풍성해서 그래서 좀 남으니까 없는 사람에게 주는 그런 차원이 아닙니다. 내 믿음이 크든 작든, 내 은혜가 크든 작든, 그것을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나도 제대로 못하는데.” “나도 교회생활 제대로 못하는데” “그런데 내가 누구 보고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있나?” 그런 마음이라면 전도 못합니다.
미국에서 한국에 선교사 파송할 때가 1800년대입니다. 그 때 만약 “미국에서도 복음이 안 들어 간곳 있는데 무슨 외국 선교냐?”라고 생각하고 “미국 전체 복음화하고 그 다음에 해서 선교하자”라고 했다면 아직 한국에는 복음이 들어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물질도, 시간도... 무엇보다도 생명을 나눕시다.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여 그 복음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나눕시다. 경제 살리기 등 이런 저런 운동들이 있지만, 교회는 우선적으로 생명 살리기 운동을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해지기 때문입니다. 죽어가는 사람 금덩어리 준다고 살아납니까? 또 암 환자에게 약을 주고 치료해서 살아났다 합시다. 그렇다고 그가 영원히 삽니까?
그의 영혼이 살아야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온 세상에 나가서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하셨습니다. 그것이 영혼을 살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배운 것 관계없이, 그들의 재산 소유가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복음을 전파하였습니다. 예수 믿어야 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금 내 놓은 것도 아니고, 은 내 놓은 것 아닙니다. “은과 금은 나 없어도 내게 있는 것 내게 주니 곧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교회는 생명 살리기 운동을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 하여 생명들을 살립시다. 이일에 충성하는 여러분이 되셔서,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충만하게 체험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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