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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복 있는 사람(시 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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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영기 목사 (진주제일교회)

저의 기도 중 하나는 “복 있는 목회가 되게 해 주십시오.” 라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복 있는 사람을 만나게 해 주십시오” 그래서 늘 “우리 교인 모두 복 있는 사람 되게 해 주십시오” 기도합니다.
시편은 모두 150편입니다. 150편의 시편을 시작하면서 제일 처음 “복 있는 사람은” 하고 시작합니다.
시편은 그야말로 시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경험한 하나님에 대한 시와 찬양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다 없어져도 시편만 있으면 구약과 신약을 다시 쓸 수 있다고 까지 합니다.
시편은 주석가 칼빈이 표현한 대로, 영혼의 모든 부분에 대한 해부로서 슬픔과 번민, 고통과 죽음을 맛보는 인생에게는 깊은 위로와 절대적 신뢰를 가르쳐 주며, 성공과 승리를 맛보는 인생들에게는 겸손과 자기 절제 그리고 감사를 가르쳐 줍니다.

시편은 한 사람이 쓴 것도 아닙니다. 한 권도 아니고, 한 가지 주제도 아닙니다. 여러 가지 주제와 목적을 지니고 있습니다. 시대에 따라 순서대로 된 것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제일 첫마디 시작이 “복 있는 사람은”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피조물 관계에 가장 우선하는 것이 복이라는 겁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 그리고 그 창조물을 보실 때마다 “보기 좋구나.”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복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바로 그것이 복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세상을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복 있는 세상, 복 있는 사람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당신이 만드신 세상에게, 당신이 만드신 사람들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복이란 생각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기쁨을 기쁨이라 생각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평화를 평화라고 생각지 않았습니다. 많이 가졌다는 데서 평화를 얻으려 했습니다.
어리석은 부자에 대한 비유가 있습니다. 그는 많은 수확하였습니다. 곳간에 가득 채우고 그래도 남아서 곳간을 더 지어 가득 채웠습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내 영혼아 이제부터 먹고 즐기자.”는 것입니다. 곳간에 가득한 것들이 자기의 삶에 기쁨이 되리라 생각했습니다. 곳간에 가득한 것들이 자기의 삶에 평화가 되리라 생각했습니다. 곳간에 가득한 것들이 자기의 삶에 복이 되리라 생각했습니다.

그 사람을 향해 하나님께서는 “이 어리석은 사람아!” 하고 말씀하십니다.
왜 어리석어요? 그날 밤에 죽어서? 그래서 땀 흘려 벌이 놓은 거 다 쓰지 못하고 죽었으니 어리석은 사람인가요?
왜 어리석은 사람인가요? 하나님께서 주신 복이 진짜 복 인줄 몰랐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기쁨이 진짜 기쁨인줄 몰랐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평화가 진짜 평화인줄 몰랐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장해 주셔야 그 생명조차도 붙어 있게 된다는 것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말이 무슨 말입니까? 그래요. 하나님과 나의 관계에서 생겨나고 이루어지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제쳐 두고는 결코 복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보세요.

요한복음 3장 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을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아니하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셨습니다. 여기에 영생을 얻는 비결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됩니까? 하나님의 독생자 곧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 됩니까? 창세기1장 1절에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만드셨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떠나서 됩니까?
출애굽기 3장 14절에 하나님의 이름을 “여호와” 곧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모든 있는 것들을 있게 하신 있음”, “모든 존재를 존재하게 하신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모든 있는 것들은 하나님 밖에서는 있을 수 없습니다.

시편 23편의 잔잔한 물가, 푸른 초장도 하나님께서 나의 목자가 되실 때 가능합니다.
모든 것이 그래요. 구약은, “내 말에 순종하면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된다.”고 하셨고, 신약은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십니까? 그러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 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복 있는 사람들입니다.
시편 1편의 “복 있는 사람은.” 물론 이 사람은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밖에 있는 사람은 “복 있다”고 아예 말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시편 1편 1절이 “복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다.”그리고 끝난 것 아닙니다.

시편 1편은 복 있는 자가 추구할 삶의 방석과 그에 따른 복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삶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심고 거두느냐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네가 하나님을 믿느냐?”가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너는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칙을 심는 대로 거둔다는 겁니다.
고린도후서 9장 6절의 요점은 이러합니다. 적게 심는 사람은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사람은 많이 거둔다는 것입니다. 땀 흘려 일한 사람이 거두기 마련입니다. 공부도 애쓰고 수고하는 사람이 그래도 성적이 좋습니다. 신앙도 그래요. 그래도 하나님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 사람은 끝내 복을 받습니다.

시편 1편은, 하나님께서 악인에게는 멸망을, 의인에게는 구원과 흥함을 허락 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아무렇게나 몰아서 멸망과 구원의 울타리로 넣는 것 아닙니다.
마태복음 25장에, 오른 편에는 양떼, 왼쪽에는 염소 떼가 있습니다. 양떼는 구원받는 사람들이고, 염소 떼는 멸망 받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아무렇게나 오른 쪽에 세운 것 아닙니다. 아무렇게나 왼쪽에 세운 것 아닙니다. 그야말로 재수 없어 왼쪽 멸망의 자리에 서거나, 재수 좋아서 오른쪽 구원의 자리에 선 것 아닙니다.

오른쪽 구원 받을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사람들아, 와서 창세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한 이 나라를 차지하여라. 너희는 내가 주렸을 때 내게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말랐을 때 마실 것을 주었고,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 입을 것을 주었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고, 감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아 주었다.”
그들은 주님 위해 분명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 열매를 하나님께서 맺혀 주셨습니다.
반면에, 왼쪽에 서 있는 사람들. 그들은 주님을 위해 아무것도 심지 않았습니다.
마태복음 25장 42절, 43절에 보면, 그들이 악한 일을 했다고 책망하지 않으셨습니다. 가난한 자의 것을 빼앗았기 때문도 아닙니다. 도적질 하고 살인했기 때문도 아닙니다. 그들은 하지 않았기 때문에, 심은 것이 없기에 멸망의 자리에 선 것입니다.
“저주 받은 자들아, 내게서 떠나서 악마와 그 부하들을 가두라고 준비한 영원한 불속으로 들어가거라. 너희는 내가 주렸을 때에 내게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지 않았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않았고,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지 않았고, 병들었을 때에 감옥에 갇혔을 때에 찾아 주지 않았다.”
주님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심은 것이 없으니 거둘 열매도 없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5장 24절의 책망 받은 한 달란트 받은 자의 이야기를 들어 보십시오.
“주인님, 나는 주인이 굳은 분이시라, 심지 않은데서 거두시고, 뿌리지 않은데서 모으시는 줄로 알고, 무서워하여 물러가서 그 달란트를 땅에 숨겨 두었습니다. 보십시오. 여기에 그 돈이 있으니 받으십시오.”
왜 그가 책망 받은 지 아시겠습니까?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니 심은 것 없으니 거둘 것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복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1)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아니합니다.

‘악인’이라는 히브리말은 ‘레솨임’입니다. 이 어휘에 대해 킬크패프릭은 “악의 본래 개념이 불안임을 생각해 볼 때 그 용어는 인간 본성에 초래 되었던 본질적 부조화를 말하는데, 이것은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므로 “악인”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 된 자“를 뜻합니다.
‘꾀’는 ‘계획’, “무엇을 하려고 하는 것”, “경영” 등을 뜻 하는 것으로 악인의 인격에서 나오는 생각 전반을 가리킵니다. 생각하는 것, 그 전체가 하나님을 떠나 자기 욕심대로인 사람, 그 사람이 악인 이라는 것입니다.
만약 누군가 여러분을 찾아와서 ‘이런 일 한번 해보자’고 제의 했는데, 그것이 남의 집 몰래 훔쳐내는 거라면 따르겠어요? 절대로 안 따른다고요? 그런데 왜 본문은 따르지 말라고 하셨어요? 따르는 사람이 있다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을 믿는 우리도 따를 수 있다는 것 아닙니까?
아직도 확고부동한 신앙적 기준으로 살지 못하는 사람은 이러한 악인들과 교제를 가지고 그들의 일에 도참하고 있습니다.
악인에게 있어 문제는,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정당한 가치 기준을 가지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돈이 없어 하나님께 헌금 못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사업을 위해 관계되는 사람에게 돈 봉투 집어 주었다든지, 술좌석을 마련해 주었다면, 이 사람은 본문의 경고를 들어야 할 사람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자기의 죄를 모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언제나 자기중심의 가치관을 가지고 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함께 예배드리는 여러분 주위를 보십시오. 그런 사람 많지요? 교회 잘 다니고 신앙생활 잘 하는 것 같은데 여전히 하나님 보다는 자기중심의 가치관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 있지요? 때로 말로 할 때는 뭐 혼자 다 할 것이 하다가 막상 일 벌어지면 슬그머니 나타나지 않거나, 주변을 빙빙 도는 사람 있어요. 그래서 마음이 별로 좋지 않을 때가 있어요.
그런데 그게 어찌 그 사람뿐인가요? 남 볼 거 없어요. 내 자신 보면 보이잖아요.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자기중심으로 살면 쉽게 죄의 유혹에 넘어 갑니다.
하와를 보십시오.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게다가 그것 먹으면 지혜로워져서 하나님 같이 된다는 자기중심의 생각이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게 된 것입니다.

반면에 보디발 아내의 유혹이 있을 때,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지만, 자기가 먼저 유혹한 것도 아니고, 게다가 당시 종은 그 집 물건과 같아서 주인이 죽으라고 하면 죽는 시늉까지 해야 할 처지라 얼마든지 응할 수 있었지만, 요셉은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창 39:9) 하고 말합니다.
자기중심, 자기 욕심으로 사는 사람이 쉽게 악인의 꾀에 넘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인 여러분 결코 악인의 꾀를 따르지 마십시오.

2) 복 있는 사람은 죄인의 길에 서지 않습니다.

“죄인”은 의도적이고, 행동적으로 야비하고 분명한 죄를 공공연히 짓는 자들입니다. “길”은 방향을 뜻합니다. 따라서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한다.”는 말은 삶의 방향이 죄인과 같지 않다는 뜻입니다.
인간은 언제나 두 길의 분기점에 서 있습니다.
신명기 32장 15절에 “보라 내가 오늘날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내 앞에 두었다.”고 하셨고, 19절에 “나는 오늘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세우고, 생명과 사망 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내 놓았다. 너희와 너희 자손이 살려거든 생명을 택하여라.” 20절에 “주 너희의 하나님은 사랑하라. 그의 말씀을 들으며 그들 따라라 그러면 너희가 살 것이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듣고, 그를 따르는 자들이 생명과 복의 길을 간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21장은,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밤새도록 그물을 던져도 한 마리도 못 잡았지만,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졌더니 엄청 많은 고기 잡았습니다.
또 주님을 사랑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신 뒤 내 양을 먹이라고 일감을 주신 것 기억하시지요?
또 주님은 따라야 된다고 했습니다. 오직 주님을 바라보고 죽기까지 따라야 한다고 한 것 기억나시지요?
왜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왜 주님은 사랑하고 왜 주님만 따라야 합니까? 바로 거기에 생명과 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믿으십니까?

어느 길을 선택하든 그 선택의 결과에 따른 책임은 매우 엄중하고도 필연적임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아침 차에다 이것저것 싣고 상주로 가신 분은 지금쯤 바닷물에 몸 담그고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모두 교회로 향하셨으니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어느 길, 어떤 방향, 그것을 인생관이라고 합니다.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인생관이 복 될 것이고, 그 결과 역시 복 될 것입니다.

3) 복 있는 사람은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 합니다.

여기 ‘오만 한 자’란, 종교를 비방하고, 거룩하고 진실한 것에 대하여 조소하여 멸시하는 태도를 가진 자를 말합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비방하고,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다고 말합니다.
왜 그런 사람 있잖아요. “하나님을 믿으려면 내 주먹을 믿겠다.” “아이고, 집사님, 사는 것도 어려운데 일요일에도 벌어야지 가게 문 닫고 교회가면 어떻게 해? 교회가 밥 먹여 준답디까?” 이렇게 말하는 사람입니다.
이들은 철저하게 자기 또는 인간의 능력에 최대의 경의를 표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바벨탑을 쌓고,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빛내자”(창 11:4)고 외치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올라가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하실 때 “주여 그리 마옵소서.” 라고 말합니다.

인본주의, 인간 만능주의가 그들의 신앙인 것입니다. 하나님 보다 사람이 먼저라는 것입니다. 종교는 사람이 잘 살기 위해 사람들의 지식으로 만들어 낸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사람의 일로 하나님의 일을 대신하려 하며, 사람의 일을 성취하기 위해 하나님의 일을 무시합니다.
성도 여러분!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마십시오.
인간은 누구든 하나님 대신 한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존재입니다. 하나님 앞에선 존재, 그가 곧 인간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 앞에서 사는 자들이 복 있는 사람들입니다.

4) 복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고 늘 그 말씀을 묵상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여기 오해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고 그 말씀을 묵상한다고 하니까 성경 읽기 정도요 생각합니다. 그래서 성경 많이 읽으면 되는 줄 압니다. 또 묵상이라 하여 그냥 명상 정도로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고 그 말씀을 묵상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삶을 말합니다.
말씀대로 사니까 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악인의 꾀를 좇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사니까 바른 인생관을 가지고 죄인이 길이 아니라 생명과 복의 길에 서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사니까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성취하기 위해 사는 것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마름에 순종함으로 그 말씀에서 기쁨을 찾고 그래서 다시 그 말씀을 되새기며 삽니다. 이들은 성경에서 가르치는 진리대로 살아갑니다.
보세요.
“그 물을 배 오른편에 던져라” 예수께서 말씀하셨고, 그래서 그 말씀에 순종하여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졌더니 엄청 많은 고기를 잡았습니다. 이 때 이들의 기쁨이 어떠했겠어요? 이 때 이들은 자기들에 말씀하신 그분이 누구신줄 알게 되었습니다. “저분은 주님이시다.”그리고 주님을 찬양하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사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의 복이 충만 할 것입니다.
그런데 말씀대로 살려면 말씀을 알아야지요.
아버지가 아들에게 “삼천포 가서 생선 좀 사오너라” 하셨는데, 그런데 아들이 생선 사오라는 소리는 못 들었어요. 그래서 그냥 삼천포까지 갔다가 왔답니다. 그 아들 향해 아버지가 뭐라 하셨겠어요?
말씀을 알아야 말씀대로 살지요. 1년에 성경 한 번 안 읽는 집사, 권사, 장로, 의외로 많아요.
몇 번 통독했느냐 말하는 것 아닙니다. 신앙 생활하면서 겨우 예배시간에 한번 열어보고 닫아버리는 사람이 있다는 겁니다.

말씀을 즐거워하십시오. 그리고 그 말씀대로 사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의 복을 받게 됩니다.
신명기 28장 1절, “너희가 주 너희 하나님의 말씀의 귀담아 듣고,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한 그 모든 명령을 주의 깊게 지키면, 주 너희의 하나님이 너희를 세상의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다. 너희가 주 너희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너희에게 찾아와서 너희를 따를 것이다.”
마태복음 7장 24-25절, “그러므로 내 말을 듣고 그대로 하는 사람은 반석 위에다 자기 집을 지은 슬기로운 사람의 같다고 할 것이다. 비가 내리고 홍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도 그 집에 들이치지만 무너지지 않는다. 그 집은 반석 위에 세웠기 때문이다.”

제가 왜 여기 서서 하나님의 말씀 전합니까? 그것은 여러분이 듣고 그 말씀대로 살아서 하나님의 복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왜 여기 나와 제가 전하는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살아 생명을 얻고 하나님의 복을 받고 살고 싶기 때문 아닙니까? 그런데 말씀을 듣지도 않고, 또 들었다 한들 저 문만 나가면 자기 생각 자기 욕심대로 산다면 거기에 무슨 생명이 있으며 거기에 무슨 복이 있겠습니까?
보세요. 하나님은 심는 대로 거두십니다. 여러분이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일에 충실 한다면 하나님은 또한 여러분에게 멋진 열매를 허락하실 것입니다.

보세요.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들어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함께 앉지 아니하며, 오로지 주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밤낮으로 율법을 묵상하는 사람, 이 복 있는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의 멋진 은혜가 뭡니까?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라 철따라 열매 맺으며, 그 열매가 시들지 아니함 같으니, 하는 일마다 잘 될 것이다.”
시냇가에 삼은 나무 상상해 보세요. 시냇가는 언제나 물이 있기에 말라 죽을 염려 없습니다. 언제나 잎이 무성하고, 때가 되면 열매를 맺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시냇가란 곧 하나님의 풍성하시고 다양한 은총을 뜻 합니다. 용서와 사랑, 평화와 위로, 교훈과 성화의 강물이 넉넉한 모습을 비유한 것입니다.

사람은 말씀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 심어져야 합니다. 그러면 끊어지지 않는 하나님의 은총을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일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받게 됩니다. 열매를 맺되 더 많은 열매를 맺도록 주님의 보살핌을 받게 됩니다.
요한복음 15장 2절에, “열매를 맺는 가지는 열매를 더 맺게 하시려고 손질 하신다.”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그들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5장 17절에, “너희가 내 안에 머물러 있고, 나의 말이 너희 안에 머물러 있으면 너희가 무엇을 구하든지 다 그대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들에게는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의 인정하심을 받게 됩니다.
6절, “그렇다. 의인의 길은 주께서 인정하시지만 악인의 길은 망할 것이다.”
또한 그들이 믿고 순종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을 인도하는 그 발의 등이 될 것입니다.
시편 119편 105절,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불이요, 내 길의 빛입니다.”
악인은 그렇지 않습니다.
‘겨’라고 말한 것은 ‘폐기물’과 같다는 것입니다. 겨는 알곡에서 벗겨 낸 껍질이기 때문에 쓸모가 없습니다. 결국 버림 받습니다. 악인은 마치 열매 없이 무성한 무화과나무 같아서 땅만 버리는 무익하고 해만 끼치는 존재입니다.
악인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기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늘 사는 것이 불안 합니다. 풍족하게 공급됨이 없기 때문에 늘 주변의 상황에 따라 울고 웃습니다. 있을 땐 왕창 쓰고 없을 때 쫄쫄 굶는 욕심꾸러기 입니다.
끝내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견디지 못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복 있는 사람들이 되십시오.
악인의 꾀를 따르지 마십시오.
죄인의 길에 들어서지 마십시오.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함께 앉지 마십시오.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며 그 말씀에 순종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하는 일마다 잘 될 것이며, 그래야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복 있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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