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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무엇보다 귀한 자녀 (11) (엡 6:4, 고전 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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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김동호 목사 (높은뜻 숭의교회)

에릭 프롬이라고 하는 분이 ‘소유냐 삶이냐?’(To have or to be?)라는 책을 썼습니다. 저자는 그 책에서 인간을 두 종류의 인간으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삶의 의미와 목적을 소유 (to have)하는데 두고 사는 사람과 삶의 의미와 목적을 인간답게 존재 (To be)하는데 두고 사는 사람입니다. 에릭 프롬은 전자를 소유형의 인간(having mode)이라고 정의하였고 후자를 존재형의 인간(Being mode)이라고 정의하였습니다.

현대사회는 점점 더 소유형의 사회로 치닷고 있는 듯 싶습니다. 따라서 현대사회의 자녀교육도 점점 더 더 많은 것을 소유하는 기술을 배워 주는 쪽으로만 발전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것을 가르치고 배우는데 너무 바빠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인간답게 사는 것과 법에 대하여는 정말 아무것도 가르치지 못하는 우를 그것도 아주 큰 우를 범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전에 있던 교회에 한문을 잘 하시는 장로님이 계셔서 교회 안에 서당을 만들어 방학 중 아이들에게 천자문과 같은 것을 가르치시면 어떻겠느냐는 말씀을 드린 적이 있었습니다. 여러 가지 여건이 잘 맞지 않아 성사하지는 못했지만 저는 늘 마음 속에 ‘서당’에 대한 생각이 있습니다. 옛날의 서당 교육은 밥 벌어 먹고 사는 기술을 가르치는 교육이 아니라 사람답게 사는 법을 가르치는 교육이었는데 오늘날 절실하게 필요하고 요구되는 것이 바로 그와 같은 교육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천안에 수련원이 세워지게 되면 방학 동안에 어린 아이들과 청소년을 위한 학교(서당)를 만들어 제가 직접 운영하려고 합니다. 아이들에게 사람답게 사는 법도를 교육하고 싶습니다. 학교 이름도 벌써 만들어 두었습니다. 그 학교의 이름은 ‘사람 학교’입니다. 그때 아이들에게 가르칠 것들에 대해서도 생각하고 있는데, 가르칠 것이 많아 한번에 다 가르칠 수는 없고 몇 단계로 나누어 교육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때 저는 아이들에게 요즘 설교하고 있는 맥아더 장군의 기도문을 중심으로 한 코스를 만들어 교육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맥아더 장군의 자녀를 위한 기도문을 보면 to have에 대한 기도가 아니라 to be에 대한 기도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가 여러분의 아이들을 가르치기 이전에 먼저 여러분들이 여러분의 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는 인생의 교사가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가르치기 이전에 먼저 자기 자신을 가르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여러분들과 함께 생각하려고 하는 맥아더 장군의 자녀를 위한 기도문은 ‘남을 다스리기 이전에 먼저 자기 자신을 다스리는 사람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라는 기도입니다. ‘자기를 다스리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모릅니다. 저를 포함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이 남은 가르치고 다스리려고 하면서 정작 자기 자신은 가르치지 못하고 다스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크게 쓰셨던 사람들을 보면 모두가 다 자기 자신을 다스릴 줄 아는 사람들 이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자기 죄에 대해서는 둔감하고 남의 죄에 대해서는 민감합니다. 자기 죄에 대해서는 관대하고 남의 죄에 대해서는 철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귀하게 쓰신 사람들을 보면 그 반대입니다. 자기 죄에 대해서는 민감하고 남의 죄에 대해서는 둔감합니다. 자기 죄에 대해서는 철저하고 남의 죄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관대합니다.

사도바울은 모든 면에서 우리와 비교할 수 없는 삶을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기 자신에 민감한 사람이었습니다. 로마서 7장 24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내랴 내가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섬기노라’며 안타까워 하더니 디모데전서 1장 15절에서는 아예 자기 자신을 ‘죄인 중에 괴수’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으로 삼은 말씀 고린도전서 9장 27절에도 보면 ‘내가 내 몸을 쳐 목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말씀들을 통하여 우리는 사도바울이 얼마나 자기 자신에 대하여 민감한 사람이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남을 가르치기 이전에 먼저 자기 자신을 가르치려 하였으며, 남을 다스리기 이전에 먼저 자기 자신을 다스리려 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저는 그런 면에서 윤동주 시인을 참 좋아합니다. 그의 서시를 보면 그가 얼마나 자기 자신에 대하여 그리고 자신의 죄에 대하여 민감한 사람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웠다”

제가 좋아하는 표현은 ‘잎새에 이는 바람’입니다. ‘잎새에 부는 바람’도 아니고 ‘잎새에 떠는 바람’도 아니라 그가 그의 시에서 표현한 바람은 ‘잎새에 이는 바람’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표현을 통하여 윤동주 시인이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는 ‘사람’이 되기 위하여 얼마나 민감하고 예민한 삶을 살았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마태복음 7장에서 남의 눈에 티를 보기 이전에 먼저 자기 눈의 들보를 보고 빼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요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남의 눈에 티는 들보라고 과장하여 비판하고 자기 눈의 들보는 티로도 보지 못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얼마나 피곤한 세상이 되어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그와 같은 사람들 중에 저와 여러분이 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을 정말 훌륭한 자녀로 키우시기를 원하신다면 무엇보다도 먼저 자기 자신의 죄와 허물에 대하여 민감한 자녀가 되게 하며 맥아더 장군의 기도문과 같이 남을 다스리기 이전에 먼저 자기 자신을 다스리는 자가 되도록 가르치고 위하여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다스린다고 할 때 구체적으로 우리의 무엇을 다스려야만 할까요? 우리가 반듯하고 훌륭한 사람이 되기 위하여 다스려야 할 것이 있다면 우리 속에 있는 죄일 것입니다. 죄를 다스리는 것이 곧 자기 자신을 다스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죄를 다스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고 구체적으로 무엇을 다스리는 것이어야 할까요? 대략 세 가지 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첫째, 욕심을 다스려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욕심이 바로 죄의 뿌리이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인 것이든 사회적인 것이든 모든 죄는 욕심에서부터 시작이 됩니다. 그러므로 죄를 다스리려면 먼저 욕심을 다스릴 수 있어야만 할 것입니다. 욕심을 다스리기 위하여는 욕심을 버려야 하는데 실제로 욕심을 버린다는 것은 인간으로서 불가능한 일이고 또 역설적인 이야기입니다만 욕심을 버린 욕심 없는 인간은 엄밀한 의미에서 인간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욕심은 버리는 것이 아니라 바꾸는 것입니다. 욕심에는 좋은 욕심이 있고 좋지 못한 욕심이 있습니다. 좋지 못한 욕심을 가지면 좋은 욕심이 없어집니다. 그러나 반대로 좋은 욕심을 갖게 되면 좋지 못한 욕심이 없어지게 됩니다. 우리가 버려야 할 욕심은 좋지 못한 욕심입니다. 무조건 욕심을 버린다고 좋은 욕심까지 버리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좋은 욕심까지 무조건 좋지 못한 욕심으로 매도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생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도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하여 세상의 모든 욕심을 다 배설물처럼 여길 수 있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소유에 대한 욕심보다 존재에 대한 욕심을 가질 수 있도록 우리 부모들이 가르쳐야만 합니다.

둘째, 교만을 다스려야만 합니다. 신앙적으로 생각할 때 가장 심각하고 문제가 되는 죄 중에 하나가 바로 교만입니다. 우리는 창조주가 아니라 창조주의 피조물입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태생적으로 교만해서는 안되는 존재들입니다. 겸손해야만 하는 존재들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생각할 때 우리는 교만해 질 수 없습니다. 우리가 교만해 진다는 것은 하나님을 잊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잊고 사는 것이 바로 죄의 뿌리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무엇보다도 겸손을 가르쳐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하여 우리들에게 겸손에 대하여 얼마나 많은 말씀을 하고 계시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겸손을 가르치시고 교만을 다스리게 하려고 얼마나 애쓰시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구원하시느니라. (욥 22:29)
하나님은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신다. (시 10: 17)
여호와께서 겸손한 자를 붙드신다. (시147:6)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 (잠 3:34)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 (잠 15:33)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 (잠 18:12)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벧전 5:6)

똑똑하고 유능한 사람은 많으나 겸손한 사람은 참 찾기가 어렵습니다. 그것은 우리들이 우리들의 아이들을 똑똑하고 유능한 사람으로만 키우려고 하였지 아이들을 겸손한 사람으로 키우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우리 자녀들에게 겸손을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우리의 사랑하는 자녀들을 똑똑하고 유능한 사람이 되게하는데는 성공하였으나 결국 교만하고 버릇없는 사람들이 되게함으로 정작 쓸모없고 볼품없는 사람이 되게하고 말았습니다.

셋째, 나태를 다스려야만 합니다.
사람들은 교만만 죄인 줄 알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나태도 교만 못지 않은 죄입니다. 죄란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것이 죄입니다.
학생 때 감동적으로 읽었던 글 하나가 있었습니다. 영화의 한 장면을 소개하는 글이었는데 그 영화가 어떤 영화였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프랑스가 독일에게 나라를 빼앗겼을 때 프랑스 사람들은 레지스탕스를 조직하여 독일 군에 저항하였습니다. 어느 날 독일 군인들에게 프랑스의 레지스탕스 조직 하나가 체포되어 심문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만 레지스탕스 조직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빵 장수 하나가 잡혀와 심문을 받고 있었습니다. 취조를 하는 독일 군인이 묻습니다. ‘너도 레지스탕스지?’ 자신이 레지스탕스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지 못하면 죽을 수 밖에 없게 된 빵 장수가 최선을 다하여 자기 변명을 합니다. ‘나는 레지스탕스가 아닙니다. 나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와 같이 진땀을 흘리며 변명하는 빵 장수를 구석에서 물끄러니 쳐다보던 레지스탕스 한 사람이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구? 나라를 독일에게 빼앗겼는데 프랑스 사람으로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구? 그러므로 너는 유죄다. 너는 죽어 마땅하다’

우리를 그냥 죄만 짓지 않으면 되는 줄로 잘못 알고 있습니다. 예 물론 그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 아닙니다. 죄를 짓지 않는 것도 중요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의를 행하는 것입니다.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의와 선을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만 핑계대고 의와 선을 행하지 않는 것은 옳지 않은 일입니다. 의와 선을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을 핑계로 의와 선을 행하지 않는 사람은 그 죄 때문에 멸망을 받게 될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잠 22:6)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마땅히 행할 길을 가르치고 그 길과 일을 행하도록 훈련시켜야만 합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우리 자녀들에게 의와 선에 대한 게으름을 다스리라고 가르쳐야만 합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는 것’(롬 12:11)을 가르쳐야만 합니다.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을 가르쳐야만 합니다. (고전 4:2)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욕심도 버리지 못하고, 교만도 버리지 못하고, 게으름도 버리지 못하고, 남의 잘못과 허물에만 민감하여 저들을 탓하고 저들에게만 모든 책임을 전가하려는 세상 속에서 우리 자신과 우리의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먼저 자기 자신을 다스리는 법을 가르치어 욕심을 버리고, 교만을 버리고, 게으름을 버리고 사는 사람이 되게 한다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얼마나 살기 좋은 그리고 아름다운 세상이 되겠습니까?

남을 가르치고 다스리기 이전에 먼저 자기 자신을 가르치고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이 되어 늘 하나님 앞에서 깨끗하고 겸손하고 충성스러운 사람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을 욕심내며 기도하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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