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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여섯 지파들 (대상 7: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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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석기현 목사 (경향교회)

오늘 본문 역대상 7장에 기록된 여섯 지파들에서는 한 가지 공통점을 찾을 수 있는데, 그것은 이 모두가 다 이스라엘의 북쪽에 위치한 지파들이라는 사실입니다. 또 한 가지 공통점을 찾아보자면, 이전에 언급된 지파들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어떤 영적인 특수성이 돋보이지는 않는 지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같은 이스라엘 열두 지파에 속하기는 했지만, 장자 지파도 아니었고 특별한 성직을 맡은 지파도 아니었으며 왕가를 배출해 낸 것도 아닌, 정말 그저 평범한 지파들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중요하지 않은 지파들이 되었던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이루고자 하신 구원 역사의 계획에는 그 열두 지파들 모두가 포함되는 것이었고, 또한 실제로 그 구속사는 모든 열두 지파를 통하여 각기 예언된 대로 정확하게 성취되어져 나갔던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여섯 지파’를 통하여서는, 지금까지 보아 왔던 지파들과는 또 다른 각도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관찰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평범한 신자들’의 삶 속에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시며 그들의 인생을 어떻게 사용하시는가 하는 점입니다.

언뜻 보면 별로 돋보일 것이 없어 보이는 ‘여섯 지파’들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지파들이 이스라엘 안에서 무슨 ‘군소 지파’로 남거나 혹은 ‘비주류 지파’가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역시 하나님께서는 목사와 선교사와 신학교수들을 특별한 지파로 구분해서 사용하고 계시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평신도들이 무슨 ‘군소 신자’나 ‘비주류 교인’으로 전락되는 것이 결코 아닌 것과 꼭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유다 지파에게는 리더쉽을 주셨고 레위 지파에게는 성직을 주셨던 하나님께서, 이 북쪽의 일견 평범해 보이는 ‘여섯 지파’들은 어떻게 역사하시고 사용하셨습니까? 우리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이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 운동에서 주류 지파에 속하기 위하여서는 과연 하나님께로부터 어떻게 쓰임 받고 살아야 하겠습니까?

1. 신앙생활에서 잘 싸우는 그리스도의 병사가 됨으로써 우리는 교회 운동의 핵심 회원이 될 수 있습니다.

역대상 7장 제일 처음에 나오는 잇사갈 지파가 바로 그 대표적인 지파였습니다. 1절과 2절 말씀에 보면 「잇사갈의 아들들은 돌라와 부아와 야숩과 시므론 네 사람이며 / 돌라의 아들들은 웃시와 르바야와 여리엘과 야매와 입삼과 스므엘이니 다 그 아비 돌라의 집 족장이라 대대로 용사더니 다윗 때에 이르러는 그 수효가 이만 이천육백 명이었더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서는 「돌라」라는 이름이 초두에 기록되었고 그 이하의 족보도 그를 중심으로 전개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사사기 10장 1절에 보면 그는 「이스라엘을 구원한」 공적을 세웠던 사사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지만, 하여튼 그 돌라는 나라가 어떤 외적의 침략을 당했을 때 그 방어전에서 승리하여 이스라엘을 구원했던 것으로 짐작됩니다.

그런 유명한 조상의 핏줄을 이어받아, 이 지파에서는 「대대로 용사」가 많이 배출되었습니다. 특히 다윗 왕 때 그 수효가 이만 이천육백 명이었다가 5절에 가서는 팔만 칠천으로 증가되어 갔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그 잇사갈 지파의 용사들이 다윗 왕국의 확장에 얼마나 크게 기여했으며 또한 중대한 역할을 감당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증거입니다. 또한 창세기 49장 14절에 이 잇사갈 지파가 장차 「건장한 나귀」와 같이 될 것이라고 예언된 것이 그대로 성취되었음을 보여 주는 일면이기도 합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베냐민 지파 역시 용사를 배출해 낸 지파라는 것이 최대의 특징으로 본문에 기록되고 있습니다. 역대상 7장 6절과 7절에 보면 「베냐민의 아들들은 벨라와 베겔과 여디아엘 세 사람이며 / 벨라의 아들들은 에스본과 우시와 웃시엘과 여리못과 이리 다섯 사람이니 다 그 집의 족장이요 큰 용사라 그 보계대로 계수하면 이만 이천삼십사 인이며」라고 했습니다.

베냐민의 아들들은 다 「그 집의 족장이요 큰 용사」라고 소개되어졌으며, 바로 이어지는 9절과 11절에 나머지 베냐민 지파의 자손들을 가리켜서도 역시 「큰 용사라」는 말이 반복되어 강조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 49장 27절에서 야곱이 베냐민을 가리켜 「물어뜯는 이리」라고 예언한대로, 이 베냐민 자손은 특히 싸움 잘하는 족속으로 명성이 높았으며, 이 본문의 족보에서도 바로 그 특성이 강조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본문에 보면 납달리 자손이 13절에 간략하게 언급되어 있는데, 나중에 12장에 보면 이들 역시 다윗 왕국을 이룩할 때 군사적으로 크게 기여한 지파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역대상 초두의 족보에 스불론 지파와 단 지파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언급이 없지만, 이들 역시 역대상 12장에 보면 다윗 왕국이 건설될 때, 다른 지파들에 비교하여 상당히 많은 숫자의 군인들이 그를 도왔음을 볼 수 있습니다. 하여튼 이런 지파들의 공통점을 찾는다면 역시 새 이스라엘 건설에 크게 기여한 용사들을 많이 배출해 내었다는 사실임에 틀림없는 것입니다.

7장 제일 마지막 문단에 나오는 아셀 지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30절로부터 39절까지 그 지파의 족보를 대략 기록한 후에 40절의 결론에 보면 「이는 다 아셀의 자손으로 족장이요 뽑힌 큰 용사요 방백의 두목이라 출전할만한 자를 그 보계대로 계수하면 이만 육천 인이었더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뽑힌 큰 용사」, 「방백의 두목」, 「출전할만한 자」라고 하는 표현들이 강조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본문에 기록된 여섯 지파들 중에서 잇사갈, 베냐민, 납달리, 아셀, 이 네 지파들에서는 용사가 많이 배출되었다는 점이 크게 부각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용사들은 특히 다윗이 이스라엘 왕국을 건설할 때 크게 기여한 자들이 되었음이 또한 공통점이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서 이 북쪽의 몇 지파들을 사용하신 방법이었던 것입니다. 비록 이들은 왕가에 속하지도 않았고 영적인 일에만 전적으로 종사하는 직분을 받은 것도 아니었지만, 용사들을 배출해 냄으로써 그 하나님의 크신 역사에 있어서 자기네 몫을 톡톡히 해 내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역시 이와 같이 용사로 쓰임을 받는 신자들은 여전히, 아니 꼭 필요합니다. 언젠가 미국에서 어느 한인교회가 개척될 때, 어떻게 되다 보니 그 창립멤버에 목사님이 셋씩이나 되었습니다. 나중에는 물론 많은 평신도들도 모이게 되었지만, 그 초창기에 그 목사님들께서는, “우리 교회에는 부하들은 없고 사령관들만 셋씩이나 되니 문제입니다.”라고 농담을 하곤 했습니다.

사실입니다. 대장만 모여서는 싸울 수 없는 것입니다. 용사라 불릴 수 있는 훌륭한 평신도가 되는 것, 교회를 위한 여러 가지 봉사의 제일선에 발 벗고 나설 수 있는 병사가 되는 것 -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완벽하게 세워 가는 길에 있어서 교역자에 조금도 못하지 않는, 꼭 같이 중요한 사명입니다. 좋은 주의 종들도 더욱 많이 필요하지만, 좋은 평신도들 역시 어쩌면 오늘날의 현실에서 더욱 요구되는 요긴한 존재가 아닐까 여겨지는 것입니다.

목사들은 ‘어떻게 하면 내가 좀더 충성된 주의 종이 될까?’하고 날마다 기도하고 고민하며 발버둥치고 삽니다. 평신도들 역시 ‘주님의 선한 일에 내가 어떻게 하면 좀 더 잘 쓰이는 훌륭한 용사가 될 수 있을까?’하는 문제를 두고 그처럼 기도하고 애쓰면서 살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목사가 사명을 받고 앞장서서 싸우는 선한 싸움에 언제든지 동원될 수 있는 ‘출전할만한 자’, 교회의 어려운 일을 한 건 맡아서 가볍게 해 치울 수 있는 ‘뽑힌 큰 용사’, 그 가운데서도 집사로, 권사로, 장로로 임직을 받아 교회 안에서 ‘방백의 두목’으로 섬길 수 있는 성도가 됨으로써, 실로 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운동에서 핵심 멤버로 이름을 올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받은 물질의 축복으로 크게 쓰임 받는 성도가 되는 것도 역시 교회 운동의 주류 회원에 속하게 되는 길입니다.

역대상 7장 14절로부터 29절에 기록된 두 지파의 공통적인 특징이 그것입니다. 여기 나타나는 두 지파, 므낫세 지파와 에브라임 지파는 둘 다 요셉의 아들들로 인하여 시작된 지파들이었습니다. 우선 본문 14절로 19절에 보면 먼저 므낫세 지파의 족보가 기록되어 있는데 그 중에서 14절과 15절에 보면 「므낫세의 아들들 그 처의 소생은 아스리엘이요 그 첩 아람 여인의 소생은 길르앗의 아비 마길이니 / 마길은 후빔과 숩빔의 누이 마아가라 하는 이에게 장가들었더라 므낫세의 둘째 아들의 이름은 슬로브핫이니 슬로브핫은 딸들만 낳았으며」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에서는 몇몇 여자들의 이름이 등장하고 있으며 특히 15절 하반절에 보면 「슬로보핫은 딸들만 낳았다」는 사실을 특별히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바로 눈앞에 두고 있을 무렵, 크게 축복을 받으리라고 약속 받았던 요셉 지파 가운데에서 대가 끊길 위험이 닥쳤던 가문이 있었는데, 바로 이 ‘슬로브핫’ 집안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아들이 없고 딸들만 있는 까닭에, 가나안 땅에서 받을 땅의 축복을 이어갈 길이 없는 사태가 그 집안에서 생겨났던 것입니다.

하지만 민수기 26장 이하의 기록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 슬로보핫의 딸들을 얼마나 자상하게 돌보아 주셨는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녀들은 원래의 관습에 따르면 상속받을 수 없었던 땅을 합법적으로 받을 수 있게 되었으며, 나중에 이것이 또 다른 문제를 야기했을 때에도 그 집안에 돌아갈 땅의 축복을 결코 상실하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특례 조치를 취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렇게 됨으로써 이 슬로보핫의 딸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사회에서 얼마만큼 여자를 남자와 같이 물질적으로 동등하게 축복해 주시는지를 몸소 체험한 첫째 사례가 되었습니다.

이어지는 20절로부터 29절에는 에브라임 지파에 관한 족보인데, 여기에도 역시 매우 특이한 사건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우선 20절부터 24절까지의 말씀만 보면 「에브라임의 아들은 수델라요 그 아들은 베렛이요 그 아들은 다핫이요 그 아들은 엘르아다요 그 아들은 다핫이요 / 그 아들은 사밧이요 그 아들은 수델라며 저가 또 에셀과 엘르앗을 낳았더니 저희가 가드 토인에게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저희가 내려가서 가드 사람의 짐승을 빼앗고자 하였음이라 / 그 아비 에브라임이 위하여 여러 날 슬퍼하므로 그 형제가 와서 위로하였더라 / 그 후에 에브라임이 그 아내와 동침하였더니 아내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니 그 집이 재앙을 받았으므로 그 이름을 브리아라 하였더라 / 에브라임의 딸은 세에라니 저가 아래 윗 벧호론과 우센세에라를 세웠더라」고 했습니다.

이 에브라임 집안에도 한 때 재앙이 있었습니다. 그의 둘째와 셋째 아들 에셀과 엘르앗이 「가드 토인」에게 죽임을 당했던 것입니다. 이 ‘가드 토인’이란 바로 ‘가드에 사는 원주민’이란 뜻으로서, 우리가 잘 아는 블레셋 족속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 에셀과 엘르앗이 블레셋 사람들의 가축을 빼앗으려고 갔다가 오히려 죽임을 당했던 것입니다. 본문 23절 중간에 「그 집이 재앙을 받았으므로」라는 말은 바로 이 재앙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크게 번성하리라는 축복을 받았던 집안의 아들들이 졸지에 죽음을 당했으니 실로 그 에브라임 집안에는 충격적인 사건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요셉의 자손을 축복하리라고 약속하셨던 하나님의 말씀은, 바로 그런 역경 뒤에 더 큰 위로를 통하여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집안에 「브리아」라 하는 새 아들을 내려 주셨습니다. 그리고 24절에 보면 그 집의 딸 「세에라」로 하여금 두 성을 세우는, 바꾸어 말하자면 그의 딸로 하여금 남자 못지않게 사회적으로 유력한 인물이 되게 함으로써 또한 에브라임을 위로하셨던 것입니다.

게다가 본문 27절 이하 29절에 보면 「그 아들은 눈이요 그 아들은 여호수아더라 / 에브라임 자손의 산업과 거처는 벧엘과 그 향리요 동에는 나아란이요 서에는 게셀과 그 향리며 또 세겜과 그 향리니 아사와 그 향리까지며 / 또 므낫세 자손의 지경에 가까운 벧스안과 그 향리와 다아낙과 그 향리와 므깃도와 그 향리와 돌과 그 향리라 이스라엘의 아들 요셉의 자손이 이 여러 곳에 거하였더라」고 기록했습니다. 즉 에브라임이 그 다시 얻은 아들 브리아의 자손을 통하여서는 여호수아라는 큰 인물이 나도록 하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본문 28절과 29절에 보면 그 에브라임 자손이 가나안 땅에서 얻어 누리게 된 「산업과 거처」들을 기록한 후에 「이스라엘의 아들 요셉의 자손이 이 여러 곳에 거하였더라」고 맺음으로써, 그 요셉 자손에게 내리신 축복의 약속이 끝내 가서는 완전히 성취되었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므낫세와 에브라임 지파에는 7장 앞뒤에 기록된 다른 지파들의 경우와는 달리 어떤 ‘용사’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습니다. 그렇다고 이 두 지파에서는 용사가 배출되지 않았다는 말은 아닙니다. 이들 지파 역시 다윗 왕국 건설 시에 실전 용사를 다른 지파들 못지않게 파송하여 큰 기여를 했지만, 그것보다는 더 돋보이는 특징이 있었기 때문에 그 사실은 생략한 것입니다.

그 돋보이는 특징이란 바로 이들이 창세기 49장에서 야곱을 통하여 요셉에게 약속된 축복을 그대로 성취 받은 지파들이 되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요셉 자손은 「전능자의 손을 힘입음」을 받는 축복을 누릴 것이라고 창세기 49장 24절에서 예언되었습니다. 그 약속 그대로, 므낫세 지파의 슬로보핫의 딸들은 원래는 도무지 땅의 기업을 이어받지 못할 상황에 빠졌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손의 특별하신 도움’을 입어서 남자들과 꼭 같은 물질의 축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요셉은 창세기 49장 25절에서 또한 「위로 하늘의 복과 아래로 원천의 복과 젖먹이는 복과 태의 복」을 받을 것이라고도 약속받았습니다. 그 약속대로, 에브라임 집안은 비록 두 아들을 동시에 잃는 큰 재앙이 있었지만, 결국은 더 큰 후손의 축복과 풍성한 물질의 축복들, 문자 그대로 ‘하늘의 복과 원천의 복과 젖먹이는 복과 태의 복’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 완벽하게 누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축복의 결과 므낫세 지파와 에브라임 지파는 북쪽의 여러 지파들 중에서도 가장 강력하고 큰 지파가 되었고 특히 에브라임 지파는 그 북쪽 지파들의 리더격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당신께서 특별히 택하신 두 지파들에게 육신적, 물질적으로 더 크게 축복하심으로써, 그들을 통하여 또한 당신의 계획해 두셨던 역사를 이루어 나가셨던 것입니다.

물론 물질의 축복을 받는 것이 우리 신앙의 최종 목적이 되어서는 절대 아니 됩니다. 하지만 우리가 물질의 축복을 받음으로써 하나님 앞에서 더 크게 쓰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도 또한 아니 될 것입니다. 용사로 쓰임 받는 지파가 있는가 하면, 반면에 물질의 축복을 받아 그 힘으로 쓰임 받는 지파도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쓰고자 하시는 신자에게는 오늘도 바로 요셉 지파와 꼭 같이 축복해 주고 계십니다. 사람의 상식으로 판단할 때에는 축복과는 아무런 연줄을 타고나지 못한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전능자의 도움’이 그에게 임하기만 하면 아무도 그에게 쏟아지는 축복을 막을 길이 없게 됩니다. 때로는 환난이 닥치고 재앙이 그 집안에 끊이지 않을 것처럼만 보여도, 일단 하나님께서 그 집안에 ‘하늘 위 땅 아래로 넘치는 복’을 주려고 작정하시면 그 축복은 언젠가는 넘치도록 채워지고야 마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평신도 역시 오늘의 이스라엘 왕국, 그리스도의 교회 운동을 위해서는 꼭 필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어떤 장로님이 어떤 교회에 등록하면서 그 교회 목사님에게 “목사님, 저는 돈은 없지만 대신 몸으로 때우는 일이라면 무엇이라도 하겠습니다.”라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물론 아주 틀린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교회의 모든 교인이 다 그런 자세만 지니고 있다면 문제가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다 몸으로 때울 수 있는 용사뿐이고 물질로 섬길 수 있는 능력은 전무하다면, 역시 하나님 나라의 일에는 차질을 빚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특히 장로된 교인이 자기가 물질의 축복을 받아 교회를 앞장서서 섬기겠다는 자세를 결여하고 있다면, 목사가 어떻게 교회를 이끌어 갈 수 있겠습니까? 이스라엘에 요셉 지파의 자손들이 필요했던 것처럼 오늘날에도 남다른 물질의 축복을 받는 평신도들 역시 꼭 필요한 줄을 알고, 그렇게 크게 쓰임으로써 이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교회 운동에 ‘주류 지파’로서 큰 이름을 남기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군소 지파들로만 보였던 북쪽의 ‘여섯 지파’, 이들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사용하셨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일견 평범해 보이는 이 지파들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왕국 건설에 실로 요긴하게 쓰셨던 것이 분명합니다. 아니 제사장이나 왕족으로 쓰임 받던 지파에 조금도 못지않게, 이 지파들 역시 자기 몫을 톡톡히 해내었던 것입니다.
장자 지파가 아니었고 성직을 맡거나 왕가에 속한 지파가 아니었을지라도 하나님의 구속사에서 이처럼 핵심 멤버로 쓰이는 데에는 아무 지장이 없었던 것처럼, 오늘날의 평신도들도 꼭 마찬가지입니다. 이 북쪽의 여섯 지파는 어떤 영적인 리더쉽에 직접 관여된 지파는 아니었지만, 그 대신에 평신도로서 하나님께 어떻게 요긴하게 쓰일 수 있는지를 잘 반영해 준 지파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지휘관뿐 아니라 용사로 나가 싸울 수 있는 교인이 여전히 필요하며, 말씀과 기도로 섬기는 종들뿐 아니라 물질로써 자기 몫을 해 낼 수 있는 지파들도 꼭 있어야만 합니다. 용사들 없이는 다윗 왕조가 혈통 하나만 가지고 세워질 수 없었을 것이고, 물질의 축복받은 자들 없이는 레위 지파가 성막의 거룩한 일에만 마음 놓고 전념할 수도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유다 지파뿐 아니라, 오늘의 ‘여섯 지파’에 속한 교인들을 들어서 선한 싸움을 잘 싸울 수 있는 용사로 아주 요긴하게 사용하고 계십니다. 레위 지파뿐 아니라, ‘평신도 지파’에 속한 교인들에게 특별한 물질의 축복을 내려 주셔서 당신의 전도와 선교 사업에 크게 쓰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 영광스러운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에서 ‘군소 지파’나 ‘비주류 지파’로 남게 된다는 것은 실로 불명예스러운 일입니다. 우리 자신은 어떻게 부름 받은 지파에 속하고 있습니까? 자신의 몸을 완전히 바치든지 혹은 큰 물질로 섬기든지, 어쨌든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한 일에 꼭 요긴하게 쓰이는 핵심 지파 회원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아 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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