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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창 2:4~7, 요 11:2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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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이성희 목사 (연동교회)
 
  복음서에는 예수님의 기적이 35가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에는 선별된 7가지 기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가운데 마지막 기적이 나사로를 살리신 기적입니다. 이 기적은 예수님의 최후의 기적이었고, 최대의 기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야이로의 딸과 나인성 과부의 아들과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야이로의 딸은 죽은 직후에 살리셨고, 나인성 과부의 아들은 장례하러 가는 도중에 살리셨고, 나사로는 죽은 지 나흘 만에 살리셨습니다. 살리신 시간으로 봐도 가장 큰 기적입니다. 나사로를 살리신 기적은 요한복음뿐만 아니라 복음서 전체에서 최대의 기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리고 시간적으로는 최후의 기적입니다.

  그런데 왜 공관복음서에는 기록하지 않았을까요? 요한복음 12:10에는 그 해답이 될만한 구절이 있습니다. “대제사장들이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하니 이는 나사로 까닭에 많은 유대인이 예수를 믿음이라”. 공관복음서는 대략 65년경에 기록되었다고 봅니다. 요한복음은 95년경에 기록되었습니다. 나사로가 다시 살아난 사건은 당시에 엄청난 사건이었습니다. 이런 사건으로 떠들면 나사로의 생명을 위협받을 것입니다. 65년경까지 나사로가 살아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95년에는 이미 나사로가 죽었고, 죽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예루살렘이 로마의 디도장군에 의해 함락되고 백성들이 흩어진 후였기 때문에 나사로에게 직접적 위협이 없어졌다고 봅니다.

  예수님의 스스로 계시는 하나님으로서 증거 하신 네 번째 말씀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입니다. 이 말씀은 나사로의 죽음 후에 마르다와의 대화에서 하신 내용입니다. 예수님과 베다니의 나사로 가정은 특별히 친밀한 관계였습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가정의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다시 유대로 돌아가자고 하십니다. 이 말을 듣고 제자들은 유대인들이 돌로 칠 것이라고 말립니다. 이 와중에 도마는 “우리도 주님과 함께 죽으러 가자”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나흘 만에 도착하셨습니다. 얼마든지 죽기 전에 오실 수 있는 거리였는데 왜 늦게 오셔서 나사로가 죽게 하셨을까요? 성경에는 이에 대하여 별다른 해석이 없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예수님께서 일부러 늑장을 피우시고 죽기를 기다리셨던 것이 분명합니다. 이런 예수님의 의도가 41-42절에 나타납니다.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신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을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여기에 해답이 있습니다. 무리로 하여금 믿게 하려고 나사로를 죽게 버려두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베다니에 오실 때에 마르다는 동네 어구까지 나와서 예수님을 맞이하였습니다. “주님이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때 예수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고 하십니다. 부활은 죽음을 전제하는 말입니다. 생명은 죽음에 반대되는 말입니다. 부활도 생명도 죽음과는 대치되는 말입니다.

  생명과 부활은 이미 태초부터 있었습니다. 에덴동산에는 두 나무가 있었습니다. 두 나무는 하나님 안에서 선택할 수 있는 두 가지 삶의 형태를 보여줍니다. 생명나무란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율법을 나타냅니다. 사람들은 부활과 생명을 택하지 않고 죽음을 택합니다. 이것이 태초의 인간의 잘못된 선택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부활이란 단어가 401회 나옵니다. 신약 전체 가운데 423쪽에 부활이라는 단어가 나타납니다. 신약의 매 쪽에 부활을 증거 합니다. 부활은 그만큼 중요한 사건입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확인입니다. 스스로 계시는 하나님으로서 예수님은 부활이요 생명입니다. 그 의미를 살펴보고 현재의 부활을 맛보고 생명력 넘치는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첫째, 부활은 곧 생명입니다.

  “내가 곧 부활이요 생명이다”라는 말씀은 “내가 곧 생명인 부활이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부활인 생명입니다. 부활은 문자적으로 다시 사는 것입니다. 다시 생명을 공급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명 없는 부활은 있을 수 없습니다.
  나사로는 나흘 만에 다시 살아났습니다. 시체가 썩어서 냄새가 나지만 새로운 생명을 받아 무덤에서 나왔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당시의 군중들이 놀랄 일입니다. 그런데 자세히 생각해보면 더 놀랄 일은 나사로가 또 죽었다는 것입니다. 죽지 않고 영원히 살았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 나사로는 또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불가타(Vulgate) 성경을 번역한 제롬(St. Jerome)이 재미있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사로가 무덤에서 나오자마자 예수님께 “나 또 죽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래, 또 죽는다”고 하였답니다. 그랬더니 나사로는 일생을 고지방에 가서 전도하며 헌신하여 살았지만 그러나 다시 웃지 않았다고 합니다. 왜요? 또 죽을 것이니까 웃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나사로는 죽음의 고통을 이미 경험하였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사는 것 없이 죽는 것이 가장 괴로운 일입니다. 사실은 나사로는 행운이 아니라 불운한 사람입니다. 나사로를 살리는 것은 사실은 살리는 것이 아니라 나사로를 두번 죽이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도 죽음은 괴로운 것이었습니다. 죽음을 앞두고 예수님은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할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또 십자가에서 이렇게 부르짖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복음을 앞둔 고통스런 메시야의 절규입니다.
  반면에 부활은 생명입니다. 생명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살아 있다는 것만큼 아름다운 것이 없습니다. 살아 있다는 사실 자체가 소명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일본의 의약품 벤처회사인 ‘화루마 디자인’과 도쿄대학교 분자세포생물학 연구소는 인간의 수명을 단축시키는 ‘단명유전자’를 처음으로 발견하였습니다. 이 유전자를 발견하므로 장수 의약품 생산이 가능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단명유전자를 발견했다고 인간이 죽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그 약품 자체가 생명은 아닙니다. 생명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 선물은 살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 철학자들도 지혜의 삶이란 곧 죽음을 준비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철학자들은 죽음을 준비하는 것이 무엇을 하는 것이냐는 말하지 못합니다. 철학자들은 그것을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예수 믿고 영생을 얻는 것이라고 합니다. 예수를 믿으면 비로소 죽음을 극복하고, 죽음을 준비합니다. 예수 믿는 것이 죽음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죽음은 마침표가 아니라 바꿈표였다”고 필립 얀시는 말했습니다. 죽음은 마치는 것이 아니라 바꾸는 것입니다. 죽음은 이 땅의 삶을 접고 저 땅의 삶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죽음을 생명으로 바꾸는 바꿈표의 역할을 하신 것입니다. 게이 바꿈표는 인류에 최대의 공헌입니다. 가장 위대한 사역입니다. 부활이 생명인 것을 아는 이 기쁨을 누리기를 바랍니다. 찬송 94장 2절에는 예수님은 누구신가라는 가사에 이렇게 말합니다. “죽은 자의 부활되고 우리 생명 되시네”. 예수님은 부활이고 생명이십니다.

둘째, 죽어도 삽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무덤을 향하여 “나사로야 나오라”고 하셨습니다. 비록 죽었습니다. 비록 나흘이 되었습니다. 비록 냄새가 납니다. 그러나 주님이 부르시면 순종하고 나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는 죽음도 순종합니다. 예수님의 명령에는 죽었어도 삽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왜곡하려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죽으신 것이 아니라 기절했다가 사흘 만에 깨어났다는 기절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한 로마 군병이 예수님의 옆구리를 찔러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고 합니다. 만일 옆구리에서 피와 물이 다 흘러나오고도 기절했다가 깨어났다면 그것도 기적입니다. 우리 몸의 피는 약 2리터 정도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3분의 2가 없어지면 사람은 죽는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짧은 죽음입니다. 그리고 다시 사신 것은 영원히 사신 것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죽으심도 육체적 죽으심이고 부활도 육체적 부활인 것을 증거 합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다음에 고기를 잡수셨고, 예수님의 몸을 만져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었다가 다시 사심처럼 우리도 그렇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죽습니다. 그러나 다시 삽니다. 그러므로 사는 자에게 죽음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부활이요 생명인 것을 아는 사람에게도 죽음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죽음이 부활을 방해할 수 없습니다. 그 죽음이 영원한 생명을 빼앗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무덤 앞에 서서 “나사로야 나오라”고 하셨습니다. 나사로의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어떤 학자는 만일에 그 때에 예수님께서 “나사로야” 하지 않고 그냥 “나오라” 그랬다면 무덤에 있던 자들이 다 나왔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인간에 대한 관계는 철저하게 개인적인 관계입니다. 개인적인 관계란 친밀한 인격적 관계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 장면을 요한복음 10장에 있는 양의 이름을 불러내는 목자 모습에 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양의 이름을 부르듯이 나사로의 이름을 불러 내셨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2:24에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고 합니다. 죽으면 열매를 맺고, 죽으면 사는 것, 이것이 기독교의 역설이며 진리입니다. 또 한 알의 밀의 비유는 예수님의 삶을 묘사한 말인 동시에 우리의 삶을 제시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전 UN 사무차장인 로버트 뮬러는 “죽음은 비극이 아니다. 비극이란 살아 있는 동안 죽도록 놔두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세요. 더 비극적이고 비참한 것은 죽음이 사는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것입니다. 이것만 안다면 사람들이 삶이 달라질 것입니다.

  복음을 알고, 죽음을 알고, 죽어도 산다는 비밀을 아는 것은 참 다행한 일이고, 행복한 일이고, 축복이며 감사해야 할 일입니다. 복음의 가장 주목할 만한 주제는 복음이 죽음에 도전한다는 것입니다. 복음의 핵심적 힘은 죽음을 이기는 부활과 생명입니다.

  키엘케골은 본문의 말씀을 해석하면서 “죽음에 이르지 않는 병”이라고 하였습니다. 죽어도 죽지 않고 사는 것이 죽음에 이르지 않는 병입니다. 세상에는 죽음에 이르는 병이 있습니다. 이것을 그는 절망이라고 하였습니다. 반면에 죽음에 이르지 않는 병도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았어도 병으로 고생합니다. 그리고 죽습니다. 그러나 그 병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 아닙니다. 오히려 영원히 사는 병입니다.
  이 비밀을 캐고 진리를 터득한 바울은 로마서 14:8에서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라고 합니다. 빌립보서 1:21에는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고 합니다. 그는 죽음과 삶이 차이가 없는 초월적 삶을 살았습니다. 그에게는 죽는 것이 이미 사는 것입니다. 사는 것이 이미 죽은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기독교회는 인간이 타고난 두려움인 죽음을 길들이는데 성공하였습니다. 오래 전 교회는 프랑스 교회를 필두로 시체를 교회 밖에 쫓아내지 않고 교회 경내의 묘지에 모셨습니다. 그리고 그 시체 앞에서 찬송하고 기도하였습니다. 산자와 죽은 자가 자리를 같이 하였습니다. 교회의 이러한 일은 생사의 경계를 얇아지게 하였습니다. 사는 것과 죽는 것이 일치하였습니다. 이렇게 죽음을 삶과 일치할 수 있었다는 것은 위대한 삶입니다. 교회는 이 엄청난 일을 하게 된 것입니다.

셋째, 살아서 믿으면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마르다에게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고 하십니다. 죽어도 영생합니다. 이 땅에서 죽지 않으면 죽음 없는 영생을 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에는 예수님의 재림에 대하여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죽은 자들이 먼저 부활하여 일어나서 공중에서 재림하시는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살아남아 있는 사람들은 죽음을 맛보지 않고 살아서 재림하시는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 때까지 살아 있는 사람은 영원히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천국의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진시황제는 불로초를 구하려고 선남선녀들을 한반도까지 보냈습니다. 늙지 않고 죽지 않으려고 하는 인간의 욕심입니다. 늙지 않으려고 안간 힘을 쓰다가 더 늙어요. 죽지 않으려고 버둥거린다고 죽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이 늙고 아름다운 것임을 알고, 죽는 것이 사는 것임을 아는 지혜는 이런 쓸데없는 일을 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필립 얀시는 그의 책에서 아주 예리하게 현대 문화를 비평합니다. 사람들이 젊어 보이는 것을 무엇보다 소중히 여기는 문화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일은 사후의 생명에 대한 확신이 없는 사람에게는 당연한 이상입니다. 젊음이란 불확실한 미래를 지연시키는 가장 확실한 방법입니다. 건강식품이나, 다이어트 기구나 식품 그리고 운동 같은 젊음의 환상을 지켜주는 산업이 나날이 번창하고 있습니다. 젊음은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미래나 죽음에 대한 확신이 없이 건강만 추구하고 젊음의 환상만 가지고 있다는 것은 불쌍한 일입니다.

  또 다른 불쌍한 영혼들이 있습니다. 죽어서도 영원히 자신의 육체를 보존하려고 하는 존재들입니다. 지금 세계에는 사후에 시신을 부패하지 않게 처리하여 거창하게 보존하고 있는 사람이 네 사람입니다. 레닌, 모택동, 호치민 그리고 김일성입니다. 저는 그 네 사람을 다 보았습니다. 사람은 죽기 쉬어야 합니다. 그래야 다시 살기도 쉽습니다. 부활을 아는 사람은 육체를 썩지 않게 보관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썩지 않는 육체가 부활이 아니며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부질없는 일을 하려고 그렇게 공을 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죽는 것이 사는 것을 아는 사람은 삶과 죽음을 동시에 살아야 합니다. 죽음과 부활을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로 알아야 합니다. 죽음과 생명이 다 고귀한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실제로 우리는 이 두 세계를 동시에 알고 동시에 살고 있습니다. 이 세계에 살면서 이미 하나님의 나라에 살고 있습니다. 살고 있지만 죽음도 압니다. 이미 주 안에서 내 자신이 죽었습니다. 이런 삶이 부활의 삶이며 생명의 삶입니다.

  최근에 갑자기 네티즌 사이에 유행한 노래가 있습니다. ‘사랑해도 될까요’인줄 알았지요? 저는 ‘파리의 여인’을 보지 않습니다. 집에서 ‘자양동 여인’을 볼 시간도 없습니다. 그게 아니라 ‘올챙이 송’입니다. “개울가에 올챙이 한 마리 꼬물꼬물 헤엄치다 뒷다리가 쏘옥, 앞다리가 쏘옥, 팔딱팔딱 개구리 됐네. 꼬물꼬물 꼬물꼬물 꼬물꼬물 올챙이가 뒷다리가 쏘옥, 앞다리가 쏘옥, 팔딱팔딱 개구리 됐네”. 아주 단조로운 곡조에 단조로운 가사인데도 너무 좋아합니다. 올챙이는 개구리의 시간을 기대하면서 삽니다.

  개구리가 잘 하는 것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개구리헤엄이고, 다른 하나는 물과 뭍에 동시에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개구리는 개구리헤엄 밖에 못합니다. 개구리가 평형이나 배영하는 것 보셨습니까? 못하지만 그것 하나만 잘 해도 물에 빠져죽지 않고 물에 살 수 있습니다. 이게 전문성 시대의 삶의 지혜입니다.
  올챙이는 물에서만 살지만 개구리는 물과 육지에 동시에 삽니다. 올챙이와 개구리가 다른 점은 다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다리가 있으면 육지에도 삽니다. 다리가 없으면 물에서밖에 못삽니다. 많은 사람들은 올챙이의 삶 밖에 살지 못합니다. 하나의 세상 밖에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개구리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늘도 이 땅도 다 우리의 세상입니다. 이 둘을 동시에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물질세계와 영적세계, 서로 다른 두 환경에서 살아가는 양서류로 생각하는 것이 삶의 열쇠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물질세계에서는 굳이 생각하지 않아도 숨을 쉽니다. 지금도 생각하면서 숨을 쉬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냥 쉬어집니다. 그러나 영적 세계의 호흡인 기도는 애써 마음을 잡아야 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의 삶은 그냥 그렇게 되어집니다. 그러나 하늘나라의 삶은 애써 묵상하고 살아야 합니다. 부활을 묵상하고 생명을 소유하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참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결론

  고래는 우리가 늘 보는 산, 도시, 빌딩 등 우리의 일상은 대부분 보이지 않는 세계입니다. 고래는 반면에 해양의 식물이나 바다의 생물들로 가득한 활기찬 거주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고래는 한 시간에 한 번 수면 위에 올라와 산소를 들이키지 않으면 죽습니다. 바다 위의 세계에 대하여 아는 바는 없지만 살아남기 위해서는 반드시 접촉해야 합니다.
  우리 영혼이 고래처럼 살아남기 위해 가끔씩 위로 올라가 공기를 들이 킨 후 다시 아래로 내려가야 합니다. 위의 세계는 아직 우리가 완전히 소유한 세계가 아닙니다. 익숙하지 않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수시로 위의 세상으로 올라가 그 세상의 것을 들이켜야 합니다. 우리는 아직 죽지 않았습니다. 부활과 생명을 호흡해야 합니다. 이것이 이 세상에서 살아남는 방법입니다. 이 땅에서 잘 사는 방법입니다.

  영적 세계를 호흡하세요. 현실만 바라보면 숨이 막힙니다. 영을 호흡하면 거기에 이미 부활의 소망이 있습니다. 생명의 잔치가 있습니다. 하늘나라가 있습니다. 움츠렸던 가슴이 트입니다. 전혀 새로운 세계를 볼 수 있습니다.
  우리말은 “죽겠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어떤 부흥사가 그랬습니다. “죽겠다” 하지 말고 “주께 있다” 그러라고 했습니다. “죽겠다” 하지 말고 “살겠다”하고 사세요. 죽기가 쉽지 않습니다. 살기가 더 쉽습니다. 더구나 우리는 다시 죽지 않습니다. 영원히 사는 사람들입니다.

  에스겔 골짜기의 뼈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마른 뼈들이 살아서 군대가 되었습니다. 우리도 무기력합니다. 육체가 죽어 있습니다. 마음도 가라앉고 좌절합니다. 경제도 침체하여 돌파구가 없습니다. 유가가 치솟아 물가의 불안정을 부추깁니다. 내년의 경기는 더 나쁠 것이라고 벌써 야단입니다. 그러나 이런 현실만 바라보지 마시고 이따금씩 수면 위로 올라와 저 세상을 호흡하십시오. 거기에 부활의 소망이 있고 참 생명이 있습니다.

  마른 뼈같이 무기력한 우리들이지만 부활과 생명이신 주님으로 말미암아 부활의 생명을 공급받고 살아서 승리하는 하나님의 군대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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