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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 (행 28: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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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이수영 목사 (새문안교회)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The blood of the martyrs is the seed of the Church)라는 것은 고대교회의 유명한 신학자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n)가 한 말입니다. 기독교신자들을 공식적으로 박해하기 시작한 자는 로마 황제 네로(Nero)입니다. 그는 로마를 자기의 취향대로 다시 건설하기 위해서 일부러 로마 시에 방화를 하게 했다는 믿을 만한 증거들이 있습니다. 이 방화로 인해 로마시의 열네 구역 중 열 구역이 불에 타 잿더미로 변했습니다. 그는 이 불이 기독교인들인 한 짓이라고 비난하며 그들을 잡아 죽일 것을 명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로마제국 안의 기독교에 대한 박해의 물결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기독교신자들은 잡혀가서 고문을 당하고 십자가에 달려 죽었습니다. 그는 기독교신자들의 온 몸에 기름을 끼얹고는 불을 지르고 그들의 몸을 태우는 불로 로마의 밤거리를 밝히게 했습니다. 그는 또한 기독교신자들을 원형경기장의 구경거리로 만든 장본인입니다. 그는 기독교신자들에게 들짐승의 가죽을 입게 해서 짐승처럼 보이게 하고는 경기장 안에 들여보내고 사냥개들을 풀어서 물어 뜯겨 죽게 했습니다. 그는 많은 여인네들을 미친 황소에 묶어서 죽을 때까지 끌고 다니게 하기도 했습니다. 사도들도 여러 가지 방법으로 처형을 당하며 순교했습니다. 마태는 에티오피아에서 그 몸이 땅바닥에 못 박히고 목이 잘려 죽었습니다.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는 성전 탑에서 밖으로 내던져지고 머리에 곤봉을 맞아 죽었습니다. 안드레는 에뎃사(Edessa)에서 X자형 십자가에 달려 죽었습니다. 바돌로매는 이교도 우상숭배자들에게 맞아 죽었습니다. 도마는 고문을 당하고 창으로 몸이 꿰뚤린 채 불 속에 던져져 죽었습니다. 베드로는 십자가에 달렸으나 주님과 같은 모양으로 달릴 자격이 없다며 거꾸로 매달리기를 자청해 죽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1세기말의 로마황제 아드리아누스(Adrian)는 1만 명 이상의 기독교신자들을 죽였는데 그 중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처럼 가시관을 씌우고 손바닥에 못을 쳐서 죽이는 처형을 당했습니다. 1세기의 로마의 네 번째 주교였던 로마의 클레멘트(Clement of Rome)는 도미티아누스(Domitian) 황제에 의해 유배를 가게 되었고 중노동에 처해졌지만 쉬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여 유배자들 가운데 많은 개종자들을 얻게 되자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그의 목에 닻을 매달아 바다에 던지게 했습니다. 그 후로 닻은 혹독한 시련 속에서 보여준 클레멘트의 노력을 기념하여 어디서나 그리스도인의 소망의 상징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박해가 일어날 때마다 교회는 더욱 성장했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이 사실이 2세기의 신학자 테르툴리아누스로 하여금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라고 말하게 만든 것입니다.

그 이후에도 기독교신자들에 대한 박해는 끊이지 않았습니다. 뛰어난 철학자이고 현명하고 어진 황제로 알려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는 사실은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박해를 하나의 과학적 고문으로 바꾸어놓은 잔인한 사람입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의 발을 으깨고는 가시밭길을 걷게 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뜨겁게 달구어진 철판 위에다 굽기도 했습니다. 블란디나(Blandina)라는 어떤 중년의 여신도를 자루 속에 넣고는 사나운 황소들에 의해 들이받게 한 일도 있습니다. 그래도 그 여인이 죽지 않자 시뻘겋게 달구어진 쇠의자 위에 앉혔습니다. 그래도 그 여인이 자기의 신앙을 포기하지 않자 칼로 죽이고 말았다고 합니다. 320년 아르메니아의 세바스테(Sebaste, Armenia)라는 곳에서는 기독교신자인 40명의 군인이 얼어붙은 연못 위에서 발가벗김을 당했습니다. 연못 주위에는 기독교신앙을 부인하는 사람들이 들어갈 수 있도록 따뜻한 물로 채워진 욕조를 가져다 놓아 유혹했습니다. 다 그 유혹을 이기고 얼어가며 신앙을 지켰는데 한 군인이 그 유혹에 넘어갔습니다. 그러자 감시병 중 하나가 다른 39명의 군인들의 신앙을 보고는 자기도 예수를 믿겠노라 하고는 39명에 합류했습니다. 그 40명은 모두 신앙을 지키려 순교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죽음은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켜서 기독교인이 되게 했다고 합니다. 순교는 이렇게 순교자의 신앙을 밝히고 죽음까지도 마다하지 않음으로써 그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를 끝까지 증언하는 일입니다. 우리말로 "순교자"라고 번역되는 말의 본뜻은 바로 "증인" 또는 "증언자"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역사 속에서 교회에 대한 박해를 그의 백성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더 힘 있게 증언하게 하시는 기회로 삼으셨으며 순교의 피를 교회가 더 크게 성장하게 하시는 영양분으로 사용하셨습니다. 기독교역사의 첫 3세기 동안 로마제국은 기독교에 대한 가혹한 박해를 자행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로마제국을 이용하셔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이 더 널리 더 빨리 전파되게 하셨습니다. 로마제국이 없었더라면 아마도 기독교는 그렇게 성공적으로 전 세계에 확산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로마제국을 결속시키는 요소들은 모두 복음의 확산에 기여한 것들입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길이었습니다. 로마인들이 닦은 길은 그 이전의 그 어떤 때보다 여행을 수월하게 했습니다. 또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라고 할 정도로 로마의 길은 널리 멀리 통하고 있었습니다. 그 길을 통해 복음이 온 세상으로 널리 빨리 퍼져나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로마의 영향권 아래 있는 세계에서는 공히 헬라어를 사용했다는 사실과 강하고 고도로 훈련된 로마군에 의해 세계의 평화가 유지되고 있었다는 사실 또한 기독교의 확산을 유리하게 한 요소들입니다. 로마는 제국의 중심으로서 자석처럼 많은 사람을 끌어당겼습니다. 사도 바울뿐만 아니라 베드로도 로마에 와서 얼마간 지낸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가장 위대한 두 사도의 영향 아래 세계의 중심지 로마에 있는 교회는 많은 사람을 끌어당기며 놀라운 성장을 했으리라 여겨집니다. 얼마간 비교적 자유롭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두 사도는 네로의 박해 하에 모두 순교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들의 죽음에 대하여 언급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거꾸로 십자가에 달려서, 바울은 목이 잘려서 죽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라는 말은 한 알의 씨가 떨어져 죽음으로써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주님의 말씀이 진리임을 역사적으로 증명한 숱한 사건들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박해는 교회를 더욱 강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며, 순교는 교회를 더욱 성장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박해를 겁내지 말며 순교를 피하려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이 마침내 로마에 오게 되었고 오자마자 한 일이 무엇이지를 잠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바울이 로마에 오게 된 것은 자유로운 전도인으로서 온 것이 아니라 20절 끝에서 언급하는 바와 같이 "쇠사슬에 매인 바 되어" 왔으며, 16절에서 보듯이 "자기를 지키는 한 군인과 함께" 있는 몸이었습니다. 17-19절이 어떻게 사도 바울이 로마에 오게 되었는지 그 사정을 요약해서 전해주고 있습니다. 17절 중간부터 보면 "내가 이스라엘 백성이나 우리 조상의 관습을 배척한 일이 없는데 예루살렘에서 로마인의 손에 죄수로 내준 바 되었으니 로마인은 나를 심문하여 죽일 죄목이 없으므로 석방하려 하였으나 유대인들이 반대하기로 내가 마지 못하여 가이사에게 상소함이요 내 민족을 고발하려는 것이 아니니라." 사도 바울은 아무 잘못한 것 없이 유대인들로부터 고소를 당하여 로마인의 손에 죄수로 넘겨졌고, 로마인들은 심문 끝에 그에게서 아무 죄목을 발견하지 못해 석방하려 했지만 유대인들의 반대 때문에 할 수 없이 로마 황제에게 상소를 하게 되었으며, 그래서 로마에 재판을 받기 위하여 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즉 유대인의 부당한 박해가 자기로 하여금 로마에 오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이 때에는 아직 기독교신자들에 대한 네로의 박해가 시작되기 전이어서 그런지 바울이 상당히 자유가 허용된 연금상태에 있었음을 본문 16절은 엿보게 합니다. "우리가 로마에 들어가니 바울에게는 자기를 지키는 한 군인과 함께 따로 있게 허락하더라" 한 것은 그가 감옥이나 군대의 병영에 갇혀있지 않고 바울이 택한 거처에 감시하는 한 군인과 함께 머무르게 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유롭게 나가다닐 수는 없었지만 사람들을 자기의 거처로 불러 모이게 할 수 있었고 찾아온 사람들에게 자유롭게 말할 수 있었음을 17절과 23절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17절에서는 바울이 로마에 들어온지 사흘 만에 그곳의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을 청했다고 했습니다. 23절을 보면 "그들이 날짜를 정하고 그가 유숙하는 집에 많이 오니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증언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에 대하여 권하더라" 했습니다. 예루살렘 유대인들의 박해가 오히려 사도 바울로 하여금 그 당시 세계의 중심부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하루 종일 하나님의 나라를 증언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님을 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오묘하신 섭리라 아니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아직 상대적으로 관용적일 시기의 로마에서 사도 바울은 복음의 씨를 뿌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결국 로마에서 맞은 죽음은 복음의 중단이 아니라 오히려 복음의 더 큰 확산의 기회였습니다. 로마에서 뿌린 그의 순교의 피는 로마 세계 전체로 튀어 복음의 씨가 되었으며 30배, 60배, 100배, 아니 그 이상으로 엄청나게 놀라운 결실을 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순교의 피가 많이 뿌려진 나라입니다. 기독교가 전해진 초기부터 많은 순교자들이 생겼습니다. 일제와 공산당에 의해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순교를 당했는지 모릅니다. 물론 혹독하고 야만적인 박해와 고문, 악랄하고 교활한 협박과 회유책에 넘어가 배교한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신실하고 용감한 신앙인들이 흘린 순교의 피를 하나님께서는 귀하게 여기셨고 세계교회의 역사에 그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놀라운 성장을 한국교회에 허락하셨습니다. 비록 북한공산정권의 60년 가까이 계속되는 극악무도하고 철저한 탄압으로 외화벌이를 위한 대외전시용 가짜 교회 말고는 교회가 자취를 감추고 말았고 신자들이 거의 씨가 마르고 말았지만 이것도 일시적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살아계시고 북한 땅에 뿌려진 순교의 피는 헛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김일성 김정일 부자는 성공적으로 기독교를 박멸했다고 여겨왔을지 몰라도 교회는 박해가 심하면 심할수록 더 강한 생명력을 품은 선교의 씨를 잉태되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고 악한 자들은 교회를 탄압하고 그리스도인들을 억압하는 자들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2000년 역사의 교훈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며 하나님을 향해 돌을 드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남한 땅에서조차 뒤늦게 그런 무모한 일을 은밀히 꾀하는 세력이 있는가 하면 내놓고 공언하는 자들이 생겨나고 있으니 참으로 딱하고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 나라에서 다시 그런 비극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오늘 오후 다섯 시에 우리 교회는 고 김영주 목사님의 추모예식을 거행합니다. 우리교회의 제3대 위임목사이셨던 김목사님은 이 교회를 끝까지 지키시다가 북한군에 의해 잡혀가셨습니다. 그 이후에 어떻게 되셨는지 확실하게 증언해주는 자료나 증인이 없어서 목사님을 공식적으로 순교자로 선포하지 못함을 우리 당회는 안타까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끝까지 신앙을 지켰음을 부인하는 증언이나 자료가 없는 한 우리는 김영주 목사님께서 순교하신 줄로 믿어야 할 것입니다. 그 신앙의 지조를 귀하게 여기고 우리 교회에 그러한 지도자를 계셨음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우리는 때늦었지만 추모예식을 갖게 된 것입니다. 지금은 교회가 신앙의 지조와 순교의 정신이 필요로 하는 때입니다. 오늘의 예식이 우리 모두에게 신앙의 지조와 순교의 정신을 드높이는 소중한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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