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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교회 (고전 15:5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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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경택 목사 (종로교회)

지난 8월1일 오후부터 8월4일까지 강원도 남애에서 가진 수련회를 은혜롭게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121명이 참여했습니다.
너무나 아름다운 곳을 우리에게 준비시켜 주셔서 얼마나 감사했는지. .
서울은 폭염이 계속되는 가운데 있었지만 우리는 시원한 바닷바람이 불어오는 곳에서 은헤중에 보냈습니다. 이제 이번 주일부터 무더위가 서서히 물러가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제 우리는 다시 새로운 각오와 결심을 가지고 힘차게 달려야 할
줄 믿습니다.
사람은 일생을 뭔가를 위해 수고를 하며 삽니다. 그런데 일생을 가치 없는 헛된 수고를 할 때가 많습니다. 오랜 세월이 지나고 돌아보면 ‘무얼 위해 살았나?’ 하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어느 글에 보니까, 인생을 시간 아침7에서 밤 11시에 비유한 것을 보았습니다.
인생의 출생은 오전 7시, 15세는 오전 10:25분, 20세는 오전 11:34분, 25세는 낮 12:42분, 25세가 되면 이미 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30세는 오후 1:51분, 35세는 오후 3시정각,
40세는 오후 4:8분, 45세는 오후 5:16분, 50세는 오후 6:25분, 55세는 오후 7:34분, 60세는 오후 8:42분, 65세는 9:51분. . .잠자리에 들어야할 시간입니다. 그리고 70세는 밤 11시라고 . . . 좀 아쉽죠? 점점 장수 하는데 . . .그러면 80세는 . . .
모세는 시 90:10에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라고 했습니다.
당신은 지금 몇 시에 해당되십니까? 얼마의 시간이 더 남아 있습니까?
시 90:12은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
라고 기도합니다. 나의 인생의 길이가 얼마나 남았는지 계수할 수 있게 해 주시고, 그 남은 때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달라는 간구입니다.

여러분에게 인생이 얼마나 남았습니까? 무엇을 위해 쓰시렵니까? 무엇을 위해 수고하며 사시겠습니까? 한번밖에 없는 인생입니다. 이 인생을 무엇을 위해 보내고 싶습니까?
우리의 삶은 삶 자체가 수고입니다. 수고란 히브리어에 보면 ‘혹사한다, 큰 고통을 당한다’라는 뜻이고, 헬라어에 보면 ‘아주 많은 괴로움을 당한다’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많은 수고 속에서 살다가 죽습니다.
전도서 1:3에 보면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라고 말씀했습니다.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아무 유익이 없다는 것입니다. 남는 것은 한 줌의 흙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주의 일에 힘쓰는 것은 헛되지 않습니다(고전15:58). 수고는 우리가 하지만 일을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헛되지 않은 수고’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께 바쳐지는 수고는 헛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58절)
이 세상에는 많은 일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주의 일’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는 일, 영의 일 이런 모든 일들은 세상에서 헛되지 않을 일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 주의 일은 무엇인가요?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저희가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요6:28-29)
즉 하나님의 보내신 자 예수를 제대로 믿는 것이 주의 일입니다. 예수를 제대로 믿지도 않으면서 주의 일을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4:13에 보면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기록하라.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계 14:13)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 니라에서 그 수고에 대한 상급이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주님께 바쳐지는 수고란 하나님의 몸된 교회를 받들어 충성하는 것입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주님의 복음을 힘써 전하는 것입니다.
몸과 마음과 시간과 물질로 정성을 다하여 주의 사역을 돕는 것입니다.
생명을 살리는 일입니다.

이 세대가 점점 더 악해져가고 있습니다. 생명을 사망에서 건짐 받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가만히 있게 된다면 과연 누가 이 세대를 건지겠습니까? 사도바울은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라고 고백했습니다. 생명을 살리는 수고야말로 헛되지 않은 수고입니다.

다니엘 12:3에 보면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고 말씀했고, 시편 126:5,6에 보면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고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복음을 위한 수고에 전심전력을 다해야 합니다.
디모데후서 4:2에 보면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고 했습니다.

아프리카 밀림 속에서 선교 사역을 감당했던 리빙스턴의 소식이 끊어진 후 헨리 스텐리가 이끄는 탐험대가 아프리카 탐험에 들어갔다가 1873년 중앙 아프리카 어느 마을에서 리빙스턴을 발견하였습니다. 이 때의 리빙스턴은 60세로 이미 병들어 쇠약해 있었습니다. 30년 동안 문명을 등지고 아프리카에서 토인들과 생활을 함께 하고 있던 리빙스턴에게 스텐리가 영국으로 귀국할 것을 설득하였지만 그는 계속 아프리카에 머물렀고 그 해에 리빙스턴은 세상을 떠났습니다. 리빙스턴이 남긴 마지막 일기장은 1873년 3월 19일의 일기였고, 그 날은 리빙스턴의 생일이었습니다. 그의 마지막 일기장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오늘은 나의 생일이다. 나의 예수여! 나의 왕이여! 나의 생명이여! 나의 모든 것이여! 오늘을 기하여 다시 나를 바칩니다. 자비하신 아버지 나를 받아 주소서. 하나님께서는 독생자를 나에게 주셨는데 이 못난 것, 아무 것도 아니지만 몽땅 바치오니 받아 사용해 주옵소서. 아멘 " 그의 시체는 무릎 꿇고 기도하는 자세 그대로 발견되었습니다. 그의 묘비에는 "이 사람에게는 다른 말이 필요 없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에 응답하여 살고, 응답하다 죽었다." 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리빙스턴의 일생은 오직 주님의 일을 위하여 힘쓰는 생애였습니다.

우리가 힘써야 할 것들이 무엇입니까?
첫째로 모임에 더욱 힘쓰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초대교회의 특징 중 기본이 모든 일에 열심히 모이기를 힘쓰는 것이었습니다.
부흥되고 성장하는 교회는 성도들이 모이기에 열심을 내고 적극적입니다.
그러나 모이지 않고 모이는 횟수를 줄여가는 교회는 결코 부흥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퇴보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교회들도 성장하고 부흥하는 교회는 모이기에 열심입니다. 일주일 내내 교회가 바쁘게 돌아가는 교회입니다.
학교에 가기 싫어하는 학생이 공부를 잘 할 수 있겠습니까?
병원에 가기 싫어하는 환자가 건강을 회복할 수 있겠습니까?
사업하는 사람이 허구헛날 골프나 치러 다니고 여행이나 다니는데 사업이 잘 될 수 있겠습니까?
날씨가 좋으면 핑계를 대서라도 야외로 나가고 날씨가 궂으면 날씨 핑계로 빠지는 성도가 바른 신앙일까요?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모이기를 힘쓰시기 바랍니다.

어떤 사람은 "어떻게 하면 모임에 나 갈 수 있을까?"를 생각하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교회에 안가도 될까?"를 연구합니다. 그래서 어디 아픈 곳은 없는가? 하고 이마를 짚어 보기도 하며, 멀쩡한 배를 만져 보기도 하고, 거절할 수 없는 분으로부터 전화가 오기를 은근히 기대하기도 합니다.
교회에 나오지 않는 이유가 시간이 없어서, 피곤하니까, 거리가 너무 멀어서가 아닙니다. 히브리서 10:25절에서 지적한 대로 습관 때문입니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 때문입니다.

우리는 왜 모이기를 힘써야 할까요?

1) 하나님의 소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이 무엇일까요? 에베소서 1장 10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히브리서 10장 25절에서는 모이기를 힘쓰라고 하셨고, 주님께서는 우리가 하나 되기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2) 우리의 믿음이 성장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임을 통해 성장하게 하셨습니다. 모임에 나오지 않고는 결코 성장할 수 없습니다. “온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얻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심으로 자라느니라”(골 2:19)

3) 승리하는 생활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무리 가운데 계시면서 구름기둥, 불기둥, 언약궤로 인도하시고 보호하시며 싸움에서 이기게 하셨습니다. 무리에서 떨어진 사람들 때문에 적의 공격을 받게 되었습니다.

사단은 무리에서 떨어졌을 때 공격을 합니다. TV 동물의 왕국에서 잘 볼 수 있습니다. 무리에서 떨어진 동물이 공격을 받습니다.
초대교회가 어떤 교회입니까? 박해받던 교회입니다. 당시는 예수님을 믿으면 잡아 죽이던 때였습니다. 그런데도 모이기에 힘쓰는 교회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얼마나 좋습니까? 이렇게 좋은 시대에 태어난 것도 감사해야 할 일입니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기도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이 시대의 비극 중의 비극은 하나님 앞에 기도하지 않는 것입니다. 기도해야 할 사람이 기도하지 않습니다. 세상일은 이것저것 다 하면서 이 핑계, 저 핑계 바쁘다는 핑계로 하나님과는 대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교회에 주신 무기는 은과 금이 아닙니다. 더욱이 세상의 권력도 지혜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교회에 주신 무기는 오직 기도입니다.
기도는 하고 싶어서 하고 하기 싫어서 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찰스 스펄젼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람은 기도하고 싶을 때 기도해야 된다. 왜냐하면 좋은 기회를 소홀히 여기는 것은 죄이기 때문이다. 뿐만아니라 기도하기 싫은 때에도 기도해야 한다. 왜냐하면 죄가 우리를 사로잡아갈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어떤 분은 ‘우리가 처음에는 육신으로 기도하게 된다’고 합니다. 기도 하고자하는 마음은 있지만 우리 몸은 영적인 일들을 싫어합니다. 몸은 세상에서 연락을 즐기는 일에 익숙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에 좀더 성숙해 지면 마음으로 기도합니다.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이 좀더 깊어지게 되면 영으로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기도하는 것을 신앙의 영적인 온도계와 같다고 표현했습니다.
사람은 37℃정도의 체온을 유지해야 하는데 이것을 유지하지 않으면 사람의 생명이 위태롭습니다. 체온이 25℃되면 사람이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37℃에서 2-3℃만 높아도 머리가 아프고, 정신이 혼미해 집니다. 성도는 영적인 체온을 유지해야 합니다. 기도로 말입니다. 기도안하는 교인도 이렇게 질병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결혼한 신랑신부의 몸이 사랑으로 뜨거워 졌을 때 애기가 생깁니다.
초대교인들은 오로지 기도에 힘썼습니다. 120명의 성도들이 마가의 다락방에서 예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내주기로 약속하신 성령의 강림을 기다렸습니다.
그들의 심령이 뜨거워 졌을 때 성령이 임하게 된 것입니다.

셋째로 전도에 더욱 힘쓰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요즘 우리 한국교회가 쇠퇴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비극이요, 슬픔입니다. 교회가 복음을 전하는 일에 대하여 관심을 갖지 아니하고 복음 전하는 기쁨을 상실하게 되면 그것은 교회의 위기입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 교회가 정체하며 정체할 뿐 아니라 퇴보하고 있는 중요한 이유는 우리 한국 교회가 영적으로 헛배가 불러 복음을 전하는 열정을 잃어버리고 복음을 전하는 선교의 기쁨을 잃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교회성장연구소(소장 홍영기)가 올해 3월 25일부터 60일 동안 전국 9개 지역에 살고 있는 만18세 이상 불신자 1,500명을 대상으로 개신교 전도 활동에 대한 의식을 조사한 결과, 한국교회가 전도에는 열심이나 방법은 효과적이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불신자 절반 이상 교회 다닌 경험 있다. 응답자 중 과거 교회에 출석한 경험이 있다고 답한 사람이 55.1%에 달했습니다.
불신자 중에 전도를 받은 경험이 있다고 답한 사람은 65.4%로 개신교(65.2)가 가장 전도율이 높았습니다. 카톨릭(15.2) 불교(13.7)이 뒤를 이었습니다. 가톨릭과 불교를 합쳐도 개신교에 미치지 못하는 결과입니다.
전도를 받을 때 긍정적인 느낌을 받았다는 사람은 14.0%였습니다. 부정적인 느낌을 받은 사람은 두 배가 넘는 36.0%, 별 느낌이 없었다고 답한 사람은 50.0%였습니다.
복음은 변하지 않지만 복음을 전하는 방법은 새로워야 합니다.
시대는 변했습니다. 복음은 변하지 않지만 그 복음을 전하는 방법은 이 시대에 맞는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어야 합니다.

한국에 온 초대 선교사들은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일본 사람들의 탄압과 한국 사람들의 무속 신앙으로 인한 반대와 불량배들의 행패들로 인하여 수많은 고통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을 의지하여 모든 것을 이기며 복음을 전함으로 우리나라의 1/4의 사람들이 예수 믿는 역사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초대 선교사인 마포삼열목사는 밤만 되면 불량배들과 유생들의 돌 세례로 곤욕을 치루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잔치집 마다 찾아다니며 술과 떡을 내 놓으라고 행패를 부리던 깡패가 있었는데, 마포삼열 선교사의 집에도 끈질기게 찾아와 돌을 던지며, 불을 지르는 그의 행패는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어느 때는 그가 던진 돌에 맞아 마포삼열 목사가 병원에 입원하기도 했습니다.
하루는 선교사의 집에 불을 지르고 도망치던 그가 다치게 되었는데 그 선교사가 찾아와 치료를 해주고 사랑을 베풀므로 감복하여 회개하고 예수를 믿게 되었으며, 평양 신학교를 나와 목사 안수를 받고 초대 제주도 선교사로 파송을 받았습니다. 그가 바로 일생동안 호남 지방에서 목회를 하다가 여수 돌산 앞 우학교회에서 신사참배를 반대 하다가 순교한 이기풍목사입니다.

전도인이 전하는 복음도 중요하지만 전하는 자의 인격도 중요합니다.
물론 메시지가 중요하지만 메신저도 중요한 것입니다.
만약에 전도인의 생활이 부도덕하고 불건전하며 위선적이면 "당신이나 바로 사시요"라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전도인의 삶에 모습은 물건을 사기전에 미리 보는 견본품이요, 또 영화의 예고편(豫告篇)입니다.
또 살아있는 전도지이며 불신자를 주님 앞으로 안내하는 이정표(里程標)인 것입니다.
생활 속에서 전도해야 합니다. 전도인이 전도대상자에게 생활속에서 '그리스도인의 인격'으로 친분을 맺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베풀면서 함께 그리스도 앞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의사의 생활과 인격은 환자에게 중요한 것은 아니며 변호사의 생활과 인격 또한 재판하는데 중요한 것이 못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인격은 전도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무더위가 고개를 떨구는 철을 맞아 다시 우리의 자세를 가다듬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의 자세로 돌이켜 주의 일에 더욱 힘쓰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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