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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열 명만 찾으시면... (창 18:2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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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하준 목사 (효자교회)

로마제국의 멸망원인

여러분, 제가 지금부터 이야기하는 나라가 어디인지 한번 맞춰보시기 바랍니다.

이 나라는 본디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손자 손녀가 어울려 함께 사는 대가족제도였지만 사회가 점차 발달하면서 대가족제도가 깨어지고 소가족제도로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들이 가정을 돌보지 않아서 가정에서 아버지의 권한이 상실되고 자녀들과 만나는 시간이 줄어들면서 점차 청소년 문제가 심각해졌습니다. 부부간에 외도와 성적인 타락으로 인해 이혼율이 급증하여 가정의 기반이 흔들리게 되었습니다.

지도자들은 시민들이 정치에 관심 갖는 것을 막기 위해 그들의 눈을 돌리려고 괘락과 유흥을 조장했습니다. 잔인한 격투기를 개최하고 목욕탕을 많이 지어 시민들이 쾌락과 유흥에 빠져들게 만들었습니다. 이 목욕탕은 매춘이 이루어지는 곳이었습니다.

과소비가 조장되어 세계 각국에서 들어오는 수입품을 애용하며 제 아무리 값이 비싸도 명품을 선호하는 명품족들이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사회 지도층들은 너도 나도 앞장서 호화로운 생활에 빠져들고 맛있는 음식을 탐하여 온 나라에 미식가들이 가득 넘쳐나게 되었습니다.

교회와 기독교 신자들은 점점 많아지고 최고 지도층에도 적지 않은 기독교신자들이 있었지만 이들은 백성을 위한 정치에는 관심이 없고 제각기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고 당리당략만을 추구하여 점점 백성들의 신망을 잃게 되었습니다. 교회도 힘을 잃고 일반 백성들에게 비난을 받게 됩니다. 이 나라는 어디일까요?

어떤 분들은 “아, 요즈음 우리나라가 이 모양 이 꼴이라는 이야기를 하는구나.” 생각하겠지만 지금까지 말씀드린 나라는 우리나라가 아니라 바로 멸망 직전의 로마제국의 모습입니다. 지금까지 설명한 내용은 바로 에드워드 기번(Edward Gibbon, 1737~1794)이라는 학자가 쓴 <로마제국 멸망사>라는 유명한 책에서 설명한 로마제국 멸망의 원인들입니다.

그는 역사상 최대의 대제국인 로마가 왜 망했는가, 그 멸망원인을 크게 5가지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이혼율 급증으로 인한 가정의 붕괴, 둘째는 과중한 세금과 세금의 남용, 셋째는 비정상적인 쾌락과 유흥의 추구, 넷째는 무분별한 군비 확장과 인구의 감소, 다섯째는 종교(엄밀하게 말하면 기독교)의 타락입니다. 놀랍게도 이 다섯 가지 이유들은 오늘날 우리 사회의 모습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처럼 느껴집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원인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말씀은 또 다른 도시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로마만큼은 아닐지 모르지만 엄청나게 부유하고 발달된 도시였는데 하루아침에 망하고 만 소돔과 고모라입니다.

창 13:10에 보면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삼촌과 헤어지면서 소돔과 고모라 땅을 선택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때 롯이 소돔과 고모라를 선택한 이유가 ‘온 땅에 물이 넉넉하고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즉 소돔과 고모라 땅이 무척 비옥하고 풍부한 땅이었다는 뜻입니다. 롯은 신앙적인 안목이 아니라 육신의 안목, 세상적인 기준을 따라 진로를 결정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개인과 가정의 불행이 시작된 것이지요. 우리가 인생의 중요한 결정을 할 때 어떤 안목, 어떤 기준을 가지고 하느냐가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런데 롯이 반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이렇게 잘 사는 땅, 비옥하고 풍부한 도시인 소돔 고모라가 하나님의 진노를 사 멸망하게 된 원인은 무엇일까요? 창세기 18:20에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중대하니...” 소돔과 고모라에 사는 백성들의 울부짖는 소리가 하나님에게까지 들려와서 도저히 용서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부르짖음은 무엇이고 그 심히 중대한 죄악은 무엇일까요? 그 죄악의 모습은 구체적으로 창세기 19장에서 설명됩니다. 하나님이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상을 살펴보기 위해 두 천사를 보냅니다. 이 천사들이 처음 만난 소돔 주민은 바로 롯이었습니다. 롯은 비록 육신의 안목에 따라 소돔 고모라에 거하게 되었지만 그래도 아직은 신앙이 남아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 두 천사를 집으로 모셔 극진히 대접합니다. 그런데 그날 밤 롯의 집에 손님이 왔다는 소문을 듣고 그 성 사람들이 몰려옵니다. 우리 성에 손님이 오셨다고 환영하려고 모인 것이 아니라 엉뚱한 짓을 하려고 모인 것입니다. 5절에는 이 사람들의 요구가 나옵니다. “이 저녁에 네게 온 사람이 어디 있느냐 이끌어내라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 여기서 ‘상관한다.’는 말은 성적인 관계를 의미합니다. 이 나그네들과 동성애를 할 테니 끌어내라는 뜻입니다. 게다가 4절에는 그 성 사람이 무론노소하고 다 몰려왔다고까지 말합니다. 온 동네 사람들이 늙은이든 젊은이든 할 것 없이 다 몰려와 동성애를 요구하고 나섰다는 뜻이지요. 그래서 영어에도 소돔 사람들을 뜻하는 ‘sodomy’라는 낱말이 동성애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장면은 소돔과 고모라가 얼마나 성적으로 타락했는지를 보여줍니다. 마치 세계를 제패하고 경제적 풍요에 들떠있던 로마제국이 환락과 쾌락산업이 발달하고, 극도의 성적타락으로 가정이 붕괴하여 멸망당한 것처럼 오늘 이 소돔과 고모라도 비록 경제적으로 풍요한 도시였지만 이렇게 엄청난 성적타락에 빠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한 두 사람 소수가 아니라 온 백성이 다, 늙은이나 젊은이나, 어른이나 애들이나, 남자나 여자나 할 것 없이 모두 타락한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망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열명의 의인이 없어서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는 결정적인 멸망의 이유는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나타납니다. 바로 그 도시 소돔과 고모라에서 하나님이 단 열 명의 의인도 찾지 못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어느 나라, 어느 사회나 반드시 문제는 있게 마련입니다. 망할만한 이유를 찾아보면 그런 원인이 없는 나라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그 나라, 그 사회가 안 망하는 이유는 백성들이 죄를 짓지 않았기 때문도 아니고, 안 망할 만큼 의롭고 훌륭해서도 아니다. 그 나라들도 다 문제가 있고 충분히 망할만한 이유들이 있다. 다만 한 가지 차이는 그 나라에, 그 사회에 의인이 몇 명이나 있느냐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만약에 의인 열명만 찾으실 수 있다면 그 나라, 그 사회는 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의인을 단 열 명이라도 찾으면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지 않겠다고 아브라함과 약속하셨기 때문에 천사들을 보내 소돔과 고모라를 살펴보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야말로 무론노소하고 다 몰려와 서로 상관하겠다고 다투는 소돔 주민들을 본 천사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하나님께 돌아가서 어떤 보고를 했을까요? “하나님, 이 소돔 고모라에는 더 이상 소망이 없습니다. 열명은커녕 단 한 명의 의인도 찾기 어려운 성입니다. 이 두 성을 이제 완전히 끝장내 버리십시오.” 이렇게 멸망선언을 했을 것입니다.




2004년 대한민국의 모습은?

지금까지 로마제국과 소돔 고모라의 멸망원인에 대해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이 두 나라 이야기를 하다보니 여러분도 분명히 느껴지는 것이 있으실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나라 이 사회가 바로 이 로마와 소돔 고모라의 복사판처럼 보인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나라의 모습이 지금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뼈저리게 느끼고 공감하고 계실 테니 제가 길게 이야기하지는 않겠습니다. 에드워드 기번이 제시한 로마제국 멸망의 다섯 가지 원인만 봐도 오늘날 우리 사회가 그 뒤를 고스란히 따라가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이혼율 급증으로 인한 가정의 붕괴, 과중한 세금과 세금의 남용, 비정상적인 쾌락과 유흥의 추구, 무분별한 군비 확장과 인구의 감소, 종교, 그 중에서도 기독교의 타락 말입니다. 어느 하나 다른 것이 있나요? 어느 하나 우리나라가 예외인 사항이 있나요? 멀리 갈 것도 없이 우리 주변만 둘러보면 이 사회를 지배하는 쾌락과 유흥의 물결, 성적인 타락과 가정의 붕괴가 분명히 보입니다. 소돔 고모라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은 도덕적 타락이 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어디부터 썩었는지, 완전히 뿌리 채 썩어버린 이 사회를 바라보며 저는 참 이상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뭐가 이상합니까? 만약 이런 기준으로만 따지자면 우리나라도 벌써 몇 번은 망해야 마땅합니다. 그 대제국 로마도 이런 이유들 때문에 망하고 소돔과 고모라도 유황불에 망했다면 우리나라는 왜 아직 안 망하고 있는 것일까?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이 나라의 위기를 지적하고 이러다가 우리 큰일 난다고 경고를 하는데 비록 비틀비틀 위태롭기는 하지만 그래도 아직 멀쩡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 질문에 대해서는 오늘 성경이 분명히 대답해 줍니다. 아직 우리 사회가 망하지 않는 것은 단 하나, 아직도 이 땅에 의인 열명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소돔 고모라는 의인 열명이 없어서 유황불로 태워졌지만 그래도 이 땅에는 아직 의인 열명이 남아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멸하시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오늘은  6.25전쟁이 난지 54돌이 되는 6.25 기념주일입니다. 우리는 6.25 기념주일을 맞으면서 이런 생각을 해보아야 합니다. 이 나라 이 민족이 6.25라는 엄청난 비극을 겪고도 오늘 이렇게 발전하고 하나님의 복을 받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분명 이 땅에 아직은 의인이 열 명 이상 남아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의인 열명은 누구인가?

그렇다면 이제 한 가지 질문이 더 남아있습니다. 과연 우리나라를 아직 망하지 않게 지탱해준 이 열명의 의인은 누구일까요? 성경은 먼저 우리들 자신이 그 의인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소돔과 고모라를 망하지 않게 하려고 애타게 간구하는 아브라함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바로 이런 자세를 가진 사람을 성경은 의인이라고 부릅니다. 사실 소돔과 고모라가 망한 이유는 이 아브라함 같은 사람, 아브라함 같은 신앙의 자세를 가진 사람이 열명도 아니, 단 한명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왜 아브라함이 의인입니까? 창 15:6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의롭게 여기신 것은 그가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만 이야기한다면 세상에 하나님 믿는 사람은 다 의인입니다. 하지만 로마가 망할 때 로마에도 엄청나게 많은 크리스천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어디 그뿐입니까? 로마의 국교가 기독교였습니다. 황제도 기독교의 신성한 수호자임을 자처했습니다. 그런데 왜 로마가 망했을까요? 그렇게 기독교인이 많고 그렇게 의인이 많은데 말입니다. 에드워드 기번의 지적 중 다섯 번째는 매우 역설적인 설명을 합니다. “기독교가 타락해서 로마가 망했다!” 그는 로마에서 핍박 받던 기독교가 오히려 로마의 국교가 되면서 타락했고 이 때문에 로마가 망했다고 정확하게 지적합니다. 기독교는 본디 권력지향적인 종교가 아닙니다. 만약 그랬다면 예수님도 목수의 아들이 아닌 왕의 아들로 오셨을 테지요. 기독교가 권력과 야합하는 순간 기독교는 타락합니다. 기독교는 다수의 논리를 따르지 않는 종교입니다. 숫자만 많으면 만사 오케이다? 아닙니다. 오히려 기독교가 국교가 되고 온 국민이 의무적으로 기독교를 믿어야 한다고 결정한 그 순간부터 기독교는 타락하기 시작했습니다. 기독교는 비록 소수일지라도 그 능력을 잃지 않고 있을 때 큰 힘을 발휘하는 종교입니다.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이런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한 나라의 역사는 다수가 아니라 창의적인 소수에 의해 만들어진다.” 맞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도 말할 수 있습니다. “신앙의 역사도 하나님 앞에 바로 선 소수가 이끌어간다!” 그래서 오늘 하나님은 소돔과 고모라에서도, 그리고 로마에서도, 또한 오늘 우리나라 우리 사회에서도 이 하나님 앞에 바로 선 소수를 찾으시는 것입니다. 이들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가기 위해서 말입니다. 이 창의적인 소수, 이 하나님 앞에 바로 선 소수, 바알에게 아직 무릎 꿇지 아니한 소수(왕상 19:18, 롬 11:4)를 성경은 의인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성경이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을 믿은 사람, 타락하지 않고 세상의 흐름에 휩쓸리지 않고 하나님 앞에 바로 선 소수를 의인이라고 부르지만 또한 아브라함과 같이 나라와 민족을 위한, 백성들을 위한 간절한 심정을 가진 사람을 의인이라고 부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천사들을 대접할 때 하나님의 계획을 듣게 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소돔과 고모라를 끝장내러 가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은 정말 깜짝 놀랍니다. 그 성에는 지금 조카 롯이 살고 있지 않은가? 게다가 아무리 사악한 소돔과 고모라라 할지라도 적어도 거기 의인이 몇 사람은 남아있지 않겠는가? “하나님, 그 의인들을 악인과 함께 멸하시려 하십니까?”

하나님이 물으십니다. “그러면 내가 어떻게 하랴? 만약 그 성에서 의인을 50명만 찾으면 내가 용서하리라.” 단 50명의 의인만 찾으시면 온 성을 멸망시키지 않고 용서하시겠다는 파격적인 제안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마음속에 슬며시 걱정이 생깁니다. “설마 그 큰 도시에 설마 의인이 50명이 없을까? 아니야, 50명에는 조금 부족할지도 몰라. 그러니까 다섯 명만 줄이자.” 그래서 “50명 중에 다섯 명 부족하면, 즉 45명만 의인을 찾으시면 멸하지 않으시겠습니까?”하고 묻습니다. 하나님은 그러마 대답하십니다. 하지만 또 아브라함의 마음속에 걱정이 생깁니다. “그래도 몇 명 부족하면?” 그래서 점점 숫자가 내려갑니다. “40명이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좋다, 멸망시키지 않으마.” 또 열 명이 줄어듭니다. “그러면 30명이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좋다, 멸망시키지 않으마.” “20명이면?” “10명이면?” 결국 10명까지 줄어듭니다. 하나님은 소돔과 고모라에서 의인 단 열명만 찾으시면 멸망시키지 않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오늘 이 장면은 결코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거래하고 타협하는 내용이 아닙니다. 잘못 생각하면 우리도 하나님과 이렇게 타협하고 거래할 수 있는 것처럼 여길 수 있습니다만 그것은 아닙니다. 본문은 아브라함의 자세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정말 조카 롯을 포함해 그래도 소돔과 고모라에 의인이 몇 명은 남아 있을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정말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당하지 않기 바라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간절히 구합니다.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시려나이까?” 비록 내 조국도 아니요, 조카가 산다는 것 외에는 나와 아무런 상관도 없는 도시들이지만 그 도시가 망하는 것이 정말 안타까워 이렇게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입니다. 이 숫자가 점점 줄어드는 것은 아브라함의 안타까움과 간절함을 보여주는 숫자입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의 조국 대한민국을 위해, 우리의 민족과 우리가 사는 이 사회를 위해 이렇게 안타까움과 간절함을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하십니까?

다함께 창 19:29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본문에서 분명히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들의 성들을 멸하실 때 곧 롯의 거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어 보내셨더라.”(창 19:29) 누구를 생각하사? 하나님이 누구를 생각해서 롯을 구해주셨다고 했습니까? 소돔과 고모라 백성 모두가 유황불로 타죽는 순간에 하나님이 롯과 그 딸들을 구해주신 이유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롯이 예뻐서 구해주신 것이 아닙니다. 앞서도 말씀 드렸지만 롯은 육신의 안목을 따라 잘못된 선택을 한 사람입니다. 어리석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는 구원 받을만한 어떤 자격도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그를 구해주신 것은 순전히 아브라함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의인이었던 아브라함이 그 안타까운 심정으로, 간절한 마음으로 구했기에 하나님은 롯을 구해주신 것입니다. 비록 소돔과 고모라에 열명의 의인이 없어 멸망당했지만, 또 롯도 결코 그 의인에 들어가지 못했지만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과 의를 생각하사 롯과 딸들을 구해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대단히 중요한 원리입니다.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습니다(약 5:16). 아브라함이 의인으로서 간구할 때 하나님이 응답하신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 열 명을 키우자

마지막으로 설교를 맺으면서 이런 결론을 내려봅니다.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이 나라 이 민족을 위해 간구하는 의인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의인들로 말미암아 이 나라 이 민족이 하나님 앞에 바로 서고 유지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이 나라가 앞으로 오고 오는 날 동안 계속 서기 위해서는 후대를 키워야 합니다. 우리만으로 역사가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후대를 안 키워서, 후계자를 잘 못 키워서 실패하는 경우를 얼마나 많이 봅니까? 정치인들도, 기업가들도, 심지어 교회들도 자기 때만 영화를 누리지 후계자를 안 키워서 실패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앞날을 내다볼 줄 몰라서입니다. 자기만 영광 받고, 자기만 성공하면 모든 일이 끝나는 줄 알고 미래를 준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의인의 역사가 우리 당대로만 끝나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오고 오는 세대를 위해, 이 나라와 이 민족과 이 교회의 미래를 위해 이 열 명의 의인을 계속해서 키워나가야 합니다. 그 일을 누가 할까요? 바로 우리 믿는 사람들이 해야 합니다. 그 일을 누가 책임질까요? 바로 우리 효자교회가 해야 합니다. 저는 이런 꿈을 꿉니다. 우리의 자녀들 중에서, 또 우리의 자녀의 자녀들 중에서 이 나라와 이 민족을 이끌어갈 위대한 지도자들이 나오는 꿈입니다. 지금까지의 지도자들처럼 자기밖에 모르고 당리당략만 일삼으며 진실하지 못하고 성실하지도 못하고 추악한 일들을 관행처럼 되풀이해온 그런 지도자들 말고 정말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정직하고 성실하고 의로운 그런 지도자들 말입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내 자녀들과 우리 교회의 자라는 세대들, 어린이 청소년 청년들을 위해 정말 많이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아낌없이 투자하고 키워줘야 합니다. 그래서 그 방법 중의 하나로 저는 내년부터 우리 교회에 효자장학회를 만들고 장학헌금을 본격적으로 시작할 구상을 하고 있습니다. 장학헌금은 제가 제일 먼저 할 것입니다. 이 장학금은 작은 시작에 불과하지만 분명한 것은 의인은 결코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키워내야 합니다. 그 일을 바로 우리가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그들이 자라 이 나라의 진정 존경받는 지도자가 되었을 때 “누가 당신을 이렇게 키워주었나요?” 하고 물어보면 “우리 부모님입니다.” 하는 대답도 물론이지만 “효자교회가 저를 이렇게 키워주었습니다.” 하고 대답할 수 있는 효자교회 출신의 의인들, 이 나라 이 민족의 위대한 지도자들 신앙인들 위인들이 나오는 그런 꿈을 저는 꿉니다. 그들을 통해 나의 조국 대한민국이 발전하고 송두리째 변화되고 하나님의 엄청난 복과 은혜를 받아 누리는 그런 꿈을 꿉니다. 오늘 6.25기념주일을 맞아 이 꿈이 바로 여러분의 꿈이 되고 우리 효자교회의 꿈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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