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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버지가 있는 교회(예수님이 원하시는 교회) (눅 15: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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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은호 목사 (높은뜻 숭의교회)

지난번 설교에서는, 예수님이 원하시는 교회는 “아버지가 없는 교회이다”는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 때 말씀드린 ‘아버지’의 의미가 무엇인지 기억하시는 분이 혹 계시는지요? 그 때 저는 마태복음 23, 9을 본문삼아 말씀을 드렸습니다.

“땅에 있는 자를 아버지라 하지 말라. 너희의 아버지는 한 분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이시니라”(마23, 9)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고자 하신 부정적인 ‘아버지’의 의미는 가부장적(家父長的)인 ‘지배의 상징성’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남을 지배하고 다스리고자 하는 그 의식과 정신을 버려야 한다는 겁니다. 남보다 더 강한 자와 힘 있는 자의 위치에서 보다 약한 자를 다스리고 지배하고자 하는 ‘의식’과 ‘정신’이 있는 곳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존재할 수 없고, 예수님이 원하시는 교회가 존재할 수 없다는 겁니다.

오늘은, 그와는 정반대로 예수님이 원하시는 교회는 “아버지가 있는 교회”라는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어떤 아버지가 있는 교회가 예수님이 원하시는 교회일까, 어떤 아버지가 있는 교회가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와 같은 교회가 될 수 있는 것일까?

복음서를 통해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처음으로 가르쳐 준 ‘하나님’이 있습니다. 그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실까요?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가 처음 배운 하나님은 ‘아버지이신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이 사실은, 우리의 신앙과 삶, 우리 인생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는 가치변화의 사건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믿을 것인가? 어떻게 하나님을 이해할 것인가에 대한 역사적이고도 근본적인 새로운 변화를 요구하시는 ‘복음사건’이기도 합니다.

일전에, 몇 해 전에 결혼주례를 해주었던 부부의 식사초청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아들 둘을 둔 가정과 딸 하나를 둔 두 가정이 함께 만났습니다. 철부지로만 생각했던 그들이 아이를 낳고 기르면서 사는 모습이 그렇게 아름답고 행복해 보일 수가 없었습니다. 같이 밥을 먹는 동안 모인 우리들의 주관심사는 당연히 아이들이었습니다. 아이들이 밥을 잘 먹는가? 어떻게 밥을 먹는가? 아이들의 표정 하나 하나, 행동 하나 하나 말 한 마디에까지 우리들의 온 관심이 집중되었습니다.

그 때, 제가 한 가지 발견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이들의 부모들을 보니까, 웃고, 얘기하고, 밥 먹으면서도 부모들이 알게 모르게 꽤 신경 쓰는 것 한 가지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니 신경을 쓰는 정도가 아니라 확신을 가지고 있는 것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그게 뭘까요? 제가 느끼기로는, 부모들이 가장 예민하게 반응하고, 확신을 가지고 것은 자기 아이가 누구를 닮았는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대게 아이 키우는 부모들이 자기 아이가 ‘엄마 닮았다’, ‘아빠 닮았다’, 혹은 ‘할아버지 닮았다’, ‘할머니 닮았다’, ‘삼촌 닮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부모들을 유심히 관찰해 보면, 정작 관심을 가지고 있는 건 아이가 누구를 닮았느냐에 있지 않습니다. 아이가 누구를 닮았든지 그게 그들에게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섭섭하게 생각하는 것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아이가 “엄마, 아빠 하나도 안 닮았네”하는 말입니다. 그 말은 아이의 부모에게 가장 섭섭한 말이기도 하고, 때로는 상처가 되는 말이기도 합니다.

저는, 아이의 부모가 섭섭하게 생각하고 상처받을 수도 있는 그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압니다. 그건, 아이의 외모(外貌)가 자기들을 전혀 닮지 않았다는 것에 대한 섭섭함이 아닙니다. 보이는 외모는 닮은 구석이 하나 없어도, 김동리 선생님의 소설처럼 겨우 ‘발가락이 닮았다’ 할지라도, 내가 내 자식을 내 생명처럼 여기고 사랑하고 있는데,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과 자식귀함을 몰라주는 것에 대한 섭섭함입니다. 우리 집 큰 아이가 딸입니다. 날 때부터 덩치가 좀 큰 편이었는데, 첫 돌 때 몸무게가 13kg이나 되었습니다. 아이를 안고 동네 나가면 사람들이, “하 그놈 장군감이네”라는 말을 많이 들었는데, 그래도 제 아내 눈치를 보니까 자기 딸이 최고로 예쁜 줄로만 아는 듯 했습니다. 아이가 예쁘냐 예쁘지 않느냐 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과는 큰 상관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같이 동역하던 목사님 부인 중에 한 분이, 그랬답니다. 물론 우스게 소리였겠지만, “나는 딸 낳으면, 효민이 같이 키우지 않고 예쁘게 키우겠다”고 하셨던 가 봅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인데, 그 말 때문에 제 아내가 꽤 상처를 받았던 가 봅니다. 그 상처는, 아이가 이쁘지 않아서가 아니라, 아이를 사랑하는 엄마의 마음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그런 경험이 있기 때문에, 저는 아이들을 볼 때 아이가 누구를 닮았는가 보다, 엄마 아빠가 아이를 어떻게 얼마나 사랑하는가를 먼저 보려고 애씁니다. 그러고 보면, 그 아이가 누구들 닮았든지, 어떻게 생겼든지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그렇게 예쁘고, 귀하고,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시는 저와 여러분의 ‘아버지’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교회는,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와 같은 ‘아버지’가 있는 교회입니다. 더 분명하게 말씀드리면, 우리 교회가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와 같은 교회가 되려면, 하나님께서 ‘해’를 惡人과 善人에게 비추시고 ‘비’를 義로운 자와 不義한 자에게 내려주시는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같은 ‘하나님의 자비(慈悲)’가 있는 교회가 되어야만 합니다(마태복음 5, 45 ; 7, 9-10).

저는, 교회를 목회하는 ‘목회자에게’도 이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그 삶의 중심에 ‘하나님 아버지 마음’,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회복하는 데서부터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이루는 하나님 나라를 사는 삶의 첫 걸음이 시작된다고 봅니다.

목회하는 목사가 어떤 마음을 품고 목회하느냐? 참 중요한 문제입니다. 改革者의 마음을 품고 목회하면, 모든 사람들이 다 개혁의 대상으로만 보입니다. 先生의 마음을 품고 목회하면, 모든 사람이 다 가르침의 대상으로만 보입니다. 經營者의 마음을 품고 목회를 하면, 모든 사람들이 다 평가의 대상이 됩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마음을 품고 목회하면, 모든 사람들이 다 사랑의 대상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탕자蕩子의 비유’라는 말씀입니다. 그 비유 속에서 우리 인간을 향하신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인가를 보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문제제기를 해 보아야 합니다. 그것은 누가복음 15, 11-24의 비유를 과연 흔히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탕자蕩子의 비유’라고 말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아버지의 재산 중 자기에게 돌아올 분깃을 가지고 집을 나간 둘째 아들을 ‘탕자라고 보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탕자가 아니라 여전히 그는 ‘아버지의 아들’입니까?

왜 이것이 중요한가 하면, 이 비유를 통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고자 하시는 복음의 핵심이, 바로 이 문제에서부터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아들이 ‘탕자’인가? 아니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아버지가 변함없이 사랑하고 귀히 여기고 있는 ‘아버지의 아들’인가? 이것이, 이 비유를 통해서 말씀하고자 하시는 예수님의 복음의 핵심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이 비유를 주의 깊게 읽고 관찰하면서, 예전에는 저도 아버지를 떠난 둘째 가 우리가 흔히 말하는 것처럼 인간쓰레기 같은 ‘탕자’인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탕자’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이 비유를 통해서 아버지가 집나간 그 둘째를 이미 용서하였고, 여전히 그를 사랑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가 언제 돌아올 것인가를 학수고대(鶴首苦待)하면서 기다리고 있는 아버지의 ‘변함없는 아들’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비유를 통해서 예수님이 말씀하고자 하시는 복음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둘째는 탕자가 아니라 아들이다. 그 아들을 여전히 기다리고 계시는 아버지 하나님, 그 하나님의 자비를 말씀합니다.

집 나간 둘째의 아들의 행위나 삶은, 틀림없는 탕자입니다. 죄인입니다. 더 이상 소위 말하는 하나님의 선민 유대인이 아니라 ‘개 같은 異邦人’이 되어버린 자입니다. 그가 굶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서 돼지 치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곧 회복이 불가능한 ‘이방인’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돼지는, 유대인들이 가장 불결하게 생각하는 짐승이고, 혐오식품이요, 부정한 것입니다. 그가 돼지를 칠 뿐만 아니라,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를 먹는 절망적인 존재가 되었다는 것은, 더 이상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죄인이요, 구제불능의 절망적인 존재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그대로, 그는 탕자 중의 탕자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비유 속에서 예수님은 아버지가 집 나간 그 둘째를 탕자로 여기지 않고, 여전히 변함없는 아들이라고 말씀합니다. 바로 그 ‘아버지의 마음’이 저와 여러분을 살리고 회복시키고, 온전케 하는 복음입니다. 그 복음 때문에 우리는 당당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겁니다. 그 복음은, 바로 하나님의 자비하심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아버지의 자비하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눅 6, 36). 바로 이것이 예수님이 선포하시는 하나님 나라 복음의 핵심입니다. 이 자비(慈悲)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 ‘아버지 마음’의 본질입니다.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품어야 할 가장 중요한 복음의 본질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미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이해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었고, 우리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오늘 21세기 한국교회도 마찬가지이고, 예수님 당시 1세기 유대사회 유대종교, 유대전통도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본받기 보다는, 그들이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본받은 제 1차적인 신앙과 신학과 삶의 규범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이었습니다(레 19, 2).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같이 너희도 거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이 오시기 전 2,000년 동안의 유대인들의 삶과 신앙과 기준설정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을 통해서 당시 유대사회, 유대종교, 유대전통과 예수님이 선포하셨던 하나님 나라의 복음사역 사이에 있었던 많은 갈등적인 요소를 보게 됩니다. 그 갈등의 뿌리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을 닮으려는 서로 다른 기준(Imitatio Dei)’ 때문입니다. 당시 유대종교와 유대사회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닮으려고 했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하나님을 닮는 가장 중요한 하나님 모방의 기준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닮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닮아야 한다고 선포하셨습니다(눅 6, 36). 왜냐하면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하나님의 나라 복음"의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아시는 대로 당시의 지배적인 유대사회와 유대종교의 비전은 ‘거룩함/ 정결’입니다. 그것이 사회/정치/종교의 기준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통해서 선포된 ‘하나님의 나라’와 代案的인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의 비전은 거룩과 정결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당시의 유대사회와 유대종교의 핵심가치였던 ‘거룩과 정결’을 ‘하나님의 자비’로 대체(代替)하셨다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보는 바와 같이 ‘거룩과 정결’의 가치 구조 속에서는, 언제나 정결한 것과 불결한 것/ 의인과 죄인/ 완전함과 불완전함/ 남자와 여자/ 부자와 가난한 자/ 유대인과 이방인/ 건강한 자와 병든 자/ 간의 이분법적(二分法的)인 경계(境界)가 존재합니다. 그 二分法的인 경계가 변질되고 왜곡된 가치기준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 됨과 화합보다는 분리와 배재와 철저한 배타성이라는 것이 존재합니다. 그래서 거기에는 언제나 판단과 정죄와 심판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해와 용서와 수용과 받아들임이 없습니다. 이것은 이것이고, 저것은 저것이라는 것 밖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 중간이나, 그 둘의 변화나 새로운 가능성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판단과 정죄와 심판으로 끝이 나고 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비’로 오는 ‘하나님의 나라’는, 비록 지금은 서로 같지 않아도, 달라도, 불완전해도, 문제가 있어도, 또 불가능해 보여도, 언제나 그 안에는 용서의 기회가 있습니다. 기다림의 시간이 있습니다. 인내가 있습니다. 분리가 목적이 아니라 둘이 하나 되기 위한 서로 서로 간의 적극적인 변화와 새로운 가능성이 존재합니다. 배타적이지 않습니다. 나와 다른 그도 함께 품을 수 있는 포용과 수용의 자리가 있습니다. 그 자비(慈悲) 안에서 불완전(不完全)함이 회복이 되기도 합니다. 아픔이 치유가 됩니다. 절망적이었던 사람이 희망적인 사람으로 변화가 됩니다. 죽어 마땅한 사람이지만 새 생명을 얻어 사는 생명의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 자비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회복해야 할 가장 중요한 "복음", 집 나간 둘째 아들을 탕자로 여기지 않고, 그를 여전히 아들로 여기면서 기다리고 계시는 아버지의 마음, 곧 ‘하나님의 자비’입니다. 목회자의 마음도 그렇습니다. 교우들의 마음도 그렇습니다. 이 마음이 없이는 교회를 교회답게 할 수가 없습니다. 아니, 이 마음이 없는 모임이나 그룹, 그런 교회는 교회가 아닙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얼마나 역설적인 말씀을 하셨습니까?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한 당시의 ‘稅吏들’과 ‘娼妓들’이 ‘義人들’이라고 자부하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보다 하나님의 나라에 먼저 들어가는 그런 ‘자비로운 하나님 아버지의 나라’, 그 ‘하나님의 나라’를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마 21, 31) 세리와 창기들은 죄인들입니다. 죄인이라는 말의 의미는, 당시 유대종교사회 가치로 볼 때, 정결치 못한 사람들, 깨끗지 못한 사람들, 더러운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바로 그들까지도 품어 안을 수 있는 자비로운 나라라는 겁니다.

바리새인들이나 사두개인들과 서기관들은 세리와 창기들이 자기들보다 먼저 들어가는 그런 ‘하나님의 나라’를 도무지 이해할 수도 없었고, 그런 하나님의 나라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나라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바로 그런 나라입니다. 교회가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가 되려면,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닮은 아버지 마음을 품은 목회자들과 교우들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가정이 ‘하나님의 나라’가 되려면, 탕자와 같은 자식이라 할지라도 여전히 아들로 여기고, 그를 기다리고, 사랑하고 용서해 주는 자비로운 아버지 마음을 가진 부모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아직도 우리 안에 있는 바리새적이고 사두개적이고 서기관적인 ‘거룩’과 ‘정결’의 신앙을 버려야 합니다. 집 나간 탕자까지도 여전히 사랑하시고, 아들로 여기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자비하심을 닮지 않으면, 저와 여러분 안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질 수가 없습니다. 그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우리 안에 없다면, 우리는 주님이 원하시는 교회를 이룰 수가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집 나간 둘째 아들뿐만 아니라 집안에 있는 맏아들까지도 동일하게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자비하심을 새롭게 닮아 가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를 기대합니다(눅 6, 36).


지난번에, 예수님이 원하시는 교회는 “아버지가 없는 교회이다”는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 때 말씀드린 ‘아버지’의 의미가 무엇인지 기억하시는 분이 혹 계시는지요? 그 때 저는 마태복음 23, 9을 본문삼아 말씀을 드렸습니다.

“땅에 있는 자를 아버지라 하지 말라. 너희의 아버지는 한 분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이시니라”(마23, 9)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고자 하신 부정적인 ‘아버지’의 의미는 가부장적(家父長的)인 ‘지배의 상징성’을 말합니다. 남을 지배하고 다스리고자 하는 그 의식과 정신을 버려야 한다는 겁니다. 남보다 더 강한 자와 힘 있는 자의 위치에서 보다 약한 자를 다스리고 지배하고자 하는 ‘의식’과 ‘정신’이 있는 곳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존재할 수 없고, 예수님이 원하시는 교회가 존재할 수 없다는 겁니다.

오늘은, 그와는 정반대로 예수님이 원하시는 교회는 “아버지가 있는 교회”라는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어떤 아버지가 있는 교회가 예수님이 원하시는 교회일까, 어떤 아버지가 있는 교회가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와 같은 교회가 될 수 있는 것일까?

복음서를 통해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처음으로 가르쳐 준 ‘하나님’이 있습니다. 그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실까요?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가 처음 배운 하나님은 ‘아버지이신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이 사실은, 우리의 신앙과 삶, 우리 인생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는 가치변화의 사건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믿을 것인가? 어떻게 하나님을 이해할 것인가에 대한 역사적이고도 근본적인 새로운 변화를 요구하시는 ‘복음사건’이기도 합니다.

일전에, 몇 해 전에 결혼주례를 해주었던 부부의 식사초청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아들 둘을 둔 가정과 딸 하나를 둔 두 가정이 함께 만났습니다. 철부지로만 생각했던 그들이 아이를 낳고 기르면서 사는 모습이 그렇게 아름답고 행복해 보일 수가 없었습니다. 같이 밥을 먹는 동안 모인 우리들의 주관심사는 당연히 아이들이었습니다. 아이들이 밥을 잘 먹는가? 어떻게 밥을 먹는가? 아이들의 표정 하나 하나, 행동 하나 하나 말 한 마디에까지 우리들의 온 관심이 집중되었습니다.

그 때, 제가 한 가지 발견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이들의 부모들을 보니까, 웃고, 얘기하고, 밥 먹으면서도 부모들이 알게 모르게 꽤 신경 쓰는 것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아니 신경을 쓰는 정도가 아니라 확신을 가지고 있는 것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그게 뭘까요? 제가 느끼기로는, 부모들이 가장 예민하게 반응하고, 확신을 가지고 것은 자기 아이가 누구를 닮았는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대게 아이 키우는 부모들이 자기 아이가 ‘엄마 닮았다’, ‘아빠 닮았다’, 혹은 ‘할아버지 닮았다’, ‘할머니 닮았다’, ‘삼촌 닮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부모들을 유심히 관찰해 보면, 정작 관심을 가지고 있는 건 아이가 누구를 닮았느냐에 있지 않습니다. 아이가 누구를 닮았든지 그게 그들에게 아무런 문제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섭섭하게 생각하는 것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아이가 “엄마, 아빠 하나도 안 닮았네”하는 말입니다. 그 말은 아이의 부모에게 가장 섭섭한 말이고, 상처가 되는 말이기도 합니다.

저는, 아이의 부모가 섭섭하게 생각하고 상처받을 수도 있는 그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압니다. 그건, 아이의 외모(外貌)가 자기들을 전혀 닮지 않았다는 것에 대한 섭섭함이 아닙니다. 보이는 외모는 닮은 구석이 하나 없어도, 김동리 선생님의 소설처럼 겨우 ‘발가락이 닮았다’ 할지라도, 내가 내 자식을 내 생명처럼 여기고 사랑하고 있는데,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과 자식귀함을 몰라주는 것에 대한 섭섭함입니다. 우리 집 큰 아이가 딸입니다. 어릴 때부터 덩치가 좀 큰 편이었는데, 첫 돌 때 몸무게가 13kg이나 되었는데, 사람들이 딸인 저희 아이를 장군이라고 했습니다. 그래도, 제 아내 눈치를 보니까 자기 딸이 최고로 예쁜 줄로만 아는 듯 했습니다. 예쁜 것 하고 사랑하는 것하고는 큰 상관이 없는데….

그런데, 같이 동역하던 목사님 부인 중에 한 분이, 그랬답니다. 물론 우스게 소리였겠지만, “나는 딸 낳으면, 효민이 같이 키우지 않고 예쁘게 키우겠다”고 하셨던 가 봅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인데, 그 말 때문에 꽤 상처가 되었던 가 봅니다.
그래서 저는 아이들을 볼 때, 아이가 누구를 닮았는가 보다, 엄마 아빠가 아이를 어떻게 얼마나 사랑하는가를 먼저 보려고 애씁니다. 그러고 보면, 그 아이가 누구들 닮았든지, 어떻게 생겼든지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그렇게 예쁘고, 귀하고,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생각하시는 저와 여러분의 ‘아버지’이십니다. 아무리 부모가 자식을 사랑한다 해도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과 우리 인간을 창조하시고 이 역사와 우주만물을 섭리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비교할 수가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교회는,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와 같은 ‘아버지’가 있는 교회입니다. 더 분명하게 말씀드리면, 우리 교회가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와 같은 교회가 되려면, 하나님께서 ‘해’를 惡人과 善人에게 비추시고 ‘비’를 義로운 자와 不義한 자에게 내려주시는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같은 ‘하나님의 자비(慈悲)’가 있는 교회가 되어야만 합니다(마태복음 5, 45 ; 7, 9-10).

저는, 교회를 목회하는 ‘목회자’도 이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도 그 삶의 중심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마음’,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회복하는 데서부터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이루는 하나님 나라를 사는 삶의 첫 걸음이 시작된다고 봅니다.

목회하는 목사가 어떤 마음을 품고 목회하느냐? 참 중요한 문제입니다. 改革者의 마음을 품고 목회하면, 모든 사람들이 다 개혁의 대상으로만 보입니다. 先生의 마음을 품고 목회하면, 모든 사람이 다 가르침의 대상으로만 보입니다. 經營者의 마음을 품고 목회를 하면, 모든 사람들이 다 평가의 대상이 됩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마음을 품고 목회하면, 모든 사람들이 다 사랑의 대상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가장 잘 볼 수 있는 사건이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탕자蕩子의 비유’라는 말씀입니다. 그 비유 속에서 우리 인간을 향하신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인가를 보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문제제기를 해 보아야 합니다. 그것은 누가복음 15, 11-24의 비유를 과연 흔히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탕자蕩子의 비유’라고 말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아버지의 재산 중 자기에게 돌아올 분깃을 가지고 집을 나간 둘째 아들을 ‘탕자라고 보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탕자가 아니라 여전히 그는 ‘아버지의 아들’입니까?

왜 이것이 중요한가 하면, 이 비유를 통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고자 하시는 복음의 핵심이, 바로 이 문제에서부터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아들이 ‘탕자’인가? 아니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아버지가 변함없이 사랑하고 귀히 여기고 있는 ‘아버지의 아들’인가? 이것이, 이 비유를 통해서 말씀하고자 하시는 예수님의 복음의 핵심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이 비유를 주의 깊게 읽고 관찰하면서, 지금까지 제가 아버지를 떠난 둘째 가 우리 모두가 말하는 것처럼 인간쓰레기 같은 ‘탕자’인줄로만 알았는데, 그런 그가 ‘탕자’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이 비유를 통해서 아버지가 집나간 그 둘째를 이미 용서하였고, 여전히 그를 사랑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가 언제 돌아올 것인가를 학수고대(鶴首苦待)하면서 기다리고 있는 아버지의 ‘변함없는 아들’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비유를 통해서 예수님이 말씀하고자 하시는 복음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탕자가 아니라 아들이다. 그 아들을 여전히 기다리고 계시는 아버지 하나님, 그 하나님을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집 나간 둘째의 아들의 행위나 삶은, 틀림없는 탕자입니다. 그는 죄인입니다. 그는 더 이상 소위 말하는 하나님의 자녀인 선민 유대인이 아니라 ‘개 같은 異邦人’이 되어버린 자입니다. 그가 굶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서 돼지 치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곧 회복이 불가능한 ‘이방인’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돼지는, 유대인들이 가장 불결하게 생각하는 짐승이고, 혐오식품이요, 부정한 것입니다. 그가 돼지를 칠 뿐만 아니라,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를 먹는 절망적인 존재가 되었다는 것은, 더 이상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죄인이요, 구제불능의 절망적인 존재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그대로, 그는 탕자 중의 탕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비유 속에서 예수님은 아버지가 집 나간 그 둘째를 탕자로 여기지 않고, 여전히 변함없는 아들이라고 말씀합니다. 바로 그 ‘아버지의 마음’이 저와 여러분을 살리고 회복시키고, 온전케 하는 복음입니다. 그 복음 때문에 우리는 당당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겁니다. 그 복음은, 바로 하나님의 자비하심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아버지의 자비하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눅 6, 36). 바로 이것이 예수님이 선포하시는 하나님 나라 복음의 핵심입니다. 이 자비(慈悲)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 ‘아버지 마음’의 본질입니다.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품어야 할 가장 중요한 복음의 본질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미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이해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었고, 우리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오늘 21세기 한국교회도 마찬가지이고, 예수님 당시 1세기 유대사회 유대종교, 유대전통도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본받기 보다는, 그들이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본받은 제 1차적인 신앙과 신학과 삶의 규범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이었습니다(레 19, 2).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같이 너희도 거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을 통해서 당시 유대사회, 유대종교, 유대전통과 예수님에게 있었던 많은 갈등적인 요소를 보게 됩니다. 그 갈등의 뿌리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닮으려는 서로 다른 기준(Imitatio Dei)’ 때문입니다. 당시 유대종교와 유대사회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닮으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하나님을 닮는 유일한 기준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닮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닮아야 한다고 선포하셨습니다(눅 6, 36).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하나님의 나라 복음"의 중심이라는 겁니다.

당시의 지배적인 유대사회와 유대종교의 비전은 ‘거룩함/ 정결’입니다. 그것이 사회/정치/종교의 기준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통해서 선포된 ‘하나님의 나라’와 代案的인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의 비전은 거룩과 정결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이 당시의 유대사회와 유대종교의 핵심가치였던 ‘거룩과 정결’을 ‘하나님의 자비’로 대체(代替)하셨다는 것을 말합니다.

‘거룩과 정결’의 가치 구조 속에서는, 언제나 정결한 것과 불결한 것/ 의인과 죄인/ 완전함과 불완전함/ 남자와 여자/ 부자와 가난한 자/ 유대인과 이방인/ 건강한 자와 병든 자/ 간의 이분법적(二分法的)인 경계(境界)가 존재합니다. 그 二分法的인 경계가 궁극적인 가치기준입니다. 하나 됨과 화합보다는 분리와 배재와 철저한 배타성이라는 것이 존재합니다. 그래서 거기에는 언제나 판단과 정죄와 심판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해와 용서와 수용과 받아들임이 없습니다. 이것은 이것이고, 저것은 저것이라는 것 밖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 중간이나, 그 둘의 변화나 새로운 가능성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판단과 정죄와 심판으로 끝이 나고 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비’로 오는 ‘하나님의 나라’는, 비록 지금은 서로 같지 않아도, 달라도, 불완전해도, 문제가 있어도, 또 불가능해 보여도, 언제나 그 안에는 용서의 기회가 있습니다. 기다림의 시간이 있습니다. 인내가 있습니다. 분리가 목적이 아니라 둘이 하나 되기 위한 서로 서로 간의 적극적인 변화와 새로운 가능성이 존재합니다. 배타적이지 않습니다. 나와 다른 그도 함께 품을 수 있는 포용과 수용의 자리가 있습니다. 그 자비(慈悲) 안에서 불완전(不完全)함이 회복이 되기도 합니다. 아픔이 치유가 됩니다. 절망적이었던 사람이 희망적인 사람으로 변화가 됩니다. 죽어 마땅한 사람이지만 새 생명을 얻어 사는 생명의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 자비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회복해야 할 가장 중요한 "복음", 집 나간 둘째 아들을 탕자로 여기지 않고, 그를 여전히 아들로 여기면서 기다리고 계시는 아버지의 마음, 곧 ‘하나님의 자비’입니다. 목회자의 마음도 그렇습니다. 교우들의 마음도 그렇습니다. 이 마음이 없이는 교회를 교회답게 할 수가 없습니다. 아니, 이 마음이 없는 모임이나 그룹, 그런 교회는 교회가 아닙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얼마나 역설적인 말씀을 하셨습니까?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한 당시의 ‘稅吏들’과 ‘娼妓들’이 ‘義人들’이라고 자부하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보다 하나님의 나라에 먼저 들어가는 그런 ‘자비로운 하나님 아버지의 나라’, 그 ‘하나님의 나라’를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마 21, 31) 세리와 창기들은 죄인들입니다. 죄인이라는 말의 의미는, 당시 유대종교사회 가치로 볼 때, 정결치 못한 사람들, 깨끗지 못한 사람들, 더러운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바로 그들까지도 품어 안을 수 있는 자비로운 나라라는 겁니다.
바리새인들이나 사두개인들과 서기관들은 세리와 창기들이 자기들보다 먼저 들어가는 그런 ‘하나님의 나라’를 도무지 이해할 수도 없었고, 그런 하나님의 나라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나라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바로 그런 나라입니다. 교회가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가 되려면,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닮은 아버지 마음을 품은 목회자들과 교우들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가정이 ‘하나님의 나라’가 되려면, 탕자와 같은 자식이라 할지라도 여전히 아들로 여기고, 그를 기다리고, 사랑하고 용서해 주는 자비로운 아버지 마음을 가진 부모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 비유 속에서 집으로 돌아온 아들의 마음 깊은 준비된 회개에 도무지 관심이 없는 아버지를 만나게 됩니다. 집으로 돌아온 아들의 자신의 과거에 대한 그 깊은 인생의 悔恨과 깊은 반성을 봅니다.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합니다. 그러나 달려가서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는 그 아버지의 마음은, 돌아온 자기 아들의 준비된 그 회개의 고백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습니다. 그게 문제가 아닙니다. 아들을 다시 만난 아버지의 자비는 조건적이지 않습니다. 무조건적입니다. 그냥 그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까, 사랑하는 겁니다. 조건 따져서 살아남을 수 있는 아들 세상에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는 다 죄인입니다. 의인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이 있는 생명의 유일한 근거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그래 네가 이제야, 정신을 차렸구나, 이제야 철들었구나. 다시는 집 나가지 말라”고 당부하지 않습니다. 그저 아들을 다시 얻은 기쁨에 겨워 종들에게 명합니다.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라.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합니다.

그러나 그 아버지의 그 기쁨에 함께 기뻐하지 못하는 자가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맏아들입니다. 그 맏아들은 바로 당시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종교적인 의인들입니다. 세리와 창기가 하나님 나라 주인공이 되는 것을 기뻐하지 못하는 바로 그들입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바리새적이고 사두개적이고 서기관적인 ‘거룩’과 ‘정결’의 신앙을 버려야 합니다. 집 나간 탕자까지도 여전히 사랑하시고, 아들로 여기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자비하심을 닮지 않으면, 저와 여러분 안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질 수가 없습니다. 그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우리 안에 없다면, 우리는 주님이 원하시는 교회를 이룰 수가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집 나간 둘째 아들뿐만 아니라 집안에 있는 맏아들까지도 동일하게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자비하심을 새롭게 닮아 가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를 기대합니다(눅 6, 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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