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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은 사랑 (4)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 (욘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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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명혁 목사 (강변교회)

  오늘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이 민족에게 나타난 8.15 해방 광복절을 59번째로 맞는 광복기념 주일입니다. 히브리인들을 애굽의 노예생활에서 해방시켜주신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을 일제의 노예생활에서 해방시켜주신 날입니다. 오늘 아침에도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설교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흠뻑 빠진 행복한 사람들이 있었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다윗과 사도 요한과 막달라 마리아가 그런 사람들이었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지난 주일 막달라 마리아에 대한 설교를 듣고 감동과 은혜를 받았다고 말한 사람들이 여러 명 있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같은 폐인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아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는 설교를 들으면서 많은 용기를 얻게 되었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여러 명 있었습니다. 감사한 일입니다. 오늘 아침에는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지도 알지도 받지도 못한 불행한 한 사람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 사람은 선지자 요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심판과 저주를 받아 마땅한 니느웨 성 사람들과 동물들을 가리키면서 “내가 [이들을]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 라고 애타는 사랑의 심정을 토로하셨지만 요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못마땅하게 여기면서 침묵의 시위를 벌였습니다. 지난 주일 막달라 마리아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을 못마땅하게 여긴 사람이 바리새인 시몬이었는데, 오늘 아침 니느웨 성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못마땅하게 여긴 사람은 선지자 요나였습니다. 소위 종교인들이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자기들의 종교적 전통과 생각에 맞지 않고 모순되게 보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제가 7년 전에 오늘 아침 설교와 같은 제목으로 설교한 일이 있었습니다. 1997년 6월 22일 주일 중국 연길과 용정을 다녀 와서 오늘 아침과 같은 제목으로 설교하면서 이런 질문을 던진 일이 있었습니다. “오늘 아침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니느웨를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 그 말은 그 당시 이스라엘의 국가정책에 위배되는 말이었습니다. 보안법에 걸리는 말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앗수르는 이스라엘의 적국이요 원수의 나라였기 때문입니다. ‘내가 니느웨를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 이 말씀을 오늘의 상황에서 어떻게 해석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북한 사람들과 북한 군인들을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 ‘내가 피해를 당해 절망 가운데 있는 조선족들을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 ‘내가 장애인들과 병자들과 감옥에 갇힌 자들을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 7년 전에 제가 여러분들에게 한 말입니다.

  사실 저는 7년 전인 1997년 6월부터 조선족을 돕는 일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1995년 12월부터는 북한 동포들을 돕기 시작했습니다. 오늘 아침 7년 전에 했던 설교와 같은 제목으로 설교를 합니다. 설교의 제목은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 입니다. 원수를 향한 애타는 사랑의 심정을 토로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오늘 아침 하나님이 사랑한 사람들을 세 가지로 나누어 말씀 드립니다.

  첫째 하나님은 니느웨 성 사람들과 동물들을 아끼며 사랑하셨습니다.

  니느웨는 앗수르의 수도였는데 앗수르는 이스라엘의 적국이요 원수의 나라였습니다.이스라엘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가서 온갖 학대를 자행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을 잡아서 죽여서 가죽을 벗겨서 성벽에 걸어놓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우리로 말하면 우리 민족에게 온갖 학대를 자행한 일본에 비길 수도 있고 북한에 비길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앗수르는 그 당시 이스라엘에게 온갖 테러와 학대를 자행한 이스라엘의 적국이요 원수의 나라였습니다. 부시 대통령의 말을 빌리면 ‘악의 축’이었습니다. 공격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느날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 성 사람들과 동물들을 심판과 저주에서 구원하실 생각을 하셨습니다. 왜 그런 생각을 하셨는지는 모릅니다. 아마 제 생각으로는 하나님께서 옛날 아브라함과 이사야에게 말씀하신 약속을 기억하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옛날 아브라함에게 이런 약속을 하신 일이 있었습니다.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창12:3). 그런데 땅의 모든 족속 가운데 니느웨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옛날 이사야에게 이런 약속을 하신 일도 있었습니다. “그 날에 애굽 사람이 앗수르 사람과 함께 경배하리라. 그 날에 이스라엘이 애굽과 앗수르로 더불어 셋이 세계 중에 복이 되리라.” 이사야19:23,24 말씀입니다. 앗수르 사람이 하나님을 경배하려면, 앗수르가 세계 중에 복이 되려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아야만 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니느웨 성에 은혜와 사랑의 사절을 보내기로 작정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요나를 택하셨습니다. 요나에게 일어나 니느웨로 가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가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쳤습니다. 요나는 니느웨로 가는 대신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도망을 쳤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요나를 고기 배 속에 잡아 넣으시면서 억지로 니느웨까지 가게 만들었습니다. 니느웨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끈질기고 강했습니다. 니느웨 성의 사람들과 짐승들이 베옷을 입고 금식하며 회개했을 때 하나님은 그들에게 구원의 축복을 베푸셨습니다. 결국 그들이 하나님을 경배했습니다. 세계 중에 복이 되었습니다. 앗수르와 니느웨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끈질기고 강했습니다.

  사실 이와 같은 끈질기고 강한 모순되고 역설적인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함의 자손이라고도 말하는 아프리카 사람들도 구원의 축복을 받게 되었고 우상을 숭배하는 이방인들 중에서도 이방인들인 조선 사람들과 일본 사람들과 중국 사람들과 러시아 사람들도 구원의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람들뿐 아니라 동물들과 식물들에게까지 사랑을 베푸시고 식물을 주어 먹이시고 입히신다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둘째 하나님은 이기적이고 불순종하고 반항하는 요나까지 아끼시며 사랑하셨습니다.

  요나는 이기적이고 배타적인 민족주의자였습니다. 하나님을 불순종하고 거역하고 반항한 못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못된 요나를 버리시지 않고 은혜와 사랑의 사절로 택하셨습니다. 요나를 택하신 것은 하나님의 실수 아니면 모험이었습니다. 옛날 학생 때 나의 조교로 일한 박윤애 선교사가 이런 글을 쓴 일이 있습니다. “나는 목사님으로부터 조교와 한국복음주의협의회의 간사로 일해 보지 않겠느냐는 요청을 받았다. 바야흐로 목사님은 실수 아니면 모험을 하신 것이었다. 내가 얼마나 준비되지 않았는지 목사님도 모르셨을 것이다. 그때 나는 타이프를 손 가락으로 하나씩 톡톡 거리며 치는 수준이었고, 커피 한 잔 탈 줄도 몰랐고, 과일도 깎을 줄 몰랐으며, 전화를 받거나 연결시켜 드릴 줄도 몰랐다. 목사님은 당신이 편애하셨던 자들 중의 하나인 나를 지명하시고는 시간이 지나면서 분명 후회하셨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요나를 택하신 것은 아마 실수 아니면 모험을 하신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요나를 택하신 이유는 요나에게 배우고 깨닫고 뉘우칠 수 있는 기회를 주시기 위해서 였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많은 경우에 이기적이고 배타적이고 불순종하고 반항하는 못된 사람들을 아끼시고 사랑하시면서, 실수 아니면 모험을 하시면서, 그와 같은 사람들을 택하시곤 하셨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구약시대의 요나였고 신약시대의 사울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김명혁 목사 같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못된 요나를 아끼시고 사랑하신 장면들을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불순종하고 반항하는 요나를 바다에 던져 물에 빠져 죽게 내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큰 물고기를 준비해서 요나를 삼키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큰 물고기를 에비하사”(1:17). 아마 상어가 삼켰다면 요나는 상어의 밥이 되었을 것입니다. 남미 브라질 해변에 서식하는 식인어가 나타났다면 요나의 몸은 순식간에 뜯겨서 없어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이것이 그 식인어 박제입니다. 이 식인어 떼가 몰려오면 소 한 마리도 순식간에 뜯겨서 없어진다고 강성철 선교사가 설명해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상한 방법으로 죽어 마땅한 못된 우리들을 살리시곤 하십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두 번째 기회를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큰 물고기에게 명하사 산소를 공급하게 하셨고 얼마 후에는 요나를 육지에 토해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말씀을 주셨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두 번째 요나에게 임하니라”(3:1). 요나는 두 번째 말씀에 할 수 없이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상한 이유로 버려 마땅한 못된 우리들에게 두 번째 기회를 주시곤 하십니다. 

  셋째 니느웨 성이 구원의 축복을 받는 것을 보고 심히 싫어하고 노하고 반항하는 요나에게 박 넝쿨을 준비해서 뜨거운 햇빛으로부터 가리우게 하셨습니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 넝쿨을 준비하사 요나 위에 가리우게 하셨으니”(4:6). 하나님께서는 못된 우리들을 때로는 구름 기둥과 불 기둥으로 보호하시고 때로는 바람과 비와 눈을 보내셔서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아끼시곤 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넷째 박 넝쿨이 시들자 요나는 성을 내면서 죽겠다고 야단을 쳤는데 죽겠다고 야단을 치는 요나를 친절하게 타이르셨습니다. “내가 이들을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 창조주 하나님께서 벌레만도 못한 피조물인 요나를 타이르시며 호소하시는 장면입니다.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배양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망한 이 박 넝쿨을 네가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 이만 여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합당치 아니하냐?” 때려 죽여도 마땅할 요나를 부드러운 말씨로 타이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무지몽매한 우리들을 마지막까지 타이르시곤 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이 하나님의 망극한 사랑에 대한 요나의 태도는 침묵의 시위였습니다. 침묵이 때로는 금이지만, 침묵이 때로는 반항과 죽음을 상징하는 납덩이가 될 수도 있습니다. 독이 가득한 납 덩이가 되어서 자기를 죽이고 다른 사람들을 죽일 수도 있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망극한 사랑과 호소에 침묵으로 반항한 불행한 사람이었습니다. 

  다셋째 하나님은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 뱃사람들도 아끼시며 사랑하셨습니다.
  요나서 1장에 나오는 뱃사람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들이었습니다. 바다에 풍랑이 일어났을 때 그들은 각각 자기들의 신을 불렀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영적으로 무지한 이방인들과 이교도들에게도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뱃사람들에게 하나님 경외의 마음을 심어주셨습니다. 뱃사람들은 바다에 일어난 풍랑을 보면서 그리고 요나의 고백을 들으면서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결국 뱃사람들은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기까지 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사랑입니다. “무리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여호와여 구하고 구하노니 이 사람까닭에 우리를 멸망시키지 마옵소서.”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들과 이교도들의 기도까지 들어주셨습니다. 옛날 불교와 선도의 도사였던 길선주 도사의 기도도 들어주셨습니다. “지존하신 하느님이시여, 저는 지금 심한 고민에 빠져 있습니다. 여러 해 동안 신봉해오던 선도는 정말 섬길만한 도인지 의심스럽고, 예수교에는 과연 영생의 진리가 있는지 알 수 없어 마음이 몹시 괴롭습니다.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시사 이 마음을 가라앉아 주옵소서. 정말 예수가 인류의 구세주인지 알려 주옵소서” 이 기도가 채 끝나기도 전에 방안에서 청아한 피리 소리가 들리더니 “길선주야, 길선주야, 길선주야” 하고 세 번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뱃사람들이 요나를 들어 바다에 던졌을 때 바다의 풍랑이 그쳤습니다. 그들이 여호와를 크게 두려워하며 여호와께 제물을 드렸고 서원까지 했다고 했습니다. 도사 길선주도 하나님께서 자기의 부르짖는 기도를 들어주셨을 때 즉시 성경책을 끼고 평양 널다리 교회로 가서 회개와 감사의 제사를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상과 미신과 타 종교를 따르는 이방인들과 이교도들까지 아끼시고 사랑하시곤 하셨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에 흠뻑 빠져서 그 사랑에 붙잡혀서 한 평생을 살아가고,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반항하면서 한 평생을 불행하게 살아갑니다. 요나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은 지극히 망극한 사랑입니다. 악독이 가득한 원수의 도성 니느웨를 사랑한 망극한 사랑이었고, 불순종하고 반항하는 요나를 사랑한 망극한 사랑이었으며, 뱃사람 이교도들까지 사랑한 망극한 사랑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망극한 사랑 때문에 길선주 도사도 살고 이기풍 깡패도 살고 이기적이고 거짓되고 위선적인 저와 여러분들도 살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들 중에 혹시라도 요나와 같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침묵의 시위를 벌이는, 불행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기를 바랍니다. 차라리 베 옷을 입고 회개한 니느웨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차라리 요나를 바다에 던지며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고 서원한 이방인 뱃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녹아지는 죄인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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