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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분별력을 잃어버린 교회 (계 2: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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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형준 목사 (동안교회)

어떤 목사님이 돌아가셔서 천국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2인 1조씩 심판대 앞에 섰는데, 자기와 함께 조를 이룬 사람은 한국의 총알 택시 운전사였습니다. 여러분, 북한의 김정일이 왜 한국에 못 오는지 알고 계십니까?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 그 중 한 가지는 한국의 길거리에 총알 택시가 많아서 겁이 나서 못 온다는 우스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총알 택시 운전사를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때, 칭찬하시고 상금도 많이 주시면서 격려와 위로를 많이 해주셨습니다. 한국에 있을 때 ‘저 총알 택시 운전사는 사람들을 공포 속에 몰아넣었는데, 하나님께서 저토록 격려하시고 축복하시는 걸 보면, 난 엄청나게 축복해 주시겠구나.’ 목사님은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 차례가 오자, “하나님께서는 넌 지옥가야 마땅한데, 목사이기 때문에 체면 봐서 천국에 오게 했다. 대신 상급은 없다.” 그러시더랍니다. 목사님은 너무 억울해서 “하나님, 이유나 알려주십시오. 저 총알 택시 운전사는 사람들을 몹시 불안하게 했는데, 상급을 주시지 않았습니까. 전 영혼을 위해서 봉사하고 헌신하는 목사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차별대우하십니까?” 하고 항변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저 운전사가 운전할 때 손님들이 다 깨어서 기도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간절히 기도하게 만들고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오게 만드는 운전사의 행위를 내가 왜 잊겠느냐. 그런데 너는 설교할 때 많은 사람을 졸게 만들지 않았느냐.”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오늘 이 이야기 속에서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상황이 편하면 자기 자신을 돌아보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상황이 어려우면 기도하고 자신의 살아가는 모습을 돌아보기도 합니다. 아마도 우리 가운데 건강이나 사업에 어려움을 당한 분일수록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진지하게 고민하면서 하나님께 나아가시는 분들이 있을 줄 압니다. 그런데 어려울 때 제대로 분별하지 못하면 그 어려움이 불행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또 평안할 때도 잘 분별하지 못하면 그것이 큰 불행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살아가면서 처하는 다양한 상황 속에서 올바른 삶을 선택하는 분별력을 갖는 건 굉장한 지혜요, 축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나라가 처한 현실 속에서 저와 여러분은 엄청난 혼란을 겪고 있습니다. 그 혼란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 하나가 예전에 상식이었던 것들이 이제는 통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기준이 급격하게 바뀌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옳다고 받아들여졌던 것들이 이제는 받아들여지지 않고, 옳다고 생각한 그것 때문에 더 큰 어려움과 비판과 비난에 직면하면서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어떤 기준을 붙들고 살아야 될 것인지, 당황하고 근심하고 계시리라 생각됩니다.

오늘, 이 땅을 창조하시고 우리를 만드신 주님께서, 이 혼란한 시대에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이고, 또 이 어려움들이 더 복된 삶으로 이어지는 삶의 원리가 되는가 하는 것을 초대 일곱 교회 가운데 두아디라 교회를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두아디라 교회를 향해서 책망하셨던 것, 칭찬하셨던 것, 약속하신 것들을 통해서 이 시대를 어떤 기준을 가지고 살아야 될지, 그 지혜를 말씀 속에서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먼저 주님께서 이 두아디라 교회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은, 우리들이 시간이 흐를수록 아름답게 성장하는 인생이 되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19절 말씀을 보면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라고 하셨습니다.

어떤 일이든지, 시작이 있고 끝이 있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화려하게 시작했지만 초라하게 문을 닫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또 시작은 보잘것없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아름답고 창대케 되는 것을 보기도 합니다. 우리가 고난과 어려움 가운데 인내하는 이유는 지금 처한 현실보다 더 아름답게 되기를 바라는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삶은, 우리가 지금보다 더욱 아름다운, 하나님의 자녀다운 모습으로 성장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보면, 두아디라 교회는 그 사업이나 행위 속에 섬김과 인내의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고, 주께서 주신 믿음으로 인해서 사람을 진정으로 섬기며, 고난과 어려움 앞에서 믿음으로 인내하는 놀라운 삶의 열매를 그들이 날이 갈수록 풍성하게 맺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땅을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변화합니다. 잘못된 방향으로 성장하는 사람이 있고, 바람직한 방향으로 성장하는 사람이 있는데, 건강하게 성장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우선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은 아름답게 성장합니다. 격려를 많이 받은 사람도 성장합니다. 징계 받고 야단 맞을 상황에 처했을 때 버림받지 않고 다시금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용기와 희망을 얻고 격려의 말을 많이 들은 사람은 성장합니다. 삶 속에서 용서를 받고, 용서할 줄 아는 사람이 아름답게 성장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이것을 받지 않고 그냥 세월이 흘러가는 대로 맡겨두다 보면, 우리 가운데 어둠과 악한 것과 잘못된 모습과 성격이 점점 자라나서 우리 영혼을 해치고 인생을 비참하게 만드는 방향으로 잘못된 성장을 하게 됩니다.

그러기에 오늘 주님께서는 본문을 통해서 우리에게 사업이나 행위가 점점 아름답게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을 끊임없이 공급받아야 합니다. 사랑을 받을 때 여유가 생깁니다. 기쁨이 있습니다. 사랑 받을 때 우리가 가치 있는 존재란 것을 알게 됩니다. 아내들도 남편의 사랑을 받으면 화장품이 필요 없습니다. 얼굴이 해같이 빛납니다. 그런데 아무리 환경이 좋아도 남편 사랑을 받지 못하면 비싼 외제 화장품을 발라도 빛이 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기 아들 독생자를 주시면서까지 사랑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 사랑을 우리가 날마다 확인하고, 날마다 그 사랑을 받고,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실패하고 연약한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비전과 꿈을 이루기 위해 창조된, 주님의 자녀라는 용서와 사랑과 격려를 받을 때 우리 마음이 점점 자라게 됩니다. 이것이 이루어지려면 주님과의 교제가 우리 속에 있어야 합니다.

주님과 교제를 하게 되면 그 열매가 섬김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여러분, 복음이 담기는 가장 아름답고 귀한 그릇은 바로 섬김이라는 그릇입니다. 섬김이라는 그릇에 담길 때 그 복음은 빛이 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사랑을 계속해서 공급받고, 그 사랑에 감격하면 다른 사람을 자꾸 섬기고 싶어집니다. 복음으로, 물질로, 피부로, 모습으로, 손으로 다른 사람을 섬기고 싶은 마음이 계속해서 찾아옵니다. 또한 우리가 주님과 계속해서 교제하면 믿음이 풍성하게 자랍니다. 우리가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 절망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기도로 이길 수 있는 인내가 이 믿음에서 나옵니다.

우리가 자라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과의 깊은 교제가 우리들 속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포도나무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살아 있는 씨앗은 30배, 60배, 백 배의 결실을 맺어서 많은 사람을 풍성케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작은 겨자씨라도 생명이 있으면 점점 아름답게 커서 새들이 깃들고 나그네가 쉬어 갈 수 있는 큰 그늘을 드리웁니다. 여러분, 우리 속에 복음의 생명이 있으면 자라게 돼 있습니다. 살아 있는 생명은 모두 다 자랍니다. 태아가 뱃속에서 죽으면 자라지 못하지만 살아 있으면 점점 자랍니다. 그리고 열 달이 지나면 그 아이가 밖으로 나오듯이 겉으로 나타나는 열매가 있게 마련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우리는 자신의 삶을 한 번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삶 속에서 섬김이 이전과 얼마나 깊어졌습니까? 폭이 넓어졌습니까? 얼마나 질적으로 향상됐습니까? 복음의 간절함이, 주님을 향한 사랑이 내 마음속에 있어서 이웃에게 이 복음을 증거하고 싶은 섬김의 마음이 우리들 속에 생겨났습니까? 교회를 오래 다니고, 중직자가 되는 것이 그 사람의 인격을 나타내는 것은 아닙니다. 섬김이 그 사람의 삶 속에서 어떻게 나타나고 있느냐 하는 것이 훨씬 중요합니다.

그 섬김도 자기의 명성이나 명예를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기에 그 사랑을 갚을 길이 없어서 교회에서 인사할 때도 진정으로 하게 됩니다. 예배가 끝나고 교회를 나갈 때 인상을 찌푸리고 나가는 분을 보면 마음이 답답합니다. 여러분, 전도하기 어려우면 예배를 마치고 나갈 때 웃으며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아, 저기에 생명이 있구나. 저기에 뭔가 있구나.’ 믿지 않는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고 교회에 나올 것입니다. 실제로 그런 형제 자매들이 있습니다.

견딜 수 없는 어려움, 시련과 억울한 일이 닥쳤을 때 믿음이 있는 사람은 참습니다. 기도합니다. 여러분의 섬김과 믿음이 얼마나 깊고 넓어졌는지 한 번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모습을 원하십니다. “과거에는 믿음이 좋았는데, 오늘 내 모습을 돌아보니까 믿음이 별로 없고 과거 모습 그대로 굳어져 있습니다. 섬김 속에 기쁨이 없고 변화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건 주님이 원하시는 모습이 아닙니다. 내가 전에는 섬길 수 없던 사람을 섬기게 되고, 보지 못했던 것들을 깊게 보면서, 내가 참지 못하던 것을 기도로 인내할 수 있는 믿음이 얼마나 자랐는가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믿음 안에서의 아름다운 성장을 우리에게 기대하고 계십니다. 갈수록 아름답게 성장하고, 그 성장이 주님을 사랑하고 믿는 믿음 가운데 이루어져서 여러분의 섬김과 믿음 속에서, 또 현실의 삶 속에서 인내로 나타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합니다.

둘째, 주님께서 우리에게 살기를 원하시는 삶은 영적인 기준이 분명히 세워진 삶입니다. 20절 말씀을 보면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라고 하셨습니다. 이 두아디라 교회는 외부의 정치적 박해나 종교적 박해가 있어서 어려움을 겪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내부적으로 문제가 생기면서 잘못된 사상을 허용하고 받아들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로 인해 복음의 본질에서 점점 멀어지고 하나님께서 책망하는 교회로 변질되었습니다. 영적인 기준을 바로 세우지 않으면 주님의 뜻을 따르고 주님의 자녀로 바르게 살아가지 못할 뿐 아니라, 주님께서 주시는 가치 있는 삶을 살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영적인 가치 기준을 분명히 세울 때 거기에 진정한 희망이 있고 인생의 가치와 기쁨이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 이 땅을 살아가면서 가장 문제되는 게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바로 가치 기준의 문제 아니겠습니까. 내가 울고, 웃고, 기뻐하고, 절망하는 것은 우리 속에 기준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두아디라 교회에 잘못된 기준이 우상 숭배의 모습으로 들어왔습니다. 여기서 우상숭배라고 하는 것은, 어떤 형상을 갖다놓고 절하는 걸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을 위해서 신앙을 바꾸고, 기도도 바꾸고, 영적 생활을 다 바꾸어서 내가 원하는 것을 얻으려고 하는 걸 의미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을 최우선으로 하지 않고, 내가 원하는 돈과 명성, 물질과 자녀, 자존심 이것을 최우선으로 섬길 때 이것이 바로 우상 숭배입니다.

또 하나는 물질주의가 그들 속에 들어왔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과 물질은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했습니다.

우상 숭배와 물질주의, 이 두 가지는 영혼을 죽이는, 치명적인 피해를 입힐 수 있는 요소입니다. 이것이 교회 안에 들어오면서 영적인 것을 말살시키고 교회를 병들게 만들었습니다. 어디까지 병들었느냐면 주님께서 심판하시는데, 오늘 본문 첫 서두에 ‘주석 같은 발’ 이라고 했습니다. 단단하고 견고한 발처럼 반드시 심판에 이르게 하는 죄악이 그들 속에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두아디라 교회에 이것이 들어오게 된 이유는 ‘이세벨’이라고 하는 자칭 선지자를 허용했기 때문입니다. 이세벨은 구약에 나오는 아합 왕의 아내입니다. 이방신을 섬기는 이 왕후가 왕실에 들어와서 이스라엘 백성의 영혼을 병들게 하고 역사를 병들게 하면서 하나님 앞에 진멸되고 심판을 받을 때까지 타락시키는 사상과 문화를 불어넣었습니다.

오늘 이세벨이 두아디라 교회에 있다는 것은 이세벨처럼 영향력 있는 여인이 교회에 있다는 의미입니다. 아마 모르긴 해도 자칭 선지자라 얘기한 것을 보면 믿음이 좋다고 인정받았던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 스스로 믿음이 좋다고 얘기하고 다녔을 것입니다. 이 여인은 굉장히 영향력 있는 위치에 있던 사람 같습니다. 주석학자에 따라서는 감독의 부인으로 추정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두아디라라고 하는 곳이 상업의 중심지여서 많은 돈이나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거나, 아니면 독특한 미모를 가지고 있어서 사람들에게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했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두아디라 교회 사람들에게 자꾸 이야기해서 결국은 두아디라 교회 교인들이 우상을 숭배하게 됐고, 하나님을 가장 먼저 숭배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위해서 섬기게 되었습니다. 교인들에게 물질적인 생각이 들어가서 영적인 기준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영적인 기준을 자꾸 무너뜨리도록 만드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두아디라라고 하는 곳은 상업 도시이기 때문에 요즘말로 하면 노동조합이라고 하는 것이 많이 있었습니다. 번역하면 동업 조합이라고 하는, 이것이 많았는데, 조합원이 되어야 장사하고 이득을 많이 남길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조합에서 섬기는 신이 있습니다. 이 신을 섬기는 행위는 음란한 일로 마무리됩니다. 요즘 회사에서 회식할 때 1차, 2차, 3차를 거쳐서 마지막에는 외도하게 만드는 문화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상황이 그렇다 보니, 그곳 교인들이 갈등을 겪고 있었습니다. 돈을 벌자니 조합에 들어가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돈을 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세벨은 이 사람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었습니다. 여러분, 우리 마음 속에 욕망이 있기 때문에 이 욕망을 채워 주는 언어를 들으면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여러분, 이것도 하나님이 주신 기회가 아니겠습니까. 돈을 가진 사람은 영향력도 크니까 우리는 사업을 해서 돈을 많이 벌어야 합니다. 그래야 복음에 권위가 생깁니다. 조합원이 돼서 신에게 절한다고 해서 우리가 정말 마음에서부터 하나님을 배신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그 속에 들어가서 복음의 영향력을 가지고 이 사회를 바꾸는 일에 참여해야 합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자연스럽게 교인들을 음란한 짓을 하게 만들고 물질적인 사고 방식에 젖어들게 하면서 하나님과 점점 멀어지게 만들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신앙생활을 할 때 우리에게 믿음으로 이야기하는 것 같지만 우리의 영적인 믿음을 흩어버리는 말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비판을 하고 비방을 하는 것도 좋지만, 영혼을 병들게 해서 결국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하게 만들고, 하나님이 주신 사랑을 나누지 못하고 분노하게 만들며 미워하게 만드는 일을 얘기하는 사람들을 허용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의 말씀 가운데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일을 발견하게 됩니다. 신앙과 영향력이 있다고 얘기하면서도 교회 공동체를 흩어버리고, 우리 영혼과 심령을 병들게 해서 우리로 하여금 믿음의 생각을 하지 못하게 만들고 격려를 못 받게 만들고 낙심하게 만들며 이간질하는 이야기를 허락하는 분위기에 휩쓸리면 나도 모르게 나 자신을 가장 귀중히 여기고 물질적인 생각이 내 가슴 속에 찾아오면서 하나님의 진노하심 앞에 직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잘 분별해야 합니다. 심지어는 가까운 친구라 할지라도 믿음을 흩어버리는 언어와 모습이 나타나면 더 이상 이야기하도록 허용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이야기를 들으면 내 영적인 기준이 살아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 그렇게 살아야겠구나. 물질이 전부가 아니구나. 하나님 뜻대로 살아야겠구나.’ 그 사람의 입을 통해서 나오는 말을 들으면 믿음과 용기가 생기는 그런 사람들을 우리는 아름답게 세워나가야 합니다.

교회 지도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이익을 위해서 지식과 경험과 권위를 내세우는 사람이 지도자가 되면 공동체가 전부 병들어 버립니다. 우리 믿음이 하나님을 향하도록, 인생을 살아가면서 믿음을 의지하고 기도와 감사의 자리에 들어갈 수 있도록 우리 모두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는 자리에 들어가지 못하게 만드는 사람, 감사하는 자리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사람, 주의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못하게 하는 사람을 허용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모두 사실을 가지고 얘기하기 때문에 분별하기가 몹시 힘이 듭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 가데스 바네아라는 곳에서 열두 명의 정탐꾼을 보내지 않았습니까. 그 중의 열 명은 사실에 근거해서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은 믿음에 근거해서 이야기했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했습니다. 보이지 않습니다. 현실적인 부분을 갖고 얘기할 때는 힘이 있습니다. 근거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보는 것 때문에 약해집니다. 그러나 믿음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믿음을 세워준다는 것은 정말 어렵습니다.

저도 화가 나서 자기도 모르게 그 사람의 믿음을 흩어 버리는 말을 할 때가 있습니다. 회개해도 또 나옵니다. 저는 계속 이 싸움을 합니다. 저로 하여금 경건하게 살게 해달라고. 저들의 믿음을 지원하고 일깨워 주는 목회자가 되게 해달라고, 또 제가 속상해도 믿음을 잃지 않도록 격려하는 목회자가 되게 해달라고 하나님 앞에 늘 기도합니다. 여러분이 절 위해 기도를 많이 해주셔야 합니다. 물론 저도 여러분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우리 교회 중직자와 이웃을 위해서, 그 사람이 믿음을 세우는 사람으로 설 수 있도록 기도하시고 격려해 주시는 게 참으로 중요합니다.

저는 농촌 봉사활동을 떠난 청년들을 격려하느라 장로님 두 분과 새벽부터 밤 12시가 넘도록 이곳 저곳을 돌았습니다. 그런데 저는 고생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피곤하고 힘들지만 고생이 아닙니다. ‘하나님, 전국으로 흩어져 나갈 수 있는 많은 청년들을 우리 교회에 주셨고, 저들이 하나님의 아름다운 일을 위해서 봉사하고 사역하는 일을 격려하도록 저를 보내시니 감사합니다. 부족한 제게 이 많은 청년들을 섬길 수 있는 기회를 주시고, 이들을 찾아가는 은혜를 주시니 또한 감사드립니다.’ 여러분, 이 생각이 믿음의 생각입니까, 아니면 ‘이 뜨거운 여름에 왜 이렇게 고생시키는가, 내가 꼭 가야 하는가. 참 힘들고 고달프구나.’ 하는 게 믿음의 생각입니까? 어떤 것이 사람들에게 믿음을 줍니까? 잘 분별하셔야 합니다.

우리에게 믿음을 주는 모습과 언어, 그런 모임에는 적극적으로 참여하시고. 그렇지 않은 것들은 과감하게 여러분의 삶 속에서 제거하시기 바랍니다. 교회도 그것들을 거절해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가 믿음 안에서 건강하고, 소망 가운데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믿음 가운데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장로님 한 분을 뵈면서 제가 참 감사하고 놀란 적이 있습니다. 어떤 분이 신장 하나를 제거하고 투석을 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파서 어떻게 하나 걱정하고 있는데, 장로님 한 분이 “투석이라도 할 수 있는 건강이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투석하면서도 건강하게 사는 사람을 아주 많이 보았습니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을 들으니 희망이 솟았습니다. 신장을 잘라낸 사람에게 “그래도 두 개 다 상하지 않고, 하나라도 온전하니 얼마나 감사하냐”고 격려했습니다.

사람은 어떤 말을 듣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여러분, 신장이 하나 없으니 큰일이라는 생각도 맞습니다. 그러나 “신장 하나를 가져도 잘 관리하면 건강하게 지낼 수 있으니까 이전보다 더 아름답게 살 수 있지 않느냐.” 이런 말을 들을 때에 믿음의 눈이 열리게 됩니다. 여러분도 가족들에게 ‘망했다. 이제 큰일났다. 저래 가지고 되겠느냐.’ 이런 말을 하지 마시고 ‘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이 일을 통해서 꿈과 비전을 이루실 수 있는 좋은 때가 왔다. 고난은 오히려 감사하고, 주님의 사랑을 더 깊이 체험할 기회다.’ 그렇게 격려하고 위로하며 새로운 관점을 보여 주는 사람이 되시길 바랍니다.

남편이 아내에게 “그렇게 살아서 뭐가 되려고 그러냐.” 그렇게 비판하면 아내가 달라집니까? 절대로 바뀌지 않습니다. 칭찬해 보십시오. 격려해 보십시오. 믿음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도록 용기를 주십시오. 그러면 아내가 분명히 달라집니다.

우리 나라는 60년대와 70년대에 정말 힘들고 어렵게 살았습니다. 연세가 쉰 살이 넘으신 어른들은 정말 힘들게 살았다는 것을 기억하고 계실 것입니다. 밤에 잠을 깨서 연탄을 갈고, 마을 우물에서 두레박 수십 개가 동시에 좁은 데서 물을 뜨고, 길거리에 분뇨 지게를 지고 가다가 엎어져서 냄새를 풍기고, 먹지 못해서 굶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그 모습을 보고 잘 살아야겠다는 목표를 정해서 모두가 열심히 살았고, 그 결과 우리는 풍요로움을 누리게 됐습니다. 젊은 형제 자매들은 그 어려움을 잘 모릅니다. 풍요로움만 보고 자랐기 때문입니다. 전 이민교회에서 이런 걸 많이 보았습니다.

그런데 박정희 대통령이 조금만 더 미래를 내다볼 수 있었다면, 잘 사는 것과 함께 바르게 살자는 것을 주장했어야 합니다. 지금 사람들의 마음이 왜 무너지고 있습니까. 바로 잘 살기 위해서 바르게 살아야 될 부분들을 다 희생시키기 때문입니다. 신문 보도가 사실이라면, 연봉 7천만 원 되는 노조에 속한 분들이 파업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파업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돈을 더 얻으려는 목적 때문에 김선일 형제가 참수 당하는 장면을 연상시키면서 자기 회사 회장의 이름을 적고 참수하는 장면을 패러디하는 것을 보면 사람의 마음이 어디까지 무너지고 있는가 하는 개탄을 하게 됩니다. 돈이면 뭐든 다 할 수 있다는 물질 만능주의가 들어와서, 요즘에는 사람이 열 명, 스무 명 죽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습니다. 백 명, 2백 명 죽으면 신문 보고 “죽었네.”하고 지나갑니다. 수만 명 죽으면 “조금 죽었구나.”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마음이 그토록 무뎌진 것입니다. 기준이 예전과 달라졌습니다.

여러분, 영적인 기준을 다시 세우고 교회가 기도하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우리 모두 다시금 깨달아야 합니다. 비판하기 전에 목회자와 이웃을 위해서 기도하는 가치관이 아름답게 자리잡고, 나를 자랑하기 전에 주님의 복음이 증거되고 세워지는 것이 더 아름다운, 영적인 기준이 세워질 때 이 나라는 다시 살아날 수 있습니다. 새로운 부흥을 우리는 경험할 수 있습니다. 소망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물질주의에 젖어들고 우상을 숭배하게 되면 이 나라는 망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 민족을 주님께서 포기하지 않으시리라고 믿습니다. 포기하지 않는 그 과정이 때론 고난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기도해야 할 때에 기도하지 못하면 그 시험이 내게 온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이제는 기도의 자리로 들어갑시다. 찬양하는 자리로 나아갑시다. 이웃을 서로 격려하고 사랑하는 모습으로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주님께서 두아디라 교회를 통해 말씀하신 것은 우리 모두가 거룩한 승리자가 되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25절에서 26절까지 보면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이렇게 돼 있습니다. 이 혼란하고 어려운 시대에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거룩한 승리자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살게 되고 평화롭고 안락한 삶을 누리는 것보다 경건한 것에 승리하는 삶이 되기를 주님은 원하고 계십니다. 베드로전서 4장 2절을 보니까  “그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좇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경건하게 사는 것에 생명과 희망이 있고, 기쁨이 있다는 것을 알기에 주님께서는 우리 삶이 오늘도 생의 현장에서 믿음으로 승리하는, 경건한 삶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 한 주간을 돌아보면서 내가 정말 하나님 앞에서 경건하게 살아왔는지, 죄와 싸워서 승리했는지 주님 앞에서 우리 자신들의 행위를 내어놓고 살펴보십시오. 주님께서 우리에게 바라는 것은 삶의 현장에서 경건하게 승리하는 삶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경건하게 살 기회를 주시는데, 그 기회는 오늘 성경을 보니까 바로 고난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일깨우는 방법 중 하나는 환경을 어렵게 만드시는 겁니다. 그 다음에 건강에 대한 어려움을 주시기도 합니다. 그리고 나아가서는 공동체 전체가 환란을 당해서 회개하게 만드십니다. 성경을 보더라도 그렇게 돼 있습니다.

그래서 질병과 고난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는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미고, 다른 하나는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메시지를 듣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기대가 담겨져 있는 축복의 모습입니다.

제가 만난 정치가들은 전쟁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도 절대로 전쟁이 일어나지 않길 바랍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지금 이 나라를 이 모습 이대로 쓰실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타락하고 병든 이 모습을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하여 열방에 보낼 하나님의 사람으로 쓸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돌이키고 회개할 기회를 주시기 위해 분명히 고난이라는 과정을 주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전쟁이든, 극도의 경제적인 어려움이든, 무엇이든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자신을 살피고 겸비하여 회개하면 주님께서 이 땅을 고치시고 이 땅에 하나님의 진정한 평강을 주신다고 저는 믿습니다.

믿음 안에서 바로 살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조만간 고난을 각오해야 합니다. 고난 없이 넘어갈 수 있는 길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회개의 자리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 민족을 다시 하나님 앞에 올려드리면서 내 삶 속에 하나님의 평강이, 주님의 긍휼과 자비가 끊어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또 우리가 고난에 처하지 않도록, 고난을 거치지 않고도 하나님의 형상을 다시 회복하고 거룩한 승리를 이룰 수 있도록 하나님께 나아가는 믿음의 결단들이 우리들 속에 있어야 합니다. 우리들은 물질주의에 찌들어서 그 기준에 의해 죽고 삽니다. 그렇지만 이제는 분명한 영적인 복음의 기준을 가지고 내 구체적인 생활 속에서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나님께 의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을 보면 주님은 불꽃 같은 눈으로 우리를 살피신다고 했습니다. 우리 마음 중심에 있는 생각까지도 주님은 감찰하신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승리하며 경건하게 살려면 내 삶 속에 하나님의 임재를 늘 의식해야 합니다.

저는 엘리베이터를 타면 대단히 거룩해집니다. 왜냐하면 엘리베이터 안에는 폐쇄회로 TV가 있어서 경비실에서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목사인 줄 알기 때문에 전 경건하게 있습니다. 누가 나를 보고 있다는 사실이 내 삶을 추스르고 돌아보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는 것입니다.

‘인생의 현장에서 주님이 불꽃 같은 눈으로 나를 보고 계신다. 내가 지금 살아가는 모습이 반드시 심판대에서 영상으로 나타나든, 어떻게 나타나든, 하나님 앞에서 반드시 대답해야 될 분명한 일이다.’ 라고 생각하면, 우리는 육체가 원하는 대로, 세상이 원하는 대로 마음껏 살지 않고 믿음 안에서 우리를 다시 돌아보게 됩니다. 거룩한 주님의 사람으로서 열방 가운데 주님께서 축복하신 사람이 되기 위해 오늘 우리에게 새로운 삶의 원리를 제공하는 주님의 말씀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심리학자 중에 조지 리치(George Ritchie)라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이 나치 독일군이 유태인들을 학살할 때 수용소에서 만난, 인상 깊은 사람을 소개했습니다. 그는 와일드 빌이라고 하는 사람인데, 하루에 열다섯 시간, 열여섯 시간씩 일해도 지치지 않고, 나이가 많지만 허리도 구부러지지 않은 채 늘 평온한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놀라운 것은 그가 수용소에 들어온 지 6년이나 되었지만, 그의 삶이 하나도 흐트러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 그럴 수 있는지 알아보았습니다.

와일드 빌은 변호사였는데, 유태인들을 학살할 때 아내와 두 딸, 그리고 세 아들이 한꺼번에 길거리에서 총살을 당했습니다. 그는 4개 국어를 하기 때문에 통역관으로 쓰기 위해서 독일군들이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죽을 것인지, 살 것인지 심각하게 고민하다가 어차피 죽지 못하고 살 거라면, 죽는 것 이상으로 보람 있는 일은 무엇일까 생각하며 자기 삶을 돌아봤습니다. 그가 변호사로 활동할 때 보니까 많은 사람들이 미움 때문에 집안도 망치고 관계도 깨지고 재산도 날리곤 하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 난 죽었다. 이제 새로운 삶이다. 앞으로 무엇이든지 사랑하면서 살아야겠다’고 마음에 결단했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원수도 사랑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불평할 만한 상황도 사랑하면서 자기 인생을 개척하고 변화시켜 나갔습니다. 그래서 늙지 않았습니다. 마음에 기쁨이 있었습니다. 그는 결국 행복한 삶을 살면서 그 수용소에서 해방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성경은 우리가 죄와 사망으로 이미 죽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오셔서 우리를 복음으로 다시 살리셨습니다. 우리는 죄에 대해서는 이미 죽은 자요, 멸망한 자입니다. 주님께서 다시 살려주신 이 삶을 어떻게 선택하며 살아야 되겠습니까. 주께서 혼란한 이 시대에 두아디라 교회를 통해서 주신 이 삶의 기준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점점 아름다워지는 삶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하십시오. 거룩한 삶에 있어서 승리자가 되고 비겁한 사람이 되지 말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내 속에 세상적이고 물질적인 가치관이 아니라, 영적인 가치관이 바로 서서 울어야 할 때 울 수 있고, 웃어야 될 때 웃을 수 있는 건강한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이 어둠의 역사를 능히 헤쳐나가며 주의 영광을 증거할 주의 사람으로 살기 원하시는 주님의 기대를 기억하시면서 고난의 때를 지혜롭게 사는, 그래서 하나님이 주시는 영광스러운 축복의 주인공이 되는 귀한 사람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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