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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일을 하려면 (요 6:2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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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김양인 목사 (목양교회)

우리가 한 세상 살아가면서 좋든 싫든 일을 도외시하고 살 수는 없습니다. 우선 먹고 살기 위해서 일할 필요가 있습니다. 농부가 밭에 나가 농사를 짓는 것이나 도시인들이 회사에 다니거나 사업을 하는 것이나 학생들이 공부하는 것도 일입니다. 작가가 글을 쓰는 것이나, 음악가가 연주를 하는 것, 배우가 연극을 하는 것도 일입니다. 비단 생계와 상관이 없이 취미로 화초를 기르거나 그림을 그릴지라도 그것 역시 일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우리 인간의 행위는 어느 것 하나 일의 범주를 완전히 탈피하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가하면 일은 우리를 피로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동시에 우리에게 상당한 즐거움과 보람을 안겨주기도 합니다. 만일 우리에게 아무 할 일이 없이 그저 낮잠이나 자면서 살라고 하면 그처럼 지루하고 고통스러운 경우도 없을 것입니다. 어찌 보면 우리 인생의 성패는 무슨 일을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 시간 저는 그리스도인이 할 일이 무엇이며 또 그 일을 어떻게 해야 좋은지에 관해서 성경 말씀에 근거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첫 번째로, 그리스도인은 일의 종류를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일에도 종류가 있습니다. 선한 일이 있는가 하면 악한 일이 있습니다. 이 사회에 유익이 되는 일이 있는가 하면 무익한 일이나 해(害)가 되는 일이 있습니다. 혹 보면, 돈벌이만 잘 된다면 무슨 일이나 마다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즐겨 사용하는 말이 “개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쓴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직업의 귀천이 없음을 강조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엄연히 직업의 귀천이 있습니다. 그 기준이 무엇일까요?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느냐, 해를 주느냐가 그 기준입니다.

예를 들면, 술과 마약을 파는 것은 천한 직업입니다. 홍등가에서 인신매매를 하는 것 역시 천한 직업입니다. 반면에 길거리에서 좌판을 벌이고 장사를 할지라도 정직하게 노력해서 산다면 귀한 직업입니다. 그리고 술과 마약이나 인신매매와 관련이 없고 사회적인 인정을 받는 직업이라고 할지라도 그 일에 종사하는 사람의 행동에 따라서 귀한 직업이 되기도 하고 천한 직업이 되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우리 사회에서 변호사나 의사는 많은 사람이 선망하는 직업입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도 돈벌이에만 급급해서 우리 사회에 해악을 끼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변호사가 의뢰인을 성실히 돕고 수입을 올리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성실한 변론에는 관심이 없고 과다한 수임료를 받는 데만 급급하다면 악한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의사가 의술로써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할 수도 있지만, 생명을 담보로 해서 돈벌이에만 열심 낼 수도 있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생업을 선택할 때 신앙적인 기준에 따라서 선택해야 합니다. 내가 이 직업을 가지면 하나님을 섬기는 데 방해가 되지는 않을까 미리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뿐 아니라, 자기의 직업을 통해서 선을 행하고 사회에 유익을 끼칠 수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성경에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고전 10:23)라고 했습니다. 자유 민주국가에서 국민에게는 직업 선택의 자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고 덕을 세우는 직책을 감당하기 위해서 직업 선택의 자유를 어느 정도 유보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의 종류를 분별하는 것은 생업뿐 아니라 개인적인 생활에서도 중요합니다. 우리는 자기에게 주어진 하루 24시간을 무엇을 하면서 보내는지 살펴보고 혹시라도 무익한 일에 아까운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면 즉시로 고쳐나가야 합니다. 건강을 위해서 잠시 낮잠을 자는 것은 좋지만 습관적으로 하루에 몇 시간씩 낮잠을 자는 것은 세월을 낭비하는 것입니다.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서 안부를 묻고 대화하는 것은 좋지만 한번 전화를 잡으면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통화를 지속하는 것은 세월을 낭비하는 것입니다. 컴퓨터를 가지고 생활에 필요한 정보를 얻는 것은 좋지만 채팅하는데 몇 시간씩 사용하는 것은 무익한 일입니다.

이에 대하여 에베소서 5장 15절로 17절에는 “15)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16)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17)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고 하였으며, 골로새서 4장 5절에는 “외인을 향하여서는 지혜로 행하여 세월을 아끼라”고 했습니다. 돈을 함부로 허비하는 것도 나쁜 일이지만 시간을 낭비하는 것은 더욱 더 나쁜 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하루를 시작하기 전에 잠시 오늘 무슨 일을 할 것인지 살펴보는 지혜를 발휘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 성도님들에게 선한 일과 악한 일, 유익한 일과 무익한 일을 분별하는 능력을 주셔서 가장 가치 있는 인생을 살아가도록 도와주실 것입니다.

두 번째로, 많은 일을 하려고 들지 말고 마땅히 할 일을 해야 합니다.

인간에게는 일에 대한 욕심이 있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많은 일을 해서 성과를 거두고 싶어 합니다. 특히,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일수록 큰일을 많이 하고 싶어 합니다. 선거철이 되면 정치가들이 지역사회를 위해서 이러이러한 일을 하겠노라고 공약을 발표합니다. 그들이 내세우는 공약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하나같이 큰일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큰일이라고 해서 사람들을 유익되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중국의 진시황은 북방 오랑캐의 침입을 막는다는 명분 아래 그 유명한 만리장성을 쌓았습니다. 그 성의 길이와 웅장함은 지금도 사람들의 찬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합니다.

또 진시황은 아방궁을 비롯해서 얼마 전에 발굴된 진시황능을 건설했습니다. 진시황은 무려 38년에 걸쳐서 자기의 능을 건조했다고 하는데 동원된 인부가 70만이나 되었다고 하며, 그 규모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더구나 능의 일부인 병마용갱에는 흙으로 빗은 키가 6척이 넘는 병사들의 인형이 8천 개나 출토되었습니다. 진시왕의 능은 아직도 발굴이 계속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후세 사람들은 진시황이 건설한 장성과 능을 보고 감탄하지만, 우리는 그 같은 대규모 역사에 동원되었을 백성들의 고통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사실, 권력자의 야망을 위한 일은 크면 클수록, 많으면 많을수록 백성들의 수고와 고통을 더할 뿐입니다. 이는 솔로몬의 경우도 비슷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주신 전무후무한 부와 지혜를 가지고 재위 초기에는 성전을 지어 봉헌하는 등 선한 일을 했지만, 나중에는 자기의 야망을 위한 일에 사용했습니다.

열왕기상 9장에 보면, 솔로몬이 성전과 자기 궁과 밀로와 예루살렘성과 하솔과 므깃도와 게셀을 건축하였고, 자기에게 있는 모든 국고성과 병거성들과 마병의 성들을 건축하고 또 예루살렘과 레바논과 그 다스리는 온 땅에 건축하고자 하던 것을 다 건축하였다고 했습니다. 솔로몬은 건축에만 힘쓴 것이 아니고, 주변 나라와 무역을 하였으며 더구나 지중해에 무역 선단을 띄워서 멀리 다시스까지 가서 교역을 해서 많은 수입을 올렸습니다. 그는 그 부를 가지고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해 보았습니다.

전도서 2장 10절에 보면 “무엇이든지 내 눈이 원하는 것을 내가 금하지 아니하며 무엇이든지 내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을 내가 막지 아니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과연 그같은 일들이 솔로몬에게 만족을 가져다주었느냐 하면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그 후에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수고한 모든 수고가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며 해 아래서 무익한 것이로다”(전 2:11)고 했습니다. 우리는 진시황이나 솔로몬과 같은 사람들의 역사를 통해서 큰일을 하는 것이나 많은 일을 하는 것이 인생을 잘 사는 방도가 아님을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큰일을 하고, 많은 일을 하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땅히 할 일을 하는 것입니다. 나의 인간적인 야망을 달성하기 위해서 일하는 것은 교만한 정신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다윗은 말하기를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치 아니하고 내 눈이 높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일과 미치지 못할 기이한 일을 힘쓰지 아니하나이다”(시 131:1)고 했습니다. 큰일과 미치지 못할 기이한 일을 힘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가 꼭 해야 할 일에 힘쓰는 것은 곧 분수를 지켜 행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윗은 목동 시절에는 양을 치는 일에 최선을 다했고, 왕이 되고나서는 백성들을 다스리는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리했더니 그가 큰일과 미치지 못할 기이한 일을 힘쓰지 아니했으나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큰일을 많이 이룩한 왕이 되었습니다. 일을 많이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꼭 해야 할 일을 하고 하지 않아도 될 일은 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할 일이 많아서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고 핑계 대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이 땅에서 큰일을 이루고 많은 일을 하는 것도 좋지만 그 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성도님 각자에게 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깨달아 그 일에 최선을 다하시는 것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 성도님들을 귀히 보시고 가치 있는 인생을 살아가게끔 은총을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세 번째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이나 되는 큰 무리를 먹이신 기적을 행하셨을 적에 그곳에 있었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그들은 서로 말하기를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고 했습니다. 개중에는 이와 같이 큰 이적을 행하시는 예수님을 자기들의 임금으로 삼으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만일 예수님을 왕으로 삼기만 하면 먹고 사는 문제는 걱정이 없을 것입니다.

그들은 이튿날 아침 일찍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랍비여, 안녕하십니까?” 라고 인사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저들의 생각을 다 하시고 이같이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 이에 그들이 묻기를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고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대답하시기를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데 양식처럼 필요한 것은 달리 없습니다. 사람들의 관심 가운데 가장 큰 것은 양식에 관한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요즘 정부 당국에서 곡물을 적게 생산하는 정책을 고수하는 것은 국가 장래를 위해 좋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우리나라에서 곡식을 생산하지 않더라도 외국에서 싼 값에 사다 먹으면 된다고 하지만, 나중에 우리나라의 농업이 완전히 황폐해 진 다음에 외국에서 곡식의 가격을 올리면 꼼짝 없이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농업은 국가의 안보를 위해서도 발전시켜 나가야 합니다. 사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보리 고개를 졸업한 지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닙니다. 겨우 이 삼십년이 될 뿐입니다.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만 해도 아침 점심으로 동사무소 앞에 옥수수 죽을 배급받기 위한 줄이 길게 서 있는 것을 쉽게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경제가 좋아져서 양식 걱정을 하지 않게 되었다고 할지라도 양식의 소중함을 망각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멀리 아프리카까지 갈 것도 없이, 지척에 있는 북한 동포들을 보십시오. 성도님들께서는 티비나 신문을 통해서 양식이 없어 영양실조에 걸려 있는 북한 아이들의 모습을 보셨을 것입니다. 이처럼 먹는 문제의 중요성을 감안할 때 기적의 떡을 배불리 얻어먹었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 나온 심정을 어렵잖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배고픈 사람들의 사정을 잘 아셨기에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그러나 다시 찾아온 사람들에게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너희가 떡을 얻어먹기 위해 나를 찾아왔다면 잘못 찾아온 것이다”는 뜻입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는 무리에게 썩는 양식을 주려고 이 땅에 오신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땅에서 나는 양식은 우리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하지만 그렇다고 생명을 무한정 연장시켜 주지는 못합니다. 매일같이 끼니를 거르지 않고 양식을 먹어도 결국은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 땅의 양식은 너무 많이 먹으면 오히려 수명을 단축시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 땅의 양식은 썩는 양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런 이유로 인해서 주님께서는 무리에게 썩는 양식을 위해 일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썩는 양식을 위해서 일한 것이 결국 죽음으로 끝난다면 그것을 얻기 위해 바친 수고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양식은 썩는 양식이 아니고 영생의 양식입니다. 이 양식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고 영생을 누리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영생을 주는 양식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무리가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라고 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양식이라면 사람이 어떻게 예수님을 먹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을 먹는다는 것은 곧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과 같은 뜻입니다. 예수님의 살을 먹고 그 피를 마신다는 말은 상징적인 표현으로서 예수님을 온전히 믿고 따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음식을 먹으면 그것이 뱃속에 들어가서 소화가 되어서 그 영양분이 온 몸에 공급되듯이, 우리가 예수 믿는 것도 이와 같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살이 되고 피가 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으로부터 우리가 영적 생명을 공급받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고 하시자, 그들은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무언가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만한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나 봅니다. 이 같은 생각은 그 당시 유대인들이 보편적으로 갖고 있었던 생각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예수님께 묻기를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라고 한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자기들이 의로운 행실로써 얼마든지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대답하시기를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의 일은 율법을 지켜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보내신 자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도 우리 주위에는 영생의 길을 알지 못하고 마치 자기의 행실을 깨끗하게 함으로써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줄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그래서 “예수 믿고 죄를 씻고 구원 받으라”고 말해 주면, “왜 내가 죄인이냐?”고 항의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나는 이제껏 양심적으로 살고 법을 지키면서 살았습니다. 따라서 만일 천국이 있다면 나 같은 사람이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세상 종교들의 가르침도 역시 사람이 자기의 의로운 행실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같은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합니다. 로마서 3장 20절에 보니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과 같이,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하나님의 일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율법을 지켜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는 선행과 자선을 통해서 자기의 의로움을 드러내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 인간들의 의로움이란 더러운 옷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이 진리를 알지 못한 채 하나님의 일을 하려는 사람은 많은 일을 하면 할수록 점점 더 영생의 길에서 멀어져 갈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인정하시는 하나님의 일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답은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나와 있습니다. 고대 근동에서는 도장을 매우 중요시 했습니다. 무슨 계약을 할 때에는 반드시 계약서에다 쌍방의 도장을 찍었습니다. 그리고 왕이 조서를 내릴 때에는 자기의 어인(御印)을 찍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너는 나의 아들이라”고 보증하는 도장을 찍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스스로 영생의 양식이라고 주장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 사실을 보증하셨습니다.

이에 대하여 로마서 3장 21절로 22절에는 “21)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과 같이, 예수 믿는 성도들은 자기의 의로운 행실로 의인이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의를 받아서 의인이 됩니다. 인간의 의는 더러운 누더기 같지만, 하나님의 의는 빛나는 깨끗한 세마포와 같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의를 옷 입은 사람들은 영생을 누리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사람이 이 땅에 태어나서 한 평생 살다가 언젠가 이 세상을 하직할 날이 올 것입니다.

죽음은 존재의 소멸이 아니라 또 다른 삶의 시작을 의미합니다. 그뿐 아니라,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라고 하신 대로 죽음 이후에는 심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 사람들의 인정을 받는 큰일을 많이 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일을 하지 못했다면 영생과 상관없는 운명에 처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인정을 받으려면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합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 그 분이 우리에게 생명의 양식이 되셔서 우리에게 영생을 선물로 주십니다. 이제 우리는 일에 대한 평소의 생각을 성경적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썩는 양식을 위해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 일해야 합니다. 전자는 세상일이고 후자는 하나님의 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을 말합니다. 장차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설 때 인정받을 것은 세상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입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주의 일에 힘쓴 것만이 영생에 들어가서 무궁한 영광을 누리는 근거가 됩니다. 오늘 이 설교를 경청하신 성도님 마다 더 이상 썩는 양식을 위해 일하지 마시고 하나님의 일에 열심 내심으로 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뿐 아니라 장차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영생의 복을 누리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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