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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요한복음 21장(12)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요 2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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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이한규 목사 (분당샛별교회)

<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

한 중학교 1학년 학생이 있었습니다. 그 학생은 중학교에 들어올 때는 톱(top)으로 들어왔는데 몇 개월 만에 심하게 망가지고 있었습니다. 성적도 떨어졌지만 더욱 큰 문제는 성격이 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반항하고, 거칠게 되고, 수업도 거부하고, 나중에는 친구들도 그를 따돌렸습니다.

선생님은 이유가 궁금했습니다. 알고 보니 이 학생의 부모가 별거 중이었습니다. 환경조사서를 봤습니다. 보니까 부모가 모두 교회를 다녔습니다. 그때부터 이 선생님은 그 부모를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음에 감동이 생겨 양쪽 부모에게 전화를 걸어 아들 성적문제로 의논하고 싶다고 해서 똑같은 시간에 학교로 오게 했습니다.

그날 학교에 와 보니 배우자가 있으니까 둘 다 언짢은 기색을 보였습니다. 선생님이 말했습니다. “아이 문제는 두 분의 도움이 다 필요해서 함께 모시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거 보세요”하고 그 학생의 영어 시험 답안지를 보여드렸습니다. 답안지에는 한 문제도 답을 적지 않고 낙서만 했는데 낙서의 마지막 부분에 선생님이 빨간 줄을 쳐놓은 이런 낙서가 있었습니다. “엄마! 아빠! 이혼하면 난 누구와 살아! 난 둘 다 필요해요! 엄마 아빠는 정말 우리를 사랑해?”

그 글을 보고 두 사람 모두 고개를 숙였습니다. 선생님이 말했습니다. “두 분 모두 교회 다니시죠? 제가 기도해 드릴게요.” 그리고 선생님이 기도하자 곧 교실은 울음바다가 되었습니다. 그날 이후로 그 가정은 다시 하나가 되었다고 합니다.

부모의 정당하지 못한 모습은 자녀의 마음에 큰 상처를 남깁니다. 정당하지 못한 감정과 태도, 정당하지 못한 말과 매가 얼마나 큰 상처를 남기는지 우리도 다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그 기억이 얼마나 오래 남고, 성격에 얼마나 나쁜 영향을 미칩니까? 우리는 자녀를 집에서 멍들게 하고 세상으로 보내는 부모가 아니라 세상에서 멍든 자녀를 집에서 풀어주는 부모가 되어야 합니다.

지금은 사회가 병들어 어디에 가도 피멍이 들기 딱 좋은 상황입니다. 사랑이 식어지고 있습니다. 이때 우리의 가장 큰 사명 중의 하나는 우리 자녀를 사랑이 많은 넉넉한 자녀로 길러 세상으로 내보내 맑은 물 샘 근원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 사랑의 중요성을 잘 알려주는 본문입니다.

< 진리는 밥에서 나옵니다 >

오늘 본문 15절 말씀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주님은 믿음을 배반한 제자들에게 분명히 무슨 말씀을 하고 싶었지만 밥 먹기 전에 하지 않고 먼저 따뜻한 사랑의 식탁을 만들어 밥을 잘 먹인 후에 하셨습니다.

성경을 보면 주님은 밥 먹이는 삶을 매우 중시하셨습니다. 벳새다 광야에서도 말씀만 주시지 않고 배고픈 군중들에게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배도 채워주셨습니다.

주기도문을 보면 주님은 가장 먼저 찬양 기도를 가르쳐주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그 다음으로 구하는 기도를 가르쳐주셨는데 그 중에서 제일 먼저 무엇을 구하게 하셨습니까?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그 다음으로 무엇을 구하게 하셨습니까?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주님은 ‘죄 사함을 구하는 기도’보다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를 먼저 하게 하셨습니다. 그처럼 주님은 ‘밥을 먹이는 것’을 귀하게 보셨습니다.

우리도 밥을 나눠주는 것을 무엇보다 귀하게 봐야 합니다. 사람들이 “진지 드세요”라고 할 때 ‘진지’란 ‘어른들이 드시는 밥’을 높이는 말인데, 그 말은 ‘참된 지혜’를 뜻하는 ‘진지(眞智)’라는 말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습니다. 아마 우리 조상들은 “진리는 밥에서 나온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실제로 요새 많은 싸움은 진리 싸움보다는 대개 밥그릇 싸움입니다. 그러나 밥을 나누려고 하면 지혜도 생기고, 외적인 평화와 내적인 평안도 주어집니다.

요한복음 6장을 보면 예수님은 “내가 생명의 떡이니”라고 하셨습니다(요 6:38). 그 말씀에서 떡은 ‘가끔 먹는 떡’보다는 ‘매일 먹는 밥’으로 표현해야 더 정확합니다. 그때 주님께서 좀더 고상하게 “나는 생명의 왕이니!”라고 하면 좋았을 텐데 “나는 생명의 밥이니!”라고 하시니까 그 얘기를 듣고 사람들은 “너무 어렵네. 별 것 없네. 이상하네.”하고 주님 곁을 떠났습니다(요 6:60,66).

왜 예수님께서 “나는 생명의 밥이니”라고 하셨습니까? 우리는 밥이 되어주고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어디에 축복이 있습니까? 밥을 나눠주는 삶에 진리가 있고 축복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복이 없는 사람은 밥그릇을 빼앗으려는 사람입니다. 두 번째로 복이 없는 사람은 내 밥그릇만 챙기는 사람입니다. 진짜 복이 있는 사람은 밥을 나눠주는 사람입니다. 그 중에서도 제일 복이 있는 사람은 자기가 밥이 되어주고, ‘거룩한 일을 위해 왕따 당하는 사람’입니다.

진정 축복 받기를 원하면 ‘어려운 사람들에게 따뜻한 사랑과 밥을 나눠주는 일’에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선교가 무엇입니까? 바로 ‘주님의 사랑과 밥을 나눠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실한 신앙을 가졌다면 선교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선교사들은 우리를 대신해서 전방에 나가 영적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상상할 수 없는 무거운 짐들입니다. 그 짐을 우리가 함께 지지 않으면 누가 져야 합니까? 한쪽에서는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는데 한쪽에서는 안락의자에서 쉬고 있다면 하나님 앞에 큰 죄가 될 뿐 아니라 인간적으로도 문제입니다. 혼자 살겠다고 하면 영혼도 죽고, 축복도 죽고, 다 죽습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을 태우고 헌신하면 나도 살고, 너도 살고, 다 살게 됩니다.

여러분들에게 매주 광고하는 대로 우리 CMA 7명의 정식 선교사들(김영숙, 임준호, 김성수, 김진영, 황수, 김재호, 임병철)과 협력 선교사들(강영철, 김영칠, 손영삼, 유재춘, 이동구, 탁수연 등)을 위해 한 사람씩 이름을 불러가며 기도해주시기를 바랍니다. 그처럼 선교사도 후원해야 하고, 선교에 전담하는 이창영 목사님 사례비 등 운영 경비도 필요합니다. 선교사에게 후원을 하다가 후원을 줄이거나 끊는 것처럼 안타까운 일은 없습니다. 그 짐을 같이 나눠 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신앙생활이란 하나님의 가슴에 빨대를 끼고 축복의 꿀을 빨아먹는 것만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주기 위해 삼위일체 하나님이 총동원되어 나서셨고, 또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까지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과 선교사들의 수고와 땀방울과 핏방울이 있었습니다. 그 은혜를 생각하며 십자가의 부담을 기꺼이 지는 것까지 나아가야 바른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최대 관심은 ‘따뜻한 사랑과 밥을 나눠주는 것’에 있어야 합니다.

< 요한의 아들 시몬아 >

그처럼 조반 먹은 후에, 해변이 아침햇살로 반짝거리고 제자들이 어느 정도 기운을 차리자 예수님은 드디어 제자 중에서 베드로를 보시며 물으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그 질문을 듣고 베드로는 이런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주님! 저는 정말 누구보다 주님을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실패했습니다. 그래서 저의 마음이 이렇게 비참한데 잔인하게도 왜 아픈 상처에 식초를 붓나요?”

그러나 그것은 베드로의 생각입니다. 주님은 과거의 아픔을 건드리려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열심을 불러일으키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 주님의 의도는 베드로를 부른 호칭에서부터 알 수 있습니다. 왜 예수님은 베드로를 부를 때 베드로의 옛 이름인 시몬이라는 이름을 부르셨을까요? 그 옛 이름이 더 따뜻하고 친밀감 넘치는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이유는 과거의 은혜 받은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서였습니다.

어느 날, 예수님은 갈대 시몬에게 찾아오셔서 그에게 “너는 갈대가 아니라 반석이 될 거야!”라는 의미로 베드로란 이름을 붙여주셨습니다. 그리고 12제자 중 수제자로 삼으시고 수많은 은혜와 축복을 주셨습니다. 그 기억을 되살리기 원하셨을 것입니다. 아마 베드로는 그 옛 이름을 들으면서 과거의 은혜 받던 기억들이 파노라마처럼 떠올랐을 것입니다. 주님은 호칭 하나까지 베드로의 마음을 일으키려고 신경 쓰셨습니다.

< 네가 이 사람들보다 더 사랑하느냐? >

그렇게 시몬이라고 부르시고 첫 번째 하신 질문이 무엇이었습니까?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는 질문이었습니다. 다른 질문도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잘 지냈느냐? 지금 힘들지 않으냐? 정말 참 제자의 길을 갈 수 있겠느냐?” 그런데 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었을까요? 그 말은 결국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어떤 것보다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본문 15절에서 ‘이 사람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논란이 많습니다. 영어로는 ‘these’라고 되어 있으니까 ‘이 사람들, 이것들’이라는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합니다. 쉽게 말하면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도 예수님을 더 사랑하느냐는 질문입니다.

사실 이 질문은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에게 하시는 가장 중요한 질문입니다. 사실 우리에게 가장 큰 문제는 사랑을 회복하는 문제입니다. 사랑만 있으면 용기도 생기고, 십자가도 지게 되고, 고난도 이길 수 있고, 인간사의 거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예수님께서 “네가 이것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하신 것은 외모주의, 외형주의를 경계한 말입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외모를 따집니까? 그래서 몸짱, 얼짱이라는 말이 생겼습니다. 뭘 하든지 얼굴부터 잘생겨야 합니다. 배우는 말할 것도 없고, 가수를 해도 얼굴이 잘 생겨야 하고, 심지어는 회사원까지 얼굴을 보고 뽑습니다.

어떤 분의 말입니다. “얼굴이 잘생기면 모든 죄가 용서되지요.” 얼마 전에는 한 20대 여자가 강도짓을 하다가 지명수배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강도가 얼굴이 너무 예뻤다는 것입니다. 강도 잡으라고 광고를 내니까 강도 잡는 일에는 별 관심이 없고 강도의 얼굴에만 관심이 많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예쁜 사람이 어떻게 강도야? 잘못 짚은 거야!”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강짱”이란 말도 생겼다고 합니다.

그런 외형주의가 교회에도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영적 은사와 축복에는 관심이 많지만 영적 원리는 외면합니다. 교회를 선택할 때도 외모부터 봅니다. 크고 화려하고 인테리어도 잘해야 선택합니다. 눈에 보이는 표적이 있다면 우르르 몰립니다. 그런 표적신앙이 점차 부적 신앙으로 변질되지 않나 염려가 됩니다. 요새는 부적도 인쇄소에서 대량으로 만드는데 그 종이 한 장이 팔자를 고친다고 믿는 그런 믿음이 기독교에서도 발견됩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믿음이란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의 영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거창한 제단이나 장식을 좋아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겉모습보다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입니다. 화려한 기도보다 감사하고 신뢰하는 마음이 더 중요하고, 어떤 의식보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더 중요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축복 받기를 원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가장 좋아하는 것보다 더 주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인간적인 계산도 버려야 합니다. 계산하는 사랑은 변질된 사랑입니다. 사실 진정한 사랑은 받기보다는 드리기를 더 생각합니다. 많이 드리고도 더 드리지 못해서 미안한 마음을 가지는 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왜 주님은 그런 사랑을 원하십니까? 우리의 것을 다 뺏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에게 더 주기 위해서입니다.

< 용서의 마스터키는 ‘하나님 사랑’입니다 >

본문에서 주님이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신 것은 주님께서 베드로의 사랑 받기를 원해서 물으신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당신 나를 사랑해?”하는 것은 더 사랑받기 위해서 묻는 것이지만 주님의 질문에는 전혀 다른 뜻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네가 나를 사랑해야 사는 길이 열린다. 능력과 지혜도 생긴다. 너는 나를 떠나서는 살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사랑 받는 존재입니다. 그 사실을 아는 것은 우리에게 큰 힘과 위로를 줍니다. 그러나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더욱 큰 힘을 줍니다. 사랑에는 관심이 많지만 실제로 사랑하지 않으면 진정한 의미의 축복과 은혜는 없습니다. 우리의 삶에 진정한 능력과 축복을 가져다주는 것은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신뢰가 가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물론 교회 다닌다는 사람들 중에도 못된 사람들은 많습니다. 그러나 정말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사람은 다를 것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그 다음에는 아무 일이나 하십시오.” 하나님을 정말 사랑하는 사람은 믿음이 간다는 말입니다.

실제로 가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래도 한 가지만 있으면 신뢰를 접지 않습니다. 그 한 가지란 “그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냐?”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사도 바울 고집도 보통 고집이 아닙니다. 또한 그의 서신서를 보면 사람의 마음을 칼로 베는 듯한 상처 주는 말들도 엄청나게 많습니다. 심지어는 실명까지 거론하면서 책망을 합니다. 그래도 사도 바울에 대해 “무식한 놈! 교양 없는 놈!”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그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열심을 가지고 그 말을 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아무리 생각해도 목사가 될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대학교 4학년 때까지 말을 더듬었습니다. 그리고 ‘심리적 가리막 현상’이 있어서 남들 앞에 서면 생각했던 말을 깡그리 잊어버렸습니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매주, 매일 남 앞에서 설교를 하고 기도를 합니까? 그리고 스스로 생각하기에 부족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말씀을 준비하다 보면 그 말씀에 내가 찔려 강단에 올라가고 싶지 않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래도 한 가지 생각을 하면 마음이 평안합니다. “나는 하나님을 정말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언어도 부족하고, 도덕도 부족하고, 행실도 부족하고, 일하는 것도 부족해서 나 자신이 너무 한심한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그래도 “나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생각하니까 그런 대로 살아갈 용기가 납니다.

우리가 부족한 것이 많아도 한 가지만 있으면 다 용납될 수 있는 용서의 마스터키가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본문 말씀대로 주님을 다른 어떤 것보다 더 사랑하고, 내가 가장 좋아하고 아끼는 것보다 더 사랑하고, 지금보다 조금 더 사랑하면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최고의 사랑받는 성도가 될 것입니다.

신앙생활하면서 “주님을 믿-쉽니다”라고 하는 사람과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하는 사람은 차이가 있습니다. “믿-쉽니다”라고 하는 말에는 ‘좀더 받고 싶은 심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삶이 힘들면 믿음을 배반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사랑합니다”라는 말에는 ‘좀더 드리고 싶은 심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고난이 와도 쉽게 흔들리지 않습니다.

베드로도 그랬습니다. 그가 주님을 믿는다고 신앙고백을 한 얼마 후에 ‘주님의 십자가’를 보기만 하고도 주님을 배반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21장에서 주님을 사랑한다는 고백을 한 이후에는 ‘자기의 십자가’를 직접 지고도 죽기까지 배반하지 않고 주님을 위해 충성했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믿는다는 고백’에서 ‘주님을 사랑한다는 고백’으로 한 차원 더 나아가야 합니다. 그 사랑이 있으면 어떤 어려움도 참을 수 있고, 어떤 상황에서도 기꺼이 헌신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이 모든 것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물으셨고, 우리에게도 그 질문을 하시고 있습니다.

< 인생 재는 법은 사랑 길이에 있습니다 >

결국 무슨 말입니까? 사랑이 희망이고, 사랑이 길이라는 말입니다. 흔히 인생 재는 법은 ‘시간 길이’에 있지 않고 ‘사랑 길이’에 있다고 말을 합니다. 모든 길은 사랑으로 통합니다. 요새 자녀 교육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런데 자녀를 잘 키우고 싶으면 자녀에게 무엇보다 사랑 교육을 잘 시켜서 사랑을 가진 사람으로 길러야 합니다. 그래서 사랑학원인 교회가 중요한 것입니다. 교회가 아니면 어디에서 사랑을 배우고 실천하겠습니까?

소크라테스가 늙었을 때 제자들이 말했습니다. “선생님! 사람들에게 가장 들려주고 싶은 말씀은 무엇인가요?” 그때 소크라테스가 말했습니다. “이제 재물을 모으는 일에만 정성을 쏟지 말고 자녀들에게 좀더 사랑과 정성을 쏟으라고 말하고 싶네.” 사랑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면 지혜도 생깁니다. 미국의 어니 브리지는 GM사를 세계 최고의 기업으로 만든 경영자였습니다. 하여튼 그 분이 손만 대면 그 기업이 세계 최고의 기업이 되었습니다. 그 분이 TWA로 가니까 TWA가 미국의 제일 항공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대학교 2년 중퇴자이지만 하루에 2시간 이상 성경을 보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는데 그때 엄청난 지혜가 생긴다고 합니다.

요새 정치가 혼란하다고 합니다. 그 해결책도 사랑에 있습니다. 대영제국의 초석을 닦았던 그랜드 스톤이라는 재상은 하나님을 사랑했던 정치가였습니다. 그리고 네덜란드를 세계 일류의 나라로 만든 아브라함 카이퍼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정치가였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가장 성공적으로 후회 없이 사는 방법이 딱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사람은 사랑을 나눌 때 가장 행복하고 가장 능력 있는 사람이 됩니다. 모든 문제의 해결책도 사랑에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아무개야! 네가 어떤 것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그 질문에 기쁘게 “예!” 하고 대답해서 하나님의 사랑 받고 축복 받는 복된 성도들이 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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