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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간음하지말라 (마 5:2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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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영규 목사 (성덕중앙교회)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27-28)  만일 네 오른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29-30)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라 하였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저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린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31-32)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

  오늘 말씀은 주님의 율법 해석의 두 번째 부분으로, 제7계명에 대한 해석과 적용입니다.  제7계명은 지난주에 말씀드린 제6계명과 더불어 인간 사회의 핵심적인 내용입니다.  제6계명이 생명과 존재에 대한 교훈이라면, 제7계명은 결혼과 가정, 異性 관계에 대한 교훈입니다.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간음하지 말라는 것은 모든 사회가 법으로 정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함무라비 법전, 앗시리아 법전, 그리스 로마 사회의 법률, 현대 사회에 이르기까지 간음죄는 법으로 다스려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간음에 대한 규정은 사회적 관습에 따라 상당히 다릅니다.  고대 중동 지방에서는 주로 여자의 간음을 엄격하게 규정했습니다.  유부녀나, 약혼 상태에 있는 여자의 간음은 돌로 쳐 죽일 정도로 엄히 다루었습니다.  반면에 남자들의 경우는 한결 너그러웠습니다.  유부녀와 간음하는 경우는 엄히 처벌했지만, 첩을 두는 경우나, 창녀와의 관계는 허용했습니다.  그리스 로마 사회에서도 비슷했는데, 특히 여자의 간음에 대해서는 남자에게 다양한 처벌 방법이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헬레니즘 사회에서 간음죄는 유부녀의 경우처럼 극히 제한적으로만 적용되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음란 행위가 공개적으로 허용되어 있었습니다.  첫째는 창녀들입니다.  둘째는 神殿에 상주하는 女司祭와 성관계였습니다.  여사제와의 성관계는 신성한 제사 의식으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러나 제7계명은 세상 법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28)  주님은 제7계명을 마음에 적용하셨습니다. “간음하다”라는 헬라어 동사는 moiceuvw(모이큐오)입니다.  이 단어는 단순히 “간음하다”라는 뜻 외에도, “여자를 유혹하다, 강간하다”, 혹은 수동태로 “간음의 유혹을 받다”, “불순물을 섞다”라는 뜻도 있습니다.  간음죄란 단순히 부당한 성관계를 맺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성적인 유혹 행위, 불순한 동기의 유혹행위까지도 다 포함시킨 말입니다.  세상법은 유부녀나 유부남과의 성관계만을 집중적으로 처벌합니다.  최근에 와서는 그마저도 당사자들이 문제삼지 않으면 처벌하지 않는 쪽으로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법은 전혀 다릅니다.  성관계만이 아니라, 유혹 행위, 음란한 마음가짐까지, 다 간음죄로 취급합니다. 

  마음의 간음이 어떻게 일어납니까?  오늘 주님은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이 구절은 두 가지로 번역됩니다.  첫 번째 번역은 “정욕의 눈으로 여자를 바라보는 사람”(현대인의성경), “looks at a woman lustfully”(JB,NIV), 즉, 미리부터 여자를 性的인 상대로 간주하고 바라보는 겁니다.  마음의 異性觀이 잘못되어 있는 경우입니다.  이런 사람은 음란죄에 대해서 전혀 양심이 작동되지 않습니다.  두 번째 번역은 우리 개역성경처럼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은 사람”입니다.  첫 번째 해석과는 상당히 뉘앙스가 다릅니다.  첫 번째 번역은 본래부터 여자를 음란의 대상으로 간주하는 경우이고, 두 번째 번역은 여자를 눈으로 바라본 결과 음란한 마음이 발동한 경우입니다.  이런 경우에 음란한 욕구와 양심 사이에서 잠시 투쟁이 발생합니다.  그러다가 결국은 양심이 굴복당합니다.  마음의 간음을 누가 알겠는가, 보는 사람도 없는데?  본래부터 음란하든지, 눈으로 본 결과로 음란해졌든지 결과는 마찬가집니다.  마음에서 간음죄를 지었다는 점에서 동일합니다. 

  제가 보기에 주님이 말씀하신 의도는 두 번째 경우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본래 마음에 음란을 품고 다니는 사람보다는 여자를 봄으로써 음란한 생각을 발동시키는 사람이 더 많을 겁니다.  현대 사회가 나아가는 것을 보면 특히 그렇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음란죄를 조장하고 유발시키는 사회입니다.  한편에서는 보는 것 때문에 음란해 지고, 한 편에서는 열심히 보여주는 바람에 음란해집니다.  보는 것이 음란죄의 동기가 된다면, 보여주는 것 역시 동일한 죄악입니다.  오늘의 문화는 한 마디로 煽情的인 문화입니다.  “털 없는 원숭이”라는 책을 쓴 Desmond Morris는 인간을 가장 기형적으로 진화된 동물이라고 합니다.  특히 性徵을 나타내는 신체의 부분들이 쓸데없이 크게 발달한 동물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것도 모자라서 요즘 사람들을 보면 신체를 더욱 기형적으로 만들려고 애를 씁니다.  몸은 형편없이 야위게 만들고, 性的인 부분들은 쓸데없이 크게 만듭니다.  요즘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말 중에 하나가 바로 “sexy하다”는 말입니다.  직역한다면 “너는 참으로 性徵이 발달했다”는 말입니다.  좀 다르게 말한다면, “너는 진짜 수놈 같다!”, “너는 진짜 암놈 같다”는 뜻입니다.  상당히 동물적인 표현입니다.  그 말이 그렇게 좋습니까?  그렇게 animal이 되고 싶습니까? 

  현대 상업주의는 사람의 심리를 너무나 잘 알고 이용합니다.  모든 상품 선전에 性을 끌어들여 사용합니다.  상품 광고마다 벗은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연예인들은 벌거벗은 사진 찍기가 유행입니다.  벗기만 하면 떼돈을 벌어요.  예술을 빙자하여 벗는 것도 유행입니다.  영화, 드라마, 연극, 벗기는 것이 인기의 비결입니다.  돈 벌려고 벗는 것이야 약간은 이해가 갑니다.  왜 멀쩡한 사람들이 벗고 야단입니까?  fashion model 흉내내는 사람들이 많아요.  모델들이야 돈을 벌려니까 벗을 수 밖에 없지요.  모델 얘기가 나왔으니까 말인데, 그 모양이 괴물이지 인간입니까?  키는 멀쭉이 크고, 뼈만 앙상하고, 걸음은 씰룩씰룩 걷고, 평소에 그런 식으로 살면 사람 구실 못합니다.  그런데, 그 모델 흉내 내느라고 밥 굶고 비쩍 마르는 사람들이 있어요.  정신이 나가도 한참 나간 사람들입니다.  모델들이야 물건 팔아먹느라고 "see through look"이니 뭐니 하지만 멀쩡한 사람들이 왜 그러고 다닙니까?  날 좀 보시오!  자세히 드려다 보시오!  그런 말입니까?  보라고 벗고 다니면서 보면 또 뭐라고 해요.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  간음죄는 보는 데서 시작됩니다.  무슨 큰 의도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단순히 보는 겁니다.  blevpw( 블레포)라는 말은 주로 감각적 의미에서 눈의 기능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별 생각 없이 그냥 보는 겁니다.  그런데 결과는 ejpiqumevw(에피뒤메오)  즉, 충동과 욕구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보는 것을 조심하고, 보여주는 것을 조심하세요.  간음죄는 먼저 마음에서 일어납니다. 

쉬운 이혼 쉬운 간음

  다음으로 말씀드릴 것은 이혼과 간음의 문제입니다.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라 하였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저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린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31-32)  주님은 간음죄를 말씀하시면서 이혼을 언급하십니다.  그 이유는 이혼이 간음죄와 상당한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간음과 이혼이 어떤 관련이 있을까요?  첫째는 간음죄가 이혼의 원인이 된다는 점입니다.  둘째는 쉽게 이혼하는 것 또한 간음에 이르게 된다는 점입니다. 이혼과 간음은 악순환의 고리입니다.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라 하였으나”(31)  이혼하려면 이혼증서를 써 주라!  이것이 랍비들의 교훈입니다.  왜 이런 교훈을 했을까요?  그 원인은 이혼을 쉽게 하지 못하도록 막아보자는 취지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이혼하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타당한 사유가 있어서 이혼하는 경우도 있지만, 깊은 생각도 없이 이혼하려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이혼증서를 써 주라는 말은 공식적인 이혼 절차를 밟으라는 말입니다.  까다로운 이혼 절차를 만들어서 쉽게 이혼하지 못하게 하자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혼은 아주 쉽게 이루어졌습니다.  조선시대 유교적 영향으로 여자들에게 매우 불리한 관습이 많았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七去之惡이라는 겁니다.  여자를 버릴 수 있는 일곱 가지 원인입니다.  첫째,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으면 내쫓는다.  둘째, 아들이 없으면 내쫓는다.  셋째, 음탕하면 내쫓는다.  넷째, 질투하면 내쫓는다.  다섯째, 나쁜 병이 있으면 내쫓는다.  여섯째, 말이 많으면 내쫓는다.  일곱째, 도둑질하면 내쫓는다.  이렇게 여자들을 내쫓기 쉽게 해 놓고도, 남자들은 첩을 두고 기생집에 자유롭게 출입했습니다.  예수님 당시 중동 지방에도 비슷한 관습이 있었습니다.  여자가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경우는 물론, 요리를 못하거나 밥을 태운 경우도 이혼 사유가 되었습니다.  지금도 아랍 사람들을 보면 부인을 네 명까지 허용합니다.  그러면서도 수시로 여자를 내보내고 새로 얻는 사람이 있습니다.  조선시대 사람들도 이혼을 쉽게 하지 못하도록 장치를 마련하기는 했습니다.  칠거지악과 더불어 三不去란 것이 있었습니다.  여자를 절대로 버릴 수 없는 세 가지 경우가 있었습니다.  첫째, 내보내도 돌아갈 친정이 없는 경우는 내쫓지 못합니다.  둘째, 부모의 3년상을 함께 치뤘으면 내쫓지 못합니다.  셋째, 집안을 일으켜서 전에 가난하였다가 부자가 되었으면 내쫓지 못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법이 아니라 결혼과 성에 대한 마음가짐입니다.  성관계는 1차적인 것이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2차적인 것입니다.  1차적인 것은 결혼입니다.  성관계는 결혼의 결과로 갖게 되는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결혼 이외의 성관계는 다 죄악입니다.  성관계는 결혼 생활을 돈독하게 만드는 도구입니다.  성관계를 맺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성관계는 적어도 몇 가지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첫째로, 헌신을 의미합니다.  남녀가 결혼하면 서로에게 몸을 바칩니다.  그것은 헌신의 약속입니다.  “나는 당신에게 생명과 같은 내 몸을 바칩니다!”  내 생명, 내 존재를 상대에게 바치는 것!  그것이 바로 성관계의 첫 번째 의미입니다.  둘째로, 사랑과 친밀함의 표시입니다.  사랑이 없는 성관계는 새끼를 낳기 위해 암수가 결합하는 동물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헌신과 사랑의 약속이 결혼이라면, 그 결혼을 맺어주는 헌신과 사랑의 행동이 바로 부부의 성관계입니다.  그러므로 성관계는 결혼을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이 말씀하는 결혼과 성입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하나님과 자기 백성의 관계를 결혼에 비유합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 날에 네가 나를 내 남편이라 일컫고 다시는 내 바알이라 일컫지 아니하리라...내가 네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되 의와 공변됨과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들며,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호2:16,19-20)  “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 중 하나가 나아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하고”(계21:9)  하나님은 남편이요 성도들은 신부에 비유됩니다.  신부에게 요구되는 덕목은 헌신과 사랑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신앙입니다.  신앙은 결국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신부로써의 응답입니다.  성경은 우상숭배를 영적인 간음죄로 간주합니다.  “네가 이같이 당할 것은 네가 음란히 이방을 좇고 그 우상들로 더럽혔음이로다”(겔23:30)  “내 백성이 나무를 향하여 묻고 그 막대기는 저희에게 고하나니 이는 저희가 음란한 마음에 미혹되어 그 하나님의 수하를 음란하듯 떠났음이니라”(호4:12) 

  결혼은 헌신과 사랑의 약속입니다.  성관계는 그 헌신과 사랑을 나타내는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결혼 없는 성관계는 모두가 죄악임을 잊지 마세요.  그것이 바로 오늘 주님이 말씀하시는 7계명의 의미입니다. 

눈을 뽑으라

  마지막으로 말씀드릴 것은 간음죄를 막는 방법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 음란한 세대에서 음란죄를 짓지 않을 수 있을까요?  오늘 말씀은 두 가지 방법을 제시합니다.

  첫째로, 눈을 뽑는 일입니다.  “만일 네 오른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29-30)  눈을 뽑으라!  손을 찍어 버리라!  음란의 동기가 되는 신체적 부분들을 파괴하라는 말씀입니다.  눈이 없을 때 그 불편함은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을 뽑아 버리라고 하십니다.  손이 없을 때, 인생은 완전 불구가 됩니다.  그런데도 손을 찍어버리라고 하십니다.  정말 눈을 뽑지는 마세요.  정말 손을 자르지는 마십시오.  다만 그런 각오로 음란의 뿌리를 제거하시기 바랍니다. 

  눈을 뽑으라는 것은 음란한 장면을 차단하라는 겁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음란죄는 주로 눈으로 보는데서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장면을 바꿔야 합니다.  잠언7장에 보면 매춘굴로 찾아가는 청년을 마치 도살장으로 들어가는 소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소년이 곧 그를 따랐으니 소가 푸주로 가는 것 같고 미련한 자가 벌을 받으려고 쇠사슬에 매이러 가는 것과 일반이라.  필경은 살이 그 간을 뚫기까지에 이를 것이라 새가 빨리 그물로 들어가되 그 생명을 잃어버릴 줄을 알지 못함과 일반이니라.”(잠7:22-23)  매춘굴을 배회하면서 간음하지 않기를 바랄 수 있습니까?  포르노 영화를 보면서 음란한 마음을 품지 않을 수 있습니까?  나이트클럽에 가서 벗고 춤추는 여자들을 보면서 음란한 마음을 품지 않을 수 있습니까?  눈의 유혹에는 장사가 없습니다.  다윗 같은 믿음의 사람도 벗은 여자를 바라보고 간음죄에 빠져들었습니다.  굴뚝에 들어가서 검댕에 묻지 않기를 바랄 수 없습니다.  아주 힘든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선 음란한 장면들을 보지 마세요.  음란한 영화, 음란한 드라마, 음란한 소설, 음란한 광고, 음란한 모든 매체를 차단하세요.  그것이 첫째요, 上策입니다.  뿐만 아니라 음란을 조장하는 사람과 사귀지도 마세요.  이렇게 말하면 항의하실 분들도 있을 겁니다.  사업상, 업무상 부득이 음란의 장소를 출입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들도 있을 겁니다.  저도 과거에 직장 생활을 하면서 원치 않게 그런 장소에 간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한 번으로 족합니다.  같은 일을 두 번 반복하지 않도록 다른 방법을 강구하면 됩니다. 

  눈을 뽑으라는 것은 마음의 가치관을 바꾸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잘못 된 결혼관, 이성관, 성에 대한 인식을 바꿔야 합니다.  “늙은 여자를 어미에게 하듯 하며 젊은 여자를 일절 깨끗함으로 자매에게 하듯 하라.  참 과부인 과부를 경대하라.”(딤전5:2-3)  이성을 동물적인 성의 상대로 인식하지 말고, 천국의 유업을 함께 나눌 신령한 동반자로 생각해야 합니다.  눈을 바꾸면 행동이 바뀝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심판을 바라보고 두려워하는 일입니다.  즉, 신앙적 안목입니다.  눈을 들어 하나님을 보세요.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입니다.  불의를 용납지 않는 분입니다.  그러니까 죄를 짓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심판을 떠올리세요.  그러면 죄 짓고 싶은 생각이 싹 사라질 겁니다.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29-30)  주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음란한 마음이 생기거든 지옥을 생각하라고 하십니다.  지옥이 너무 멀어서 생각나지 않거든 가까이 생각하세요.  하나님의 심판은 너무나도 다양하게 준비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  사람이 회개치 아니하면 저가 그 칼을 갈으심이여 그 활을 이미 당기어 예비하셨도다.  죽일 기계를 또한 예비하심이여 그 만든 살은 화전이로다.”(시7:11-13)  각종 질병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불의의 사고를 준비하고 계십니다.  천재지변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내세에만 있는 게 아닙니다.  현세에도 무수히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평생 병자로 만들 수도 있고, 불구자로 만들 수도 있고, 거지로 만들 수도 있습니다.  인생 말년에 고생할 것을 생각해 보세요.  끔찍한 일입니다.  정말 하나님의 심판이 두려운 줄 알아야 됩니다.  하나님이 무서운 줄 아는 사람은 음란죄를 지을 생각이 싹 사라질 겁니다. 

  결론입니다.  간음죄는 개인을 망치고, 가정을 망치고, 자녀를 망치고, 사회를 망치는 죄악입니다.  그런데도 세상은 점점 음란해집니다.  음란죄는 죄로 여기지도 않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실상이 그렇습니다.  대한민국의 성매매 실태를 정부기관에서 조사한 적이 있습니다.  2002년에 형사정책연구원이 전국 5천403개 업소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성 구매자가 하루 평균 35만 8천여명이고, 성매매 산업에 종사하고 있는 여성이 최소 33만명에 이르는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성인남성의 20% 정도, 열명 중 네 명 정도가 한달 평균 4.5회 성을 사고 20-30대 여성인구의 4.1%는 성을 팔아먹고 산다는 결과입니다.  성매매 형태를 보면 사창가와 같은 전업형 성매매로 거래되는 규모보다도 유흥주점과 마사지업소, 다방, 이발소 같은 兼業형 성매매 업소의 거래규모가 엄청나다고 합니다.  이러한 성매매 규모를 국민 총생산과 비교해 보면 국내총생산(G에)의 4.1%인 약24조원에 달합니다.  이 규모는 대한민국의 농림업과 어업을 합한 총생산과 같은 규모입니다.  이런 망할 세상에서 우리는 자신을 지켜가야만 합니다.

  첫째로, 음란의 장면들을 눈에서 차단해야 합니다.  세상이 아무리 음란을 선전할지라도 절대로 접근하지 마세요.  마치 썩은 쓰레기를 피하듯이, 독극물을 피하듯이, 그런 장면들을 피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눈을 들어 하나님을 보세요.  하나님은 항상 심판하실 만반의 준비를 하고 계십니다.  내세에는 지옥의 심판이 기다립니다.  현세에는 각종 재앙과 고난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간음죄를 피하여 가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제7계명의 목적은 부부 생활, 혹은 가정의 화목과 사랑을 이루는 데 있습니다.  가정을 소중히 여기시고 성을 신성하게 여기시기 바랍니다.  “모든 사람은 혼인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히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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