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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광복절] 그리스도인의 자유 (요 8:3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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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사연 목사 (신천교회)

(서론)

우리나라는 기미년 3월1일 독립만세 사건이나, 상해임시정부를 세워놓고 광복 운동을 하여 마침내 일제 압박에서 해방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육신이 자유롭게 되었다고 진정한 해방이나 자유를 얻은 것이 아니라, 육과 영혼이 자유로워져야 진정한 자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문은 그리스도를 통해 그 영혼이 죄로부터 자유케 된 자가 아니라면 하나님이 태초에 인간에게 허락하신 소중한 자유의 맛을 경험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완전히 성취하신 속죄사역을 힘입은 자들만이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광복절을 맞이하여 그리스도께서 속죄사역을 통해 당신의 백성들에게 주신 자유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一) 죄를 대적할 수 있는 자유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받아들인 이후에는 전보다 마음의 갈등이 더 심하게 일어난다고 합니다.
예수를 믿기 전에는 자신이 특별히 남들보다 많은 죄를 짓는 것 같지 않았고, 별다른 고통 없이 평안한 마음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믿고 난 후에는 어찌된 영문인지 마음 속에 악한 생각이 더 많이 일어 나고, 더 많은 죄를 범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갈등도 더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도 이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염려하지 마십시오. 그러한 생각과 갈등은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완전한 속죄사역으로 말미암아 자유를 얻었다는 증거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알기 전까지는 철저하게 죄의 종 된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때에 우리는 죄의 종으로서 행하는 것이 자연스러웠고, 그렇게 지내는 것에 대하여 아무런 부담도 갖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금하신 행동을 하면서도 별다른 내적갈등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양심에 의해 조금 가책을 받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렇게 대수롭게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를 알기 전 우리 영혼의 상태였으며, 우리는 이를 평안이라 불렀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죄에 대한 굴종이었습니다. 노예근성에 철저히 길들여져서 죄에 저항하겠다는 의식마저 포기한 채 그것에 철저히 굴종함으로써 얻는 갈등 없는 생활, 그것이 죄의 노예가 되었던 때요, 우리가 평안이라 느끼던 것의 실체였습니다.
오늘날 수많은 영혼들이 이러한 상태에서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으로 인해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죄의 종(노예)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에 저항할 수 있고, 죄와 갈등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가 이렇게 죄를 많이 짓는가 하는 사실을 새롭게 발견하고 고민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갈등하며 자책하게 되는 것 그 자체가 죄에 대해서 저항할 수 있는 자유를 얻은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죄와 철저히 싸우고 갈등하십시오. 죄에 대하여 저항해야 한다는 당위성과 그렇게 하지 못하는 자신을 놓고 고민하고 땅을 치며 통곡하십시오.
Paul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탄식했습니다. (롬 7:24) 그렇습니다. 죄를 대적하고 범죄하는 자신을 부끄럽게 여겨 탄식하는 자가 죄에서 해방되어 진정한 자유자가 된 것입니다.

(二) 그리스도를 사랑하며 섬길 수 있는 자유입니다.

사도 Paul은 기독교 2000년 사에 가장 큰 족적을 남긴 사람 중 하나입니다. 그가 행한 모든 일들이, 그리고 그가 전한 많은 말들이 우리 성도들의 모범이 될 만큼 그의 삶은 대단한 업적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교회사적 업적들보다 더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것은 Paul의 변화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핍박하는데 온갖 고난과 죽음의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고 앞장섰던 자가 예수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로 변화한 사실이야말로 Paul의 위대함을 더욱 돋보이게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Paul의 변화의 원동력에 집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과연 무엇이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였던 그를 충성스런 예수의 증인으로 변하게 했느냐? 입니다.
그것은 Paul이 고전 15:10절에서 대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 했습니다.
Paul의 충격적인 변화는 그가 성경에 대한 탐구의 결과도 아닙니다. 또한 스승이나 부모나 친구의 권면도 아닙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이며, 속죄사역을 통해 그가 회심할 수 있도록 준비하신 그리스도의 은혜의 결과였습니다.
즉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속죄사역은 Paul에게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섬길 수 있는 자유를 부여한 것입니다. 우리 또 그 속죄사역으로 말미암아 전에는 죄에 얽매여 그리스도를 알지도 못했으나, 이제 그리스도를 사랑하며 섬길 수 있는 자유를 획득한 것입니다.
아직까지도 이 자유를 얻지 못한 채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이들이 많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우리가 얻은 이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새삼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사랑할 수 있는 자유, 그리스도를 진심을 다해 섬길 수 있는 이 고귀한 자유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혜인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이 아름다운 자유를 우리에게서 결코 빼앗을 수 없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三) 부활과 영생을 사모할 수 있는 자유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속죄사역으로 말미암아 성도들은 부활과 영생을 사모할 수 있는 자유를 얻었습니다. 인간의 수명이 길어야 100년 정도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부활과 영생의 소망은 참으로 소중한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부활과 영생을 사모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부활과 영생을 믿는 것이 비과학적이며, 비현실적이라고 비웃고 불쌍하게 생각하기도 합니다.
왜 우리에게 너무나 확실하고 귀한 부활과 영생의 소망이 그들에게는 믿어지지 않는 허황된 이야기며, 비현실적인 것으로 생각될까요? 그것은 그들의 영혼이 자유롭지 못하며, 죄에 매여 있어 영적 진리를 바로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많은 지식이 있다할지라도 그 영혼이 죄에 매여있는 자는 가장 기초적인 영적진리도 보지 못하고, 알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가지고 매일 산다는 바리세인과 서기관들도 성육신 하신 예수그리스도가 그들이 그토록 기다렸던 메시야임을 알아보지 못하고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던 것입니다.
날때부터 소경이었던 자가 영적진리에 어두웠던 바리세인과 서기관들에게 "이상하다.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였으되 당신들이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는도다 ...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일도 할 수 없으리로다"라고 했습니다. (요 9:30,33)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을 힘입어 영혼의 자유를 얻은 자가 아니라면 부활과 영생의 실재를 결코 알 수 없으며 사모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부활과 영생을 사모할 수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완전한 속죄사역의 결과 우리에게 주어진 너무나 소중한 자유인 것입니다. 부활과 영생을 믿고 사모하는 성도 여러분은 과연 이 사실을 깨닫고 이 자유를 마음껏 누리시기 바랍니다.

(결론)

성도 여러분! 육신의 자유가 목숨 바쳐 지켜야 할만큼 소중하다면 우리 영혼의 자유의 소중함은 과연 어디에 비길 수 있겠습니까? 이제 여러분은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완전한 속죄사역의 공로를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바로 영혼의 자유를 얻는 유일한 길입니다. 참으로 영혼의 자유는 우리가 가진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잠깐 살다가 가는 이 세상에서 육신의 자유는 전부가 아닙니다. 우리는 영혼의 자유를 소망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이 주시는 참된 자유 속에서 기쁨과 평안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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