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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 민족을 해방하신 하나님의 본심 (신 6: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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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이동아 목사 (분당제자교회)

일제 강점기에 일본군에 끌려간 아들을 둔 어머니가 일제만행을 고발하며 복수할 것을 아들에게 당부하는 내용의 서신이 13일 공개했습니다. 국사편찬위원회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으로부터 입수해 이날 공개한 이 편지는 "내가 죽은 뒤 나의 아들 김명진에게 전해주시요"라고 시작되며 일제의 만행이 얼마나 극악무도했는지를 가늠케 해주는 사료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명진아,
우리 집안 식구 다섯 사람은 왜놈 때문에 모두 굶어 죽었다.
나는 너의 아버지를 따라가겠다

네가 왜놈의 병정으로 뽑혀간 그 이튿날부터 순사와 면서기 놈들은 날마다 우리 집에 와서 쌀을 뒤져서 빼앗아 가고, 배급은 눈곱만큼 주기 때문에 집안 식구는 굶어 죽었다
너 어미아비 죽인 원수를 꼭 갚아 달라

너는 왜놈들의 군대에 있는 동안 온갖 방법을 다해 왜놈의 대포와, 탱크, 비행기를 비밀리에 파괴하고 못쓰게 만들어라

더 (일본군에) 있지 못할 경우 왜놈의 장관을 죽이고 중요한 문서를 훔쳐 우리 독립군이나 (동)맹군대로 달아나 힘을 합쳐 원수 왜놈과 끝까지 싸워라 명진아 나는 간다.
이것이 나의 절명서이다 꼭 원수 갚아라.
원수는 왜놈이다. 

사월 십일. 어미 그림

이 편지는 김우전 광복회장이 광복군으로 활동할 시기인 1945년 4월 직접 쓴 '일본군내 한인 투쟁지침 전단'과 함께 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서 발견된 점에 비춰해방 직전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이처럼 36년간의 일제치하에서의 우리의 역사는 말로 다할 수 없는 참혹하고 처참한 굴욕과 치욕의 역사였습니다. 그러나 8.15 이후 세대들은 그 체험이 약하고 그 때 그 감동과 감격이 점점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59주년을 맞는 오늘에도 우리는 60대 이상의 일제의 압박을 체험하고 광복의  기쁨에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불렀던 세대와는 많은 정서적으로 그 광복의 의미가 퇴색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 정신을 전수하기 위하여 많은 행사들을 하지만 해방과 진정한 자유를 향유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이스라엘도 이와 같은 애급의 종살이로부터 출애굽사건으로부터 이스라엘의 구원의 역사를 다루고 있습니다. 출애굽 이세들 광야 40년을 지나서 약속의 땅에 들어와 그 구원의 하나님을 잊지 않도록 유월절 맥추절 수장절 3대 절기를 지키도록 규례를 만드셨습니다. 

1.후일에 자녀들이 묻거든(20절)

미국의 유명한 철학자 산타아나가 말하기를 “뼈아픈 과거를 기억할 줄 모르는 사람은 과거를 되풀이하게 된다. 그러나 슬기로운 사람은 경험 속에서 지혜를 배우고, 지혜로운 민족은 역사 속에서 교훈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출애굽 1세대는 광야 40년간 광야에서 다 죽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여호수와 갈렙만이 가나안에 들어갑니다. 그 후 세대들이 여호와 하나님이 명하신 증거와 말씀과 규례와 법도가 무슨 뜻이냐고 묻거든 그 대답할 말을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자녀들이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녀들에게 어떻게 답할 것인가를 보여줍니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라”고 베드로 사도는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누군가가 나에게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다는 전제가 있어야 하며, 더 나아가서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은 사람들로부터 궁금증을 일으키는 삶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요즈음처럼 힘든 날은 없었습니다. 옛날에야 다 못 먹고 못살았으니까 그러려니 하고 살았지만 어느 정도 먹고 살만하다가 갑자기 나라경제가 어려워지다 보니 몸으로 느끼는 고통은 더욱 극심합니다. 앞날에 대한 불안과 공포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한마디로 미래에 대한 소망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 속에서도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소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소망은 현재의 삶에 그대로 나타납니다.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사람들을 사랑하고, 어떠한 고난이 있더라도 불의 편에 서지 않고 의를 행하게 됩니다. 현실이 아무리 어려워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의 삶은 항상 세상과 분리된 거룩한 삶입니다. 이런 그리스도인들을 보면서 사람들은 궁금해 합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당신은 무엇이 그리 즐겁습니까? 도대체 삶이 즐거운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신비로워야 합니다. 남들이 알지 못하는 기쁨과 평화와 감사와 찬양이 있는 삶이어야 합니다. 과연 세상 사람들이 나를 보면서 그런 궁금증을 느낄 것인가를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할 수 있는 대답은 무엇입니까?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소망이 있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세상적인 이유 때문에 삶의 의미와 소망을 갖습니다. 사업에 성공해서 갑자기 떼돈을 벌었다든가, 아니면 앞으로 무슨 좋은 일이 계획되어 있다든가 하는 식의 세상적인 이유가 전부입니다. 만일 우리의 소망의 이유가 물질적이고 육신적이고 현실적인 것에 근거한다면 이는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오직 우리의 소망의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신 그리스도가 우리가 가진 소망의 전부입니다. 비록 다른 사람들보다 직장이 안정되지도 않았고, 돈이 많이 버는 것도 아니고, 든든한 후원자가 없어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의 은혜와 부활의 소망 때문에 삶이 즐겁고 평안한 것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삶이 힘들고 어려워도, 의를 위해 핍박을 당해도 악에 속하지 않고 선을 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삶을 살 때 굳이 입으로 그리스도를 증거하지 않아도 삶을 통해 그리스도가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삶이 힘들고 어려울 때일수록 세상을 바라보기 보다는 우리의 소망이신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신 구속의 은혜와 부활을 소망할 때 나의 삶이 변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삶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2.너는 네아들에게 이르기를(21)

“우리가 옛적에 바로의 종이 되었더니 여호와께서 권능의 손으로 우리를 애급에서 인도하여 내셨으니” 

애급에서 바로의 압정에서 430년간 종살이 했었다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여호와께서 권능의 손으로 우리를 애급에서 인도하셨다는 구원의 간증인 것입니다.   

애급에서 종살이 430년 이제는 노예근성으로 체질화된 백성들입니다. 바로의 종으로 종속되어 자유가 없는 노예생활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 노예와 주인의 관계라고 하는 것은 충성과 복종' 오직 '충성과 복종' 그것이 노예와 주인의 관계였습니다. 저들은 말할 수 없는 비인간적 대우를 받았습니다. 심지어는 철학자들의 글 속에도 나옵니다. '노예와 당나귀는 같다'고 그랬어요. '그런데 당나귀는 내 말을 못 알아듣고 노예는 말을 알아듣는다' 이렇게까지 말했습니다.

우리는 보기가 민망해서 혹은 그림이라던가 영화로 나올 때 보면 간단하게 옷을 그 치부를 가린 옷을 입혀서 나옵니다만 은 원래 노예는 옷이 없었어요. 신발도 없고 옷도 없이 그렇게 해서 일을 시키고 그리고 집이라고는 그저 움막 같은데 외양간처럼 만들어 놓고 지푸라기를 넣어 줬어요. 거기서 그대로 자야 했고요.

노예가 서로 말을 하면 거기서 또 문제가 생기니까요 일체 말을 못하게 했어요. 듣기만 하고 말을 못하게. 그래서 말을 아예 못 배워 버려서 그냥 "웅웅웅" 이렇게 했던 거죠, 동물처럼. 말도 언어까지도 빼앗아 버렸어요. 오로지 '충성과 복종' 이것만 요구했습니다.

그래서 그 같은 로마의 문명을 이루게 되었다 하는 것입니다. 말을 잘 안 듣던가 하게 되면 뭐 체형을 가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죽이거나 팔아먹던가 정 고약한 노예라고 하면은 일벌백계로 길거리에다 세워놓고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어요. 수많은 사람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이것이 노예입니다. 그의 지식도, 그의 건강도, 그의 정조도, 그의 도덕성도 다 주인의 것이요 생명까지도 주인의 것입니다. 마음대로 주인이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어요. 이것이 노예입니다.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끔찍한 일이었습니다. 

우리 민족도  같은 경험이 있습니다. 430년에 비하면 십분지 일도 안 되는 기간이긴 하지만 36년간 일본으로부터 종살이를 한 체험이 있기에 이스라엘의 종살이는 동질감을 느끼며 실감이 나고 우리에게 와 닿은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당시의 흑백사진화보에

일왕(日王) 히로히토가 45년 8월15일 정오 라디오 방송을 통하여 미영중소 연합군에게 항복을 발표하자 서울 광화문 네 거리로 나와 환호하는 서울 시민들의 모습은 가관이었습니다. 조국의 해방을 환호하는 서울역 광장과 남대문로 일대의 인파 -만나는 이마다 서로 부둥켜안고 목이 터져라 해방 만세를 외치면서 밤이 되어도 흩어질 줄을 몰랐습니다.

지금 50대 이하의 분들은 그저 역사책에서 배운 것이지만 그 이상 사신 분들은 실제로 1945년 8 월 15일 정오, 한국이 36년 동안 일제의 속박으로 빛을 잃고 살다가 빛을 다시 찾은 광복의 순간을 체험하신 분들이십니다. 우리 민족의 형편으로 일제의 치하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할 수 없는 처지였습니다. 그들은 우리의 말을 빼앗았습니다. 우리의 성을 가는 치욕을 주었습니다. 말로는 내선일체(內鮮一體)라고, 일본과 조선은 하나 라고 하면서 결국은 우리를 식민지 노예로 삼았습니다. 

그들은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좋은 것은 쌀이든 생선이든 과일이든 다 일본으로 가져갔습니다.  더구나 많은 젊은이를 징발해서 가장 위험하고 힘든 일을 일본 땅에 서 시켰습니다. 지금 일본에 70만이 넘는 한국 교포가 살고 있습니다만, 대부분이 일제시대에 일본으로 징발되어 갔던 우리 동포들의 후손입니다. 일본 사람들은 문자 그대로 우리를 종으로 취급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어둠 속에서 36년을 자유를 속박당한 채 살았었습니다.

일제는 민족운동과 독립운동의 구심점이었던 기독교를 훼파하기 위해 조직적이고 강압적인 방법을 동원했습니다. 특히 신사 참배 결의는 한국 교회의 좌절과 변질을 가져왔습니다. 교회를 스스로 떠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신사 참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한국 교회는 광복될 때까지 신사 참배를 실시했습니다. 교회의 종과 쇠로 만든 난로는 전쟁 무기를 만드는데 필요하고 모두 떼어 가기도 하였으니 기독교를 말살하려는 정책이었던 것입니다.

총독부는 주일예배도 훼손했습니다. 주일아침 1부 예배는 일본 신을 위해 열도록 했고 낮 예배 중 12시에 사이렌 소리가 들리면 회중은 일어나 동쪽을 향해 최경례(最敬禮)를 했습니다. 예배 중 헌금도 두 번 하여 다른 한번은 애국헌금으로 이 애국헌금은 일제의 전쟁물자 조달을 위해 사용됐습니다.

성경도 신약성경만을, 일제 말기에는 사복음서만을 인정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유대민족의 역사가 담긴 구약성경이 전쟁을 수행중인 일제에 도움을 주지 않고 일본 천왕의 절대 신성에 위배된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찬송가 가사도 바뀌거나 삭제됐고 일본 신의 이름으로 바다와 강에서 침례도 이뤄졌습니다. 이 의식은 신도계의 계(契)를 받는 행위로 기독교의 세례와 같은 개종의식이었습니다. 

더아가서는

우리는 애급이라는 세상에서 죄와 마귀의 종으로 본질상 진노의 자녀들이었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권능의 손으로 애급에서 인도하여 내신 것을 간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권능의 손으로 이스라엘을 선택하시고 지명하여 구원하신 은혜를 후손들에게 간증하라는 것입니다. 


2.여호와께서 우리의 목전에서 크고 두려운 이적과 기사로 건져내심(22절)

바로는 모세를 통하여 10가지 재앙을 통하여 하나님의 두려운 이적과 기사 앞에 무릎을 꿇게 돕니다. 권능의 하나님 앞에 항복하고 만 것입니다. 그것이 유월절 어린양 피뿌림의 사건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온 집은 양을 잡아 문설주 인방에 바르고 여호와의 사자가 장자의 생명을 다 거두어 가는 능력 앞에 모든 사슬에서 풀어주고 말았습니다. 이 절기를 유월절 절기로 대대로 규례로 지키게 된 것입니다. 해방 기념일인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민족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 백성을 해방한 줄 믿습니다.

하나님은 연합군과 원자폭탄을 도구로 일본을 심판하였습니다. 그 결과 우리에게 자유와 해방이 왔습니다. 우리 민족의 위기 속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해방의 유월절을 주셨던 것처럼 하나님의 백성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민족을 왜정 제국주의 발밑에서 해방시켜 광복의 기쁨을 주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 광복절을 기념 하면서 에벤에셀 하나님께 감사하고, 다시는 우리민족이 자유를 빼앗기는 일이 없도록 우리민족을 주안에서 잘 지켜야 하겠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받은 8.15 해방은 역사의 주권자 하나님께서 개입하신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일본 제국주의를 심판하였습니다. 일본 임금이 신이 되지 못하도록 심판하였습니다. 그 도구로 UN연합군을 사용하였습니다. 그 결과 이 땅에 자유와 독립 그리고 신앙의 자유가 오게 된 것입니다. 

일제 35년은 우리의 모든 것을 빼앗아갔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34년 11개월 16일입니다. 우리의 이름은 일본식으로 개명되었고, 말과 글은 일본어로 대치되었습니다. 신앙을 빼앗겼고, 신사참배 하도록 강요받았습니다. 양식은 공출되었습니다. 또한 딸과 누나들은 정신대에 끌려갔고, 아들과 형들은 징용되었습니다.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독립운동을 했지만 희망이 없어보였습니다. 심지어 일본은 1945년 8월 17일에 민족과 교회의 지도자 3만 명을 죽일 계획까지 세우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억압받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급에 열 가지 재앙을 내려 구원하셨듯이, 일본에 원자폭탄을 떨어뜨리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방법으로 우리를 해방시켜주셨습니다.

한걸음 더아나가서

우리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성령의 법으로 우리를 무죄석방하신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안에서 있으면 정죄함이 없나니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해방입니다.


해방을 주신 목적(24절)

1)여호와를 경외하고

2)항상 복을 누리게 하려함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목적은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고 항상 복을 누리게 하려 함입니다.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는 '실존주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에서 인간에게 주어진 네 가지 자유를 말하고 있습니다.

1)투기적 자유입니다. 미래를 향해서 자신을 개방하고 과거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서 미래를 향해서 자기 몸을 던져버릴 수 있는, 과거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그 미래를 향해서 자기를 던지는 그런 자유, 통쾌한 자유지요. 그러나 여러분, 과거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자유인이 어디 있습니까? 

2)선택의 자유입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넓은 선택의 영역을 지니고 살아갑니까? 흔히 말하는 영어의 "I have no choice"라는 말이 있어요. 선택이 없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은 그 순간 노예된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언제나 우리는 선택의 여유를 가지고 삽니다. 그리고 내가 선택하는 것은 내 마음으로 선택하는 것입니다. 간혹 그런 분들이 있습니다. 결혼하여 아이 낳고 살면서도 '그저 할 수만 있으면 이 사람하고 안 살았으면 좋겠다. 그러나 어찌할 수가 없잖아.' 어쩔 수 없이 살아갑니다. 그야말로 선택이 없습니다. 내 팔자거니 하고 삽니다. 그건 자유인이 아닙니다. 유행가 가사처럼 죽었다 다시 태어나도 당신의 아내가 되겠소, 그게 바로 자유인입니다. 항상 현재적으로 사랑을 고백하고 현재적으로 아내를 선택하고 남편을 선택해야 됩니다. 그런데 이미 선택한 데 대해서 나는 선택권을 포기하고 '에라, 모르겠다. 그냥 사는 데까지 살자.' 그건 자유인이 아닙니다. 벌써 죽은 사람입니다 그러면. 그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3)선택에 대한 책임을 져야 됩니다. 내가 선택했으니 책임을 지는 자유인이어야 합니다. 선택을 어정쩡하게 해놓고 책임을 안지겠답니다. 책임이 없는 사람은 자유인이 아닙니다. 내가 선택한 것에 대한 내 책임을 내가 넉넉하게, 그것도 기쁨으로 져야합니다. 그 사람이 자유인이요. 뿐만 아니라 연대성을 함께 생각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내 자유가 남의 자유를 속박해서는 안 되는 거예요. 내가 자유하면서 다른 사람에게도 자유를 보장해줘야 됩니다. 그런 자유여야 참 자유이지 "나는 자유다" 하고 휘젓고 다니는데 많은 사람에게 억압을 주고 불행함을 주고 불편함을 준다면 그건 자유인이 아닙니다.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자유케 하는 자의 역할이 있고야 자유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의 손이 개입하십니다.  유월절 어린양의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십니다. 우리를 자유케 하려고. 자유는 정당한 값을 지불하고 자유할 수 있습니다.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는 결코 자유할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 8장 36절에서 인자가 자유케 하면 자유하리라. 아들이 자유케 할 때만이 자유하리라.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하나님의 율법적 요구를 충족케 하시고 비로소 자유할 수가 있는 것이죠. 그리고 성령과 말씀으로만이 자유를 지켜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8장 32절에서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십니다.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진리가 나를 자유케 하는 것이지 내가 스스로 자유하는 게 아니요. 그가 나를 자유케 하는 것이죠. 내가 스스로 자유할 수는 없는 것이에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바로 이 길 외에는 자유함이 없습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입니다. 사랑의 영입니다. 이 속에만 진정한 자유함이 있습니다. 

여러분, 나 자신의 자유를 다시 한 번 점검해 봅시다. 여러분은 얼마만큼 자유하십니까? 얼마나 자유를 누리고 있는 것입니까? 선택의 자유가 있습니까? 사랑의 자유가 있습니까? 내가 나를 이기는 확실한 자유를 누리고 있습니까? 우리는 해방 59년 동안 자유에 대해서 공부했습니다. 이것이 정치적인 자유라고, 경제적인 자유를 얻어보겠다고 '잘 살아보세'를 외쳐보았습니다. 그래서 자유했습니까? 죄와 사망의 법에서 자유하기 전에는 자유는 어느 곳에도 없는 것입니다.

노예 생활을 하는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사람에게는 자유가 있었고요 감옥에 있으면서도 자유인이었습니다. 권력의 보좌에 앉아서도 그는 자유인이 아니었어요. 부자라고 자유인이 아닙니다. 유식하다고 자유인이 아닙니다. 죄와 사망의 법에서 자유로운 사람만이 자유인입니다.

우리를 구속하신 하나님의 목적은

1)우리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2)항상 복을 누리게 하기 위함이요

시128:1--6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
가정의 축복/내실에 있는 아내는 결실한 포도 같음
        상에 둘린 자녀는 어린 감람나무 같음
교회생활을 통한 영적인 누림/푸른 초장/시냇물/시온에서 복을 받음
자손만대에 평강의 복을 누림/평안한 집안   

3)우리로 오늘날과 같이 생활하게 하려함이라/현실의 복 

해방 후의 갑작스러운 국토 분단으로 그나마 돌아가던 한반도 경제에 일시적인 마비상태가 왔고 이렇게 엎친 데 전쟁으로 인한 대대적인 파괴가 덮쳐 한국 사회의 빈곤이 극에 달했던 것입니다. 6.25동족상잔의 비극과 4.19 ,516 군사혁명 10.26사태  광주민주화 운동 문민정부 수많은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64년 100달러였던 국민소득을 95년 1만 달러 이상으로 성장시켰던 배경은 한국전쟁과 냉전체제를 겪으면서 국민이 처절하게 느꼈던 심각한 안보위기였으며 국가 존망의 기로에서 경제부흥을 통한 국력 양성만이 살 길이라는 공감대가 있었기에 여러 가지 악조건을 극복하면서 한강의 기적을 일구어 냈다고 사회전문가들이 보는 견해지만 이것은 배후에 나라의 흥망성쇠를 주장하시는 하나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이 없이는 이런 부요를 부닐 수가 없는 것입니다. 수많은 성도들의 순교와 기도와 마지막 제사장 나라로 주앞에 쓰임 받는 주님의 선택된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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