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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회복이 임한 것을 기억하면서 (단 4:2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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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서정호 목사 (영암교회)

유대인의 탈무드에 보면 이런 가르침이 있습니다. "누구나 자신에게 적당하다고 생각되는 자리보다는 조금 낮은 자리를 잡아라. 남으로부터 내려가라는 말을 듣는 것보다 올라가라는 말을 듣는 편이 훨씬 낫지 않은가. 하나님은 자기 스스로 높은 자리에 앉은 자를 낮은 곳으로 떨어뜨리시고 스스로 겸손한 자를 반드시 높은 곳으로 끌어올리신다."

겸손은 인생에 있어서 소중한 요소입니다. 자신을 살피고 낮추는 사람에게는 실수가 적고, 예절이 바르며 칭찬을 받습니다. '좁은 문'의 작가 앙드레 지드는 "겸손은 천국의 문을 열고 교만은 지옥의 문을 연다."고 했습니다.  성경에서도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를 찾으신다고 하셨습니다.

들쥐의 교만

수도사 한 사람이 수풀 속을 지나가다가 까마귀가 쥐를 잡아먹으려는 것을 발견하고 불쌍한 생각이 들어 까마귀를 쫓아 버리고 쥐를 살려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쥐는 자세히 보니 고양이란 놈에게 날마다 쫓기며 산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수도사는 이번에는 개가 되도록 만들어 주었습니다. 개가 되면 쫓기는 신세를 면하게 될 줄로 기대했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범에게 꼼짝 못하고 도망만 다니는 모습이 하도 불쌍해서 이번에는 그 개를 범으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다른 문제가 생기기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범이란 놈이 이전의 자신을 생각하지 못하고 자꾸 개를 보면 괴롭히고 고양이를 보면 고양이를, 들쥐를 보면 들쥐를 괴롭히고 심지어 수도사가 범에게 충고하면 수도사의 말까지 무시를 하고 덤벼드는 것이었습니다.

고마운 줄도 모르고 자기가 산중의 왕이라고 하며 수도사도 아니꼽게 굴면 없애버리려는 생각까지 품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수도사는 어느 날 다시 그 범을 원래의 모습인 들쥐로 돌아가게 하여 죽을 때까지 수풀과 들판을 헤매며 쫓기는 신세가 되게 하였습니다. 사람은 조금씩 자신을 발전시켜 나가는 가운데 어느 날에는 자신의 격에 맞지 않는 높은 자리에 오르게도 됩니다. 그러나 그런 자리에 도달했을 때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이 교만과 배은망덕입니다. 그 자리에 앉을 수 있기까지 도와 준 주위의 사람들을 생각하고 나 혼자만의 능력으로 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겸손한 사람들이 많을수록 이 사회는 밝아질 것입니다.

구 소련의 반체제 인사였던 알렉산더 솔제니친은 “교만은 돼지의 비계와 같이 인간의 마음에서 자란다”고 했습니다. 교만은 여러 가지 형태를 가지고 있습니다. 교만은 고집이 센 사람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교만은 거만한 태도를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서 아주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영적 교만은 자기 자신의 죄를 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타락한 상태에 대한 인식이 없이 다른 것들을 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의 기쁨을 체험하면 자신의 죄에 대해 큰 슬픔을 느낍니다. 테레사는 이러한 현상을 빛에 비추어진 물이 든 잔에 비교합니다. 해가 비치게 되면 해가 비치지 않을 때 보이지 않던 불순물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잔에 담겨 있는 물이 해가 비치지 않을 때는 깨끗하게 보이지만, 해가 비치게 되면 먼지가 가득함을 드러내게 됩니다.

우리 영혼도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을 하기 전에는 하나님을 노엽게 하지 않기 위하여 조심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이 단계에 이르게 되면 정의의 태양이 그것을 비추어 무수히 많은 불순물들을 보게 하는 것입니다.

최효섭 목사의 글을 보면 천국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천국은 항상 날씨가 청명하다. 그곳은 변덕쟁이가 없기 때문이다. 그곳은 조미료가 필요 없다. 모두가 소금이기 때문이다. 천국은 경쟁과 싸움이 없으며 오직 칭찬과 사랑만 있다. 그곳은 폭탄선언이나 깜짝 쇼가 없고 항상 평온하다. 천국의 사람들은 무엇을 달라고 기도하지 않는다. 그저 감사의 기도가 있을 뿐이다. 그런데 천국행 비자를 발급 받을 수 없는 일곱 종류의 사람이 있다. 교만한 사람, 욕심쟁이. 남을 헐뜯는 사람, 거짓말쟁이, 화를 잘 내는 사람, 이기적인 사람, 화합을 깨트리는 사람은 천국행 비자를 받을 수 없다."

그렇습니다. 천국은 모두가 한마음으로 동경하는 새 하늘 새 땅이지만 문턱이 매우 낮은 곳입니다. 그래서 무릎을 꿇지 않는 자는 아무도 그 즐거움에 들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겸손한 사람들을 위해 예비 된 곳이기 때문입니다. 성지 베들레헴의 아기 예수 탄생 기념 교회를 가보면 입구가 돌로 낮게 막혀져 있어 누구든지 머리를 숙이고 허리를 구부려야만 들어갈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가이드의 설명이 '겸손을 원하시기 때문입니다.'였습니다.

느브갓네살왕은 신바벨론 제국을 40년 이상을 통치하면서 제국의 판도를 크게 넓히고 큰 업적을 남기면서 그 권세가 하늘을 찌를 듯하였습니다. 그야말로 느브갓네살 왕은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능치 못한 일이 없는 듯하였습니다. 전 세계가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같은 태평성대에 왕은 꿈속에서 큰 나무의 이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바벨론의 박수, 술객, 술사, 점쟁이들이 그 꿈을 해석하지 못했으나 다니엘이 해석하게 되었는데, 그 내용은 느브갓네살 왕이 교만함으로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 실패하지만, 회개함으로 회복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느브갓네살 왕을 꿈으로 경고하였는데, 이 꿈은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느브갓네살 왕은 애굽까지 누르고 천하를 통일하여 큰 나라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수도 바벨론은 견고한 성벽을 쌓아서 함락의 우려가 없는 세계 유일의 큰 성을 쌓아서 왕의 정치적, 문화적 황금시대를 이루고 그 영화는 절정에 달하게 되었습니다. 그야말로 그 권세와 영광은 하늘까지 닿을 정도의 큰 영광을 얻게 되었습니다. 고가 하늘에 닿은 것은 왕의 교만이 하늘까지 미치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그 나무가 베인바 되었습니다. 느브갓네살 왕은 왕권을 상실하게 될 것을 가리킵니다. 들짐승과 함께 일곱 때를 지내리라 함은 왕이 사람에게 쫓겨나서 일곱 때(7년)를 지낼 것을 의미합니다. 느브갓네살 왕은 하나님의 경고를 듣고도 회개하지 않음으로 실패자가 되었습니다. 다니엘의 충언입니다(27) "공의를 행함으로 죄를 속하고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김으로 죄악을 속하소서. 그리하시면 왕의 평안함이 혹시 장구하리이다" 그러나 느브갓네살 왕은 하나님의 경고를 듣고도, 회개하지 않고 나가다가 12개월 후에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 큰 실패를 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경고를 듣지 않고, 나가면 하나님의 징계가 임하게 되고 실패하게 됩니다.

오늘 성경본문에 등장하는 느부갓네살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왕으로서 엄청난 위기를 통과하고 나온 느부갓네살이 마지막 37절에서 보는 것처럼 하나님께 대한 자세를 고치는 것을 봅니다. 하늘보다 높아지려는 자기의 교만을 꺾으시는 하나님을 바라 본 것입니다. 느부갓네살에게 임한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하면서 우리 자신이 결코 교만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귀하신 뜻에 순복하는 성도들이 되도록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 되기를 원합니다.

느부갓네살에게 심판이 임한 때를 한두 가지로 나누어서 생각해 봅니다. 먼저 열 두 달이 지난 후입니다. 다니엘을 통해서 하나님의 심판 계획이 선포되었습니다. 다니엘은 그 심판 계획을 통고하면서 간절한 자세로 라고 간언을 했습니다. 그런데 하루 이틀 사흘이 가도 문제가 없습니다. 한 달 두 달이 가도 전혀 심판이 없습니다. 그러면서 열 두 달이 지나갑니다. 그러자 이제는 교만이 하늘을 찌르는 것입니다.

열두 달은 하나님께서 그래도 긍휼을 여기셔서 은혜로 내려주신 기간이요 회개하라고 주신 날들입니다. 12 개월, 곧 1년을 기다리십니다. 그런데 느부갓네살 왕은 1년이 지나면서 그 꿈에 대한 충격과 두려운 마음이 사라지는 기간이 되고 말았습니다. 다시 말해서 유예 기간이 끝났다는 표현입니다. 죄를 범하고 난 뒤에 은혜로 회개의 기간을 주셨는데, 아무 일도 없다고 혹은 더 왕성하다고 생각하고 회개하지 않으면 느부갓네살에게 임한 심판이 찾아옵니다. 기억할 것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기회들은 잘 선용해야 합니다.

또한 느부갓네살이 바벨론 궁 지붕에서 거닐 때 심판이 임했습니다. 바벨론 사람들은 집을 지을 때에 지붕을 평평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지붕 위를 산책하기도 하고 그 지붕 위에서 기도를 하기도 합니다. 느부갓네살은 여기 사용된 단어를 볼 때 자주 지붕 위를 거닐었던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는 지붕 위를 자주 거닐면서 바벨론을 흐뭇하게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궁정의 지붕은 높아서 자기 자신의 업적을 확인하기에 좋은 지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입에서 튀어 나오는 말이 있는데 그는 자기를 계속 강조하고 있습니다. 바벨론에서 발굴된 벽돌들에는 다 느부갓네살 왕의 이름이 찍혀 있다고 합니다. 교만이 앞에 가면 그 뒤에 꼭 따라 오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패망입니다. 자기를 드러내고자 하는 말이 채 끝나기 전에 하늘에서 음성이 들려옵니다.

느부갓네살에게 경고한 뒤 열 두 달이 지난 것처럼 어느 날 유예 기간이 끝나면 그 심판을 아무도 막을 수 없습니다. 유예 기간이 끝나기 전에 겸손히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여전히 하나님 앞에 뻣뻣하게 서서 자기를 드러내면 결국 심판만이 임합니다. 이제 느부갓네살에게 임한 하나님의 심판의 때를 기억하시고 은혜로 주어진 은혜의 기회가 있는 동안 주 앞에 와서 엎드리고, 나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겸손히 주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하늘로서 음성이 들립니다. 온 천하를 휘어잡고 방금까지 호령하던 왕이, 난공불락의 보좌로 자랑하던 그 왕위에서 쫓겨납니다. 하나님의 한 마디의 음성으로 그렇게 됩니다. 또한 왕위에서 쫓겨 날 뿐만 아니라 사람에게도 쫓겨나는 것입니다. 사람의 세계에서 쫓겨나서 짐승들의 세계로 가는 것입니다. 느부갓네살은 결국 짐승으로 떨어지는 심판을 받습니다. 낭인 병(狼人病)에 걸려 짐승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소처럼 풀을 먹으며 하늘 이슬에 젖습니다. 머리털이 독수리 털 같고 손톱은 새 발톱과 같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느부갓네살을 여기까지 낮추십니다. 대제국 바벨론의 왕이었습니다. 누가 감히 건드릴 수 있습니까? 도무지 그 누구도 그를 건드릴 수 없는 위치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시작하시면 순간입니다. 여리고 성을 무슨 방법으로 무너뜨립니까? 그러나 하나님이 시작하시면 순식간에 무너져 내립니다. 홍해를 무슨 방법으로 건넙니까? 그러나 하나님이 시작하시면 순간적으로 바닷물이 갈라집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거대하여 교만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 넘어짐과 쓰러짐은 순간입니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때 말입니다. 43년 동안 지었어도 다 짓지 못하고 계속 짓고 있던 예루살렘 성전이 우리 주님의 예언처럼 돌 위에 돌 하나  놓이지 아니하고 무너져 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낮추시기 전에 우리가 낮아져야 합니다. 겸손해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물리치십니다.

꿈의 계시로 경고했으나, 열두 달 동안 회개하지 않고 계속 교만한 가운데 나가다가 하나님의 심판으로 왕권을 뺏기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경고를 듣고도 회개하지 않고, 하나님의 큰 축복을 받고도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고, 자기자랑하고 자기가 영광 받고자 하면 하나님의 권고가 떠나고 실패자가 되고 맙니다.

느브갓네살 왕은 왕권과 명예를 박탈당했고 인간성을 상실 당했으며 짐승 생활하는 비참한 상태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어떤 위인, 어떤 영웅, 세계를 지배하는 왕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한번 손을 대시면 무력한 자가 되고 맙니다. 하나님의 뜻에 합당치 않으면 지극히 높은 자라도 지극히 낮추시고 비천하게 하십니다.

헤롯 아그립바왕도 교만하다가 충이 먹어 죽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어떻습니까?  오늘날 우리의 실패의 원인이 하나님이 보실 때에 겸손하지 못하고,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리지 못하고, 내가 했다고 교만하고, 내 것 삼으려 하고, 내가 영광을 얻으려고 하는 교만 때문인 줄 알고 회개하여 겸손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느브갓네살 왕의 회복

느브갓네살왕이 교만하다가 하나님의 징계로 7년 동안 짐승 생활하는 비참한 생활 속에서 실패와 낙망 중에 깊이 회개하고 하나님을 우러러 보았습니다. 그때에 하나님의 권고가 임하고 잃었던 모든 축복을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짐승과 같은 비참한 생활을 하는 중에 하늘을 우러러 보고 하나님을 전심으로 찾을 때에 하나님의 권고가 임하게 되었습니다. 느브갓네살 왕이 영광 중에 있을 때는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하고 교만하였습니다. 그러나 실패와 낙망 중에 하나님을 발견하고 하나님을 앙망하게 되었습니다.

당대에 손꼽히는 신학자이며 학생들에게 존경받던 교수가 어느 날 교수직을 사임하고, 정신박약자들이 수용된 복지원의 직원이 되었습니다. 높은 보수와 명예가 보장된 교수직을 버리고 정신박약아들의 용변을 치우고 목욕을 시키는 궂은일을 맡아하였습니다. 자신의 하는 일에 사명감을 가지고 기쁨으로 감당하며 만족해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의아하게 생각하고 이유를 물었으나, 침묵으로 일관하였는데, 그 후 자서전에서 "그동안 나는 올라가는 길만 추구하였다. 어려서 천재소리 듣고, 교수가 되어 존경받고, 책을 내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나는 오로지 성공만을 위해 살았다. 그러나 어느 날 정신박약아인 한 소년을 만났을 때 이런 인간의 고통에도 하나님은 동참하시며, 낮은 자리에도 계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오르막길에서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았지만 내리막길에서 진정한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다." 어떠한 경우에도 자기나 다른 사람이나 세상 영광을 보지 않고, 하나님을 우러러 볼 때에 소망이 있습니다.

34절입니다. '그 기한이 차매 나 느부갓네살이 하늘을 우러러보았더니 내 총명이 다시 내게로 돌아온지라. 이에 내가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감사하며 영생하시는 자를 찬양하고 존경하였노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요 그 나라는 대대에 이르리로다.'

그 기한이 찼다고 합니다. 앞부분을 통해 볼 때 7년입니다. 그런데 35절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는 것은 바로 라는 표현입니다. 늘 자기만 바라보다가 이제 그가 하늘을 바라봅니다. 그는 하늘을 볼 줄 몰랐던 사람이고 자기만 바라보고 자기를 높이려던 사람이었는데 그가 하늘을 바라봅니다.

26절에서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줄을 왕이 깨달은 후에야 왕의 나라가 견고하리이다'라고 선포했습니다. 느부갓네살이 그 다니엘의 해석처럼 하늘을 우러러볼 때에 다시 회복이 이루어지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 그것은 회복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느부갓네살이 하나님의 권세를 영원한 권세라고 표현합니다. 자기가 가졌던 권세는 순간적으로 무너져 내리고 빼앗기는 권세이지만 하나님의 권세는 영원한 권세인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나라는 대대에 이른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36절입니다. '그 동시에 내 총명이 돌아왔고 또 내 나라 영광에 대하여도 내 위엄과 광명이 내게로 돌아왔고 또 나의 모사들과 관원들이 내게 조회하니 내가 내 나라에서 다시 세움을 입고 또 지극한 위세가 내게 더하였느니라.' 여기 다시 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느부갓네살은 하늘의 음성이 들리는 동시에 왕위에서 쫓겨나고 사람에게서 쫓겨났습니다. 그런데 하늘을 우러러보며 하나님께 감사하며 자기 자신의 죄를 회개할 때에 그 동시에 모든 것이 회복되고 지극한 위세가 더 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그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하는 것을 잘 보여주는 부분입니다. 느부갓네살이 하늘을 우러러볼 때에 총명이 돌아 왔다고 했습니다. 그의 마음을 짓누르고 있던 짐승의 마음이 다 사라지고 다시금 인간의 마음이 되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느부갓네살에게 임한 하나님의 심판의 때를 기억하면서, 은혜로 주어진 은혜의 기회가 있는 동안 주 앞에 와서 엎드리고, 나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겸손히 주 앞에 엎드리며 느부갓네살이 하늘을 우러러볼 때, 하나님께 감사하며 회개할 때 회복이 임한 것을 기억하면서, 교만한 자가 아니라 겸손히 살아가는, 주님의 마음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오늘 사회 경제적인 어려움 가운데 59번째 광복절을 맞게 되었습니다. 최근 국가주의를 배격하는 교육 정서와 함께 광복절의 의미도 점점 퇴색돼 가고 있습니다. 다양화된 시대에 살면서도 개혁이란 미명 아래 민족주의적 사고와 이념, 그리고 독선적 아집을 가지고 분열과 대립으로 첨예화하고 있는 현실은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미래 지향의 사회에서 이런 사고의 행태는 오늘의 우리들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분열주의적 사고가 오늘날 한국을 사분오열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민주주의란 꽃은 기독교 문화의 밭에서만 아름답게 핀다고 했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제도상으로 세계 어느 나라와 견주어도 뒤떨어지지 않는 정치적 민주화를 이루었지만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아우르는 민주화는 아직도 요원하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습니다. 우리 사회의 표면에 나타나는 정치권의 대립이나 노사간 갈등도 문제지만 그 저변에 자리하고 있는 사회적 병리현상을 바라보는 보수주의자들과 진보주의자들의 시각 차이는 도저히 타협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평행선을 긋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급을 항상 기억하고 기념하면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가듯이, 우리 민족도 이 광복절을 항상 기억하고 그 뜻을 새기면서 해방과 자유의 역사, 사랑과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가야 하겠습니다. 이 땅에 진정한 해방과 자유가 이루어질 때까지 쉬지 않고 깨어 있어 기도하며 정신을 차리고 억압과 불의의 세력을 대적해 가야 하겠습니다. 이제 참 자유를 주신 그리스도의 제자들로서 자유와 평등, 사랑과 평화를 위해 헌신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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