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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온유의 눈으로 세상 보기 (마 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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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흥규 목사 (인천내리교회)

      <온유한 사람은 땅을 유업으로 받습니다>

      아이젠하워(Dwight D. Eisenhower, 1890-1969)는 미국의 제 34대 대통령이었습니다. 아이젠하워는 대통령이 되기 전, 제 이차 세계 대전 당시에 연합군의 총사령관을 지냈습니다. 이차 세계 대전이 한창 진행 중일 때 아이젠하워의 어머니가 열차 여행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이젠하워 장군의 어머니 옆에 앉아있던 시골 아주머니는 옆에 앉은 사람이 누구인지도 모른 채 수다를 늘어놓기 시작했습니다. 군에 나가 있는 자기 자식 자랑에 열을 올렸던 것입니다. 자기 아들이 최근에 하사로 진급이 되었다는 등, 입에 침이 마를 정도로 자식 자랑을 했습니다.

      한참 동안 자기 아들 자랑을 다한 이 아낙네는 아이젠하워의 어머니에게 물었습니다. “당신 아들은 어떤 사람인지 말해보세요.” 그 때 아이젠하워의 어머니가 한 말은 딱 한마디였다고 합니다. “제 아들도 당신 아들과 마찬가지로 군에 있답니다.”

      오늘 우리는 팔복 중에 제 삼복인 온유한 사람이 얻는 복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심령이 가난해서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은 자신의 죄악과 연약함을 놓고 슬퍼합니다. 이제 이와 같은 일복과 이복을 통과한 사람은 제 삼복에 이르게 됩니다. 제 삼복은 온유한 사람이 땅을 차지하는 복입니다.

      우리 다같이 본문 말씀을 다시 한번 큰소리로 읽어보겠습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예수님께서 이와 같은 제 삼복을 말씀하실 때에는 시 37: 11의 말씀을 염두에 두셨습니다. “오직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으로 즐기리로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땅은 생명만큼이나 소중했습니다. 워낙 땅덩어리가 적어서 그런지 땅을 차지하는 문제 때문에 이스라엘에는 오늘까지 전쟁이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사실 구약 성경 안에서 일어난 모든 사건은 ‘땅’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요셉, 모세, 여호수아 등등 거의 모든 인물들이 땅을 정복하고 빼앗기는 일에 관여했습니다. 땅의 소유권은 무엇보다도 안전(security)과 안정(stability)을 보장해주기 때문에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땅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간 광야 생활을 하다가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그 기쁨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자기들의 안전과 안정을 보장해 줄 수 있는 공간을 비로소 확보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땅을 차지하는 복’을 누가 얻습니까? 온유한 사람이 얻습니다. 여기서 얻는다고 할 때 영어 성경은 ‘inherit,’ 즉 ‘유업으로 상속받는다’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이 땅은 우리의 노력으로 얻는 땅이 아니라 우리의 노력이나 수고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주실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어떻게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땅은 지상에서의 영토가 아니라 장차 다가오게 될 천국의 영토를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마치 벧후 3: 13에서 약속된 바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온유한 사람은 이 세상에서 결코 볼 수 없는 천국의 영토를 밟게 되는 복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성경적 ‘온유함,’ ‘PRAUS’의 정의>

      오늘 우리가 이와 같이 온유한 자가 얻게 될 땅의 축복을 바로 깨닫기 위해서는 온유함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바로 알아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온유함이 무엇입니까? 어떤 사람이 온유하다고 말할 때 어떤 성품을 가졌기에 온유하다고 말하는 것입니까? 온유라는 말은 한문으로 따뜻할 ‘온’(溫)자에 부드러울 ‘유’(柔)자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말 그대로 하면 ‘따뜻하고 부드러운 성품’을 가진 사람을 온유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온유한 사람이라고 할 때 마음이 온순하고 착해서 아주 부드러운 사람을 흔히 연상합니다. ‘부처님 가운데 토막’같은 사람이니 ‘무골호인’(無骨好人), 즉 뼈가 없이 물렁물렁하여 한없이 좋은 사람이니 해서 착한 사람을 흔히 연상합니다. ‘온유’라는 말은 이와 같이 어떤 단호한 결단이나 기백 없이 사람만 물러 터져서 좋은 사람과 연결시킬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온유함은 이와 같이 무조건적인 유약함의 이미지와는 조금 그 뜻이 다릅니다.

      ‘온유한’이라는 말의 희랍원어는 ‘praus’인데 이 말은 여러 가지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먼저  ‘praus’라는 말은 기본적으로 ‘부드러운’(gentle), ‘겸손한’(humble), ‘사려깊은’(considerate), ‘예의바른’(courteous) 등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온유함은 분명히 부드럽고, 겸손하고, 사려깊고, 예의바른 성품을 의미합니다.

      온유한 사람은 운전할 때 상대방에게 먼저 양보할 줄 압니다. 온유한 남편은 아내를 위하여 문을 먼저 열어주며 때로 설거지나 청소까지 해줍니다. 회사에서 온유한 사장은 직원들에게 손수 커피를 타줍니다. 십대 청소년들 중에 온유한 딸은 밤늦게 귀가해서 부모님 속을 썩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온유한 사람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실 때의 그 온유함은 기본적인 의미 그 이상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마 11: 28-30에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예수님이야말로 ‘온유한’이라는 희랍원어 ‘praus’가 내포하고 있는 성품을 그대로 가지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부드럽고, 겸손하고, 사려깊고, 예의바른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예수님께 배우라고 권면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이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온유함은 두 가지 중요한 속성이 더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로, 온유함을 뜻하는 희랍어 praus는 ‘주인의 통제하에 들어가는 상태’(to be under the control of a master)를 뜻하기도 한다는 사실입니다. 야생마가 주인의 전적인 통제하에 들어가는 모습을 그릴 때 ‘온유한’을 뜻하는 praus라는 희랍어를 똑같이 사용합니다. 다시 말해 야생마가 온순해져서 주인의 지배하에 움직이게 될 때 praus라는 형용사를 쓴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야생마가 주인의 통제하에 들어간다는 것은 야생마가 가지는 힘이나 기상을 포기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야생마가 가지는 특유의 힘이나 뛰어난 기상은 여전히 가지되 그 의지를 주인의 뜻에 완전히 복속시킨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온유해진다는 것은 우리가 가진 재주나 능력, 기상을 완전히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우리의 뜻을 주 하나님의 뜻에 복종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치 미친 듯이 사납게 날뛰던 야생마가 자신의 기상이나 날쌤을 상실하지 않고서도 주인의 뜻에 고분고분 순종하듯이 우리의 정욕에 눈이 멀어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날뛰던 우리가 우리의 재능이나 은사를 잃지 않고서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줄 아는 자세가 바로 온유인 것입니다. 

      둘째로, 온유한 사람은 배우려고 하는 사람임을 기억하십시오. 누군가에게 무엇을 배우려고 하는 자세는 온유함이 없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나는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태도만큼 잘못된 것은 없습니다. 마음이 온유한 그리스도인은 참 스승되신 예수님께 늘 배우려고 합니다. 선생은 가르치려고 하는 사람이고 제자는 배우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선생되신 예수님으로부터 배우려고 하지 않는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온유해질 때 우리는 우리의 뜻을 꺾고 예수님의 멍에를 메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못된 의지를 꺾고 주님의 뜻에 기꺼이 순종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우리는 스승되시는 예수님께 무엇이든지 배우려고 할 것입니다.

      <지면에서 가장 온유했던 사람 모세>

      성경에서 사납게 날뛰던 자기 의지를 꺾고 하나님의 뜻에 기꺼이 순종하여 온유한 사람이 된 대표적인 경우가 모세일 것입니다. 모세는 히브리인으로 태어났지만 바로의 궁전에서 공주의 아들로 자라났습니다. 어른이 되었을 때 모세는 자기의 동족인 히브리 사람 하나가 애굽 사람에게 학대받는 것을 목격하고서는 욱하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그 애굽 사람을 주먹으로 쳐죽이고서는 미디안 광야로 피신을 해버렸습니다.

      적어도 나이 사십이 될 때까지 모세는 질풍노도와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언제 어떻게 그 마음속에 가라앉아 있는 분노가 폭발할지 알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던 모세가 자신의 사나운 의지를 주님께 맡기고 유순해지기 시작한 것은 미디안 광야에서 40년 동안 고생할 때였습니다.

      40년 동안의 연단 생활을 통하여 모세는 비로소 하나님이 쓰실만한 그릇으로서 다듬어졌던 것입니다. 한 마리의 야생마가 주인의 전적인 통제하에 들어가듯이 모세 역시 자신의 의지를 꺾고 하나님의 뜻을 배우려는 자세를 가졌습니다. 그리하여 나이 80이 되었을 때 모세는 출애굽의 영도자로서 부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민 12: 3은 모세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 모세의 온유함이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보다 뛰어났다는 것입니다. 그의 전 삶과 의지를 하나님의 뜻에 기꺼이 맡기고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온유하다고 하는 것은 바보가 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비겁하거나 물러터진 사람이 되어서 “사람만 좋다” 하는 이야기를 들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들판을 휘젓는 야생마가 야생마 특유의 날쌘 기상은 여전히 가진 채 주인의 뜻에 길들여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특유의 개성을 포기하지 않은 채 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라는 것이 온유입니다. 결국 온유함이란 한 마디로 말해서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지는 것입니다!

      <온유의 눈으로 세상보기>

      여러분, 팔복은 세상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볼 것을 가르쳐 줍니다. 마찬가지로 온유함도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① 하나님이 여러분을 보시듯이 여러분 자신을 보십시오.

      마틴 로이드 존스(Martin Llyod-Jones)는 온유함을 이렇게 정의한 적이 있습니다. 온유함이란 “자기 자신을 진실하게 평가함으로서 결정되는 바 이웃 사람들에 대한 겸손하고 부드러운 태도”이다.

      옳습니다. 온유하다고 하는 것은 먼저 자기 자신을 정확하게 평가함으로서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온유해지기 위해서 하나님이 여러분을 보시듯이 여러분 자신을 보십시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어떤 사람으로 보십니까? 구속받은 죄인으로 보십니다. 우리가 다 죄인으로서 어긋난 딴 길로 걸어갈 때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셔서 우리를 구속해주셨습니다.

      우리는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의 말대로 ‘의인이면서 죄인이고 죄인이면서 의인’입니다. 한편으로 우리는 죄많은 이 세상에 매여살기 때문에 죄인입니다. 그러나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무제약적인 사랑과 은혜 때문에 의롭게 되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분명히 주님의 은혜로 의롭다 인정을 받았지만 죄많은 세상을 살아가는 한 여전히 죄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의로워진 죄인’으로서 보신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시는 눈으로 우리 자신을 바라보면 우리는 온유해질 수 있습니다. 남에게 과시하고 좋은 인상을 주기 위하여 무엇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는 죄인인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자랑할 것이 있다면 오직 주 안에서 자랑할 뿐인 것입니다!

      ② 하나님이 여러분의 이웃을 보시듯이 여러분의 이웃을 보십시오.

      신학자 프릿츠 리넥커(Fritz Rienecker)는 ‘praus’를 이렇게 정의한 적이 있습니다. 온유함이란 “불쾌한 일을 당할 때 인내함으로 잘 참아내고 남을 해치려는 마음이나 복수하려는 생각을 버리는 정신에서 나타나는 바 겸손하고 부드러운 태도”이다.

      옳습니다. 온유함이란 우리의 이웃이 우리에게 아무리 부당한 일을 저지른다고 할지라도 잘 참아내고 복수하지 않으려는 정신입니다. 어떤 분이 우리 시대의 성자(saint)는 이웃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사람이라고 정의한 적이 있습니다. 이웃에게 덕을 끼치지는 못할지언정 적어도 해는 끼치지 않으려고 조심하는 사람이 우리 시대의 성자라는 것입니다. 참 옳은 말씀이라고 생각해봅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우리가 이웃에 대하여 어떻게 관대하게 대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우리의 이웃을 보시듯이 우리가 이웃을 보게 될 때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이웃을 어떻게 보십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이웃을 천하와도 바꿀 수 없이 소중한 하나님의 자녀로서 보십니다.

      자식을 키우는 사람들은 다른 집 자식들을 함부로 대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 자식이 나에게 소중하듯이 다른 집 자식들도 그 집 부모들에게는 다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나만 소중하게 여기시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이웃도 소중하게 여기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러므로 우리는 이웃을 우리보다 낫다, 못하다 판단할 수 없습니다. 어떤 분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누군가를 업신여길 수 있을 뿐이다.” “나로 하여금 다른 사람보다 우월하게 느끼도록 만드는 그 어떠한 경험도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다.”

      옳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이웃을 어떻게 보시는가를 생각하면 우리는 이웃에 대하여 온유하고 겸손해질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추한 죄인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 죄인을 어떻게 보시는가를 생각할 때 우리는 그 죄인 앞에서도 겸손해질 수 있습니다! 

      ③ 하나님이 여러분이 가진 은사를 보시듯이 여러분의 은사를 보십시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praus의 중요한 뜻 중에 하나는 우리의 힘과 재능을 주 하나님의 통제하에 맡기는 것입니다. 마치 사나운 야생마가 주인의 뜻에 순종하여 부드럽게 되듯이 우리는 주님의 뜻에 기꺼이 순종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우리가 가진 여러 가지 재주와 능력을 어떻게 보십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써야 할 거룩한 선물로 보십니다. 성경적 겸손이란 우리 자신의 능력이나 재주를 무조건 비하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비굴한 것이 됩니다. 우리의 능력이나 재주 이상의 높은 마음을 가지는 것은 교만입니다. 그러므로 겸손이란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들어 주신 모습, 꼭 그 모습 그대로 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 은사를 주셨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머리가 좋아서 공부 잘하는 은사, 노래 잘하는 은사, 그림 잘 그리는 은사, 운동 잘하는 은사, 등등의 은사를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와 같은 은사를 주신 것은 나와 가문의 명예를 높이고 자랑하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 모든 것을 주님의 통제하에 두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귀하게 쓰라고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이 가진 각종 은사를 하나님께서 보시듯이 여러분이 그 은사를 보게 될 때 여러분은 온유하고 겸손해질 수 있을 것입니다!

      테레사 수녀(Mother Teresa, 1910-97)는 빌리 그레이함(Billy Graham, 1918-  )과 더불어 금세기에 가장 유명한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테레사 수녀는 수녀원에 처음 들어갔을 때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한 가지 변하지 않는 삶의 목적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작은 몽당연필’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과연 테레사 수녀는 작은 연필이 되어 쓴 것마다 이 세상을 조금씩 변화시킬 수가 있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능력과 재주를 주 하나님의 손 아래 두십시오! 그리하여 하나님의 지배를 받으십시오! 그리하면 여러분은 온유한 사람들이 되어서 여러분이 가진 능력과 재주를 헛된 것 위하여 쓰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아름답게 쓸 수 있을 것입니다!

      <선장을 바꾸십시오!>

      이제 결론을 맺습니다. 어떤 항구에 예인선 한 척이 있었습니다. 예인선은 바다 위에 다른 배를 끌어서 항구에 안전하게 도착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배입니다. 그런데 이 예인선의 선장이 아주 악명 높은 사람이어서 매우 난폭하게 운전을 했습니다.

      이 예인선이 다른 배를 이끌 때에는 함부로 다른 배를 들이받아서 배 안에 있는 선원들이 넘어지거나 물건들이 깨어지는 일들이 다반사로 일어났습니다. 동료 선원들은 이 예인선을 ‘미친 배’라는 별명을 붙여서 다른 예인선을 구할 수 있으면 다들 이 배는 피하려고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떤 배 한 척이 예인선의 도움이 필요했는데 이 미친 배 말고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예인선이 예전과는 달리 아주 부드럽게 다가왔습니다. 아주 매너 없이 배를 접선했던 옛날과는 달리 아주 예절바르게 운전했습니다. 그리하여 배 안에 있던 접시나 유리 컵 등이 하나도 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안전하게 항구에 도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인선의 안내를 받던 배의 선장이 놀라서 물었습니다. “아니 이 미친 배에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배가 옛날과는 완전히 달라졌어요!” 그 때 예인선 안에 타고 있던 선원 한 사람이 대답했습니다. “우리 선장이 갈렸답니다!”
      옳습니다. 우리 인생의 배에 어떤 선장이 타고 있는가에 따라서 우리의 삶은 달라질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온유한 분들이 되시길 바랍니까? 그리하여 땅을 차지하는 복을 얻기 원하십니까? 예수님이 여러분이 탄 인생의 배에 선장이 되게 하십시오. 그 분의 뜻을 따르십시오! 그리할 때 여러분은 온유한 분들이 되셔서 땅을 차지하는 makarios의 복을 얻게 될 줄로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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