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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에덴동산 (창 2: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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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영기 목사 (진주제일교회)

전교인수현회를 가졌습니다. 지리산 계곡은 푸른 산, 맑은 물, 맑은 공기였습니다. 그러나 조금만 더 들여다보면 쓰레기와 오염된 것들을 봅니다. 사람만 괜찮으면 에덴동산 같은 곳인데, 사람 때문에 황폐되어 가는 걸 봅니다.
아브라함과 롯의 갈등으로 서로 헤어지게 되었을 때, 롯이 본 땅은 요단들입니다. 그 땅은 아직 하나님께서 진노하시기 전의 땅이라, 여호와 동산 같았고, 애굽 땅 같았습니다. 그 요단들에 소돔과 고모라도 있었습니다.
여호와 동산 같은 곳, 애굽 땅 같이 풍성한 곳, 그러나 사람들의 잘못으로 하나님께서 그 땅을 멸하셨습니다. 그렇기에 사람이 변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삶이어야 합니다.

에덴동산. 실제로 있느냐 없느냐 하는 논쟁이 있습니다. 더욱이 지리학자들의 견해는 “옛날에는 땅이 한 덩어리였는데, 그것이 세월이 지나면서 오늘과 같이 갈라지게 되었다.”는 겁니다. 사실, 성경에서도 보면 대홍수 같은 사건들이 땅들을 갈라놓게 했을 거라는 생각을 갖게도 합니다.
그러나 에덴동산이 “어디다.” 하고 말하기는 적당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어떤 역사적 상황으로서 사실을 설명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즉, 오늘처럼 동경 몇 도, 북위 몇 도, 하는 식으로 나타내려는 것 아닙니다.
따라서 실제 그 장소가 어디냐 하는 것보다, 그 의미를 찾아보아야 합니다.

우선, 에덴이라는 이름의 의미입니다.
에덴은 즐거움, 기쁨, 좋음이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에덴을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기 전에, 즐거움과 기쁨 그리도 좋음을 먼저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에덴동산은 사람의 행복을 위해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에덴은 곧 사람의 즐거움과 기쁨 그리고 좋음이 있었습니다.
에덴동산은 아름다웠고, 과실이 풍성했으며, 물이 충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에덴에 당신이 지으신 사람을 두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사람에게 즐거움과 기쁨 그리고 가장 좋은 것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죄로 말미암아 그 즐거움과 기쁨 그리고 좋은 것, 즉 에덴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때, 사람에게는 에덴이 있었습니다. 즐거움과 기쁨 그리고 좋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죄를 범하여 하나님을 떠나게 되었을 때, 사람은 그 즐거움과 기쁨 그리고 좋은 것 즉 에덴을 잃어버리게 된 것입니다.

에덴동산에는 나무가 있었고, 그 열매는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았습니다. 먹을거리의 풍성함이 있었습니다.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먹을거리입니다. “살기 위해 먹는다.” “먹기 위해 산다.” 이런 말들은 먹는 것과 산다는 것이 하나라는 겁니다. 사람은 살아있는 한 먹어야 합니다. 에덴에는 그런 먹을거리가 풍성하였습니다.
에덴동산에는 물이 있었습니다. 옛날 이스라엘은 물 때문에 싸웠습니다. 아브라함과 그의 조카 롯의 다툼도 물 때문이었습니다. 야곱의 우물 이야기도 물의 중요함을 이야기 하는 것이었고,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 시작을 물로 하셨고, 당신은 영원한 생명수임을 말씀하셨습니다. 
나무와 물,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입니다.
“대저 나 여호와가 시온을 위로하되, 그 모든 황폐한 곳을 위로하여 그 광야로 에덴 같고, 그 사막으로 여호와의 동산 같게 하였나니 그 가운데 기뻐함과 즐거워함과 감사함과 참회하는 소리가 있으리라.”(사 51:3)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을 예언하는 이사야 41장 18절은, “내가 자산(민둥산)에 강을 열며, 골짜기 가운데 샘이 나게 하며, 마른 땅으로 샘 근원이 되게 할 것이며.” 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이 왜 불행합니까?
그 즐거움, 기쁨, 좋음을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풍성함을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행복해지기 위해 에덴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물론 지형적으로 어떤 장소적으로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어디라고, 장소로 말할 수 없는 것이니까요. 그러나 그 의미로 돌아갈 수는 있습니다.
에덴은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사는 곳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곳입니다. 그 곳에서 산다는 것은 곧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실상, 인간의 행복은 하나님 앞에 설 때만 가능합니다. 구약의 복은 ‘빠룩’이란 단어로 “무릎을 꿇다”가 원형입니다. 즉,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 것, 그것은 곧 하나님 앞에선 인간을 의미하며, 따라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이 복이라는 것입니다.
구약부터 신약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간절한 요청은 “너희는 내게로 돌아와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복 있는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복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인간을 부려먹으려 하셨다면, 미리 에덴을 만들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사람부터 만들어 그 사람들로 하여금 에덴동산을 만들고자 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먼저 에덴동산을 만드셨습니다. 즐거움과 기쁨과 좋은 것들을 먼저 만드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정말 복된 삶을 살기로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 나아가십시오. 하나님께서 만드신 바로 그곳에서 사십시오.

에덴에서의 인간을 청지기였습니다. 즉 에덴에서의 인간은 동산을 가꾸고 지키는 것이 일이었습니다. 사실 우리의 즐거움, 기쁨 그리고 좋은 것은 그냥 얻어지는 것 아닙니다. 그것들은 인간의 일로 인해 얻어지고, 인간의 일로 인해 계속 유지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만들어 예비해 놓으신 것을 인간이 힘써 지켜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사람들이 겪는 불행의 또 하나 원인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들을 힘써 지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망가뜨리고 말았습니다. 더욱이, 그 망가진 것 고칠 수 없고, 고치기도 힘들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악하기 때문입니다. 욕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악한 욕심이 고치기는커녕 더 망가뜨리려고 있습니다.
사실, 망가뜨리기는 쉬워도 고치기는 어렵습니다.
그린벨트 해제. 이제 산도 깎고, 나무도 베어내고, 집을 짓습니다. 나무는 작은 것 같아도 50년 이상 심지어 몇 백 년 자란 것입니다. 그것 잘라 내면, 그래서 또 그만한 나무로 키우려면 50년 이상 몇 백 년이 있어야 합니다. 잘라내기는 한 순간이지만 그렇게 다시 되도록 하는 것은 엄청난 긴 시간이 흘러야 합니다.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의 것으로 관리하고 사용하는 것이 곧 인간의 일입니다.
사람의 불행은, 하나님의 것을 자기 것처럼 생각하고 자기 마음대로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이제라도 사람이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의 것으로 관리하고 사용해야 합니다. 그것이 “먹든지 마시든지, 죽든지 살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라고 한 사도 바울의 고백입니다.
아담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동산 안에 있는 모든 나무의 실과는 다 따먹어도 좋다.”는 겁니다. 이것이 사람에게 주신 자유입니다.
자유란, 어떤 것에 의해 제한되거나 구속되지 아니한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나 그런 자유라 할지라도 그것은 곧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위해 사용되어야 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자유를 사람이 자기 위해 사용한 겁니다. 넘지 말아야 할 선, 즉 하나님과 사람의 선을 넘어서고 말았습니다. 그것이 죄입니다.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의 것으로 관리하고 사용할 때,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것을 내 것으로 관리하고, 날 위해 사용하면 결국 불행하게 됩니다.
교회에서도,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의 것으로 관리하고 사용해야 합니다. 강대상, 의자, 피아노 등은 말할 것도 없고, 주방의 젓가락 하나, 고춧가루 한 숟가락까지도 하나님의 것으로 생각하고 사용해야 하는 겁니다.
그것은 나아가 “이 세상이 누구의 것이냐?”로 발전합니다.
세상을 만드신 분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이 세상을 하나님의 것으로 관리하고 하나님을 위해 사용해야 합니다. 언제나 먼저 생각해야하는 것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입니다.
“도대체 하나님은 뭘 원하실까?” 그것을 물어보고 그 물음에 따라 살아야 합니다.
목사인 내 기도, 하나님께서 왜 이 교회에 보내 주셨을까? 하나님께서 이 교회를 통해 무얼 하시고자 하실까? 하나님은 우리 교인들이 어떻게 되기를 원하실까? 그런 물음 가운데에 내가 뭘 해야 하나를 발견하거나 다시금 확신하게 되는 겁니다.
성도들 역시, 내 인생을 통해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심이 무엇일까? 내게 준 이 사업을 통해 하나님을 무엇 하시려 하시나? 내 직장에서 내가 무얼 하기를 하나님은 원하실까? 내 가정에서, 내 이웃들로 더불어 살면서 하나님은 내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시나? 그런 질문이 있어야 하고, 그 질문에 합당한 답으로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도 생명, 여러분의 사업, 여러분의 삶, 이 모든 것은 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의 것으로 관리하고 사용해야하기 때문입니다.

에덴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이어야 했습니다.
“먹어도 좋다. 먹어서는 안 된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에덴은 바로 그 말씀에 순종할 때 에덴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불행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것입니다.
“아! 탈선한 민족, 불의로 가득 찬 백성, 사악한 종자, 부패한 자식들, 야훼를 버리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을 업신여기고 그를 배반하여 돌아섰구나. 아직도 덜 맞아서 엇나기만 하는가? 머리는 상처투성이고, 속은 온통 병이 들었으며,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성한 데가 없이 상하고 멍들고 맞아 터졌는데도, 짜내고, 싸매고, 약을 발라 주는 이도 없구나.”
얻어맞았는데도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있다고 하나님께서 탄식하시는 겁니다.
반면에 이사야 1장 18-19절엔, ‘야훼께서 말씀하신다. “오라, 와서 시비를 가리자. 너희 죄가 진홍같이 붉어도 눈과 같이 희어지며, 너희 죄가 다홍같이 붉어도 양털같이 되리라. 너희가 기꺼이 순종하면 땅에서 나는 좋은 것을 먹게 되리라.”고 하십니다.
“비록 죄인이지만, 그래서 얻어맞고, 그래서 죽어야 하지만, 그러나 지금이라도 말씀에 순종하면 좋은 것을 먹게 된다.”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에덴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그들에게 즐거움과 기쁨과 좋은 것 즉 에덴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 에덴, 즉 즐거움과, 기쁨과, 좋은 것들을 없이 버렸습니다. 지금이라도 우리가 즐거움과 기쁨과 좋은 것을 얻으려면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을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요15:10-11)
예수님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켰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버지의 사랑을 받게 되었고, 기쁨을 얻게 되었습니다. “너희도” 즉 우리도,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면 예수님의 사랑을 받게 되고, 예수님께서 일으켰던 기쁨을 얻게 된다.
어떻게 하면? “계명을 지키면” 즉 “말씀에 순종하면”
말씀은 무엇입니까?
기록된 말씀이 성경입니다. 보여진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선포된 말씀이 설교입니다. 대부분 그리스도인 말씀을 곧 성경만을 생각합니다. 성경말씀 읽고 순종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읽고, 듣고, 순종해야합니다. 예수님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 순종해야 합니다. 그럴 때 잃어버린 에덴 즉 즐거움과 기쁨과 좋은 것들을 찾게 됩니다.
그렇게 우리는 에덴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그 옛날의 에덴을 다시 있지 아니합니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계21:1)  새 하늘과 새 땅 즉 새 에덴을 말씀하십니다.

그 새 에덴에도 물이 있습니다.
(계 22:1) “또 저가 수정같이 많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그것은 그냥 강물이 아닙니다. 사람의 목을 축이는 그런 갈증을 해소하는 물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요, 복이요, 생명입니다.
(시 46:4) “한 시내가 있어 나뉘어 흘러 하나님의 성 곧 지극히 높으신 자의 장막의 성소를 기쁘게 하더라.”
(시 36:8) “주께서 주의 복락의 강수로 마시우리라.”
(사 12:3)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에서 흘러나오는 물은 생명수입니다.
에스겔 47장에, 성전 문지방에서 솟는 샘이 있습니다. 그 샘은 흐르고 흘러 큰 강을 이루었습니다. 그 강이 흐르는 강둑에는 좌우편에 나무들이 무성하게 살아났습니다. 그 강물이 바다에 이르자 바닷물이 소성함을 얻었고, 그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아지고 모든 것들이 살아났습니다.
바로 살아나게 하는 물이 생명수인 겁니다.

새 에덴에서 나무들이 있다.
(계 22:2)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가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생하기 위하여 있더라.”
(공동번역) “그 나뭇잎은 만국 백성을 치료하는 약입니다.” 역시 다시 살아나게 하는 나무인 겁니다.

무엇보다도 새 에덴에는 저주가 없습니다.
(계22:3) “다시 저주가 없으며”
처음 에덴은 인간의 죄로 저주받았습니다. 그러나 새 에덴은 다시 저주가 없습니다. 그것은 곧 영원함을 의미합니다. 곧 완전함을 의미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는 재림하시는 주님과 합께 오는 그 새 에덴을 기다립니다.
생명수와 생명열매가 있는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립니다.
이제 다시 오시는, 그래서 우리가 기다리는 예수님은 2천년 전과 같이 어린아이가 아닙니다. 그 분은 온 인류의 구원자요, 심판자로 오십니다. 그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 받으시길 바랍니다. 새 에덴이 바로 여러분의 영원한 나라가 되시기 바랍니다.
또한 기억할 것은, 비록 우리가 힘들게 살아가는 이 땅의 삶도 에덴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 살아가십시오.
언제나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의 것으로 관리하고 사용하십시오.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사십시오.
그러면 에덴 곧 즐거움과 기쁨과 좋은 것이 여러분의 것이 될 것입니다.

15.08.2004 주일 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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