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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브라함 이미지 (창 18:2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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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창우 목사 (한남제일교회)

할렐루야! 어렵습니다. 어려울 때일수록 우리가 지혜롭게 살아야 합니다. 음식점이나 공공장소에 가면 흔히 목격하는 일이 있습니다. 요즘 아이들이 참 자유롭습니다. 저희 집에도 조카 아이가 둘 있는데 혼자 있으면 그렇게 얌전합니다. 그런데 같이 있으면 보통이 아닙니다. 음식점에 갈 때마다 “조용히 해야 한다, 떠들면 안된다” 라고 합니다.

 유치원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공공장소에서 지켜야 할 것에 대한 교육을 했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물었습니다. “음식점에 가면 어떻게 해야 하니? 부모님이 뭐라 하시니?” 한 아이가 손을 들며 이야기합니다. “음식 갖고 장난하면 안돼요.” “맞아요. 음식을 갖고 장난치면 안돼요.” 다른 아이가 또 이야기합니다. “큰 소리로 떠들면 안돼요.” , “그래요. 큰 소리로 떠들면 안돼요.” 아이들이 각자 이야기하는데 한 아이만 이야기를 안 합니다. 선생님이 아이에게 물었더니 좀처럼 이야기를 안합니다. 주저하며 손을 들더니 “싼 거 시켜라.” 

없을 때는 돈에 맞게 사는게 필요합니다. 진짜로 행복한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더 많은 것을 가지지 못해서 안타까운 사람은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준 것에 감사할 수 있는 영적인 능력, 은혜를 갖는 사람이 행복합니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아브라함이 복을 받은 사람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아브라함은 소돔과 고모라 성을 향해서 기도하는데 기도하는 가운데 아브라함의 아름다운 신앙인격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런 분이 과연 믿음의 조상, 민족의 조상, 그 이름이 자손대대로 높여지는 그런 분이구나 멋있는 분이구나 생각하게 됩니다. 이분을 보면서 생각하게 되는 한가지는 겸손한 분이라는 것입니다. 자기를 낮추고 더 낮추는 모습을 봅니다.

27절 말씀을 같이 보겠습니다. ‘아브라함이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티끌이나 재와 같사오나 감히 주께 아뢰나이다’
아브라함은 첫째로 나는 티끌과 같은 존재다, 먼지와 재의 모습이 나의 모습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갖고 있습니까?
어제 쓰레기통을 여는데 먼지가 수북히 쌓여 있습니다. 생각하길 ‘우리 집 사람이 청소를 하고 청소기 먼지를 비웠구나.’ 먼지는 청소의 대상입니다. 쓰레기입니다. 있으면 더럽습니다. 쓸모없는 것뿐 아니라 남에게 해를 끼치는 것이 먼지요, 재요, 쓰레기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자기 존재의 가치를 가르켜 쓰레기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겸손입니다.

여러분, 아브라함이라고 하니까 아브라함 링컨이 생각납니다.
하나님을 잘 믿는 미국의 16대 대통령 아닙니까? 아주 겸손하신 분입니다.
그러나 이분의 생애를 보면 이렇습니다.

22살 사업실패, 23살 주의원 선거 낙선, 24살 사업실패, 26살 사랑하는 사람 잃어버림, 29살 의회의장 선거, 31살 대통령 선거 낙선, 34살 국회의원 선거 낙선, 39살 국의회원 선거 낙선, 46살 상원의원 선거 낙선, 47살 부통령 선거 낙선, 49살 상원의원 선거 낙선, 51세 대통령 당선

대단하지 않습니까? 불굴의 의지 아닙니까? 이분의 불굴의 의지, 낙심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단 하나,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자기를 낮추되 아브라함과 같이 나는 티끌과 같은 존재다, 내가 이런 실패를 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는 것입니다.

링컨은 그의 약점 때문에 많은 조롱을 받았습니다.
외모의 약점은 다리가 길어서 웬만한 의자에 앉지 못하고 맞춤의자를 앉았습니다. 또 얼굴이 못 생겼습니다. 얼마나 못생겼던지 자신도 얼굴 때문에 괴로워했습니다. 초등학교 다니는 아이가 편지를 썻습니다. 못생긴 얼굴에 수염이라도 기르면 괜찮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 이야기를 받아들여서 수염으로 못생긴 얼굴을 커버했습니다.

한번은 국회에 나갔는데, 야당의원이 욕설을 퍼부으면서 당신은 이중인격자이고 두얼굴의 사나이고 위선자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대응하겠습니까? 모든 사람이 대통령이 무엇이라고 할지 숙연하게 있었습니다. 놀랍게도 대통령은 별 반응 없이 “나보고 두 얼굴의 사나이라고 하는데, 두 얼굴을 가질 정도면 이렇게 못생긴 얼굴을 갖고 다니겠습니까?” 라고 재치있게 넘어갔습니다.

한번도 자신의 자랑을 해본일이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엄청난 실패를 겪으면서도 나는 당연히 실패할 수밖에 없는 존재다, 그런데 이분에게 위대한 점이 무엇인가?
이 분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 기도 잘하는 사람입니다.
이분의 기도 가운데 보면 이런 것이 있습니다. 남북 전쟁 때 얼마나 위급한 상황입니까? 부하 가운데 하나가 “대통령 각하, 기도하실 때 하나님이 우리편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십시오.”라고 했습니다. 대통령이 “아니다. 나는 한번도 하나님이 내 편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해 본적이 없다. 나는 내가 하나님 편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라고 합니다.

내가 무엇이관대 하나님이 내편 될만한 자격이 있습니까? 자기는 그럴만한 자격이 없다는 사람입니다. 보잘 것 없다는 것입니다. 티끌같은 인생이고 먼지같은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무엇이 잘난 것이 있습니까? 나는 구원받을 만한 조건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아브라함 링컨의 말처럼 ‘내가 하나님 편이 되어야지’,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붙잡겠다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 보시기에 기뻐하시는 사람이 되겠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입니다. ‘티끌같은 나라도 감히 주께 아뢰나이다.’ 하나님께 의지하고 하나님께 맡긴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온전한 겸손입니다.

겸손의 두 번째 의미는 하나님을 의지하는데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 말로 ‘겸손히 자신을 낮춘다’, 세상 사람들도 할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 일은 하나님의 백성만이 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 하나님의 백성들만이 가지는 겸손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사람은 교만한 사람입니다. 내 능력과 내 의지 갖고 살아갈수 있다는 것은 교만입니다. 우리는 먼지같은 존재, 쓸모없는 인생, 어떤 비방이나 책망이 있어도 당연하게 다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셔야 살 수 있다라고 생각하는 것, 세상에 쓸모없어도 하나님이 붙잡아 주시면 할수 있다는 것이 아브라함의 겸손이고 그리스도인의 겸손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 앞에 재단을 쌓습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겸손입니다.

여러분, 성도의 자존심이 무엇입니까? 내가 얼마나 부자가 되었고, 얼마나 출세했고, 얼마나 건강하냐가 성도의 자존심이 된다면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보다 더 부자인 사람 있고, 예수 믿는 사람보다 더 건강한 사람 있고, 예수 믿는 사람보다 더 출세한 불신자들이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돈 벌고 출세하고 권력을 갖는 것이 복이지만 이것은 온전한 복이 아닙니다. 우리 성도의 진정한 복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아 가는 것임을 깨달으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참회의 기도를 할 때에도 우리가 무엇을 기도하겠습니까? 지난 한 주간동안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 보면 그 말씀조차도 지킬 수 없는 인생임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베드로가 3년씩이나 주님과 동고동락 하면서 주를 위해 목숨 바치겠다 하고서 제대로 지켰습니까? 그렇게 위대한 베드로도 약속을 못 지켰습니다.

 어린 손녀 아이가 할머니 집에 놀러왔습니다. 놀다가 저녁때가 되어 집에 가자고 하니 할머니 집에서 자고 가겠다고 합니다. 엄마에게 혼자 가라고 합니다. 할머니 집인데 잘 수 있다고 호언장담합니다. 엄마가 가고 혼자 잠을 자는데, 새벽이 되자 깨어서 엄마를 찾으며 우는 것입니다. 그 밤중에 우는 손녀를 데리고 택시를 타고 집에 데려다 주었습니다. 얼마 후 손녀가 또 왔습니다. “엄마, 나 할머니 집에서 자고 갈거야.” 할머니가 뭐라고 했겠습니까? “지난번에 네가 자다가 울어서 새벽에 데려다 주었는데, 그 일을 또 하라는 말이냐? 나 너 못 믿어.” 손녀가 웃으며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도 나를 믿지 못하겠어요.” 

세상에 믿을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나 자신도 못 믿는데 말입니다.
솔직한 심정입니다. 이 세상에 믿을 사람 한 사람 없습니다. 그 하나님만이 나를 살게 하고 그 하나님만이 나로 승리케 하는 줄 믿습니다. 이 세상이 나를 비난한다 할지라도 우리가 붙잡을 분은 하나님 한분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성도의 자존심입니다. 티끌만도 못한 나, 쓰레기 같은 인생입니다. 우리가 한주간동안 말씀대로 산다고 해도 얼마나 합니까? 진정한 참회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야 살아가기에 감사하고 정말 어려울 때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는데 의지하지 않았던 것을 회개하는 것입니다.

솔직히 이야기해 보십시오. 길 가다가 교통사고난 사람 왜 사고 난 것입니까?
나는 왜 사고 안 났습니까? 병원에 가서 보십시오. 얼마나 많은 환자가 있습니까?
나는 왜 병원에 입원 안했습니까? 굶어죽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눈을 떠서 세계를 보면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런데, 나는 왜 굶어 죽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은혜요, 축복이요, 사랑인줄로 믿습니다.

숨쉬는 것까지도 하나님이 주장하십니다. 오늘 어떤 분이 와서 남편의 손가락이 썩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왜 내 손은 괜찮은데 그 사람은 그럴까요? 제가 대답하길 “하나님 믿게 하시려나 봅니다.” 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한걸음 한걸음, 한숨 한숨 쉬는 것조차도 내 마음대로 못합니다. 하나님이 내게 은혜주셔야 살수 있고, 하나님이 내게 은혜주셔야 감당할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의지하지 못하고 살았던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버트란트 럿셀의 행복론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자기 자신의 힘과 존재를 겸허하게 평가하는 것이 행복의 근원이다.’
자기를 낮추어 평가하는 사람은 항상 자기 성공에 만족합니다. 나는 이만한 사람이 못되는데, 어떻게 이런 복이 왔는가? 자기 앞에 이루어진 일에 대해 스스로 놀라고 감사하고 사는 사람이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우리 이동섭 목사님, 황명신 사모님이 제 친구 교회에 가서 지난주간 간증을 하셨답니다. 친구와 전화통화를 하며 뭐라 하시더냐 물었더니, 한남제일교회에 감사하다고 이야기했답니다. 그리고 또 무슨 이야기 안 했나 물었더니, 교인들이 이목사님과 황사모님 사시는 모습 보고 그냥 은혜받고 갔답니다.
그렇게 남편에게 불평하고 괴로워했는데, 황사모님도 저렇게 사시는데 나는 무엇 때문에 불평했는가 하고 감사하고 회개하고 눈물바다가 되어서 헤어졌다고 합니다.

감사하며 사는 사람이 행복한 것입니다. 반면에 불행한 사람은 스스로 높이기 때문에 실패에 대해서 논란을 합니다. 어떻게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만족하지 못하고 불평불만하며 사니까, 불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도 순간순간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나 같은 사람, 나 같은 죄인을 이렇게 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며 ‘나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정말 티끌만도 못한 쓸모없는 존재입니다.
그러기에 비난받는 것이 당연하고 실패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합니다. 그것을 이상하게 여길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티끌같은 존재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붙잡고 하나님의 은혜를 알 때에 감사하며 살아갈 때에 우리에게 겸손의 모습이 나타난다는 사실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그런 겸손이 있어야 합니다.

세 번째, 겸손은 의인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의인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성경에 보게 되면 소돔과 고모라 성이 나옵니다. 이 소돔과 고모라 성이 멸망받았습니다. 죄가 많아서입니까? 아닙니다. 의인 10명이 없어서 망했다는 것입니다.

이 경영학의 법칙에도 보면 20:80 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20%가 80%를 먹여 살린다는 것입니다. 개미들도 열심히 일하는 것 같으나 실상 20%만 열심히 일하고 나머지 80%는 그냥 왔다 갔다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전체를 보시지만 10명의 의인을 보시고 축복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나머지는 20% 때문에 거저 사는 것입니다. 의인은 누구입니까? 도덕적 의인이 아닙니다. 죄없는 의인은 절대 없습니다.
아브라함도 도덕적 의인은 못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 했습니다. 이 땅에 모든 사람들은 다 허물이 있고 부족한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이 의인입니까? 의인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창세기15:6 에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의로 여기시고’, 하나님을 믿는 것이 ‘의’ 입니다. 무엇을 믿는 것입니까? 75세에 하나님이 부르시니 그때까지 없던 자녀를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와 같이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어려움이 오자 애굽땅으로 갔습니다. 애굽땅에 가서 거짓말했습니다. 도덕적으로 의롭지 않습니다. 또 여러분이 잘 아는 것처럼 하나님이 자식을 안 준다고 해서 자기들의 생각대로 하갈을 통해서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너무나 상해서 13년동안 아브라함과 관계를 끊었습니다. 하나님이 관계를 끊었다기보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찾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99세 때에 나타나셔서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 나를 믿느냐?’라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아브라함이 ‘하나님, 제가 하나님을 믿습니다.’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이 아브라함을 의인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사람입니다.

신명기11:26에 보면 하나님께서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들으면 복이고 안 들으면 저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을 듣느냐, 안듣느냐에 따라 복과 저주가 나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는 사람은 의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과연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행하는가 성경이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성경을 보게 되면 참 안타까운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참 싫어했습니다. 그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서 죽게 했습니다. 주동자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이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몰라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몰라서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들어야 된다는 것을 잘 들으십시오. 대충 들어서 율법주의자가 되는 것입니다. 성경을 자세히 보면 하나님의 법과 세상의 법이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은 율법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율법이 아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율법이지만 율법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말이 무슨 말입니까? 율법주의자들은 모든 말씀을 세상의 법처럼 적용합니다.
간음했다 - 성경에 죽이라고 했다 - 돌로 쳐 죽이라고 했다 - 예수님에게 죽일지 안 죽일지 묻습니다.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고친 것에 대해 안식일을 범했다고 예수님을 죄인이라 합니다. 이들은 율법대로 살아야 한다고 합니다. 율법의 정신은 모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시지 않습니까? “이 여인을 죽일까요? 말까요?” 라고 묻자,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 고 하십니다. 그러자 다 돌아갔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 하노니 다시는 가서 죄를 짓지 말라’고 하십니다.

사도바울은 율법은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사모하게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는 것이 율법주의자들의 눈에는 안식일을 어기는 죄인의 역할이지만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사람을 살리우는 일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느니라고 하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신명기 23장에 보면 ‘종이 주인을 피하여 내게로 도망하거든 너는 그 주인에게로 종을 돌리지 말라’ 고 했습니다. 종은 주인의 소유물이니까 주인에게 돌려주는 것이 당연히 합법적입니다. 그러나 주인의 학대에 못 이겨 피한 사람을 돌려 보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죽는단 말입니다.

북한을 탈북한 사람들을 다시 돌려주는 것이 합법적입니다. 그러나, 돌려보내면 어떻게 됩니까? 죽는단 말입니다. 그래서 돌려 보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을 살리우는데 필요한 말씀입니다.
사람을 법으로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고아와 과부를 위해서 추수를 하거든 일부를 남겨서 그들을 살려주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인들에 대해서도 그 당시는 남자의 소유물처럼 여겼습니다. 그러나 네 이웃의 아내를 탐내지 말라고 하면서 여인들을 보호해 줍니다. 길가다가 여인이 성폭행을 당하면 남자는 죽이지만 여자는 살리라고 합니다. 정당하게 잘잘못을 가리고 억울하게 죽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사냥을 해도 어미새와 새끼 새를 같이 잡지 못하게 합니다. 생명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고래를 잡아도 그 고래의 어미와 새끼를 같이 잡지 말라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은 율법은 의인들에게 즐거움의 대상입니다. 율법대로 사는 사람은 생명을 살리우는 일에 앞장을 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율법의 완성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의인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요, 하나님의 마음을 갖고 서로 위로하고 돕는 자라고 하는 사실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다 티끌같은 존재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살아갈수 없는 존재입니다. 우리가 진정 겸손할 때에 우리는 진정한 의인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진정한 의인은 남의 허물이나 죄를 책하지 아니하고 어떻게 하면 도와줄지 살려줄지 위로할지 세워줄지에 대해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바로 이런 사람이 아브라함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찾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는 사람, 어설프게 듣는 사람은 율법주의자가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깊이 빠지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 하는 사람은 생명을 살리우는 일에 앞장 서는 사람이 된다는 사실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좋은 인격자는 그러기 때문에 말을 잘 듣습니다.

사람 나이 40이면 얼굴을 책임지고, 50이면 주변을 책임진다고 합니다. 의인 옆에는 사람이 모이게 되어 있습니다. 그전에 어른들이 이런 말을 합니다. 맑은 물에는 고기가 안 산다고 합니다. 박근혜씨가 어떻게 한 당의 총재가 되는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분의 말을 들으며 많이 깨달았습니다. 박근혜 씨는 누가 이야기를 하면 2시간이고 3시간이고 잘 듣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총재가 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높이고 따르는구나 생각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원하시는 의인은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듣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아브라함의 겸손한 이미지가 저와 여러분의 이미지가 되길 바랍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된 것처럼 우리 자신도 하나님 앞에서 자손 대대로 복받는 신앙의 좋은 모델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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