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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박넝쿨의 교훈 (욘 4: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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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광호 목사 (영생감리교회)

요나서는 한편의 드라마를 보는 듯합니다. 그리고 이 드라마 같은 이야기 속에는 매우 귀한 진리가 담겨져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말씀하시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외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피하여 다시스로 도망갔습니다. 풍랑에 던져지고 고기 뱃속에서 들어가는 등 모진 고난과 죽음의 위기를 겪은 후에 하나님은 다시 요나에게 말씀하십니다.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것을 선포하라. 결국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니느웨로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요나의 진정한 마음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가 처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불순종하여 도망할 때나 다시 죽음에서 건짐 받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니느웨로 갈 때에나 그 마음은 한가지였습니다. 즉 도망한 것도 그곳에 가기 싫어서였고 다시 가기는 했으나 여전히 가는 것이 못마땅합니다.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구원하시려는 니느웨성은 이스라엘의 적대국인 앗스루의 수도성이였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미운, 용서할 수 없는 적국 앗수르의 수도를 구원하라는 명령을 요나는 아무리 하나님의 명령이라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3장에 보면 두 번째로 임한 하나님의 말씀을 어쩔수 없이 순종하여 니느웨성으로 가서 하나님의 경고를 그리고 회개를 외칩니다. 니느웨성은 큰 성읍이었습니다. “니느웨는 극히 큰 성읍이므로 삼일길이라”(3절) 그런데 요나는 성의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였던 것입니다. 4절 “하룻길을 행하며 외쳐 가로되”(4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느웨 성의 왕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다 굵은 베옷을 입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습니다.

이를 바라본 요나의 반응이 4장 1-3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요나는 굉장히 못마땅하여 화를 내고 있습니다. 나아가 하나님께 자기를 죽여 달라고 떼를 씁니다. 죽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했던 니느웨 사람들이 멸망하지 않았으니 난 적국이 잘사는 꼴을 보기 싫으니 차라리 죽어버리는 것이 낳겠다는 항변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멸망을 선포했으면 그 말대로 행하셔야지 어찌 그들을 용서하시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요나가 얼마나 적국 니느웨성 사람들에 대한 감정이 분노로 가득차있는 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네가 성냄이 어찜이뇨? 라고 말씀하지만 그 말씀에 대항이라도 하듯 요나는 니느웨성이 망하는 꼴을 끝까지 지켜보겠노라고 성 동편 언덕에 올랐습니다. 그리고 니느웨성을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날이 밝아 오자 햇빛은 견딜 수 없이 따가웠습니다. 요나는 작열하는 태양으로 인해 죽을 지경입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습니다. 저는 언젠가 요나에 대한 에니메이션을 본 적이 있는데 그 캐릭터가 너무나 인상적이었습니다. 거칠고 퉁명하고 심술굳은 그의 모습은 쉽게 그의 성품을 짐작할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요나가 햇빛으로 인해 힘들어 하자 하나님은 박넝쿨을 자라게 하시고 그늘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러자 요나가 그 그늘에서 즐거워하며 니느웨성을 쳐다보고 있습니다. 요나서 어디에도 요나가 기뻐하였다는 말이 없었는데 요나는 하나님이 준비하신 박넝쿨로 인해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다음날 벌레를 준비하셔서 박넝쿨을 시들게 하시고는 뜨거운 동풍과 햇빛을 보내셔서 요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습니다.
요나는 그 박 넝쿨이 없어짐을 아쉬워하며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겠다고 또 불평합니다. 그렇게 불평하는 요나를 향해 하나님은 타이르듯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요나는 더욱 성내며 죽기까지 할지라도 내 행동이 합당하다고 하나님께 항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박 넝쿨을 아쉬워하는 것이 무엇이냐? 네가 심었느냐? 네가 가꾸었느냐? 그렇지도 않은 박 넝쿨을 아까워하면서 왜 사람은 귀하게 생각지 못하느냐? 좌우를 분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12만명이나 있는데 많은 짐승들도 있는데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겠느냐?”
이렇게 요나서는 끝납니다.

박넝쿨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이 있습니다.

첫째. 편협한 사고와 이기주의를 극복하라는 것입니다.

요나는 니느웨성의 멸망을 원하고 있습니다. 성 동편의 언덕에 오른 이유는 안전하기도 한 곳이지만 니느웨의 멸망을 지켜보겠다는 작정입니다. 요나는 지금 몹시 못마땅합니다. 멸망을 선포했지만 오히려 구원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적국 니느웨성, 심판 받아야 마땅한 죄의 도성이라고 요나는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감람산에서 예루살렘의 멸망을 바라보면서 우시던 자비로우신 예수님의 모습과 요나의 모습은 너무도 대조적입니다.

편협한 사고는 위험 합니다.
이미 굳어진 사고를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선과 악을 규정합니다. 그리고 조금의 양보나 타협도 용납하지 않습니다.
편협한 사고는 자기의 한계를 뛰어넘지 못하게 합니다.
극히 자기 중심적이며 이기주의 적입니다.
존중하는 관계는 없습니다. 일방적인 관계만이 있습니다.
편협한 사고를 극복하지 못하면 바른 것을 보지 못합니다. 절대적인 가치의 소중함을 모릅니다. 그러므로 그 속에 화해나 평화나 사랑은 존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편협한 사고를 극복하지 못하면 병든 자아상을 갖게 됩니다. 자기 감정의 노예가 됩니다.
진정한 사랑, 진정한 화해, 진정한 일치를 원한다면 우리가 가진 편협한 사고를 극복하는 노력이 꼭 필요합니다.

편협한 사고를 하며 이기주의적인 요나에게 하나님은 길이 참으시고 은혜를 베푸셔서 하나님의 자비를 체험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박넝쿨의 교훈을 통해 하나님의 온유한 충고는 요나 자신의 어리석음과 왜곡된 마음이 얼마나 수치스러운 것인지를 깨닫게 하기에 충본한 것입니다.
요나는 니느웨 성 전체보다 선지자로서 자신의 명예를 더 소중하게 생각하는 졸렬한 생각의 노예가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군부독재시대를 거치면서 반공 이데올로기로 모든 백성들을 다스려왔습니다.
우리도 모르게 굳어진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빨간색은 나쁘다는 것입니다. 공산당을 표시할 때 쇠뇌 되어 버린 색깔입니다. 파란색은 좋은편 빨간색은 나쁜 편이 고정관념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아직도 여전히 색깔론이 먹히는 나라가 우리나라입니다.
편협한 사고와 이기주의는 극복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나를 살리고 가정을 살리며 사회를 살리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길이 될 것입니다.

둘째, 이땅의 만족과 쾌락은 결코 영원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박넝쿨은 더위에 고통스러워 하는 요나에게 큰 위안이 되었습니다. 요나 앞에 스스로 자라난 박 넝쿨은 요나에게 기쁨과 평안을 선물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한 순간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벌레가 그 줄기를 갉아 먹자 곧 시들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추구하는 육적인 만족과 기쁨은 결코 영원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순간적인 기쁨과 만족을 대단한 것으로 착각한다면 곧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박넝쿨이 아주 보잘것 없는 하찮은 벌레에 쉽게 병들어 죽은 것처럼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괘락과 만족은 순간적인 것으로 지나가 버릴 것입니다. 그러므로 박 넝쿨통해 하나님은 덧없는 세속적인 즐거움에 너무 연연해하지 말라고 교훈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어떤 분이 자기가 가진 많은 돈을 자랑하는 것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자랑스럽게 말하는 그의 모습 속에 교만과 욕심이 가득한 모습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해에 갑자기 쓰러졌습니다. 시름시름 앓더니 곧 죽었습니다. 그 후 자식들이 재산 때문에 싸우면서 서로 원수가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세상의 쾌락과 만족이 결코 영원할 수 없습니다.
세상적인 만족이 사라지면 곧 더 힘겨운 고통과 아픔이 찾아옴을 알아야 합니다. 박넝쿨이 잠시 그늘을 제공하고 쉼과 위로를 주었지만 곧 더 큰 고통으로 이어지게 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보다 영원한 것을 바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영원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영원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의 기쁨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영원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복음의 사람으로 사는 것입니다.
성도가 얻어야 할 진정한 만족과 기쁨은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세상의 것으로 만족하고 위로받지 말고 영원한 하나님의 것으로 만족하며 위로와 평안을 누리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셋째. 하나님이 소중하게 여기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요나서는 정말 우리에게 귀중한 것, 정말 우리들이 붙들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치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박넝쿨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며 살아갑니다.
박넝쿨의 가치를 소중하게 여긴다는 것은 나와 괸계된 것이고 나에게 이익을 주는 것은 가치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나와 관계되어 있지 않고 나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 것은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박넝쿨을 붙잡고 삽니다. 나에게 이익이 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붙잡으려고 합니다. 하나님이 가치있게 여기시는 것이 무엇인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민족과 나라와 공동체가 가치있게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 보다는 내가 가치 있게 여기는 것들, 내 마음에 합당한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오늘 이 땅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요나와 같은 마음을 품고 삽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모습이 바로 요나의 모습은 아닙니까?

저는 요나서를 읽을 때마다 절망과 분노를 느낍니다. 심술 굳고 욕심 많은 요나의 교만하고 함부로 하는 모습이 싫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무례하게 행동하는 요나의 모습이 정말 화가 납니다. 하나님 차라리 나를 죽여주옵소서. 사는 것 보다 죽는 것이 낫겠습니다. 어디 함부로 이런 말들을 할 수 있습니까? 어떤 때는 참 어이가 없고 우스운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그 요나의 모습이 바로 나의 모습인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편협한 사고에 불들려 살아가고 있습니까? 얼마나 이기적입니까? 순간적인 것으로 지나가 버릴 세속적인 만족과 기쁨을 대단한 가치가 있는 것처럼 소중히 여기면서도 정말 중요하고 가치있는 일들은 나와 상관없다고 쉽게 지나치거나 평가절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보실 때 얼마나 안타깝고 모자란 모습입니까?

하나님이 니느웨성을 심판하지 않고 용서하신 것을 요나는 못마땅하고 불쾌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요나는 도저히 니느웨성 사람들이 용서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요나는 정말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요나를 하나님은 박넝쿨을 통해 자상하게 일깨우시고 계십니다.

남북평화통일을 이야기 하고 북한 선교를 이야기하면 요나처럼 반응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을 용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공산당을 용납할 수 있느냐고 합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이 소중하게 여기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아야 할 때가 왔습니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망한 이 박넝쿨을 네가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이만 여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마땅치 아니하냐”

하나님은 니느웨의 십이만의 영혼을 사랑하셨습니다. 멸망의 죽음을 눈앞에 둔 그들에게 구원의 은총을 베푸셨습니다. 하나님이 소중히 여기시는 것은 생명을 살리는 것입니다. 영혼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 생명 한 생명을 너무도 소중히 여기시며 아끼시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따져야 할 것은 옳으냐 그르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정말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저는 북한 선교의 비젼을 봅니다. 통일이 이루어질 때 북한에서 일어나게 될 놀라운 부흥의 역사를 생각합니다. 과거 1907년 평양 대 부흥운동이 일어나 한반도의 복음화의 큰 시작을 이루었듯이 통일의 그 날, 다시 평양에서 그리고 북녘 땅에서 일어나게 될 제2의 부흥운동을 꿈꾸고 있습니다.

북한에 쌀을 지원하는 것이 옳으냐 그르냐를 따질 것이 아닙니다. 북한 어린이들에게 우유를 보내고 영양실조와 죽음의 사경에서 당장 구해내는 일이 잘하는 것이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곳에 구원받아야 할 수많은 생명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천하보다 귀한 영혼들이 복음을 듣지 못한 채 죽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여순 반란사건 때 사랑하는 두 아들을 잃었습니다. 두 아들에게 총을 겨누었던 원수와도 같은 젊은이를 대신 자기의 아들로 삼았습니다.
손양원목사님이 보신 것은 옳으냐 그르냐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오직 한 생명의 소중함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 결과는 생명을 살리는 위대한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나는 도저히 그를 용서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가 나에게 행한 것을 생각하면 참을 수 없다고 합니다. 자신이 왜 용서해야 하는지를 반문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성서는 하나님의 용서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나의 성의 없는 선포에도 불구하고 니느웨성의 왕과 백성들은 재를 뒤집어 쓰고 회개하였습니다. 혹시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시리라 믿고 눈물로 회개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용서하셨습니다. 멸망하시려던 뜻을 돌이키사 니느웨를 멸망치 않고 구원을 베푸셨습니다.

왜 용서하지 못합니까? 우리의 감정만 앞세우기 때문입니다. 자기 의와 교만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판단과 정죄만이 앞설 뿐 생명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가치 있게 여기시는 것은 생명이요 평화이며 일치입니다.
하나님이 소중하게 여기시는 것은 사랑이며 용서입니다.

묵은 상처와 감정은 쓴 찌꺼기에 불과합니다. 그것은 아무런 가치도 없습니다.
우리를 더욱 파괴하고 괴롭힐 뿐입니다. 우리는 너무 이기적이어서 내 감정의 가치를 귀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감정에 따라 행동하려고 합니다. 더 큰 가치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정작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랑과 용서의 가치를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독생자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죽게 하셨습니까?
아들의 가치가 소중하지 않기 때문이 아닙니다. 아들의 가치보다 죽어가는 생명을 살리는 가치를 더욱 귀하게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가장 귀히 여기시는 가치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의 상식이 아닌 하나님의 상식으로 또한 우리의 입장에서의 이해와 우리 입장에서의 용서가 아닌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의 마음으로 그분 앞에 설 수 있어야 합니다.

북한 선교주일을 통해서 우리는 북한을 다시 이해하고 용서하며 사랑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사랑의 행위를 힘써야 합니다. 진정 그들을 사랑하는 행위는 빵과 복음을 나누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소중하게 여기시는 것은 생명을 살리는 것입니다. 옳고 그름의 문제보다 더 중요한 것은 생명을 살리는 것입니다.

오늘은 북한선교주일입니다. 세계에서 아직도 분단의 아픔을 갖고 사는 나라는 우리나라 뿐입니다. 분단의 역사 반세기를 지나고 있지만 여전히 통일의 그날은 밝지 못한 상황입니다. 북핵문제로 인하여 한반도의 전쟁의 위기는 더해가고만 있고 정치인들은 여전히 당리당략에 이끌려 서로 헐뜯고 싸움만 벌이는 가운데 더욱 통일의 희망은 멀어져가는 것만 같습니다.
그럼에도 감사하고 다행스러운 것은 여전히 북한 선교를 위해 많은 사람들이 기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시민 단체들이 북한의 어린이 돕기를 힘쓰고 있습니다. 중국선교를 통해 북한 선교의 길을 모색하는 선교단체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직접 북한 선교를 감당하는 선교단체들이 많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도 북한 선교에 대한 관심을 갖고 몇 분의 목사님들과 성도들이 북한을 다녀오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간접적인 선교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땅에 평화통일이 속히 이루어지기를 기도합시다.
북녘 땅에 복음의 깃발이 휘날리는 그날을 위해 평화의 복음이 선포되고 많은 주의 백성들이 세워지는 그날을 위해 기도합시다.
2004년 8월15일 주일낮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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