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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님의 세 가지 명령 (요 21: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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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윤형 목사 (하늘문교회)

베드로와 주님의 제자들이 갈릴리바다에 고기를 잡으러갔습니다. 그러나 그 밤에 그들은 아무것도 잡지 못했습니다.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찾아 오셨습니다.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 “없나이다.”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시몬 베드로가 그물을 육지에 끌어 올리니 그물에 일백쉰세 마리의 고기가 잡혔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조반을 먹으라고 부르셨습니다. 육지에는 숯불이 있고, 떡과 고기가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갈릴리 해변에 차려진 예수님의 아침상은 제자들의 부족과 결핍을 채우는 성찬이었습니다.

그들이 조반을 먹은 후에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부르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왜? “베드로야”라고 부르시지 않았을까? 이는 인생의 연약과 인생의 한계를 나타내는 말씀일지 모릅니다. “바 요나 시몬아!” - 이 말씀은 일찍이 베드로가 주님께 대한 그의 믿음과 사랑을 고백했을 때, 주님께서 부르신 이름입니다.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의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16:19)고 베드로에게 대임을 맡기실 때 부르신 이름입니다.

그런데 지금 베드로는 말고의 귀를 날리던 용감한 장사도 아니요.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라고 고백하던 믿음 있는 신앙인도 아니요.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주를 버리지 않겠나이다.”라고 하던 충성스러운 주의 수제자도 아닙니다. 주님을 부인한 죄책감과 소망을 잃어버린 허탈감에 빠져있는 나약한 인간 베드로 일뿐입니다. 그러나 요한의 아들 시몬이었을 때 대명을 받았던 것처럼, 오늘 베드로는 요한의 아들 시몬으로 돌아가서 다시 한번 주님의 대명을 받아야할 사람인지 모릅니다.

주님께서는 다시 한번 더 베드로에게 사도의 대명을 수임하시면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사랑을 확인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도의 길! 제자의 길은,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갈수 있는 길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세 가지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Ⅰ. “내 어린양을 먹이라”고 하셨습니다. - 목양사역

성경은 주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라”고했습니다(눅19:10).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맡기신 일이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는 것입니다(막16:15).

성경은 여러 곳에서 세상에 있는 사람은 길 잃은 어린양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이 길 잃은 어린양을 찾아서 이 땅에 오신 목자장이십니다.

본문은 주님을 사랑하는 것과 주의 어린양을 기르는 것을 동일시하고 있습니다. 주님사랑은 곧 주님의 양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 어린양”은 누구를 말하는가?
이제 막 교회에 출석하고, 아직 주님의 은총 속에 거해보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이제 겨우 겨자씨만한 믿음을 가진 자들입니다. 그들의 사랑은 불같이 뜨겁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이 약한 불씨는 세찬 바람이 불면 꺼져버릴 수도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특별한 관심과 보호가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언제나 어린양은 어미젖을 일정하게 먹도록 돌봐주어야 합니다. 깨끗한 물을 마실 수 있도록 공급해줘야 합니다. 잠자리가 불편하지 않도록 보살펴 줘야합니다.

단순히 먹이만 주는 것이 아니고 좋은 습관에 길들여져서 좋은 양이 되도록 기르는 것이 바로 어린양을 기르는 것입니다. 어린양은 믿음이 약한 자들입니다. 믿음이 약한 자는 쉽게 낙심하고, 쉽게 상처받고, 쉽게 넘어지는 자들입니다. 양에게 목자가 필요한 것은 이렇게 어린양, 병든 양, 목자의 도움이 필요한 양이 있기 때문입니다. 꼴을 주되 키 큰 기린이나 먹으라고 높은 나무위에 메달아 줘서는 안 됩니다. 코끼리나 먹으라고 멀리 줘서도 안 됩니다. 어린양의 꼴은 어린양이 먹기에 합당한 먹이를 양 가까이에, 물 가까이에 가져다주어야 합니다.

누가 어린양인가? 이 교회에 나온지 얼마 안 되는 사람입니다.

사실 교회에 처음 나온 사람은 모든 것이 낯설어서 주위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할 용기조차 가지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경우에 관심의 대상이 되어야 할 어린양이 관심 밖으로 밀려나서 관심의 대상도 되지 않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 가? 먼저 나온 사람! 먼저 믿은 사람들에게 가려져서 교회 안에서 예수님의 모습을 보지 못하는 경우는 얼마나 많은가?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 팽개쳐진 자리에서 소외됨으로 고통 받는 영혼은 교회 안에 얼마나 많은가? 예수님께서 내 어린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내 손길이 필요한 이웃의 영혼을 향하여 내 손을 펴라는 것입니다. 소외 받는 어린양에게 위로의 꼴을 공급하라는 말씀입니다.


Ⅱ. “내 양을 치라”고 하셨습니다. - 보호와 보존 사역

“친다”는 말은 살피고 돌본다는 말입니다. 목자는 언제나 양의 안전에 대하여 관심을 가져야합니다. 가장은 가정의 안전을 생각하고, 사장은 회사의 안전을 생각하고, 대통령은 나라의 안전에 대하여 생각해야 합니다.

이 일은 교회도 예외가 아닙니다.
말세에 사탄은 우는 사자같이 삼킬 자를 두루 찾고 있습니다(벧전5:8).

말세가 될 수록 거짓 선생과 거짓 선지자들이 나타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면서, 할 수만 있으면, 택한 백성이라도 미혹하려고 합니다. 이들의 미혹이 얼마나 열심인지, 그릇된 이단들이 나타나면, 곧 크게 팽창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세상의 많은 그릇된 사상들이, 잘못된 신앙들이 성도들의 영혼을 죽이고 있습니다. 이런 영적 위협으로부터 성도들은 보호할 책임이 교회에 있습니다.

교회는 깨어서 그릇된 사상을 가지고 교회에 침투하여 성도들을 미혹하는 자가 있는가를 잘 살펴서 있다면, 이들을 치리하여, 성도들로부터 분리시켜야합니다. 교회가 혼란하여 성도들의 영혼이 상처를 입지 않토록 해야 합니다.

이것을 교회의 치리권이라고 합니다. 교회의 권징과 치리가 바르게 시행될 때 교회의 거룩성과 성도의 순결은 세워갈 수 있습니다.


Ⅲ. “내 양을 먹이라”고 하셨습니다. - 양육사역

내 양을 먹이라는 주님의 명령은 주께서 교회에 주시는 교육명령입니다.

교회의 구성원들은 믿음이 약하거나, 강하거나, 끊임없이 말씀의 꼴로 양육 받아야합니다. 왜냐하면 어린아이가 영양분을 공급받지 못하면 성장할 수 없듯이, 성도들이 지속적으로 영의 양식인 말씀을 공급 받지 못하면, 그 신앙이 성장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가르치는 일에 열심해야 합니다. 교회는 어린양을 양육하여 우리를 채워야합니다. 무엇을 먹일 것인가? 예수 그리스도를 꼴로 먹어야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고 하셨습니다(요6:35).

예수님만이 생명의 떡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양은 예수님의 말씀만을 먹어야합니다. 교회의 강단에 세상의 교양, 세상철학, 세상학문이 강론된다면 그 교회는 교회가 아니고, 강연회장이나. 세미나장이 될 것입니다. 그것은 양에게 꼴이 되지 않고 독초가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합니다. 예수님의 양에게는 예수님의 말씀의 꼴을 먹이되, 기도하고, 묵상하고, 연구하여, 늘 따뜻하고 싱싱한 꼴을 풍성히 공급하는 강단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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