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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희망의 씨를 뿌리는 사람들 (시 12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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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수 목사 (홍성교회)

희망의 씨를 뿌리는 사람들

지금부터 68년 전 독일 베를린에서 올림픽경기가 있었습니다. 이 때 손기정선수가 마라톤에서 1등을 했습니다. 그러나 손기정선수는 한국대표가 아니라 일본대표였습니다. 그 때의 마라톤 우승은 공식적으로 일본의 우승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즘 당시 경기를 중계했던 독일 방송에서 손기정선수를 한국학생이라고 표현한 것이 발견이 되었습니다. 정말 그나마 위로가 되는 부분입니다. 두 세대가 지난 일이라 공감하기가 쉽지 않지만 그 때 손기정선수와 우리나라 국민들의 마음은 우승하지 못한 것보다 더 슬펐습니다.

<1936년 8월9일 우승한 후의 인터뷰>
"기쁘기도 기쁘나 실상은 웬일인지 이기고 나니 기쁨보다 알지 못할 설움만이 복받쳐 오르며 울음만 나옵니다. 남승룡과 함께 사람 없는 곳에 가서 남몰래 서로 붙들고 몇 번인가 울었습니다. 이곳의 동포들이 축하하는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눈물만 앞섭니다."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 마라톤우승자 황영조와의 대담에서>
"지금 젊은 사람들은 나라 없는 설움에 대해서 모른다. 내가 우승한 뒤 일본 국가가 연주될 때 나는 고개를 떨구었다."

나라 없는 백성은 기쁜 일도 슬픔이 됩니다. 웃을 일에도 눈물이 흐릅니다. 기쁨이 슬픔이 되고 웃음이 눈물이 되며 희망이 절망으로 끝납니다.

오늘은 광복59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36년 동안 일제의 식민지로 수탈과 억압 속에 신음하던 우리나라가 해방된 날입니다. 이 36년 동안 서러움의 세월을 살았던 우리 민족에게는 1945년 8월 15일은 참으로 기쁘고 복된 날이었습니다. 그 날의 기쁨은 광복절노래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흙 다시 만져보자 바닷물도 춤을 춘다. 기어이 보시려던 어른님 벗님 어찌하리. 이 날이 사십년 뜨거운 피 엉긴 자취니. 길이길이 지키세. 길이길이 지키세.”(정인보 작사, 윤용하 작곡)

오늘의 흙은 어제의 흙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제의 흙은 내 땅의 흙이 아니었지만 이제 오늘의 흙은 내 땅의 흙이 되었습니다. 죽으면 남의 땅의 흙이 될 뻔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죽어도 내 땅의 흙이 될 수 있습니다. 빼앗겼던 땅을 되찾고 약탈당한 우리 민족의 미래를 되찾았습니다. 그래서 내 마음이 춤을 추는 것처럼, 바닷물도 춤을 춘다는 것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정말 꿈같은 일이었습니다. 악몽에서 깨어난 것 같았습니다.

1. 운명을 바꾸시는 하나님

오늘 본문 말씀 시편에서도 이러한 해방의 기쁨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리실 때에 우리가 꿈꾸는 것 같았도다!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이스라엘은 70년 동안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가 살았습니다. 동족을 죽이고 나라를 멸망시킨 원수의 땅에서 70년을 살았습니다. 좌절과 절망의 세월이었습니다. 거역할 수 없는 운명의 힘 앞에서 노예처럼 살아야 했습니다. 포로라는 말의 원문은 쉬바트(운명)입니다. 그래서 직역하면 시온의 운명을 회복시키셨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 시의 역사적 배경을 고려하여 운명이라는 말을 일반적으로 포로라고 번역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포로라는 말의 히브리어는 슈부트입니다. 4절에 나오는 포로라는 말은 슈부트입니다. 1절에서는 쉬바트를 사용하고 4절에서는 슈부트로 바꾸었습니다. 쉬바트와 슈부트! 발음이 비슷합니다. 이 비슷한 발음의 단어를 교차시키면서 두 단어의 의미도 서로 교차시키고 있습니다. 포로생활은 이스라엘의 운명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포로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의 운명을 바꾸어주셨다는 것입니다.
누가 운명의 사슬을 끊을 수 있습니까? 누가 자신의 운명을 바꿀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운명의 포로들을 해방시키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운명의 힘 앞에 굴복하여 미래를 상실한 사람에게 자유를 주시고 미래의 희망을 회복시켜주십니다.

애굽에 노예로 팔려간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애굽의 노예들이던 히브리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 받고 그 민족의 미래가 달라졌습니다. 기생 라합이 예수님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모압 여인 룻의 인생이 역전되었습니다. 85세의 갈렙이 강대한 아낙자손의 산성 헤브론을 차지했습니다. 목동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의 인생이 하나님의 손 안에서 역전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손 안에서 운명이 바뀐 사람들에게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을 철저하게 신뢰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철저하게 신뢰하는 사람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사람들의 운명을 바꾸십니다. 그리고 거룩한 뜻을 위해 사용하십니다.

2. 악몽을 깨우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포로의 운명에서 회복하셨을 때에 꿈꾸는 것 같았다고 찬양하고 있습니다. “꿈꾸는 것 같았다”는 말의 원문은 “우리가 꿈꾸는 사람 같았다”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 악몽에서 깨어난 사람 같았다는 것입니다. 운명의 포로가 되어 살던 시절이 이제 꿈처럼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악몽이야기) 악몽을 꿀 때는 두려워서 사지가 굳어지지만 깨어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악몽 같은 시절들도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면 꿈처럼 사라지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아닙니다. 운명에 가위 눌린 꿈에서 깨어납시다. 운명을 바꾸시고 삶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고 삽시다.

3. 위대한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

이스라엘이 포로생활에서 해방된 것을 보고 주변의 나라들이 말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저희를 위하여 대사를 행하셨도다.” 대사라는 말은 말 그대로 큰일이라는 의미입니다. 이 말의 의미를 잘 살려서 표현하면 하나님께서 위대한 일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나라의 운명을 바꾸고 사람들의 삶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일이야말로 진정 위대한 일입니다. 가장 위대한 일은 한 사람의 삶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어둠의 삶에서 빛의 삶으로, 부정적인 삶에서 긍정적인 삶으로, 두려움의 삶에서 믿음의 삶으로, 절망에서 희망으로 변화되는 사건이 위대한 사건입니다. 운명을 바꾸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통해 우리의 삶에 위대한 일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3절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대사를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

4. 힘 있게 회복하시는 하나님

4절을 보면 “우리의 포로를 남방 시내들 같이 돌리소서”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의 운명을 남방 시내들처럼 회복시켜주소서”라는 뜻입니다.

남방시내는 이스라엘 남부의 건조한 지역 네겝 사막에 있는 시내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남방의 하천들은 ‘와디’라고 부르는 하천입니다. ‘와디’는 평소에는 바짝 마른 상태로 있다가 가을이나 겨울에 많은 양의 비가 내리게 되면 일순간에 격류로 변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남방 시내들처럼 회복시켜달라는 간구는 힘 있게 해 달라는 의미입니다. 운명의 포로 되었던 삶에서 해방되는 것을 넘어서서 힘 있는 회복의 삶을 살게 해달라는 간구입니다. 바벨론에서 아직 귀환하지 않은 백성들을 모아서 힘차게 나라를 재건할 수 있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많은 비로 격류를 이루어 힘차게 흐르며 메마른 땅을 적시는 와디처럼 은혜의 비로 힘차게 메마른 심령을 적시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회복의 삶을 살고 싶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힘찬 회복의 삶이 가능합니까?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은혜의 물결이 되어 세상으로 흘러 나가는 것입니다. 은혜 받은 사람들의 감사의 물결, 은혜 받은 사람들의 겸손의 물결, 은혜 받은 사람들의 사랑의 물결, 은혜 받은 사람들의 용서의 물결..... 이 은혜의 물결이 메마른 심령과 가무른 세상을 흘러 적시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힘 있는 회복의 삶을 꿈꾸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삶을 이루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의 자녀들도 운명의 포로에서 해방되어 은혜의 비로 세상을 적시며 변화시키는 그리스도인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5. 눈물을 기쁨으로 바꾸시는 하나님

이스라엘이 포로에서 해방되었을 때 그들에게 기쁨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귀환한 이스라엘사람들은 황폐해진 나라를 재건해야 하는 힘든 사명 앞에 서야 했습니다. 당장 먹을 것도 없고 기거할 것도 없는 황폐한 땅에서 주변의 적들과 싸우며 나라를 재건해야 했습니다. 자유를 얻은 그들의 앞에는 눈물로 씨를 뿌려야 하는 험한 생활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눈물어린 희생과 헌신의 삶이 없이는 나라를 재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렸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나라 재건을 위해 헌신했습니다.

우리나라도 해방 이후에 험난한 시련에 직면했었습니다. 정치적 혼란과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 분열과 암살과 불의가 가득했습니다. 전쟁의 아픔도 겪었습니다. 교회도 혼란한 정치와 이념에 휩쓸려 반목과 분열의 시련을 겪어야 했습니다. 자유는 시련과의 싸움 없이 완성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눈물을 흘리며 앉아 있는 사람들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씨를 뿌리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눈물을 흘리면서도 씨를 뿌리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분단의 아픔과 정치 경제적 시련 속에서도 나라를 재건할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씨를 뿌렸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렸습니다. 왜 눈물을 흘립니까? 먹을 양식이 귀하고 귀한 때에 먹지 않고 땅에 뿌리기 때문에 눈물이 나는 것입니다. 배고파 우는 자식들이 있지만 이 씨앗을 끓여 먹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렇게 눈물을 흘리며 새롭게 도전해오는 시련과 싸우며 미래를 준비했습니다. 그들이 눈물을 흘리면서 씨를 뿌릴 수 있었던 것은 운명을 바꾸시는 하나님께서 눈물을 기쁨으로 바꾸어 주실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라고 찬양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뿌리는 씨앗은 희망의 씨앗이었습니다. 기쁨의 미래를 거두게 하는 희망의 씨앗이었습니다.

6절을 보면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간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의 원문에는 이중부정을 뜻하는 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즉 “울지 않고서는 씨를 뿌리러 나갈 수 없다”는 말입니다. 현실은 울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울지 않고서는 씨를 뿌릴 수가 없습니다. 그래도 씨를 뿌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기쁨의 미래를 거두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운명의 포로에서 해방된 우리들도 시련에 직면하게 됩니다. 울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희망의 씨가 있습니다. 운명을 바꾸시는 하나님께서 주신 씨앗입니다. 눈물의 현재를 기쁨의 미래로 바꾸어 줄 씨앗입니다. 이 씨를 뿌려야 합니다. 울면서 뿌려야 합니다.

<월남 이상재 선생의 절망과 희망>

“설사 나라가 망하고 가족이 다 죽었다고 할지라도 이 땅에는 아직 조국의 미래인 저 젊은이들이 많지 않습니까? 이 젊은이들은 선생님의 자식일 뿐만 아니라 이 나라의 희망이지 않습니까?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이토록 고통스럽고 아픈 과정을 허락하시면서 선생님을 통해 하고자 하시는 일이 있음을 누가 알겠습니까?”

황폐한 땅에서 기쁨의 미래를 거두기 위해 눈물로 희망의 씨를 뿌렸던 믿음의 선배들처럼 우리도 오늘날 영적으로 황폐한 세상에 복음의 씨를 뿌리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복음이 세상의 희망입니다. 예수님이 이 시대의 소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희망의 씨를 뿌리는 사람들이 됩시다. 이 희망의 씨가 우리의 운명을 바꾸고 우리의 인생을 복되게 하며 이 세상을 새롭게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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