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포기를 모르시는 예수님 (눅 13: 1-9)

  • 잡초 잡초
  • 243
  • 0

첨부 1


- 김흥규 목사 (인천내리교회)

I. 고난과 죄, 그리고 회개의 삼각 관계

본문 말씀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먼저 1-5절까지는 예수님 당시에 일어났던 두 가지 사건을 언급하면서 고난과 죄의 관계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 다음 6-9절까지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두 가지 이야기는 분명히 서로 다른 이야기이지만 한 가지 주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바로 '회개'와 '용서'라는 누가 복음 특유의 주제인 것입니다.

먼저 1-5절에 나오는 두 가지 비극적인 사고는 다른 공관 복음서는 물론이고 요한 복음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두 가지 사고는 도대체 어떤 것입니까?

⑴ 고의적인 범법 행위로 당하는 고난의 문제: 갈릴리인 학살 사건
우리 다같이 본문 1절의 말씀을 읽어봅시다. "그 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저희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고하니."

이 말씀을 조금 더 쉽게 풀어서 해석을 하면 이렇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이스라엘을 통치하던 빌라도 총독이 갈릴리 사람들을 학살했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빌라도는 그 갈릴리인들이 흘린 피를 그들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바치려고 했던 희생 제물에 섞었다는 것이지요. 도대체 이 사건이 언제 어떻게 일어났는지 아무도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많은 학자들은 이 사건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추측합니다.

1세기의 유대인 역사가인 죠세푸스(Flavius Josephus)의 기록에 따르면 빌라도는 유대인들을 매우 잔인한 방법으로 다루었던 사람이었습니다. 빌라도 총독은 특히 예루살렘으로부터 약 30 마일 정도 떨어진 샘으로부터 예루살렘 도성 안 깊숙이 물을 끌어들일 수 있는 도수관(導水管, AQUEDUCT)을 만들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거대한 도수관 공사를 위해서는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습니다. 빌라도는 이 자금을 예루살렘 성전의 금고로부터 빼내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룩한 하나님의 성전에 바친 혈세(血稅)로부터 자금을 융통하려고 했던 것이지요.

당연히 유대인들은 빌라도 총독의 도수관 프로젝트에 대하여 거세게 반발했습니다. 유대인들의 국가적인 명절 유월절(PASSOVER)에 비극은 마침내 일어나고야 말았습니다. 수많은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몰려들면서 빌라도의 학정을 규탄하는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이 때 빌라도는 참으로 비열한 방법으로 시위 군중들을 학살했습니다.

빌라도는 로마 군인들이 유대인들과 똑같은 옷을 입고 변장을 한 채 군중들 속에 섞이게 만들었습니다. 그런 뒤 칼 대신에 곤봉이나 막대기를 몰래 숨기고 있게 했습니다. 드디어 상부로부터 진압 작전을 알리는 신호가 떨어지자 로마 군인들은 순식간에 시위 군중들을 덮쳐서 주모자 급에 해당되는 사람들을 무조건 쳐죽였습니다. 이 때 수많은 갈릴리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갈릴리 사람들은 예루살렘 사람들과는 달리 로마에 대한 반감이 깊었고 또한 굉장히 혁명적인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주로 갈릴리 사람들이 학살을 당했던 것입니다.

본문에서 몇 사람이 예수님께 찾아와 보고했다는 학살 내용은 바로 이 사건과 연관되어 있지 않은가 하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⑵ 우발적인 사고로 인해 당하는 고난: 실로암 망대가 무너진 사건
그런데 또 한 가지의 사고가 있었습니다. 실로암에 있는 망대, 즉 탑이 무너져서 18 명이 목숨을 잃은 사건입니다. 첫 번째 사고가 빌라도 총독의 지시하에 일어난 의도적인 범법 행위였다면 이 사건은 전적으로 우연히 일어난 사고였습니다. 

학자들은 이 사건 역시 도수관 공사와 관련이 있지 않은가 하고 추측합니다. 다시 말해서 도수관 공사를 위해서 예루살렘 도성의 벽 위에 설치한 망대가 어느 날 갑자기 무너져서 그 밑에 있었던 사람들 18 명이 치여 죽은 것으로서 해석하는 것입니다.

⑶ 고난과 죄, 그리고 회개
그런데 이제 이 두 가지의 비극적인 사고에 대한 예수님의 생각이 아주 중요합니다. 먼저 빌라도가 의도적으로 갈릴리인들을 학살한 사건에 대해서 예수님은 어떤 반응을 보이셨습니까?

우리 2-3절 말씀을 다함께 읽어봅시다.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음으로써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요점은 아주 분명합니다. 갈릴리인들이 그렇게 비참하게 죽임을 당한 것이 우리들보다 죄가 더 많기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만일 우리도 회개하지 아니하면 그들과 마찬가지로 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4-5절 말씀을 읽어봅시다. "또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 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여기에서도 예수님의 요점은 너무나도 단순합니다.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서 18 명이 갑자기 죽었는데 그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결코 죄가 더 많아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도 자신의 죄를 회개하지 않으면 그들과 똑같이 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저는 갈릴리인들에 대한 학살 사건이 빌라도의 치밀한 계획 아래 일어난 고의적인 비극임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망대가 무너져 18 명이 죽은 것은 전혀 우발적으로 일어난 사고라는 사실도 말씀드렸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다보면 누군가의 의도적인 범죄 행위 때문에 고난을 당하거나 목숨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태풍이나 토네이도와 같은 자연 재해 때문에, 혹은 누군가의 의도적인 범죄 행위와는 전혀 상관없이 그저 우연히 일어난 사고에 연루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 어떤 경우이든지 간에 예수님은 고난이 죄와 항상 그리고 필연적으로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강하게 부인하십니다. 어떤 사람이 큰 사건에 연루되어 큰 고통을 당하거나 아니면 목숨을 잃는다고 할 때 그들이 결코 우리보다 죄가 더 많아서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지요. 바로 이 때문에 예수님은 두 번씩이나 "이들이 다른 사람보다 죄가 더 많아서 그렇게 된 줄로 아느냐?" 하고 질문을 던지신 다음에 두 번 다 "아니라!(NO!)"고 힘주어 강조하고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 고난과 죄의 관계는 성경이 씨름하고 있는 가장 집요한 문제 중에 하나입니다. 신 28-30장 말씀을 보면 대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복을 받고 불순종하면 저주받는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이 구약의 율법은 흔히 고난이 죄에 대한 형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와 같이 율법적인 사고와는 전혀 다른 견해를 보여주십니다. 다시 말해서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항상 그리고 필연적으로 벌을 받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셨던 것입니다.

요 9장 말씀에는 나면서부터 소경된 사람에 대한 논쟁이 나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던진 질문은 지극히 구약적이며 율법적인 사고에서부터 나왔습니다. 도대체 이 사람이 이렇게 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이냐는 것입니다. 자기의 죄 때문입니까? 아니면 그 부모의 죄 때문입니까? 예수님의 대답은 명쾌합니다. 소경 자신이나 그 부모의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드러내기 위하여 그렇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병자를 고쳐주심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서 고난을 당한다고 보신 것이지요!

옳습니다. 사람이 고난을 당하는 것은 지은 죄 때문인 경우도 많지만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어떤 경우에는 상대적으로 죄를 덜 짓는 성자들이 훨씬 더 가혹한 고난을 당하는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여러분, 오늘 예수님이 말씀하시려는 요점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누군가가 큰 고통을 당한다고 해서 우리보다 죄를 더 많이 지어서 그런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우리도 그와 같은 고통을 얼마든지 당할 수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9-11 테러 사건이 일어났을 때 수천 명이 뉴욕의 쌍둥이 빌딩에 있다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된 것이 우리보다 죄를 더 지었기 때문입니까? 예수님에 따르면 천만의 말씀입니다. 우리도 역시 그와 같은 일을 당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도 이와 같은 고난을 당할 수 있느냐 않느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정말로 강조하시려고 했던 것은 회개입니다! 회개는 죄인들만이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누구나 다 해야 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회개하지 않으면 빌라도에게 학살당한 사람들이나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죽은 사람들보다도 더 무서운 일을 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여러분, 본문에서 말씀하는 두 가지 사건의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둘 다 전혀 예기치 못한 상태에서 돌발적으로 일어난 비극이라는 사실이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이들은 회개할래야 회개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지은 죄를 돌아보며 자기를 반성하며 뉘우칠 시간이 전혀 없는 가운데 죽임을 당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려는 의도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에게 시간이 주어질 때 회개하지 않으면 이 보다 훨씬 더 순식간에 회개할 여유를 갖지 못한 채 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는 늦추어져서 안됩니다. 우리가 사는 날 동안 계속되어야 합니다. 지금 이 순간에 여기에서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멸망당하지 않습니다!

II.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포기하지 않는 과원지기

여러분 이와 같은 회개의 중요성은 6-9절에 나오는 무화과나무의 비유에도 계속됩니다. 마 21: 18-19과 막 11: 12-14에 보면 예수님께서 열매 없이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저주했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런데 본문에 나오는 말씀은 하나의 상징적 비유로서 마태와 마가와는 그 성격이 다릅니다.
     
⑴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사이에 둔 주인과 과원지기
본문의 비유는 포도원 주인이 포도원을 방문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 당시 고대 근동 지방에서는 포도원에 포도만 심은 것이 아니라 흔히 다른 과실나무도 함께 심었습니다. 문제는 포도원 주인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구했지만 아무 것도 얻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주인은 포도원을 관리하는 과원지기를 불렀습니다. 뭐라고 말했습니까?

우리 다같이 7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과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실과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 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느냐."

레 19: 23을 보면 땅에 어떤 나무를 심을 때 삼 년 동안은 할례받지 못한 것으로 여겨 그 열매를 먹지 말라고 했습니다. 아마 이와 같은 율법적인 규정 때문에 포도원 주인은 3년 동안은 열매가 없어도 꾹 참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제 이와 같이 참을 수 있는 최대한의 시간이 다 지났을 때 주인은 역정을 냈습니다. 뭐라고 역정을 냈습니까? 첫째로, 나무를 찍어버리라는 명령이고, 둘째로 찍어버려야 할 이유, 즉 무화과나무가 땅만 버리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합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주인의 명령에 대하여 과원지기가 한 가지 제안을 합니다. 여러분, 8-9절 말씀을 다같이 큰 목소리로 읽어봅시다. "대답하되 가로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이 후에 만일 실과가 열면이어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 버리소서 하였다 하시니라."

이게 무슨 말입니까? 포도원 주인은 무화과나무가 괜히 포도원에 들어와 아무 열매도 맺지 못한 채 땅만 축내고 있으니 당장 찍어버리라고 명령했습니다. 바로 이 때 과원지기는 주인에게 아주 공손하게 부탁을 했습니다. 부탁은 두 가지로 요약됩니다. 첫째로, 무화과나무를 찍어내지 말고 올해도 그냥 두자는 것입니다. 둘째로, 자신이 무화과나무 둘레를 파고 거름을 주겠다는 것입니다.

과원지기가 주인에게 이와 같은 두 가지 제안을 하는 이유 역시 두 가지 때문입니다. 첫째로, 이렇게 한 해를 더 참으면 다음 철에 열매를 맺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 때문입니다. 둘째로, 만일 그 때에 가서도 여전히 열매를 맺지 못할 경우에는 완전히 찍어버려도 좋다는 다짐입니다.

⑵ 해석의 문제: 포도원주인=하나님, 과원지기=예수님, 포도원=교회, 무화과나무=우리
여러분, 이 말씀을 바로 이해하기 위하여 도대체 포도원주인은 누구를 말하며, 과원지기는 누구를 말하며, 포도원은 무엇을 의미하며, 무화과나무는 또 무엇을 상징하는가에 대해서 해석하는 일입니다. 여러 가지 견해가 있겠지만 저는 이렇게 해석하고 싶습니다.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을 상징합니다. 과원지기는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포도원은 교회를 상징합니다. 그리고 무화과나무는 바로 우리 자신을 상징합니다.

자, 이렇게 해석할 경우 본문을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포도원 주인되신 하나님은 포도원인 이 교회에 우리를 부르셔서 한 그루의 무화과나무로 심어주셨습니다. 요엘 2: 22과 미가서 4: 4을 보면 포도나무나 무화과나무는 다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상징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어쨌든지 간에 하나님께서 포도원과 같은 이 교회에 우리를 불러주신 이유는 우리가 풍성한 열매를 맺기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열매를 맺지 않고 땅만 버리고 있으면 어떻게 됩니까? 당연히 하나님께서 우리를 찍어내시려고 할 것 아닙니까?

그러나 이 때 우리의 중보자 되시는 예수님께서 나서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놀라운 것은 과원지기 예수 그리스도는 포도원 주인되시는 하나님 편이 아니라 무화과나무인 우리편을 들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주인 어른, 포기하지 마시고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십시오! 제가 무화과나무 주변을 파고 거름을 주어서 열매 맺도록 만들겠습니다. 제발 그 때까지만 더 기다려주십시오. 만일 그 때에 가서도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그 때는 찍어버리셔도 좋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에게 바로 이와 같은 과원지기이신 것을 기억하십시오! 우리 중에 단 한 사람도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게 하지 않으시려고 오래 참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를 절대로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도 두 번째 기회를 주셨고, 죄인 중의 괴수인 바울도 포기하지 않은 채 참고 기다리셨습니다.

영국의 명 수상인 윈스톤 처칠(Winston Churchill, 1874-1965)이 어느 대학의 졸업식에 연사로 초청을 받았습니다. 드디어 처칠이 연설할 차례가 되었을 때 졸업생들을 비롯해서 온 청중들이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할는지 숨을 죽이고 기다렸습니다. 연단으로 나간 처칠은 "NEVER GIVE UP!," "절대로 포기하지 마십시오!" 이 한마디만 엄숙하게 말한 채 자기 자리로 돌아가 앉았습니다.

깜짝 놀란 청중들은 숨을 죽인 채 그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까 기다렸습니다. 잠시 후 자리에서 다시 일어난 처칠이 또 연단에 나가서 역시 "NEVER GIVE UP!" 이 한마디만 던진 채 자리에 가서 앉았습니다. 긴장한 청중들은 넋을 잃은 채 이 노 수상을 쳐다보았습니다.

다시 연단에 나간 처칠 수상은 "NEVER GIVE UP!"이라는 말을 무려 다섯 번씩이나 외친 후 다른 것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연설을 끝냈습니다. 그 제서야 졸업생들은 처칠이 말하고자 하는 요점을 이해했습니다. 어떤 난관이 있어도 절대로 포기하지 말라는 메시지였던 것입니다! 

  III. 포기를 모르는 예수님의 사랑

여러분,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비록 열매를 맺지 못하고 허물이 많다고 해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우리를 절대로 포기하는 법이 없는 사랑입니다. 그동안 여러분이 신앙 생활에 넘어졌습니까? 지은 죄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회개하지 못했습니까? 포기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때문에 다시 일어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로 용서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여기에서 결단하는 것입니다. 오래 참으시는 주님의 자비와 사랑을 기억하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여러분 둘레를 파고 거름을 줄 때 겸손하게 받아들여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이 비유는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 전혀 알려주지 않은 채 미완성으로 끝이 납니다. 과원지기가 무화과나무를 잘 돌봐서 그 다음 철에 열매를 맺었는지 안 맺었는지 알려주지 않습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과원지기의 마지막 말입니다. 기회를 한 번 더 주어도 여전히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 때 가서는 주인 어른 마음대로 하십시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주권대로 찍어버리셔도 괜찮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입니다. 기억하십시오. 회개의 기회는 항상 끝없이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 어느 때에 죽음의 그림자가 우리에게 찾아 올 줄 모릅니다. 사 55: 6 말씀처럼 하나님을 만날만한 때에 가까이 계실 그 때에 찾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 순간에 하나님께 회개하고 돌아오십시오. 그래야 살 길이 있습니다. 아멘!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