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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를 본 받아 (빌 3: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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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김흥규 목사 (내리교회)

I. 본 받는 삶의 중요성

요즈음 저는 미국의 한 기독교 신문에서 연재하고 있는 원로 목사님의 수기를 감명 깊게 읽고 있습니다. 이 분은 LA 지역에서 목회를 하셨는데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목사님이십니다. 그런데 이 분이 훌륭한 목사님이 되신 동기가 흥미로웠습니다. 방탕한 자기 아버지와 같이 인생을 살아서는 안되겠다고 노력하다보니 훌륭한 목사님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을 가만히 살펴보면 본 받을 만한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본 받아서는 안될 사람들이 훨씬 더 많은 것처럼 보일 때가 많습니다. 저도 자식들을 키우지만 나를 좀 본 받으라고 말할 자신이 없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물론 제가 제법 잘 한다고 생각하고 좀 자신이 있는 부분은 자식들이 본 받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의 약점이라고 생각되는 부분은 자식들이 본 받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마피아 두목을 아버지로 둔 딸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저의 아빠는 제가 아빠를 사랑하기는 원했지만 아빠처럼 되어서는 안 된다고 항상 가르치셨어요." 참 의미있는 고백이 아닌가 싶습니다. 가족들이 나를 사랑하기는 원하지만 나처럼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어떤 젊은이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스테인드 글래스를 만들어 내는 아주 유명한 예술가 밑에서 도제(徒弟)로 훈련을 받고 있었습니다. 제자는 선생의 솜씨를 흉내내보고 싶었지만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었습니다.

어느 날 제자는 선생이 쓰고 있는 연장을 빌려서 스테인드 글래스를 만들면 선생처럼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선생의 도구를 빌려서 열심히 예술 작품을 만들어보려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실망한 제자가 선생을 찾아가 고백했습니다. "선생님, 제가 선생님이 쓰고 계신 연장을 가지고 훌륭한 작품을 만들어 보려고 했는데 하나도 달라지는 것이 없군요." 이 때 선생이 조용히 미소를 지으며 말했습니다. "너에게 필요한 것은 선생이 쓰는 도구가 아니라 선생이 가지고 있는 예술혼이란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본 받는다면 그 분들의 정신과 삶일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은 누구에게 무엇을 배울 것인가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II. 예수 그리스도를 본 받는 삶

아마 바울 사도가 세운 교회들 가운데 빌립보 교회만큼 바울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한 교회도 없었을 것입니다. 빌 1: 8에서 바울은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빌립보 교인들을 사랑한다고 고백했습니다. 또한 2: 12과 4: 1에 보면 빌립보 교인들을 '나의 사랑하는 자들' 혹은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이라고 부르면서 아주 특별한 친밀감을 표시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빌립보 교회는 바울의 선교 초기에 물질적인 도움을 주었던 유일한 교회였습니다(빌 4: 15-16 참조). 또한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혀 있었을 때 교인 중 하나인 에바브로디도를 보내서 바울을 돌보게 했습니다(빌 2: 25-30 참조). 이와 같이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이 자기를 본받으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남다른 사이였습니다.

바울은 오늘 봉독한 본문 말씀에서 빌립보 교인들에게 자기를 본받으라고 말씀합니다. 조금 뻔뻔스럽고 교만해 보일 정도로 자기를 모범으로 삼으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바울이 왜 자기를 본 받으라고 했는지 본 받는 삶에 대하여 잠시 생각해 보겠습니다. 

⑴ 누군가 훌륭한 분이 계시면 본받으십시오.
여러분, 본문 17절 말씀을 다같이 읽어봅시다.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 받으라 또 우리로 본을 삼은 것 같이 그대로 행하는 자들을 보이라."

여기에서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이 먼저 자기를 본받아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런 다음에 바울처럼 산 사람들을 역시 본 받으라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바울처럼 산 사람들은 누구를 말합니까?

빌립보서 전체를 놓고 볼 때 바울은 두 사람을 염두에 둔 것 같습니다. 먼저 2: 19-24 말씀을 보면 디모데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디모데야 말로 바울이 가장 사랑했던 수제자 중에 한 사람으로서 바울을 가장 많이 본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가 자식이 아비에게 함과 같이 자기 일을 구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일을 구했다고 칭찬했습니다.

그 다음에 2: 25-30 말씀을 보면 에바브로디도가 바울을 본 받았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에바브로디도는 로마에서 갇힌 몸이 된 바울을 돌보기 위하여 빌립보 교회가 특별히 파송했던 사람입니다. 에바브로디도가 얼마나 극진히 바울을 섬겼던지 빌 2: 25에 보면 그가 바울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된 자로서 칭찬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2: 30 말씀에 보면 에바브로디도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아보지 않을 정도였다고 했습니다. 이와 같이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는 바울의 신앙을 본 받았던 모범적인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나 디모데나 에바브로디도가 다함께 궁극적으로 본 받아야 할 대상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여러분, 바울은 빌 2: 5-11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a Kempis, 1380-1471)는 불후의 명작 「그리스도를 본받아」(The Imitation of Christ)라는 책을 썼습니다.

여러분, 이 책의 제목이 말해주듯이 우리가 본 받아야 할 궁극적인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바울과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본 받아 산 신앙인들이었음을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예수님의 정신과 삶을 본 받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본 받아 살려고 했던 모든 분들을 본 받아야 합니다! 

⑵ 본받아서는 안될 사람은 본 받지 마십시오.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에게 자기를 본 받으라고 말한 것은 본 받아서는 안될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도대체 누구입니까?

여러분, 18-19절 말씀을 다같이 읽어봅시다.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본 받아서는 안될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한 마디로 말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바울이 이들을 언급할 때 구체적으로 누구를 지칭하는 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이들은 혹시 바울이 빌 3: 2에서 혹독하게 비판한 '개들,' '행악하는 자들,' '손 할례당'과 관련이 있는 지도 모릅니다.

중요한 것은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전혀 무관한 삶을 산다는 데 있습니다. 아니 무관한 것으로 끝나지 않고 십자가의 원수로서 산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십자가의 원수로 사는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삶을 삽니까?

우리 다같이 본문 19절 말씀을 다시 한번 읽어봅시다.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神)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십자가의 원수로 사는 사람들은 결국 멸망을 당합니다. 그것이 생명의 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들의 삶은 크게 세 가지의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로, 그들이 믿는 신, 즉 하나님은 배, 즉 먹는데 있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오직 먹고 마시는데 인생의 목적을 둔 쾌락주의자들이었습니다. 여러분, 십자가의 원수로 사는 사람들은 영혼과 상관없이 사는 사람들입니다. 오직 육체의 배 부르는 데만 관심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본 받아서는 안 됩니다!

둘째로, 십자가의 원수로 사는 사람들은 수치를 영광으로 삼는 사람들입니다. 부끄러운 일을 하면서도 거기에 영광이 있다고 믿는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본 받아서는 안됩니다!

셋째로, 십자가의 원수로 사는 사람들은 땅의 것만을 생각하며 삽니다. 사람은 하늘을 쳐다보며 살도록 지음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비록 땅에 머물러 살지만 자기를 초월하여 영원의 세계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의 원수로 사는 사람들은 하늘을 보지 못합니다. 땅이 전부인양 오로지 땅의 것에만 골몰해서 삽니다. 이런 사람들을 본 받아서는 안됩니다!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⑶ 천국 시민으로서 천국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 받으며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본문 20-21절 말씀을 다같이 읽어봅시다.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 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여러분,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십자가의 원수로 사는 사람들은 자신의 배를 하나님으로 삼습니다. 이들은 부끄러운 것을 영광으로 삼습니다. 오직 땅의 것에만 눈이 먼 채 삽니다.

이제 그리스도를 본 받아 사는 사람들은 이들과는 정반대의 삶을 살아갑니다. 이들은 비록 땅위에서 살지만 땅의 것만 바라보지 않습니다. 하늘을 바라보며 천국 시민으로서 살아갑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바울은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입니다(행 22: 28-29 참조). 오늘날 미국 시민권이 그렇듯이 그 당시 로마의 시민권은 곧 세계 시민권을 의미했습니다. 따라서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은 많은 특권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은 로마로부터 아무리 멀리 떨어져 산다고 해도 호적(Registry)을 반드시 로마에 두어야 했습니다. 거주하는 주소가 아무리 다르다고 할지라도 그들의 신분은 로마로부터 온 것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하여 어떤 지역에서 떨어져 산다고 할지라도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은 인권을 보호받을 수 있었습니다. 로마 정부와 황제가 그 배후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신분은 하늘로부터 옵니다. 우리는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인으로 계시는 천국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로마 시민권자들을 로마 제국의 황제가 보호해 주었듯이 천국 시민권을 가진 우리는 천국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켜주십니다!

십자가의 원수로 사는 사람들은 땅의 시민권자들입니다. 그래서 자기네 배를 하나님으로 삼고 수치스러운 일을 하면서도 영광으로 알며 땅 위의 보이는 것이 전부인양 살아갑니다. 결국 그들의 마침은 멸망입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다릅니다. 우리의 시민권은 천국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천국의 시민권자답게 살아가야 합니다. 천국의 모범 시민으로서 멋진 삶을 살았던 바울을 본 받으며 살아야 합니다.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를 본 받으며 살아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바울과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가 그토록 최선을 다하여 본 받으려고 노력했던 예수 그리스도를 본 받으며 살아야 합니다! 그리할 때 본문 21절의 말씀처럼 천국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께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형시켜주실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부활의 영화(榮化, GLORIFICATION)에 참여하게 된다는 말씀이지요!

III. 주 안에서 굳건히 서십시오!

여러분, 오늘 말씀의 결론은 본문 4: 1에 있습니다. 우리 다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

그렇습니다. 우리는 비록 땅에 살아도 하늘 시민권을 가진 하나님의 백성들임을 잊지 맙시다. 우리는 하늘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 받으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리할 때 주님께서 땅의 것이 변하여 하늘의 영광스러운 것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도 주 예수님을 본 받으며 주님 안에서 굳건히 서 계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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