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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기묘한 만남 (마 27:3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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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철 목사 (대구교회)

세상에는 여러 만남이 있다.
사람을 알려면 그 친구를 보라는 말이 있다.
그가 만나는 사람, 그와 교제하는 사람, 그와 한 뜻을 이루며 살아가는 사람, 바로 그들을 보면 그 사람의 생각과, 인격과 삶의 모습과 미래를 볼 수 있다고 한다.

어떤 이는 사람을 잘 못 만나서 감옥에 다녀오면서도 휴가를 다녀왔다고 생각한다.
어떤 이는 사람을 잘 못 만나서 끝내 상전을 배신해야만 하는 이도 있다.
어떤 이는 사람을 잘 못 만나서 사기 당하고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히는 경우도 있다.

사람을 잘 만나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있다.

그것을 사람 보는 안목이라 말한다.
단순히 안목이 높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거룩한 안목, 고상한 안목을 지녀야 한다.

돈에 눈 밝은 사람이 있다.
오르려는 주식을 정확히 예견하는 눈을 가진 사람이 있다.
연예인으로 대성할 것인지, 끼가 있는지 정확하게 보아서 무명의 신인을 유명하게 만드는 사람이 있다.
아무도 알아 주지 않는 운동 선수를 그의 대성할 소질을 알고 데려다가 훌륭한 선수로 키워내는 눈을 가진 사람도 있다.

갖고 있는 안목에 의해서 그 사람의 미래는 달라지는 것이다.

우리 신앙인 들에게 요청되는 안목을 이른바 영안이라 한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임재 하심을 깨닫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알아 보는 눈, 하나님의 의도와 기대에 합당한 삶을 바라 보는 눈, 이것을 이름하여 영안이 밝다라고 말한다.

이 영안이 밝은 사람은 불가능에서 가능을 꿈 꿀 수 있게 된다. - 엘리야 850:1
이 사람은 모두 안 된다고 할 때 된다라고 말한다. - 여호수아와 갈렙

이 사람은 모두 환경을 볼 때, 자기 삶의 변화를 꿈꾼다.
이 사람은 모두 조롱하고, 침 뱉으며, 받은 은혜를 망각하고 있을 때, 자기를 그의 나라에서 기억해 달라고 한다.

여러분이 잘 아는 우화가 있다.
이러한 재미있는 우화가 있다. 생쥐 한 마리가 있었다. 이 생쥐는 항상 '발발' 떨며 살았다. 왜냐면 고양이가 무서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어딜 가도 고양이가 나타나고 또 저기에 가도 고양이가 나타나는 것 같고 눈을 감아도 고양이 꿈을 꾼다.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서 발발 떨다가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더란다.
"하나님 난 고양이가 무서워 못살겠는데 어떻게 좀 나를 고양이로 만들어 주시기를 바란다."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셔서 고양이로 만들어 주었다 한다. 그러면은 기뻐하고 당당해야 되겠는데 또 발발 떤다. 무서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너는 또 왜 이렇게 두려워하느냐?" 했더니 개가 무서워서 못 살겠다.
"어딜 가나 개가 '멍멍'거리고 따라다니는데 못살겠다"고...
"그래 그러면 내가 개로 만들어 주마."
개가 된 이 생쥐는 또 무서워서 벌벌 떨고 도대체가 구멍에서 나오지를 못한다.
"너 또 이렇게 개가 됐는데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했더니,
"호랑이가 무서워서 못살겠다"고... 그래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얘야, 내가 아무리 애써도 네 마음이 생쥐라면 아무 소용도 없겠구나. 뭐 벌벌 떨바에야, 다시 생쥐로 돌아가라” 그래 다시 생쥐가 되었더라 한다.

여러분, 마음의 변화가 없으면 외적 조건이 아무리 달라진다고 해도 사실은 달라진 것이 아니다.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사람들은 언제나 모든 책임을 환경에 돌리려고 한다.
"환경이 이렇기 때문에 내가 이렇다. 저가 이렇기 때문에 내가 이렇다."
"당신 때문에 내가 이렇게 되었다"

어떤 변화가 있기를 바란다면, 환경과 나 어느 쪽이 먼저인가?
내가 환경을 바꾸는 것인가? 환경이 나를 이렇게 만드는 것인가?
때로는 우리가 욕망에 대해서도 이 끝없는 욕망, 욕망이 채워지면 될 것이라고 전제한다.

그래서 집 없는 사람은 집이 있으면, 병든 사람은 건강만 있으면, 또 직업이 없는 사람은 직업만 있으면, 아무 소원도 없을 거라고 말은 하지만 그저 뭐 그것 주어 줘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욕심은 점점 더 커진다. 그 채울 수 없는 끝없는 욕망에 사로 잡혀서 헤어나지 못한다. 근본적으로 이 욕망의 문제를 완전히 제어하고 자기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의 경우에는 물질로도 출세로도, 명예로도, 그는 절대로 평안할 수 없다.
자, 이제 우리는 생각해야 한다. 그래서 이 밖에서 오는 변화 이건 내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이런 것을 우리는 기적이라고 말한다. 밖에서 내 의지와 상관없이 이루어지는 이런 큰 역사, 이 속에서 특별한 기적이 나타나기를 바란다.

바로 영안이 열려 있는 사람과 닫혀 있는 사람의 차이인 것이다.

오늘 본문에 보면 이런 사람들이 나온다.

마 27:42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저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

이것이 무슨 뜻인가? 십자가 밑에서 소리 지르는 것이다. 예수님을 십자가에다 못박아 놓고 자기들이 말이요, 자기들이 못박아 놓고는 하는 말이 "뛰어내리라. 거기에서 덜렁 뛰어내려 그러면 믿겠노라."
그런가? 정말 믿을까?

뛰어내려! 뛰어내리면 믿겠노라"

무엇을 믿겠다는 것인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겠노라. 당신이 하나님이기를 믿겠노라."

이런 얘기다. 그러나 이것은 허구이다. 예수님께서 이미 많은 이적을 행하셨다. 병자를 고쳤다. 장님의 눈을 뜨게 했다. 그리고 죽은 자를 살렸다. 5천명을 먹였다. 예수님의 생애는 온통 이적과 기사로 충분하지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끈질기게 따라다니면서 예수님을 괴롭힌 것이 무엇인가?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보여라. 표적을 보여라. 또 다른 표적, 지금 보인 것말고, 또 다른 뭐 좀 화끈한 뭔가 좀 천지 개벽 같은 좀 기가 찬 기적을 보이라고 추구한다. 재촉한다. 예수님 바로 이 문제에 대해서는 지친 것 같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마 12:3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요나가 큰 물고기 뱃속에 사흘 동안 있었지요. 바로 그것을 말한다. 내가 죽고 사흘만에 부활할 것이다. 이 부활 사건 외에는 아무 표적도 더 보일 것이 없다. 그 완악한 무리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오늘 본문에 보는 대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는다. 그리고 그 앞에서 소리를 지른다. 뛰어내리라고 못 박아 놓고 무슨 짓인가?

계속 이같이 모욕을 한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놓은 것은 육체적 고통이다 모욕과, 희롱과, 욕과, 조롱, 이 조롱은 정신적 고통이에요. 십자가에 못 박고 죽이면서 그를 계속 짖밟는 것이다. 존재차원에서 그를 짖밟는다.
"네가 하나 님의 아들이냐? 하나님의 아들이면 뛰어내리라!"
또 그의 능력을 희롱한다. 남을 구원하고 많은 이적을 행하고 뭐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어디 한 번 더 이적 을 해봐라. 뛰어내려!"
그건 능력을 비방하는 것이다. 그 다음에는 관계를 또 비방한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며 어디 하나님이 구원하시나 보자. 하나님이 네 편이냐? 아니면 하나님이 너를 버렸느냐?"
이러고 또 비난을 한다. 이 많은 저주와 이 모욕 그리고 조롱이 계속 넘친다.


그렇게 모든 이들이 저주하고 조롱하고 모욕할 때 유일하게 한 사람이 예수님의 삶을 받아 들인다.
소위 영안이 열려 있던 한 강도는 예수님을 구세주로 바라보게 된다.

그리하여 그 사람은 주님을 향하여 이렇게 말한다.

눅 23:40~42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가로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41)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42)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

다른 사람들과 달리 이 사람은 예수님의 삶을 이해하고 받아들인다.
언제부터 예수님을 믿었는지는 알 수 없다.
어차피 죽은 것이니 밑져 봐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믿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동일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그 분, 자기와 마찬가지로 그 인생이 실패로 끝나 보이는 그 사람, 예수님을 향하여 그는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눅 23:42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

영안이 닫혀 있는 사람은 바로 자기 옆에 자기를 구원해 줄 사람이 있음에도 바라 보지 못하고 그를 조롱하며, 죽어 가는 마당에서조차, 자신의 구세주를 핍박한다.
그러나 영안이 열려 있는 사람은 비록 죄 가운데서 십자가 형을 받지만, 그는 예수님을, 그래도 자신을 구원할 자, 자신의 구세주로 영접하는 것이다.

오늘 이 땅에 수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연호하며, 그 분을 통해 얻었던 기적과, 은혜를 찬양한다.
그러다가, 일 순간, 더 이상 얻을 은혜가 없는 듯 하자, 자신의 욕망대로 움직여 주지 않은 주님을 향하여 비난하고, 조롱하며, 그를 가차없이 배반한다. 수 많은 군중들이 그를 욕할 때, 누구 하나 나서서 감히 주님을 변호하지 않는다.

더 이상 그에게 기대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결국 예수님을 환호하던 그 시절의 그들의 눈은 구세주 예수님을 바라 본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득을 채워 줄 물주로 주님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오늘 나의 모습은 아니었는가?
주님께서 주실 복을 손가락 꼽아 계산하며 이해득실을 따져, 내게 더 이득이 되려 할 때 주님을 환호한다.
그러면서도 주님을 위하여, 나의 시간을 드리지 못한다.
그러면서도 주님을 위하여, 나의 주머니를 털어 내지 못한다.
주님이 좋다고 말하면서도, 주님을 위한 희생 앞에 그를 비난한다.
주님께서는 자신의 몸을 주셨는데, 주님께서는 하나밖에 없는 자신의 생명을 내게 고이 주셨는데도 말이다.

영안이 열려 있던 한 강도는 모든 이들이 주님을 비난하며 핍박할 때 그들을 책망한다.
그리고 그 분께 자신의 삶을 맡긴다.
주님은 그에게 이렇게 선언하신다.

눅 23: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기억하라
영안이 열려 있는 그대를 향하여 주시는 말씀이다.

따라서 해 보자
오늘 김철이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종려 주일에 우리에게 오신 주님, 그리고 골고다 십자가 언덕에 높이 매달린 주님을 더 이상 비방하지 말고, 여러분의 모든 삶을 바쳐서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시어, 주님과 함께 낙원에 자리하는 여러분이 되시길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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