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성전을 헐라 (왕하 25:8~12, 롬 9:27~32, 마 7:24~27)

  • 잡초 잡초
  • 279
  • 0

첨부 1


- 설교 : 박종화 목사 (경동교회)

구약의 말씀: 열왕기하서 25: 8 ~ 12
  바빌로니아의 느부갓네살 왕 제 십구년 다섯째 달 칠일에, 바빌로니아 왕의 부하인 느부사라단 근위대장이 예루살렘으로 왔다. 그는 주의 성전과 왕궁과 예루살렘의 모든 건물, 곧 큰 건물은 모두 불태워 버렸다. 근위대장이 지휘하는 바빌로니아의 모든 군대가 예루살렘의 사면 성벽을 헐어 버렸다. 느부사라단 근위대장은 도성 안에 남아 있는 나머지 사람들과 바빌로니아 왕에게 투항한 사람들과 나머지 수많은 백성을, 모두 포로로 잡아갔다. 그러나 근위대장은, 그 땅에서 가장 가난한 백성 가운데 일부를 남겨 두어서, 포도원을 가꾸고 농사를 짓게 하였다.

서신서의 말씀: 로마서 9:27 ~ 32
  그리고 또 이사야는 이스라엘을 두고 이렇게 외쳤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수가 바다의 모래와 같이 많을지라도, 남은 사람만이 구원을 얻을 것이다. 주께서는 그 말씀하신 것을 온전히, 그리고 조속히 온 땅에서 이루실 것이다." 그것은 또한, 이사야가 미리 말한 바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주지 않으셨더라면, 우리는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이 되었을 것이다" 한 것과 같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무엇이라고 말해야 하겠습니까? 의를 추구하지 않은 이방 사람들이 의를 얻었습니다. 그것은 믿음에서 난 의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의의 율법을 추구하였지만, 그 율법에 이르지 못하였습니다. 어찌하여 그렇게 되었습니까? 그들은, 믿음으로가 아니라, 행위로 의에 이르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걸림돌에 걸려 넘어진 것입니다.

복음서의 말씀: 마태복음서 7:24 ~ 27
  예수께서 예루살렘 가까이에 오셔서, 그 도시를 보시고, 눈물을 흘리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오늘 네가 평화의 길을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겠느냐! 그러나 지금 너는 그 길을 보지 못하는구나. 그 날들이 너에게 닥칠 것이니, 너의 원수들이 흙언덕을 쌓고, 너를 에워싸고, 사면으로부터 너를 공격하여서, 너와 네 안에 있는 네 자녀들을 짓밟고, 네 안에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얹혀 있지 못하게 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너를 구원하러 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셔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쫓으시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될 것이다' 하였다. 그런데 너희는 그 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예수께서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고 계셨다.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과 백성의 우두머리들이 예수를 없애 버리려고 꾀하고 있었으나, 어찌해야 할지를 알지 못하였다. 백성이 모두 그의 말씀을 열심히 듣고 있었기 때문이다.

--------------------------------------------------------------------------------




구약성서를 보면 예언자들의 이름이 많이 나옵니다. 성서학자들은 예언자들을 몇 가지 기준에 따라, 작은 예언자와 큰 예언자로 나눕니다. 그런데 성서에 있는 작은 예언자들의 책, 그러니까 ‘소예언서’는 공통적으로 부피가 작습니다. 호세아, 아모스, 오바댜, 나훔, 하박국, 말라기 등은 작은 예언자들이고, 오늘 봉독할 때 들으신 예레미야 같은 예언자는 굉장히 큰 예언자입니다.

큰 예언자 가운데에는 예레미야, 에스겔, 이사야 이 세 사람이 대표적인 예언자인데, 이 세 사람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민족적으로나 국가적으로 굉장히 어려웠을 때, 민족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을 때, 이 세 예언자들이 나와서, 각기 활동한 시기는 다르지만, 눈물로 자기 민족에게 호소한 것입니다.

예레미야서를 읽어보면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더러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서 ‘너희는 망한다’고 선포하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눈앞에 있다고 알려주라고 합니다. 그리고 회개하고 돌아서면 새 날이 예비되어 있다고 일러주라고 합니다. 국운이 막바지에 달했을 때, 그때 출현한 민족의 지도자는 아니 사회적 또는 종교적 지도자는, 그가 참 지도자라면 당연히 눈물로 외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예레미야를 눈물의 예언자라고 합니다. 그리고 예레미야서를 눈물로 쓴 예언서라고 합니다. 여러분이 실존적으로나 가정적으로, 또는 사회적으로 극심한 곤궁에 처해 있다면, 여러분의 말과 글에는 눈물이 배어 있지 않겠습니까? 곤궁 가운데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편지 한 장 남긴다면, 그 편지는 단순히 글로만 쓰는 것이 아니라, 눈물로 쓰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분단된 가운데 북쪽 이스라엘은 이미 바빌론의 침략으로 망해버렸고, 남쪽 유다는 아직은 버티고 있지만, 북쪽의 바빌론과 남쪽의 이집트 사이에 끼어서 멸망 직전에 있습니다. 그야말로 풍전등화와 같은 상황입니다. 이때 예레미야가 등장합니다.

예레미야가 하나님께 드린 말씀은 이것입니다. “저는 말도 못합니다. 무엇이라고 해야 합니까? 제 나이도 어립니다. 인생의 경험이 짧은데 어떻게 이 무거운 예언의 말씀을 전합니까?”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때가 급하다. 네 입을 빌리겠지만, 말은 내가 하겠다. 내 말을 네 입에 담겠다.”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기에 전하는 자의 성장, 성숙과는 상관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제 예레미야는 임박한 유다의 멸망을 눈물로 전합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주권을 빼앗기고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가 되기 전, 소위 조선시대의 말기와 같은 상황입니다. 당시에 유다 조정에서는 두 파로 갈린 논쟁이 있었습니다. 한쪽에서는 유다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북쪽에 있는 바빌론과 동맹을 맺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소위 친바빌론파입니다. 다른 한쪽에서는 오히려 남쪽에 있는 이집트를 끌어들여서 나라의 안보를 보장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친이집트파입니다. 조정은 두 파로 쫙 갈라져서 싸우고 있었습니다.

그 상황에서 예레미야는 이렇게 외칩니다. “예루살렘은 망한다. 유다는 망한다. 망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없기 때문이다. 이집트로도 안 되고 바빌론으로도 안 된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바빌론이 유다를 점령하고 이집트는 패배했습니다. 예레미야는 친이집트파에게 납치되어 이집트로 끌려갔고, 거기서 객사했다고 합니다. 눈물로 예언을 한 사람, 눈물로 회개를 호소한 사람, 그 사람의 운명은 유다의 운명과 똑같았습니다.

오늘 본문의 마지막인 10절에 이런 말을 합니다. 야웨께서 예레미야의 입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나는 이스라엘 민족을 뽑아내고 허물고 멸망시키겠다. 완전히 파괴시켜 버리겠다.” 왜 그래야 합니까? 이스라엘은 세워둘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내가 다시 심고 세우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에는 동사가 여섯 개입니다. 뽑고, 허물고, 멸망시키고, 파괴시킨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개혁입니다. “파괴시키고 다 부수어버리면 어떻게 합니까?”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 개혁의 첫째 조건입니다. 생존의 첫째 조건입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 말을 눈물 없이 어떻게 전하겠습니까? 하나님, 이런 고통스런 방식밖에 없습니까? 이스라엘의 새로운 삶을 위해서는 이 방법밖에 없습니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 다음 단계가 있다. 어리석은 걸 다 뽑고 허물고 멸망시키고 파괴한 다음에 내가 새것을 심고 새 것을 세우겠다.” 이 두 번째 개혁을 희망으로 전하라고 하십니다. 눈물과 웃음, 배고픔과 풍요함, 절망과 희망, 이 두 가지가 다 예언자의 입에 담깁니다. 결과적으로 예레미야라는 예언자는 부정적인 개혁을 하고 자기 운명도 이집트에 가서 객사하는 걸로 마무리합니다. 그리고 새로 심고 새로 세우겠다는 하나님의 긍정적인 개혁의 약속은 예레미야 손을 거치지 않고 다음 시대로 넘어갑니다.

예레미야가 하나님에게 묻습니다. “어떻게 해야 우리가 다시 설 수 있습니까? 아니 왜 허물어야 합니까?” 하나님께서는 “바탕이 없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그들의 얼 가운데에, 그 사람들의 중심에 하나님이 계실 자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바탕이 없다는 것입니다. 야웨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주인이시라고 고백했지만, 그 하나님이 앉고 설 자리가 이스라엘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성서 연구에 여러 가지 방법과 학설이 있습니다만, ‘자리’에 관한 논의가 있습니다. 모든 이야기는 그 이야기가 생겨난 사회역사적 자리가 있습니다. 그 자리를 도외시하고 성경말씀을 읽으면 원래의 뜻을 읽을 수 없게 됩니다. 이것을 학자들은 ‘삶의 자리’, 독일어로 Sitz im Leben 이라고 합니다. 말씀, 혹은 말씀의 형식이 생겨난 배경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예레미야의 예언을 읽으면서 그가 예언했던 자리, 유다의 멸망을 앞둔 역사적 자리, 이스라엘 민족의 양심과 신앙의 자리를 헤아려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성서를 읽으실 때는 그 말씀이 선포되었던 사회역사적 자리가 어떤 것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동시에 우리 마음의 자리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 마음속에 이 말씀이 들어와서 자라날 수 있는 자리가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아무리 좋은 말씀을 읽어본들, 제 가슴에 뿌리박고 자랄 자리가 없으면 허사입니다. 자리를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말씀은 선포되지만 그 말씀이 서야 할 자리를 우리한테서 찾고 있습니다. 그 자리를 마련하는 것은 우리에게서 뽑을 것은 뽑고 버릴 것은 버리고 깰 것은 깨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마련된 자리에는 항상 새로운 것이 세워져야 합니다. 오늘의 세계는 개혁을 향해 가는 것입니까? 그 개혁은 부수는 개혁입니까, 세우는 개혁입니까? 구원이 뭡니까? 깨고 부수고 하는 걸로 구원이 이루어지지는 않습니다. 세우는 것이 목적입니다. 세우기 위해서 부수는 것입니다. 만일 세우는 것 없이 부수기만 한다면, 어디에다 하나님 나라를 세울 것입니까? 어디에다 나를 세워야 합니까? 개혁, 좋습니다. 구원도 좋습니다. 부수는 것도 좋습니다. 회개도 좋습니다. 뭘 어떻게 어디에 세울 건지 설 자리를 마련하십시오.

오늘의 복음서 본문에서 예수께서는 산에 올라가서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5장에서 7장까지는 예수께서 산에 올라가서 가르치신 말씀을 기록한 것입니다. 그래서 5장에서 7장까지를 산상수훈이라고 합니다. 산 위의 설교라는 뜻입니다.

설교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배고픈 사람 있습니까? 자리를 마련하십시오. 그러면 거기에다 하나님 나라를 주겠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있습니까? 자리를 만들면 거기에다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나라를 세우겠습니다. 여러분의 불의는 부셔져도 하나님의 의는 다시 서야 합니다. 여러분은 세상의 소금 아닙니까? 소금으로서 자기의 자리를 마련하면, 내가 그 자리에다가 빛을 세우겠습니다. 소금으로 썩은 걸 몰아내고 빛을 세우겠습니다.” 이렇게 산상수훈이 시작됩니다.

오늘 읽어드린 말씀의 마지막 절, 7절에서는 반석 위에 집을 세우라고 합니다. 우리는 즐겨 찬송을 부릅니다. 그런데 찬송은 1절, 2절, 3절 등 여러 절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 절들의 끝에는 후렴이 있습니다. 그런데 후렴은 그 찬송의 핵심입니다. 후렴을 먼저 정한 뒤에 1절, 2절, 3절의 노랫말을 만듭니다. 그러므로 후렴은 근본입니다. 후렴은 반석입니다. 마태복음 5장에서 7장까지에도 후렴이 있습니다. 거기에 있는 예수님의 말씀의 후렴은 무엇입니까? “내 말을 듣고 그대로 행하면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사람과 같다. 그러나 내 말을 듣고도 그대로 행하지 않으면 모래 위에 집을 지은 바보와 같다.” 이게 후렴입니다.

다시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가난한 자는 복이 있습니다. 하나님나라를 드리겠습니다. 터만 내놓으십시오. 이 말을 듣고 자리를 마련하지 않는 사람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사람과 같고, 이 말을 듣고 자리를 마련하는 사람은 반석 위에 세우는 사람과 같습니다.” 앞으로 5장에서 7장을 읽으실 때 오늘 읽어드린 후렴을 넣어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반석 위에 세워지지 않으면 어려움이 올 때 무너지고 맙니다.

한 나라가 위기에 처하는 것은 이런 저런 정책이 잘못되어서가 아닙니다. 그 민족의 얼이, 바탕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가정이 망하는 것도 얼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망한 것은 이런 저런 일을 잘못 처리해서가 아니라, 기본적으로 하나님이 계실 자리를 없앴기 때문입니다. 그 자리만 마련해주십시오. 반석! 그 반석을 예수께서는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서신서 본문인 베드로전서에도, 하나님은 시련을 주시되 영원한 구원을 위해서 시련을 주신다고 합니다. 그리고 든든한 반석 위에 서있는 사람은 불같은 시련을 받으나 다시 일어선다고 합니다.

오늘 우리는 ‘위기’라고들 합니다. 무엇 때문에 위기입니까? 다시 한번 가슴을 여미고 생각해보십시다. 기술이 발전하면 위기가 아니고, 그렇지 않으면 위기입니까? 아닙니다. 위기란 말은 역사의 얼이 우리한테서 사라졌다는 뜻입니다. 실존적인 위기는 뭡니까? 내 인간의 삶의 바탕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까?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고 어떤 구조에서 어떤 근거를 갖고 살아야 하는지를 모르게 되었다는 뜻이 아닙니까?

바탕이 없는 인생은 아무리 돈이 많은들, 권력이 많은들 끝내 무너지고 맙니다. 반석 위에 놓여 있지 않으면 무너집니다. 반석을 찾으십시오. 하나님의 나라는 반드시 우리 역사 속에, 우리 인간들 속에, 저 개인의 실존 속에 자리를 요구합니다. 자리를 만들고서 하나님과 함께 사십시다. 그 자리는 큰 자리여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세워질 자리면 충분합니다. 그 자리에서 부활의 생명이 피어날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이, 여러분의 가정이, 우리 교회가 반석 위에 놓여져 있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