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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낮을 사는 사람들 (사 2:1~5, 롬 6:20~23, 요 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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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종화 목사 (경동교회)

구약의 말씀: 이사야서 2:1 ~ 5
  이것은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을 두고, 계시로 받은 말씀이다. 마지막 때에, 주의 성전이 서 있는 산이 모든 산 가운데서 으뜸가는 산이 될 것이며, 모든 언덕보다 높이 솟을 것이니, 모든 민족이 물밀듯 그리로 모여들 것이다. 백성들이 오면서 이르기를 "자, 가자. 우리 모두 주의 산으로 올라가자. 야곱의 하나님이 계신 성전으로 어서 올라가자. 주께서 우리에게 주의 길을 가르치실 것이니, 주께서 가르치시는 길을 따르자"할 것이다. 율법이 시온에서 나오며, 주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 나온다. 주께서 민족들 사이의 분쟁을 판결하시고, 뭇 백성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실 것이니, 그들이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나라와 나라가 칼을 들고 서로를 치지 않을 것이며, 다시는 군사훈련도 하지 않을 것이다. 오너라, 야곱 족속아! 주의 빛 가운데서 걸어가자!

서신서의 말씀: 로마서 6:20 ~ 23
  여러분이 죄의 종일 때에는, 의로움에 얽매이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거두었습니까? 이제 와서 여러분이 그러한 생활을 부끄러워하지마는, 그러한 생활의 마지막은 죽음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죄에서 해방을 받고, 하나님의 종이 되어서, 거룩함에 이르는 삶의 열매를 맺고 있습니다. 그 마지막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죄의 삯은 죽음이요, 하나님의 선물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복음서의 말씀: 요한 복음서 9:1 ~ 7
  예수께서 가시다가, 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을 보셨다. 제자들이 예수께 "선생님, 이 사람이 눈먼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이 사람의 죄입니까? 부모의 죄입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이 사람이나 그의 부모가 죄를 지은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그에게서 드러나게 하시려는 것이다. 우리는 나를 보내신 분의 일을 낮 동안에 해야 한다. 아무도 일할 수 없는 밤이 곧 온다.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 나는 세상의 빛이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신 다음에, 땅에 침을 뱉어서, 그것으로 진흙을 개어 그의 눈에 바르시고, 그에게 실로암 못으로 가서 씻으라고 말씀하셨다. (실로암을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다.) 눈먼 사람이 가서 씻고, 눈이 밝아져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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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읽은 복음서 말씀에 보면, 예수께서 안식일에 하나님의 능력에 관해 말씀하십니다. 다른 복음서에도 있는 이야기입니다만, 오늘 읽은 요한복음서에 있는 이야기는 조금 특이합니다.

안식일에 사람들이 예수 앞에 병자 하나를 데리고 왔습니다. 소경인데,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흙에 침을 뱉어서 이겨가지고 이 사람의 눈에 바르고서는 실로암 연못에 가서 눈을 씻으라고 하셨습니다. 이 사람이 씻었더니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다른 복음서에도 나면서부터 소경인 이 사람의 이야기가 있지만, 흙을 발라서 눈을 뜨게 했다는 이야기는 이 요한복음서밖에 없습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서 요한복음서 기자가 말하려고 것이 있습니다. 처음 인간이 만들어질 때, 하나님께서는 흙을 가지고 인간을 만드시고 그 흙 속에 하나님의 생명의 호흡을 불어넣으셨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창세기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나면서부터 소경인 사람, 이 사람을 예수님은 새로운 인간으로 만들고 싶으셨습니다. 볼 수 있는 인간으로! 그것은 다른 말로 말하면 재창조입니다. 새로운 창조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창세기에서와 비슷한 행위를 하십니다. 침을 뱉어서 흙을 이긴 다음 흙을 눈에 바릅니다. 창세기 이야기와 비슷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여기에 하나를 더하십니다. 실로암 못에 가서 본인이 직접 씻어라. 아마도 재창조에는 한 가지가 더 필요한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질병에서 또는 잘못한 데서 아니면 죄를 지은 데서 돌이켜 새로 거듭나기를 원한다면, 예수께서는 오늘 성서 말씀에서처럼 침을 흙에 발라서 이긴 다음 우리에게 발라주실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제 새로운 인간으로 구원받을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우리가 실로암 못에 가서 직접 씻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씻는 것까지 해주시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순종하는 믿음, 이 두 가지가 합해져야 구원이 생깁니다.

유대 사람들은 빵을 만들기 위해서는 밀가루를 반죽해야 하는데, 안식일에는 반죽은 금지된 행위였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밀가루는 반죽하지 않으셨지만, 흙을 반죽하셨습니다. 침을 발라서. 그것 역시 유대교 율법을 엄격하게 해석하면 금지명령을 어긴 일에 속합니다. 침 뱉은 것도 반죽하기 위해서 한 것이라면 안식일 위반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새로운 창조를 위하여 침을 뱉고 흙을 반죽하여 소경에게 발랐습니다. 그러고서는 소경에게 가서 씻으라고 하십니다. 일하라는 뜻입니다. 예수께서는 자신만 안식일을 위반한 것이 아니라 소경도 위반하게 했습니다. 위반의 이유는 생명을 구하기 위함입니다. 율법주의가 횡행하던 시절, 예수께서는 상징적인 행위로 율법을 폐기하셨습니다. 율법은 생명을 위해 있음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바리새파 사람들이 소경을 두고 묻습니다. 이 사람이 나면서부터 소경된 것은 조상의 탓입니까? 이 사람의 탓입니까? 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은 분명히 눈먼 것이 자신의 운명이라고 믿었을 것입니다. 십계명에 보면, 죄를 지으면 삼사 대까지 벌을 줄 것이고 계명을 지키면 수천 대에 이를 때까지 복을 베푸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눈먼 것은 조상 탓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당시에 만연했던 생각입니다. 이와 반대되는 생각도 있었습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죄 가운데서 태어났기 때문에 소경이 된 것은 자기 죄의 결과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둘 중에 어느 것이냐고 예수께 묻습니다. 그들의 질문 속에는 안식일에는 병자를 고치면 안 된다는 비난도 들어있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 사람이 눈 먼 것이 조상 탓이든 이사람 탓이든 그걸 따지는 데에는 나는 관심이 없다. 안식일에 병을 고쳐야 하는지 아닌지는 관심사가 아니다. 내 관심은 지금 이 사람을 고치는 것이다.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묻지 말고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눈여겨보아라.” 그래서 침으로 흙을 이겨 붙입니다. 그러시고 나서는 직접 가서 실로암 못물에 씻게 하십니다.

예루살렘에는 연못이 두 개 있었다고 합니다. 베데스다 연못하고 실로암 연못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이 실로암 연못은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상징적인 연못입니다. 실로암이란 말의 뜻은 보냄 받은 자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보냄을 받은 구원의 주, 메시아입니다. 메시아는 이스라엘의 희망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희망을 담고 있는 연못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실로암에 가서 씻으면 병이 낫는다는 미신 비슷한 믿음도 있었습니다. 소경은 거기에 가서 씻고서 눈이 나았습니다.

예수님의 생각은 분명합니다. 날 때부터 이유도 알지 못한 채 어둠 속에서 살아야 했던 사람, 이 사람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왜 어둠 속에 살게 되었느냐 하는 분석이 아니라, 당장 눈을 뜨고 볼 수 있는 사람으로, 빛 가운데 사는 사람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오신 목적은 밤에 있는 사람을 낮의 사람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어둠의 과거를 끊고, 지금 과거의 연속이 아니라 미래의 시작인 지금 가운데서 미래를 열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가 메시아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예수께서 우리에게 어떻게 하실 것 같습니까? 우리가 살아온 지난날을 하루 하루 다 분석해가지고 이것 잘못했고 저것 잘못했고 그렇게 하러 오실 것 같습니까? 잘했어도 잘못했어도 어차피 죄와 어둠 속에 살아야 할 우리 아닙니까? 그분께서는 미래를 열려고 하십니다. 우리더러 미래를 바라보라고 하십니다. 질병에 걸려 고생하시는 여러분, 치유라는 내일이 있지 않습니까? 예수께서 오시는 것은 미래를 열기 위함입니다. 내일을 열려고 오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말을 빌리면 이렇습니다. 죄 때문에 어둠에 사는 사람, 눈이 먼 사람은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습니다. 죽음은 운명입니다. 하지만 죄에서 해방을 받으면 또 다른 생명, 새로운 생명이 주어집니다. 사도 바울 설명은 이렇습니다. 죄가 무엇입니까? 죄는 죽음으로 끝날 수밖에 없는 운명으로 이끄는 것입니다. 죄에서 용서받는 건 무엇입니까? 죽음의 사슬에서 벗어나 영원으로 이어지는 새로운 생명을 여는 문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죄의 역사입니다. 구원은 그것을 깨뜨리고 영원한 생명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사람은 언젠가는 죽습니다. 저도 죽음이 두렵습니다. 장례식도 많이 치르게 됩니다만, 만일 내가 위로해 주는 사람이 아니고 저 관 속에 누워있는 사람이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가끔 하게 됩니다. 사람은 뱀이나 맹수에 물려서 죽기도 합니다. 교통사고로 죽기도 합니다. 다른 사고를 당해서 죽기도 합니다. 질병에 걸려서 죽기도 합니다. 이 죽음에 대해서 누구도 법원에 고소하지 않습니다.

또 다른 죽음이 있습니다. 살인, 살해라고 부르는 죽음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죽이면 그건 안 됩니다. 요즘도 스물 몇 명을 죽인 사람이 떳떳하게 카메라 앞에 서는 장면을 우리는 보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전쟁터에서 총에 맞아서, 폭탄에 맞아서 한 명, 두 명이 아니고 수십 명, 수백 명이 한순간에 죽습니다. 또는 포로수용소의 가스실에서 수백만 명이 죽기도 했습니다. 죽은 자의 죄 때문입니까? 죽이는 자의 죄 때문입니까?

그러나 예수의 관심은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이런 죄악이 아니라, 그 죄악의 마지막인 죽음, 여기서 어떻게 인간을 해방시킬 수 있느냐 하는 데 있습니다. 어떻게 죽음의 질곡에서 벗어나 생명의 날을 누리게 해줄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게 예수님이 오신 목적입니다.

비록 죽음이 두렵지만 우리는 죽음 이후에도 살아갑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여러분, 인간의 목숨이 다 끝나는 죽음 그 이후에 여러분은 무엇으로 기억되고 싶습니까? 미술 작품을 남긴 사람들은 비록 몸은 갔으나 그의 작품은 지금도 계속 살아 있습니다. 선한 일을 한 사람들은 육체는 갔지만, 그의 선한 행실은 지금도 우리 가운데 살아 있습니다. 내 인생이 끝났다고 해서 내가 만들고 생각하고 기도하고 행한 것들도 함께 끝내겠다고, 무덤에 가지고 가겠다고 할 권리도 없고 그럴 힘도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구약 본문에서 예언자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바벨론의 포로 가운데 있는 이스라엘을 살려주기로 하셨으니, 이스라엘은 시온 산으로, 예루살렘에 올라가라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 이스라엘을 살려주시는 하나님은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야곱이 죽은 지 수천 년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지금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살아 있습니다. 야곱은 죽어서도 그 삶이 끝나지 않습니다.

악한 자도 선한 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다 자기가 죽은 이후에도 자신의 작품으로, 인간 됨됨이로, 업적으로, 때로는 기념물과 기념관과 책으로 역사에 살아남게 됩니다. 지금 우리도 사실은 죽음으로 끝나는 역사를 사는 게 아니라 죽음 이후의 역사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역사는 우리 인간들이 만드는 역사가 아닙니다. 예수님과 함께 만드는 역사입니다. 이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며칠 전에 아주 우스운 이야기를 하나 들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요즘 불가마가 있는 찜질방이 아주 유행이라는데, 찜질방 출신들이 지옥문에 아주 많이 왔더랍니다. 지옥문 앞에 글씨가 붙어 있었습니다. “수리중!” 왜 수리하느냐고 물었더니, 한국에서 온 찜질방 출신들은 그렇게 뜨거운 지옥 불가마 속에서도 고통스러워하기는커녕 “시원하다~.”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옥불의 온도를 높이려고 대규모로 수리하는 중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천국에는 사람들이 얼마나 길게 줄을 서있는지 끝이 없어보였습니다. 늦게 도착한 사람이 줄이 이렇게 긴 이유가 뭐냐고 물어보니까 하는 말이, 한국에서 온 사람들이 성형수술로 하도 얼굴을 많이 바꿔놓아서 지금 진짠지 가짜진 대조하느라고 그렇게 시간이 많이 걸린다고 하더랍니다.

정말이지 인간은 뭔가를 더 낫게 고치고 꾸미고 살고 싶은 모양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운명까지도 가능하면 새롭게 바꿔보고 싶어 합니다. 그렇게 해서 지금만 아니라, 오고 오는 세대에도 좋은 기억으로 남게 되기를 바라기도 합니다. 지금 우리가 살면서 왜 먹고 싶은 것 맘대로 안 먹고, 실컷 쾌락을 즐기고 싶은데도 자제하고, 남이 안 볼 때 나쁜 짓도 많이 하고 싶은데 그걸 삼가면서,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반듯하게 살려고 애씁니다. 그 이유가 뭔지 물을 필요가 없습니다. 내 인생은 내가 죽고 무덤에 묻히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내일에도 모레에도 백일하에 다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인생을 죽음으로 끝내고 싶어도 결코 그렇게 끝나지 않습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형상이 우리 가운데 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내가 죽는다고 하나님의 형상이 없어질 리가 없지 않습니까? 인간인 우리도 자존심이 있어서 자신의 이름값을 생각하는데, 하나님이야 더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결코 우리의 죽음과 하나님의 형상의 죽음을 동일시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전혀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미래를 열어 주십니다. 지금은 무슨 시간입니까? 지금은 괴로움이 있어도 슬픔이 있어도 그래도 내일을 여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지금이 중요한 것 아닙니까? 왜 지금을 의미 있게 살아야 합니까? 내일을 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도 고통 속으로 어둠 속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고 무덤 속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삶은 어둠으로, 죽음으로 종결된 것이 아닙니다. 부활의 아침이 그 어둠을 내쫓습니다. 사실 십자가는 우리 신앙의 상징입니다. 십자가가 뭐하는 것입니까? 십자가 앞에서 우리의 과거 행실 때문에 회개하고 펑펑 울며 눈물을 쏟을 수 있습니다. 그걸로 우리는 만족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십자가에서는 과거가 유죄인가 무죄인가, 자기 탓인가 조상 탓인가를 따질 필요 없이 부활의 생명이 시작됩니다. 십자가, 그 죽음의 그늘에 가면 부활의 새 아침을 맞게 됩니다. 십자가는 마지막이 아니고 영원한 생명의 시작입니다.

우리는 오늘 이 땅에서 미래를 살아갑니다. 미래를 이미 수놓고 살아갑니다. 오늘은 무슨 시간입니까? 바로 미래가 태동하는 시간입니다. 이 깨달음, 미래가 태동하는 현재를 살고 있다는 이 믿음이 없기 때문에 사람을 스무 명씩 살해할 수 있고, 가스실에서 수백만 명을 죽일 수가 있습니다. 곡할 일도, 폭력도, 죄 지을 일도 없는 미래가 지금 여기에서부터 조금씩 움터 나온다는, 미래에 대한 확신이 있다면, 오늘 생활은 즐거울 수 있을 것입니다.

미래가 보장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오늘 속에 미래가 움트고 있다는 기쁨도 우리한테 중요합니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이 한 가지 사실을 알려주십니다. 부활의 생명은 이미 십자가에서 태동하였다는 것을! 이 사실을 여러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지금은 영원한 생명이 출발하는 시점입니다.

사도바울이 말합니다. “과거 지향적으로 죄에 매여 사는 사람은 죽음으로 끝납니다. 그러나 죄에서 해방된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시작합니다.” 죄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미래와 현재를 단절시키는 게 죄입니다. 용서받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끊어진 미래와 현재가 이어지는 것이 용서함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하신 나면서부터 소경이 된 사람을 고쳐주시면서 가서 실로암 물에 씻으라고 하셨습니다. 씻으면 미래가 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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