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변화된 사람 (신 3:23-29)

  • 잡초 잡초
  • 309
  • 0

첨부 1


- 설교 : 서해원 목사 (대광교회)

  우리가 주님을 개인의 구세주로 영접하고 하나님을 믿으면 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말이 달라지고, 생각이 바뀌고, 얼굴도 달라집니다. 우리의 내면은 물론이고, 외적인 모습까지도 점점 달라지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저를 보면 어떤 사람은 ‘은행원 같다, 학교 선생님 같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누구와 닮았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사실 목사가 되고 나서 누구나 저를 보면 목사임을 아는 것이 저의 바램인데 그게 잘 안됩니다. 얼마전 제가 잘 가는 사우나에 직원이 뭐 하느냐고 물어서 목사라고 하니까, 아무리 보아도 목사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최근 제가 어느 곳에서 저를 보고 목사님 같다고 하더군요, 그 소리를 듣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예수 믿으면 달라집니다. 얼굴도 외모도 변하게 되어 있습니다. 못생긴 사람도 주님을 잘 믿으면 예쁘고, 멋지게 됩니다. 얼굴에 윤기가 흐르고 광채가 납니다. 편안해 보이고 환합니다. 그것이 믿음이 가진 힘입니다.

  우리는 지금 모세의 생애를 개인적인 부분에 초점을 맞추어 생각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어떤 사람일까요? 그는 변화된 사람입니다. 처음 그는 인간적인 모습이 온 몸에 베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조금씩 달라지더니 생애가 마칠 때에는 놀랍게 변했습니다. 옛사람은 사라지고 새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의 생애를 통해 달라진 것이 무엇일까요? 본문을 중심으로 몇 가지를 살펴보면서, 우리가 추구할 달라짐을 점검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믿음의 성장입니다. 처음 모세의 믿음은 어머니로부터, 조상으로부터 배운 믿음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그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믿음이 작은 씨앗이 되어 그의 마음에 심겨졌습니다. 누구나 그런 것처럼 처음 모세의 믿음은 적은 믿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부름을 받을 때, ‘사람들이 하나님을 누구냐고 물으면 내가 무엇이라 대답하리이까?’ 라고 질문했던 사람입니다. 주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잘 몰랐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시작된 적은 믿음입니다. 그러나 그 믿음이 자랍니다. 금보다 귀한 믿음에서 산을 옮길만한 능력의 믿음을 갖게 됩니다. 모든 싸움에서 승리하는 믿음, 세상이 감당치 못할 믿음, 흔들리지 않는 대장부의 믿음을 갖게 됩니다. 믿음이 있을 때 그는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그에게 주어진 모든 삶을 믿음으로 판단하고 믿음과 함께 진행하고 믿음 안에서 이루어 갑니다. 120세로 생을 마칠 때까지 모세에게서 돋보이는 것은 믿음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서 그의 믿음을 칭찬하고 있습니다. 그의 믿음은 사람들이 인정했고, 성경도, 하나님도 인정했습니다. 이렇게 겨자씨와 같은 작은 믿음에서 큰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모세는 이렇게 변화된 사람입니다.

  그의 믿음이 행동으로 나타난 것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모습은 ‘순종’이었습니다. 믿음이 있으면 순종합니다. ‘예’라고 대답합니다. 믿음이 없으면 순종하지 못합니다. 모세가 처음에 그랬습니다. 그는 부름을 받을 때, 왜 그렇게 핑계가 많았는지 모릅니다. 이래서 못하고, 저래서 못한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하나님이 노를 발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런 모세가 달라졌습니다. 본문이 그 하나의 대표적인 예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본문의 핵심은 모세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 앞에 그는 더 이상 토를 달지 않습니다. ‘알겠습니다’ 하고 받습니다. 모세는 이런 사람으로 변했습니다. 믿음이 자랐고, 순종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예수 믿고 지금까지, 여기까지 오면서 나의 믿음은 어떻습니까? 나는 믿음이 자랐습니까, 아니면 그대로 입니까? 믿음은 전진 아니면 퇴보 둘 중의 하나밖에 없습니다. 자라지 못했다면 그만큼 뒷걸음 친 것입니다. 나는 순종의 사람입니까, 아니면 핑계를 대는 사람입니까?

  바울은 고린도후서 1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미쁘시니라 우리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예 하고 아니라 함이 없노라...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였으니 저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올림픽이 한참 진행 중에 있습니다. 어젯밤에도 축구 응원하느라 잠을 이루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번에 금메달을 목에 건 모든 선수들이 신앙인인 것을 아십니까? 유도에 이원희, 양궁의 박성현, 베드민턴의 김동문, 하태권 이 선수들이 모두 독실한 신앙인들입니다. 특히 양궁의 마지막 한발은 신앙의 힘으로 쏜 것이라 생각됩니다. 흔들림 없이 10점을 쏘아 1점차로 금메달을 손에 쥐었습니다. 신앙의 힘이 돋보이는 순간이었습니다.

  흔들리지 않은 신앙의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순종하는 사람의 길을 날마다 걸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변화된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더 큰 축복을 누리며 사는 여러분들의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둘째는 더 겸손해 졌습니다. 모세의 생애를 자세히 보면, 그는 교만한 요소가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교만했습니다. 애굽의 학문과 지식을 통달하고, 부귀와 영화를 손에 쥐고 명성과 이름을 날리며 승승장구한 사람입니다. 그의 앞에는 거치는 것이 없었고, 막을 것이 없었습니다.

  이처럼 교만했던 모세가 겸손해 집니다. 출애굽의 역사를 이루면서 우리는 모세의 겸손을 봅니다. 최고의 위치에서 자기를 드러내지 않습니다. 어떤 업적도 자기의 공과로 돌리지 않습니다. 낮은 자리에서 섬기며 봉사합니다.

  모세가 겸손한 사람으로 변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 출애굽에서 보여준 그의 사랑입니다. 출애굽의 사건에서 백성들이 보여준 모습이 무엇입니까? 그들은 끊임없이 원망하고 불평했습니다. 그런 백성을 모세는 가슴에 품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입장에서 이해합니다. 그들에게 긍휼과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합니다. 믿음이 없어서, 광야생활의 어려움 때문에, 무지하여 어리석게 행동하는 그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이런 모세의 사랑이 없었다면 이스라엘은 몇 번이나 심판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런 백성을 사랑으로 품고 눈물과 금식으로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무엇보다도 그의 더 겸손해진 모습은 ‘므리바 사건’이후에서 더욱 아름답게 발견합니다. 므리바 사건은 그가 백성들에게 분노를 발하며 반석을 두 번 내리 친 사건입니다. 참고 참다가 마침내 모세가 폭발한 것입니다. 지속적으로 원망하고 불평하는 백성들을 더 이상 볼 수 없어서,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분노를 발했습니다. 모세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그는 세상에서 가장 온유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온유함이 지면의 어떤 사람과 비교되지 않는다고 하나님도 칭찬했던 인물입니다. 그런 모세가 분노를 발하고 만 것입니다. 이 사건으로 모세가 많이 회개했지만, 결정적으로 그는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충격적인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 말씀 앞에 보이는 행동이 바로 본문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그가 순종의 사람으로 핑계를 대지 않은 관점에서도 중요하지만, 그가 더 겸손해진 모습으로도 보아야 합니다.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고 받아드리면서 그는 겸손해 졌습니다. 더 겸손하고, 더 온유해 진 것입니다. 이것이 모세의 변화입니다.

  인간의 본성적으로 교만한 존재입니다. 교만하기에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 교만하기에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교만하기에 남을 비판하고, 판단하려고 합니다. 교만하기에 죄를 짓는 것입니다. 교만은 우리가 철저히 다스려야 이길 수 있습니다. 늘 꿈틀거리며 튀어 오르기에 조절하지 않으면 누구라도 넘어 갑니다. 사람들이 우리가 주님을 믿고, 가장 아름답게 변하는 모습을 보고 싶은 것이 겸손입니다. 사람이 달라졌다는 것은 바로 겸손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더 겸손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나는 겸손한 사람입니까, 아니면 아직도 교만한 사람입니까?

  주님처럼, 모세처럼, 바울처럼, 다윗처럼, 우리가 온유하되 더 온유하고, 겸손하되 더 겸손해야 합니다. 우리가 사랑하되 더 사랑해야 합니다. 그렇게 주님을 따라가는 변화된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는 욕심을 버린 것입니다. 본문은 욕심을 버린 모세의 삶을 대표적으로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모세가 가진 욕망은 한마디로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애굽을 탈출하던 날부터 모든 백성들은 가나안을 꿈꾸었습니다. 광야가 그들의 목적지가 아닙니다. 꿈에도 그리던 조상들의 땅 가나안을 밟는 것이 최고의 희망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달이면 넉넉히 들어 갈 수 있는 길을 그들은 40년을 헤매었고, 꿈을 꾸다가 모두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모세에게 있어서도 가나안은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면에서 백성보다 더 간절한 꿈이요, 소원이었습니다. 백성들이 모두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해도 모세는 그 꿈을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으로부터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모세, 너도 가나안에 못 들어간다...”

  모세가 가나안에 갈 수 없는 이유는 므리바에서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못한 연고입니다. 그것은 분명 모세의 실수였습니다. 한 번의 실수입니다. 그것으로 모세는 들어갈 수 없게 됩니다. 왜 하나님은 모세의 이 한번의 실수를 이처럼 엄하게 다루셨을까요? 이것이 그렇게 큰 죄가 되는 것일까요? 당시 정황으로 보면 아마 우리 모두 같은 심정일 것입니다. 더욱이 그것은 의도가 아니라 실수였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왜 하나님이 이것을 엄히 다스렸을까요? 왜 못 들어가게 했을까요?

  백성들은 못 가도 모세는 다르지 않습니까? 믿음에 있어서, 인정받은 모습과, 충성에 있어서, 삶에 있어서, 모든 면에서 모세를 원망과 불평으로 일관해 온 백성과 같은 처지로 만드는 것은 좀 부당하게 여겨집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하나님은 모세의 실수에 초점을 두신 것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실수는 누구나 다 합니다. 한 번이 아니라 열 번, 백 번도 합니다. 만약 우리의 실수대로, 잘못대로 하나님이 진노하신다면 이 세상에 온전히 살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것도 경고 없이 한 번의 실수를 이렇게 문책하면 이 땅에 살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세가 못 들어 간 것은 ‘실수’가 아니라 ‘욕망’ 때문입니다. 모세는 언제부터인가 가나안을 욕망으로 삼았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꿈이요, 소원이었으나 점점 그것이 욕망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그 중심을 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모세는 가나안을 욕망으로 삼고 있었기에, 집착증세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기는 꼭 간다는 우월 의식에 사로잡혔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은 절대로 자기를 그 대열에서 제외시키지 않는다는 교만도 싹트고 있었습니다. 이런 욕망을 품고서는 눈에 보이는 가나안보다 영원한 가나안에 들어 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무엇보다도 모세의 욕심을 먼저 알게 하고, 다스리신 것입니다.

  처음 모세는 수없이 반문했을 것입니다. 본문에 ‘다시는 거론하지 말라’는 말을 보면 그가 얼마큼 집착했는지 짐작이 갑니다. 왜 가나안에 못 들어가느냐고, 왜 죄를 범한 백성들과 자기를 똑같은 대열에 놓느냐고, 나는 꼭 가야겠다고, 그는 묻고 또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가나안에 대한 그의 열정이 욕망인 것을 알았습니다. 거기에 대한 집착이 죄를 낳고, 결국 분노를 낳은 것을 믿음의 눈으로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부터 그는 욕망을 버리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생애를 마감하면서, 수없이 반복하여 백성에게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삶을 간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모세는 변한 사람입니다. 믿음과 성품은 물론이고 모든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고집스러운 일종의 집착, 모든 인간이 죄성으로 가질 수 있는 자기욕망, 욕심, 인간적인 생각, 고집을 버리고 거기에서부터 자유로워 진 것입니다. 그렇게 자유해진 모세를 하나님은 오늘까지 인간세계에서는 그의 시체를 찾을 수 없도록 숨겼습니다. 하지만 그의 영혼은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는 천국으로 이끄셔서 거기서 영원한 자유를 누리며 살게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욕망을 다스려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점점 성숙한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의 증거입니다. 어떤 것에 대한 지나친 집착이 욕심이라는 것을 아십니까? 자녀에 대한 지나친 집착은 내 욕심에서 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업과 직장에 대한 집착이 욕망이 아닌가를 점검해 보십시오. 내가 아니면 안된다는 자만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하나님이 서야 할 자리에 자기가 설 수도 있습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느니라..”는 말씀을 늘 새기며 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자유를 주셨는데 다시 종의 멍에를 매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욕망으로부터 자유하기 위해 필요한 삶의 태도는 자족입니다. 그래서 본문에도 26절에서 ‘족한 줄로 알라’고 하셨습니다. 자족이 무엇입니까? 나를 가장 잘 아시는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함에도 불구하고 지금 주머니에 돈이 없다면 지금은 없어야 하는 때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병들어 있다면, 병들지 않고서는 주님과의 교제가 불가능하기에 나를 아프게 하셨음을 받아드리는 것입니다. 지금 내 삶에 눈물로 침상을 적시고 있다면, 고난을 통해 성숙케 하시는 하나님의 연단임을 아는 것입니다. 지금 주어진 나의 형편, 내 삶의 모든 환경을 먼저 받아드리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우리에게 변화를 요구하십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달라지는 사람으로 부름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옛사람, 옛 모습을 벗어야 합니다. 이제는 달라지는 것에 초점을 맞추십시오. 변화된 사람으로서 좀 더 깊은 신앙인의 길을 걷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