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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두 종류의 죄인 (눅 18: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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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양인 목사 (목양제일교회)

우리는 누구를 대할 때 나름대로의 기준을 갖고 대합니다. 고향이 어디며, 직업이 무엇이며, 종교를 갖고 있는지, 교양이 있는지 등에 관해서 알아보려고 합니다. 물론,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은 각자 다를 수 있습니다. 상인들은 고객의 교양이나 종교, 고향 따위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주머니 사정에만 관심을 둡니다. 그들은 사람들을 경제적인 수준에 따라서 여러 부류로 나눕니다. 회사에서 신입사원을 뽑을 때에도 채용기준이 있습니다. 나이, 성별, 학력, 자격증, 성적 등등 나름대로의 채용 기준을 정해서 합당치 않은 사람은 탈락시킵니다.

사람들은 입으로는 만민이 평등하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여러 가지 계층과 부류로 나누기를 좋아합니다. 과거 신분제가 시행되던 시대에는 사람을 양반과 평민과 노비로 분류했습니다. 양반은 나이가 어려도 늙은 노비에게 반말을 했습니다. 지금도 미국 사회에서는 백인과 유색인종의 차별이 남아 있습니다. 백인은 단지 피부가 희다는 이유로 대접 받고 흑인은 단지 피부가 검다는 이유로 차별을 받습니다. 이처럼 인간들은 서로를 여러 방법으로 분류하고 차별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공평하게 대우하십니다. 백인이라고 흑인보다 높이 평가하지 않으시며, 부자라고 가난한 사람보다 좋은 대우를 하지 않으십니다. 피부색이나 성별이나 지식의 유무나 재산의 많고 적음이나 신분의 높고 낮음과 같이 사람들이 중요시하는 조건들이 하나님 앞에서는 무용지물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않습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중심을 보십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기준에 합당한 사람은 의인으로, 그렇지 않은 사람은 죄인으로 인정하십니다.

예수님의 비유에 보면 바리새인과 세리가 각기 따로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바리새인은 세리와 멀찌감치 떨어져서 고개를 쳐들고 큰소리로 기도했습니다. 이 바리새인의 기도하는 태도나 그 내용을 보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겸허한 모습은 찾아볼 수 없고 오직 자신의 의로움을 사람들에게 과시하려는 의도가 뚜렷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그 단적인 증거로 그의 기도에는 회개가 없습니다. 그는 감히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의로움을 자랑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는 오만한 태도로 다른 사람들을 깔보았습니다. 그는 기도하기를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우월감을 갖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아무개 보다 선한가?”라고 묻지 말고, “내가 하나님 보시기에 선한가?”라고 물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이 바리새인의 기도는 하나님의 보좌에 상달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도를 외면하셨습니다. 바리새인은 스스로를 의인으로 여겼으나 사실은 하나님 보시기에 추한 죄인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반면에,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바리새인은 성전의 앞자리에 나아갔으나 세리는 맨 뒷자리에 머물러 서서 기도했습니다. 세리는 자신이 감히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는 죄인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는 자기의 죄를 애통해 하며 가슴을 쳤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세리의 기도를 기쁘게 받으셨으며 그를 의롭다고 인정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비유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기준이 사람의 기준과 완전히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첫 번째로, 바리새인은 자기를 의롭다고 믿었기에 하나님의 정죄를 받았습니다.

사람이 의로운지 불의한지를 분간하는 기준은 국법이나 도덕이나 윤리가 아닙니다. 그 이유는 인간이 만든 법이나 도덕, 윤리 자체가 완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고대에는 제왕의 말이 곧 법이었습니다.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은 자기가 세운 금신상에게 절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풀무 불에 던져 넣었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의 말이 곧 법이었습니다. 이 경우에 그 법은 정의의 기준이 될 수 없음이 분명합니다.

오늘날도 국법 가운데는 정의롭지 못한 조항이 적지 않기 때문에 개정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도덕과 윤리는 법보다 우위에 있긴 하지만 완전하지는 못합니다. 어떤 행위는 한국인에게는 도덕적이지만 다른 나라 사람에게는 비도덕적일 수가 있습니다.

한 가지 예로서, 조선시대에 통용되었던 칠거지악(七去之惡)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유교의 도덕관으로서 아내를 내쫓을 수 있었던 7가지 사유를 말합니다. ①시부모에게 순종하지 않는 것(不順舅姑去) ②자식을 낳지 못하는 것(無子去) ③행실이 음탕한 것(淫行去) ④질투가 심한 것(嫉妬去) ⑤나쁜 병이 있는 것(惡疾去) ⑥말이 많은 것(口舌去) ⑦도둑질하는 것(竊盜去) 등입니다. 이 7가지 사유의 특징은 모든 것이 남성위주로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자식을 낳지 못하는 책임을 여자에게만 지운 것은 잘못이고, 설령 여자에게 책임이 있더라도 그것이 이혼의 사유가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조선 시대 사람들의 가치관으로 볼 때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라고 주장할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만일 그렇다면 이는 도덕규범이 시대에 따라서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 것으로 도덕의 불완전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또 행실이 음탕한 것이 이혼 사유라고 하지만, 조선 시대의 사대부치고 첩실을 두지 않은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었을까요? 또 나쁜 병에 걸리면 불쌍히 여기고 간병해 주어야 할 텐데 아내를 버리는 빌미로 삼다니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그렇다면 도덕이나 윤리보다 우위에 있는 양심을 기준으로 삼으면 되지 않을까요? 물론, 오염되지 아니한 양심이라면 기준으로 삼아도 무방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에 따라서 양심의 수준이 다릅니다. 깨끗한 양심이 있는가 하면, 더러운 양심이 있으며, 양심이 화인 맞아서 더 이상 양심의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양심에 거리낌이 없다고 해서 그의 행위가 반드시 의롭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10)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 하신 성경 말씀을 그대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무엇으로 우리 행위를 판단해야 할까요? 인간의 행위를 판단할 기준은 하나님의 법인 율법입니다. 율법이 완전하고 의로운 이유는 율법을 주신 하나님께서 완전하시고 의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하여 시편 19편 7절로 9절에는 “7)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 8)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 9)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규례는 확실하여 다 의로우니”라고 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레위기 18장 5절에 보니 “너희는 나의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인하여 살리라 나는 여호와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구절은 비록 짧지만 그 내용은 극히 중요합니다. 율법을 지켜 행하면 그로 인해 살리라 곧 영생을 얻으리라는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이 구절은 율법을 지켜 행하지 않으면 살지 못할 것이라 곧 영생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는 뜻이 됩니다. 율법을 다 지키면 영생에 들어가는 이유는, 율법을 지킴으로 의롭다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율법을 어기면 죄인이 되기 때문에 영생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러면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면 되는 거군요”라고 말할 것입니다. 맞습니다. 율법을 온전하게 지키면 영생을 얻습니다. 바리새인들이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율법을 지키는데 힘썼습니다. 아니, 그들은 율법에 없는 세부 규칙들을 만들어서 지키느라 애썼습니다.

예를 들면, 율법에는 ‘안식일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말라’고만 했지, 일이 무엇인지 규정한 것이 없습니다. 이에 바리새인들은 일이 무엇인지를 자세하게 정했습니다. 그들의 기준에 의하면, 안식일에 5리 까지 걷는 것은 일이 아니지만 5리를 넘으면 일을 한 것입니다. 또 안식일에 말린 무화과 열매 세 개 이상의 무게가 나가는 것을 옮기면 일을 한 것입니다.

복음서에 보면, 어느 안식일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밀밭 사이를 지나면서 밀 이삭을 비벼서 먹는 것을 바리새인들이 보고 예수님께 항의한 사건이 나옵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의 안식일 규정에 의하면, 제자들이 이삭을 자른 것은 곡식을 수확한 것이고, 손으로 비빈 것은 탈곡한 것이고, 껍질을 불어 날린 것은 키질한 것이고, 그것을 먹은 것은 음식을 만든 것에 해당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규정은 율법이 명한 것이 아니라 바리새인들이 만들어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상식에 근거해서 일이라고 판단할 수 있는 행위를 하지 말라고 하신 것이지 율법에 없는 규정을 만들어 지키라고 명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바리새인들이 까다로운 세부 규정을 수없이 만들어낸 것은 그들은 능히 그 모든 규례를 지킬 수 있다고 자만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종교적인 교만이 그들 스스로를 얽어매는 까다로운 규정들을 만들어내게 한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10)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11)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약 2:)고 말씀합니다.

무릇 법이란 어느 한 조항을 범해도 전체를 범한 것이 됩니다. 내가 도둑질을 하지 않았더라도 살인을 했다면 죄인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까지 한 번도 율법을 어긴 일이 없이 잘 지켜 왔더라도 오늘 율법의 가장 작은 규례를 하나 범했다면 그 사람은 율법을 다 범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율법을 지켜서 의롭다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사람이 누가 있단 말입니까?

맞는 말씀입니다. 율법을 지켜서 의롭다는 인정을 받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지키지도 못할 율법을 주신 것일까요? 그것은 로마서 3장 19절로 20절에 그 답이 나와 있습니다. “19)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20)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율법을 주신 이유가 무엇인지 일깨워 줍니다. 그것은 율법을 지켜서 의롭게 되라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통해서 자신의 실상을 올바로 파악하라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율법은 거울과 같습니다. 우리는 거울을 보면서 자신의 모습이 어떠한지, 이를 테면 머리가 제대로 빗겨진 상태인지, 또는 얼굴에 검정이 묻은 것은 없는지, 옷은 맵시 있게 입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율법에 자신을 비추어 봄으로써 우리 자신의 영적 실상이 어떠한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양심이 살아 있는 사람이라면 율법을 지켜서 의롭게 될 수 없는 자신을 솔직히 고백할 것입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롬 7:24)

만일 율법을 통해서 자신의 죄인 됨을 절실하게 깨달았다면 이는 슬픈 일이 아니라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뜻대로 된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중병에 걸린 사람이 자기의 병든 사실을 알게 된 것과도 같습니다. 병자를 치료하는 데 가장 시급한 것은 병든 사실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병든 사실을 알게 된 사람은 의사를 찾고, 의사의 지시에 순종할 것입니다.

사람이 구원 받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율법을 통해서 자신이 구제 받을 수 없는 비참한 죄인인 사실을 알게 되어야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기독교를 가리켜 타력(他力) 종교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반면에 불교나 대부분의 타종교는 인간 스스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 자력(自力) 종교입니다. 내가 수양을 하고 도를 닦아서 부처가 되는 것이 불교입니다. 도교는 도를 닦아 신선이 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씀하기를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라고 합니다. 세상 종교인들이 도를 닦아 부처가 되고 신선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나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지켜 의롭게 될 수 있다고 하는 것이나 인간이 제 능력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한 점에서 똑같습니다.

예수님의 비유에 나오는 바리새인이 한 말을 들어보십시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그는 자기가 율법을 완전무결하게 지켜왔음을 과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 점이야말로 이 바리새인이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조차 알지 못하는 비참한 상태에 있음을 드러낸 것입니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이 바리새인처럼 교만하게 굴 수밖에 없습니다. 이 바리새인은 자기를 의롭다고 믿음으로써 하나님을 불의하다고 한 것과 같습니다. 만일 그가 옳다면 하나님의 판단이 잘못되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거룩하신 하나님께 잘못이 있을 리가 만무합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입니다.

그런즉 우리는 모든 교만을 버리고 율법의 거울에 비친 우리의 실상을 솔직히 인정하고 겸손히 하나님의 긍휼을 간구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두 번째로, 세리는 자신의 죄인 됨을 인정했기에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습니다.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사람은 누구 한 사람 예외가 없이 다 죄인입니다. 죄인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여 있으며 결국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죄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 나와서 자기의 죄를 자복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 1:9) 하신 말씀이 그것입니다. 자기가 죄인인 사실을 솔직히 인정하고 회개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용납을 받습니다.

예수님의 비유에 나오는 세리를 보십시오. 이 세리는 겉으로 드러난 행실로 볼 때 자타가 의롭다고 인정한 바리새인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추했습니다. 그 당시 세리는 로마 당국을 위해 일하는 자들로서 가난한 동족의 재물을 갈취하는 죄를 범했습니다. 성전에 들어온 이 세리를 유심히 살펴보십시오. 그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합니다. 그는 감히 하나님 앞에 가까이 갈 수 없는 자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의 양심은 부끄러움에 가득차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볼 수도 없습니다. 그는 고개를 떨구고 눈에는 회한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는 바리새인처럼 자기를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었으므로 다만 가슴을 치며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고 할 뿐이었습니다. 바리새인의 당당한 모습과 비교하면 세리의 모습은 너무나 초라하고 보잘것없습니다.

세리의 위축된 모습을 보면서 바리새인은 기도하기를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고 했습니다. 바리새인의 감사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가 아니라 자기의 의로움을 과시하기 위한 방편에 불과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혹시라도 눈물로 회개하는 형제들을 보면서 “하나님이여, 나는 저 형제와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라고 기도한 적은 없으십니까? 바리새인의 교만을 버리고 세리처럼 겸손한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바리새인은 세리를 무시하고 깔보았지만 하나님께서는 세리를 귀하게 보셨으며 의롭다고 인정해 주셨습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 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멸망 받을 죄인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용납을 받는 죄인이 있고, 하나님의 버림을 받는 죄인이 있습니다. 세리와 같은 죄인이 있는가 하면, 바리새인과 같은 죄인이 있습니다. 둘 다 죄인이지만 전자는 구원의 은혜를 받지만, 후자는 하나님의 진노를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죄인이라도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수 있다면 멸망 받지 않고 생명을 누리게 됩니다. 죄인이기 때문에 멸망 받는 것이 아니라 그 죄를 용서 받지 못하기 때문에 멸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죄의 길을 죄인들에게 열어주셨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과 같은 죄인은 교만해서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의로움을 내세우기 때문에 사죄의 은총을 받지 못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자기의 죄인 됨을 깊이깊이 인식할수록 하나님의 사죄의 은총을 더욱 더 크게 받아 누리게 됨을 아시기 바랍니다. 로마서 5장 20절에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라고 하신 말씀이 그것입니다. 우리가 율법을 알면 알수록 우리 자신이 죄인인 사실이 더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그것은 율법이 우리에게 범죄를 더한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율법을 통해서 드러난 많은 죄를 하나님 앞에 나아가 자복함으로 사죄의 은혜를 누린다면 그것은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친 것입니다. 사소한 죄밖에 지은 것이 없는 사람은 그 죄를 용서 받더라도 그리 감격이 없습니다.

그러나 누가 보아도 흉악한 죄를 지은 사람은 그 죄를 용서 받게 되면 정말로 감격하고 또 감격할 것입니다. 바리새인이나 세리나 하나님의 기준에 의하면 다 멸망 받을 죄인입니다. 다만, 세리의 죄는 그 성격상 겉으로 쉽게 드러났으나 바리새인의 죄는 은밀한 것이 다를 뿐입니다. 어찌 보면, 바리새인의 위선과 교만과 같은 은밀한 죄가 더 심각한 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두 여인이 어느 현명한 노인을 찾아가서 가르침을 청했습니다. 한 여인은 자신이 젊었을 때 남편을 바꾼 일에 대해 괴로워하면서 스스로를 용서받을 수 없는 큰 죄인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또 한 여인은 자기는 인생을 살아오면서 도덕적으로 큰 죄를 짓지 않았노라고 했습니다.

노인은 첫 번째 여인에게 큰 돌을 주워오라 하고, 두 번째 여인에게는 작은 돌을 여러 개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얼마 후에, 두 여인이 돌을 가져오자 노인은 그 돌들을 다시 제자리에 두고 오라고 했습니다. 큰 돌을 가져왔던 여인은 쉽게 제자리를 찾아 갖다 놓았으나 작은 돌들을 주워온 여인은 원래의 자리를 일일이 기억해낼 수가 없어서 도로 가지고 왔습니다.

그 때 노인이 말하기를 "죄도 마찬가지다. 크고 무거운 죄는 언제 어디서 지었는지 기억할 수 있어 회개할 수 있지만, 작은 죄는 하찮게 여기고 잊어버리기 쉽다. 그러니 나는 죄가 없다고 생각이 드는 것은 실제로 죄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다만 죄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 뿐이다. 그러므로 죄는 크든 작든지 간에 짓는 즉시로 뉘우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세리는 성전에 올라갔을 때에는 비탄에 잠겨 있었으나 애통하는 마음으로 자기의 죄를 자백했을 때 하나님의 용서와 의롭다 하시는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런즉 우리는 세리와 같이 언제나 하나님 앞에 겸손한 심령으로 나아가 죄를 자백함으로써 사죄의 은총을 받아 누리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죄인이 있습니다. 하나는 바리새인처럼 자기가 의롭다고 믿는 죄인이고, 다른 하나는 세리처럼 자기가 죄인인 줄 아는 죄인입니다. 전자는 자기 힘으로 의롭게 될 수 있다고 믿기에 하나님의 은혜를 필요로 하지 않으나, 후자는 자신의 무능과 죄인 됨을 절실히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를 갈구합니다.

바리새인은 하나님의 외면을 당했으나 세리는 사죄의 은총과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습니다. 이 시간, 이 설교를 경청하신 성도님 마다 바리새인과 세리, 이 두 사람 중 어느 편에 가까운지 살펴보시고,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좋은 편을 택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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