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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참된 예배 (요 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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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양인 목사 (목양제일교회)

성경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시되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고 증언합니다. 이 우주 공간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재는 사람밖에 없습니다. 이 사실은 인간의 존재 목적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일깨워 줍니다. 목수는 나무로 무엇을 만들기 전에 먼저 어디에 무슨 용도로 쓰일 물건인지를 정합니다. 건축가는 집을 지을 때 미리 설계도를 작성합니다. 그 설계도에는 그 집에 대한 건축가의 의도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적에도 특별한 의도가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이에 대하여 이사야서 43장 21절에는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우리 인생이 할 수 있는 가장 영광스러운 일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지극히 합당한 일입니다.

동물원의 울타리 안에 갇혀 있는 유인원을 보면, 그 생김새가 어쩌면 그렇게 사람과 비슷한지 모릅니다. 저는 침팬지, 고릴라, 원숭이 따위를 보면서 저렇게 생김새가 사람과 흡사하니까 진화론자들이 저것들을 사람의 조상이라고 오해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조금만 관심을 갖고 그것들의 행동을 관찰해 보면, 한갓 짐승에 불과하지 본질적으로 사람과 닮은 점이 없습니다.

우선, 사람은 이성(理性)이 있으나 짐승은 이성이 없고 오직 본능에 따라서 행동합니다. 인류가 이룩한 모든 문명은 이성의 산물입니다. 그러나 짐승은 수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조금도 발전이 없습니다. 이렇게 볼 때, 짐승에 불과한 유인원을 인간의 조상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 다음, 사람은 종교를 갖고 있으나 짐승은 종교가 없습니다. 아프리카 밀림 속에서 벌거벗고 살아가는 미개인들도 나름대로 종교를 갖고 있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미개인이든 문명인이든 신에 대한 관념을 다 갖고 있습니다. 비록 그들이 섬기는 신들이 기독교의 하나님이 아닐지라도 말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사람이 짐승과 다른 점입니다. 세상 종교들은 절대자를 숭배하려는 인간의 영적 욕구가 표현된 것입니다.

왜 사람만 종교를 갖고 있을까요? 그 답은,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하여 성경은 말씀하기를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전 3:11)고 했습니다. 여기서,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사람의 수명이 짐승들에 비하면 길다고 할 수 있지만 고작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에 불과합니다. 그런데도 사람은 영원을 꿈꾸고 동경합니다.

참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적에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란, 곧 영원한 존재이신 하나님을 찾는 마음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짐승으로 태어나지 않고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얼마나 감사할 조건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범죄한 인간들은 그 마음눈이 어두워져서 제 힘으로 하나님을 찾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신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은 몇 가지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무신론이 있습니다.

이는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이론입니다. 이런 사상을 가진 사람들을 무신론자라고 부릅니다. 유물론을 숭상하는 공산주의자들이 무신론자들입니다. 유물론자들은 정신을 물질의 산물로 보고, 물질로 된 사람의 몸이 죽으면 정신도 사라진다고 말합니다. 물론, 그들은 영혼의 존재를 믿지 않습니다. 진화론자들도 대부분 유물론에 근거한 무신론자들입니다. 그들은 인간을 비롯해서 모든 동식물이 진화의 산물이라고 말합니다.

진화론에서 가장 중요한 말은  ‘우연히’ 또는 ‘저절로’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우연히 또는 저절로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원인이 있어야 결과가 있는 법입니다. 바닷가 모래밭에서 수천만 년이 지나는 동안 우연히 원소들이 결합되어서 시침, 분침, 초침이 되고 크고 작은 톱니바퀴도 되고 숫자판도 되더니 우연한 기회에 그 부속들이 척척 결합이 되어 완전한 시계가 되었다고 말한다면, 여러분께서는 그 말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진화론자들은 이와 같은 이야기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성경은 무신론자들에 대하여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시 14:1)라고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 무신론자들처럼 어리석은 자들은 달리 없습니다. 그뿐 아니라, 절대자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죄를 짓고 불의를 행하면서도 두려워할 줄을 모릅니다. 자연히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만일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고 인간이 진화된 존재라면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근거는 사라지고 맙니다. 아메바가 진화를 거듭하여 소도 되고 돼지도 되고 원숭이도 되었으며, 원숭이가 진화해서 사람이 되었다면 소나 돼지나 원숭이나 사람이나 본질상 조금도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원숭이나 소나 돼지를 죽인 것이나 사람을 죽인 것이나 다를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신론 공산주의자인 스탈린은 수천만 명이 넘는 반대파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했으며, 북한의 김일성 역시 수십, 수백만의 동족을 살해하였고, 캄보디아에서는 크메르루즈군(軍)이 이백만에 달하는 동족을 무참하게 살해했으나 조금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쓸모없는 인간쓰레기를 처치한 것일 뿐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인간들의 행위를 최종적으로 심판하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는지 알 수 있습니다.

둘째로, 불가지론이 있습니다.

불가지론이란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지도 인정하지도 않는 종교 사상입니다. 불가지론자들은 인간의 능력으로는 하나님의 존재를 알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 말은 맞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에게 당신의 존재를 여러 가지로 계시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책이 두 개 있는데, 하나는 우주만물이고, 다른 하나는 성경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둘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계시하셨습니다. 누구나 밤하늘에 무수한 별들을 바라보노라면 “이 끝없이 넓은 우주와 별들을 누가 지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또는 망망대해를 바라보거나, 높은 산 정상에 올라가서 내려다보노라면 비록 기독교의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도 절대자가 계시다는 생각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처럼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직관에 의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 생각을 억누르고 불가지론에 머물러 있는 것은 양심을 속이는 태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에 대하여 로마서 1장 20절에는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고 말씀합니다. 인간들이 우주만물을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을 보면서도 하나님의 존재를 깨닫지 못하는 것은 인간들의 마음이 어두워졌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알려면 먼저 마음눈이 밝아져야 합니다.

한편, 하나님께서는 소위 ‘자연의 책’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인간들을 위해서 하나님의 계시를 글로 기록한 책을 주셨는데, 그것이 성경입니다. 성경은 사람들에 의해서 기록되었으나 원 저자는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이십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선지자들과 사도들을 감동하셔서 성경을 기록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하여 베드로후서 1장 20절로 21절에는 “20)먼저 알 것은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21)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고 했습니다.

우주 만물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사람이라도 성경을 읽어보면 매우 구체적으로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 역시 아무나 읽는다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 역시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눈을 밝혀주셔야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1장 17절 이하에서 이같이 기도했습니다. “17)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18)너희 마음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19)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불가지론에 사로잡히면 하나님을 올바로 섬길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도님들께서는 영원 전부터 영원 후까지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확실히 믿고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삶을 지속해 나가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유신론이 있습니다.

유신론이란 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종교 사상을 말합니다. 그러나 신의 존재를 인정한다고 해서 다 같은 유신론은 아닙니다. 유신론 가운데도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먼저, 범신론이 있습니다.

이 사상은 우주 삼라만상에 다 신이 깃들이어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간에 모든 사물에는 영혼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정령 숭배 사상 또는 애미니즘이라고 부릅니다. 일본에는 8백만이나 되는 신(야오이카미)이 있다고 합니다. 일본인들은 산이나 바다, 나무, 돌, 바람, 조상의 혼령 등 거의 모든 것을 신으로 섬깁니다. 그래서 일본에 가보면 도처에 우상의 처소가 즐비합니다.

그런가하면 인도의 힌두교는 신의 수가 3천만이 넘는다고 합니다. 해나 달, 별, 강, 산은 말할 것도 없고,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에도 신이 깃들이어 있고, 구름이나 바위에도 신이 깃들이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소나 돼지, 부엉이, 개똥벌레 할 것 없이 다 신적인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심지어는 탁자나 밥그릇, 신발과 같은 일상 용품에도 신이 깃들이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사람도 신에 해당합니다.

하나님께서 우주 삼라만상을 통해서 당신의 신성과 능력을 나타내 보이셨음에도 불구하고 타락한 인간들은 이를 알지 못하고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습니다(롬 1:23). 이로써 우리는 인간들이 처해 있는 영적 어두움이 얼마나 깊은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 다신론이 있습니다.

다신론은 다수의 신을 인정하는 종교 사상입니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 그리스 신화와 로마 신화를 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 사람들은 제우스를 비롯해서 열 두 신을 섬겼고, 로마 사람들은 주피터를 비롯하여 열 두 신을 섬겼습니다. 이 신들은 죽지 않는다는 것 외에는 사람들처럼 술도 마시고 연애도 하고 자식도 낳고 싸움질도 하는 아주 재미있는 신들입니다.

그런가 하면, 구약 성경에 나오는 가나안 사람들 역시 다신론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바알과 그 아내 아세라를 주로 섬겼고, 그 외에도 바알세붑이나 여신 아스다롯, 밀곰, 그모스, 몰록 등과 같은 신들을 숭배했습니다. 다신론자들은 한 사람이 여러 신을 섬기는 것을 조금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섬기는 신이 많을수록 더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로마의 어느 황제는 만신전(萬神殿)이라는 신전을 지어 놓고, 다른 나라를 정복하면 그 나라 사람들이 섬기던 신상들을 빼앗아 와서 그곳에 진열해 놓고 섬겼다고 합니다. 어리석은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실제로 있었던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그 다음, 유일신론이 있습니다.

유일신론이란, 신은 한 분밖에 없다는 종교 사상입니다. 그 대표적인 민족이 이스라엘입니다. 구약 성경은 여호와 하나님만을 유일하게 신으로 인정합니다. 신명기 6장 4절로 5절에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이 말씀과 같이,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고 불릴 수 있는 존재는 오직 한 분, 성경에 계시하신 하나님밖에 없으십니다.

성경에 계시하신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신 신이십니다. 그러므로 능력으로 천지 만물을 창조하셨으며, 또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지금도 우주 만물을 운행하시고 인류 역사와 인간들의 생사화복을 섭리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실 뿐 아니라, 전지하시며, 영원하시며, 거룩하시며, 무소부재 곧  계시지 않은 곳이 없으신 신이십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우주보다 크신 분이시므로 하늘의 하늘이라도 하나님을 모시기에는 부족합니다.

한편, 성경은 하나님을 유일하신 신으로 계시함과 동시에 삼위일체 하나님이심을 계시하고 있습니다. 삼위일체 교리는 사람이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어렵다기 보다 불가능하다고 보는 편이 옳을 것입니다. 우리는 다만 성경에 계시된 그대로를 믿고 고백할 따름입니다.

“곧 삼위로서 일체시고, 일체 가운데 삼위이신, 유일하신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다 하나이시며, 그의 영광도 같으며, 그의 존엄도 동일하게 영원하십니다. 성부께서 계신 것 같이, 성자도 그러하시며, 성령도 그러하십니다. 곧 성부께서 창조함 받지 않으신 것 같이, 성자도 창조함 받지 않으셨으며, 성령도 창조함 받지 않으셨습니다. … 성부께서 영원하신 것 같이, 성자도 영원하시며, 성령도 영원하십니다. 그러나 그들은 세 영원한 분들이 아니시며, 한 영원한 분이십니다. 세 창조함 받지 않은 분이시며, 한 다 이해할 수 없는 분이십니다. 이와 같이 성부도 전능하시고, 성자도 전능하시고, 성령도 전능하십니다. 그러나 세 전능자가 아니라, 한 전능자이십니다. 이와 같이 성부도 신이시며, 성자도 신이시며, 성령도 신이십니다. 그러나 그들은 세 주(主)가 아니시며, 한 주이십니다. …”

빙금 인용한 것은 주후 5세기에 작성한 아타나시우스 신조인데 삼위일체를 설명한 것이 아니고 삼위일체에 대한 신앙 고백을 정리한 것입니다. 인간의 논리로써 하나님의 존재 양식을 설명하기란 불가능하므로 아타나시우스 신조에서는 삼위일체를 설명하기보다는 성경에 계시된 내용을 그대로 나열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너희가 나를 누구에 비기며 누구와 짝하며 누구와 비교하여 서로 같다 하겠느냐?”(사 46:5)고 하셨듯이, 인간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존재양식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예로부터 오늘날까지 하나님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보고 살 자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거룩하신 신이시기 때문입니다. “거룩함”은 하나님께만 해당되는 품성입니다. 인간은 죄가 있기 때문에 거룩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무슨 큰 바위나 바다, 태양이나 달, 별들을 신령한 존재로 알고 그 앞에 절하며 섬깁니다.

인도인들은 겐지스강을, 이집트인들 나일강을 신으로 섬깁니다. 그들은 그 강이 너무나 크고 막강한 힘을 발휘하는 것을 보고 그 강을 신으로 착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같은 강을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이는 마치 미개인들이 자동차를 보고는 “야, 이거 봐라. 대단한 신이다. 신이 아니고서야 저렇게 빨리 달릴 수가 있겠느냐?” 하면서 자동차 앞에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불신자들은 마음이 어두워서 허탄한 것들을 신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상천하지에 신은 오직 성경에 계시하신 하나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 기독교가 섬기는 하나님은 영이시며 거룩하시며,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눈으로 하나님을 볼 수도 없고, 손으로 만질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어떤 모양으로 만드는 것은 큰 죄를 짓는 것입니다. 어떤 모양으로 만들어진 것은 이미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모양도 아니며, 다만 우상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시기를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출 20:3)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출 20:4,5)고 명하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기독교의 하나님은 타종교들이 섬기는 신들과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 역시 타종교들과는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첫째로, 예배의 목적이 다릅니다.

성도님들께서는 미신을 섬기는 사람들이 새벽에 일어나서 찬물로 목욕하고 촛불을 켜고 정화수(井華水)를 한 그릇 떠놓고 손이 닳도록 비는 것을 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하루, 이틀 비는 것이 아니라, 백일 동안 그렇게 빌기도 합니다. 이를 백일기도라고 합니다. 그 정성이 얼마나 대단합니까? 그들이 즐겨 사용하는 말이 무엇이냐 하면 “지성이면 감천이다”라는 것입니다. 지극 정성을 드리면 하늘도 감동시킬 수 있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무슨 목적을 위해서 하늘을 감동시키려는 것일까요? 단지 복을 받기 위함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섬기는 신에게 영광을 돌리고 그 신을 위해서 헌신하는 데는 아무런 관심도 없으며, 다만 복을 받기 위해서만 그 신을 섬깁니다.

그러면 그들이 말하는 복이란 어떤 것일까요? 가족이 무병 건강하고, 사업이 잘되고, 직장에서 진급하고, 아들 딸 상급학교에 합격하고, 자식 결혼 잘하고, 대체로 이런 것입니다. 물론 그러한 것들도 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현세적인 복보다는 영혼의 구원을 더 중요시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현세적인 복을 받을 목적으로 하나님을 섬기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순종했더니 하나님께서 기뻐하셔서 복을 내려 주시는 것이 순서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먼저요 복은 그 다음입니다.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그 자체가 예배의 목적입니다. 칼 바르트라는 신학자는 말하기를 “그리스도교의 예배는 인간 생활을 영위하는데 있어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 중에서 가장 중대하고, 가장 시급하며, 가장 영광스러운 행동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배란 사랑과 능력이 무한하신 창조주 하나님께 인간이 가진 바 최상의 것을 바쳐서 경배하는 행위로서 인간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하고 우선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배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에 가장 잘 부합하는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할 때 존재의 목적을 달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고 사는 사람은 인생의 목적을 망각하고 사는 것입니다. 아무리 이 사회에서 훌륭한 일을 많이 할지라도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이 땅에 태어난 가장 큰 목적을 망각한 것으로 그는 실패한 인생에 불과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먼저 예배 중심으로 살아가십시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예배를 열납하시고 영육간에 풍성한 복을 내려주실 것입니다.

둘째로,  예배하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 바로 서야 합니다.

창세기에 보면, 아담이 낳은 두 아들 가인과 아벨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루는 가인과 아벨이 각기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하나님께 드렸고,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않으셨습니다. 이 일로 가인은 동생 아벨을 시기한 나머지 들에서 쳐 죽이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를 열납하지 아니하시고 아벨의 제사는 열납하신 까닭이 무엇일까요? 가인은 곡식으로 제사를 드렸고, 아벨은 양의 새끼를 잡아 제사를 드렸기 때문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창세기 4장에 보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고 했습니다. 이 구절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의 예배가 하나님께 열납되려면, 먼저 예배하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올발라야 합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해야 합니다. 죄를 멀리하고 정직하고 진실하게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가난한 이웃에게 사랑과 자비를 베풀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진실한 성도들이 드리는 예배를 기쁘게 받으십니다.


셋째로,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을 예배해야 합니다.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에서 예배를 드렸고, 사마리아인들은 사마리아에 있는 그리심 산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유대인이나 사마리아인이나 예배드리는 장소를 중요시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어느 장소에 모셔둘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예배하는 자는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예배하는 자들이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을 예배해야 합니다. 우리의 사랑과 충성과 순종과 헌신을 다하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야말로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예배를 기쁘게 받으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성도들의 마음속에는 기쁨과 감사와 감격이 충만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은 사람을 통해서 영광을 얻으시려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할 의무와 책임이 성도들에게는 주어져 있습니다. 집에서나 직장에서나 사업장에서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답게 바르고 아름다운 언행을 할 때 믿지 않는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역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다르다.”고 칭찬할 것이요, 이로 인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들은 일상생활을 통해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예배를 통해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우리가 예배 시간에 기쁜 마음으로 힘차게 찬송을 부르고, 베풀어주신 은혜에 감사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여 들을 때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님들께서는 예배를 통해서 구원받은 은혜에 대한 감사와 찬송을 하나님께 드림과 동시에 설교를 통하여 선포되는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헌신의 삶을 살아가심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자유롭게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지금 지구상에는 약 60억이 넘는 사람들이 살고 있지만, 신앙의 자유를 제대로 누리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나마 종교의 자유가 보장된 곳에 사는 사람들 가운데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보다는 세상의 즐거움을 위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그들에게는 교회에 나가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따분하고 재미없는 일, 또는 시간 낭비쯤으로 생각합니다. 그 대신 오락을 하고 스포츠를 즐기고 술 마시고 영화를 보고 친구들과 만나서 즐기는 것을 가치 있고 보람된 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행동은 사람의 존재 목적을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것이요,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은 이제 사람의 존재 목적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기 때문에 불신자들과 전혀 다른 삶의 목적과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불신자들이 좋아하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아무 재미도 없고 무가치한 일로 생각되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고 오히려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다는 이 사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위대한 은총이요 특권입니다. 그런즉 하나님을 예배하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함으로써 성도님들이 드리는 예배가 하나님께 아름답게 열납되는 산제사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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