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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상얻는 자가 되십시오 (고전 9:2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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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춘수 목사 (강동교회)

여러분 삶에서 상을 받은 경험이 있습니까?
어떤 분에게 이렇게 질문을 했더니 자신은 상을 굉장히 많이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무슨 상을 받았는가 물었더니 “밥상”이라고 말을 하여서 웃은적이 있습니다.
요즈음 아마도 많은 분들이 밤잡을 설치면서 올림픽 경기를 시청할 줄 압니다.
특히 오늘 새벽에 벌어진 우리나라와 파라과이 축구전을 많은 분들이 보셨을 것입니다.새벽기도 가기전에 잠깐 보았는데 결국 4-3으로 지고 말았습니다.아마 보신 분들은 실망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최선을 다한 경기라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올림픽에서 우리가 가장 관심을 갖는 것은 지는 것보다는 이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과연 얼마나 메달을 딸 것인가? 누가 금메달을 딸 것인가? 여기에 솔직하게 관심이 많습니다. 듣기 좋게는 참여하는 것이 의미가 있다고 하지만 참여하는 것이 의미라고한다면 무엇하러 4년동안 그렇게 피땀흘려 훈련하고 고생합니까? 많은 선수들의 관심이나 많은 국민들의 관심은 과연 자국 선수들이 이기는 것을 바라고 많은 메달을 딸 것에 대해 관심이 제일 많습니다.

저는 우리나라를 볼때 대단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어제까지 메달집계로보면 지금 금메달이 5개 은메달이 10개 동메달이 4개로 집계되어 현재 종합 10위를 달리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물론 금메달을 앞세우면 우리가 10위이지만 전체 메달 수를 달리면 그보다 훨씬 더 높은 순위라고 할 수 잇습니다. 이번에 유도에서 첫금메달을 딴 것을 보았는데 정말 멋있게 한판승으로 상대방을 제압하고 우승하는 우리나라 선수가 너무 멋져 보였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우리나라 여자양궁입니다. 여자양궁에서는 개인전에서도 금메달 여자 단체전에서도 금메달을 땄습니다.말이 그렇지 올림픽 5년패라고 하는 것은 정말 놀라운 성적입니다. 4년마다 한번씩 열리는데 5년패를 햇으니까 20년동안 참피언의 자리를 내어놓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올림픽에 출전하는 모든 운동경기에서 감독이나 선수들이라면 아마도 제일 관심은 좋은 성적을 내어서 상을 얻는 것일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비판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너무 올림픽이 상업주의화되었다고 비판하기도 합니다.그러나 저는 개인적으로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들이 메달을 따면서 얻게 되는 그 개인적인 명예, 그리고 나라의 명예,우리에게 준 기쁨, 그들이 그 메달을 통하여 드러내는 국익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여러분들의 인생에서 상을 얻은 경험들이 있을 것입니다. 때로는 공부를 잘해서,때로는 운동을 잘해서,노래를 잘해서,그림 그리기를 잘해서 상을 얻었을때가 있었을 것입니다.그런 경험들이 삶에서 얼마나 자신감을 주고 삶을 기쁘게 해주었습니까?
우리 나라 국민으로서 우리 나라 선수들이 경기할때마다 상얻기를 다 기대하시고 소망하셨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신앙의 경주를 하는 우리들에게 바라는 것 중에 하나가 또 하늘의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오늘 우리들에게 가장 바라는 것들이 상을 얻는 신앙 생활을 하기를 기대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운동장에서 상을 얻기 위하여 달음질하는 선수처럼 그리스도인들도 상을 얻기 위하여 달음질하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남들에게 말만 하는 자가 아니라 본인 자신이 상을 얻기위하여 달음질하는 삶을 살았음을 고백합니다. 바울은 항상 운동장에서 상을위하여 달리는 운동선수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그렇게 1년 2년 3년 산 것이 아니라 평생 마지막 죽을때까지 그렇게 살았습니다. 딤후4:7-8에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다”고 합니다.그러면서 바울은 이렇게 끝까지 믿음의 선한 싸움을 하면서 믿음 생활에 최선을 다한 자신의 삶에 있어서 하나님의 상의 비젼이 있음을 고백합니다. 딤후4:8“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고 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히 하나님의 상 하나님의 칭찬이 있음을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바울뿐 아니라 오늘 우리의 삶에서 이기는 자가 되어서 하나님의 상과 칭찬을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상을 얻는 자가 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1. 상얻기를 위하여 값없이 포기할 줄 먼저 알아야 합니다.

바울은 포기를 잘 할 줄 알았습니다.믿음이란 포기를 잘 합니다. 하나님이 좋아하지 않는 것들에 대해서 포기합니다. 내 육이 좋아하는 것들을 포기할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여기 바울은 하나님이 주시는 상급을 위하여 포기한 중요한 것이 한가지 있습니다. 자기의 모든 권리와 누릴 자유를 포기하였습니다.
여러분 올림픽에서 상을 얻은 사람들을 보십시오.철저하게 포기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은 운동을 위하여 모든 육신의 즐거움을 포기하였습니다. 유도에서 금메달을 딴 한 선수는 이제 무엇을 하고 싶으냐라고 하자 ‘자기도 이제 연애한번 해보고 싶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기자가 ’왜 운동하면서 애인을 사귀지 않았는가‘라고 하자 ’그러면 운동에 집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중요한 것을 얻으려면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영적으로도 그대로 적용이 됩니다.

고전9장1절에서 바울은 “내가 자유자가 아니냐 사도가 아니냐”라고 고백합니다. 여러분 바울은 복음이 준 자유를 알았던 자요 그것을 누렸전 자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런 자신의 지식의 자유를 누릴 권리를 포기합니다.그러면서 바울은 고전9장에서 자기가 포기한 3가지를 설명합니다. 우선 바울은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리를 포기합니다. 사도로서 삯을 받을 권리를 포기하고 자비량으로 복음을 증거합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됩니다. 약한 사람에게는 약한 사람의 종이 됩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유대인같이 율법아래 있는 사람들에게는 율법아래있지 않지만 율법아래 있는 자같이 되어서 자기를 포기하고 섬기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할 것은 바울이 이렇게 자기를 포기하되 “값없이 포기”하였다는 것입니다. 값없이 포기하는 것은 마음에 자원하는 기쁨과 감사가 있습니다.그러니까 바울이 포기하면서 억울함이 없고 섭섭함이 없습니다. 고전9:18에 보십시오. 바울은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위하여 전할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인하여 내게 있는 권을 다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라”고 합니다. 여기 바울은 포기하되 값없이 자기의 모든 것을 포기합니다. 그리고 조금도 그것을 억울하게 느끼지 않습니다. 포기한 것에 대해서 조금도 미련함이 없습니다.
여러분 포기에도 2가지 종류의 포기가 있습니다.

첫째는 자기를 드러내기 위한 포기가 있습니다. 포기하되 그것으로 자기의 이름을 드러냅니다. 자기의 공로를 자랑하는 것입니다. 세상 교회에서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포기입니다. 그러나 이런 포기는 하나님의 상이 없습니다.

둘째는 복음을 드러내는 포기가 있습니다. 이 포기가 바로 바울의 포기입니다. 바울은 자기의 모든 사도로서 누릴 권리,자유를 포기합니다. 갈2:20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안에 그리스도께서사신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나 바울은 없습니다. 예수 안에 나만 있을 수 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실 상을 소망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포기로 말미암아 오는 여러 가지 불이익과 손해들을 결코 불평하거나 억울해하지 않습니다.여러분 복음을 드러내는 포기,주님을 드러내는 포기가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믿음의 경주에서 상을 얻기 위하여 가장 포기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자기입니다.예수님께서는 자기를 따르기를 원하는 제자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셔습니다. 마16:24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을 것임이니라”고 합니다. 주님께서 주님을 따르는 제자되기 위하여 가장 강조하신 것은 우선적으로 자기입니다. “자기를 부인하라”는 것은 ‘자기에 대해서 아니요“라고 포기할 줄 알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렇게 자기에 대해서 포기한 자의 삶을 산 자들에게 마16:27 ”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깨 오리니 그때에 각 사람의 행한대로 갚으리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주님이 우리에게 보여준 모습은 철저하게 자기를 포기하는 삶의 모습이었습니다. 여기 포기해야 할 자기는 옛사람의 나입니다.나의 생각,나의 고집,나의 욕심을 말합니다.

종종 교회에서 나를 포기하지 않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 분들은 나를 드러내려고 합니다. 항상 내가 중심이 된 분들은 내가 왕이 되어 있습니다.이런 분들은 모든 것이 자기가 초점입니다. 모든 면에 권리를 주장합니다. 갖고있는 지식으로 자기를 나타냅니다. 자기의 자유함대로 거침없이 행동합니다. 할말 못할말을 아무데서나 마구 합니다..자기의 마음의 소욕대로 자유롭게 행동합니다. 오늘 본문에 소개되는 고린도교회가 그랬습니다. 이런 삶을 사는 분들은 결코 하늘에서 상이 없습니다. 다음에는 종으로서 사는 자입니다. 무익한 종처럼 자기의 모든 권리를 내려놓고 묵묵히 값없이 예수님의 나타냄을 위하여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교회 속에서 지금 나는 예수님을 나타내기 위함 포기가 무엇이 있습니까?
신자로서 당신의 삶이 모든 사람 앞에서 이제 증명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알아야 할 것은 좋은 가정,좋은 직장,좋은 교육으로서 증명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는 사람들 앞에서 자신이 진정 예수님을 믿는 신자라는 것이 증명될 필요가 잇습니다.

종종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당하는 어려움이무엇입니까? 세상이 여러분에게 예수믿으니 무조건 손해를 감수하고 무작정떠안을 때입니다. 이때 우리의 마음이 시험에 들 수 있습니다. “아니 내가 예수믿는다고 사람을 우습게 봐”. 그래서 무지막지하게 세상처럼 나가는 분들이 있습니다.물론 그렇게 하면 나는 손해보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손해봅니다.
그렇게 하면 나는 성공한 것같지만 예수님은 성공하지 못합니다. 그렇게 되면 세상에서는 높아진 것같지만 주님 나라에 가면 상을 받지 못합니다. 복음을 위하여 나를 포기하여 만물의 찌끼같이 주님 앞에 나를 내어놓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복음을 위하여 나의시간 나의 물질 나의 모든 야망들이 값없이 내려놓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상얻기를 간절하게 소망하셔야 합니다.

25절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여기 바울은 면류관을 얻기를 원하였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면류관은 이 세상으로 말을 하면 상을 말합니다. 바울은 때로는 상으로 면류관으로 표현을 합니다. 바울은 상을 위한 열심을 갖았습니다. 그래서 빌3: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에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고 소망을 고백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주시는 상과 세상에서 얻는 상의 차이가 분명히 있다고 합니다. 세상에서 얻는 것들은 썩을 것이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상은 썩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 상을 가만히 앉아서 운명에 맡기지 않았습니다. 그냥 눈가림만 하고 어쩔 수 없이 하는 태도도 아니었습니다. 매일 항상 그 상을 얻기를 소망하면서 자신의 삶과 시간과 모든 것을 집중하면서 그 소망을 향해 살았습니다.그 상을 위해 인생을 심었습니다. 그 상을 비젼으로 삼고 시간과 물질과 몸을 투자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과연 하늘의 것들을 사모하고 하나님이 주실 상을 소망하고 있습니까?
많은 경우에 우리는 이 세상에서 우리가 누릴 것들을 소망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분명하게 명심해야 할 것은 이땅에서 우리의 존재를 명심하여야 합니다. 성경 히브리서 기자는 11장13절에서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라고 합니다. 땅에 살고 있는 우리 성도는 이 땅이 “외국인”“나그네”라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고향은 이 곳이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곳에서 잠깐 있다가 갈 사람들입니다. 오늘 우리가 영원하지 않는 땅에서 살면서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본향입니다. 우리의 돌아갈 본향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늘을 생각하면서 하늘을 사모하면서 하늘을 바라보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없이 설 그 날을 기대하면서 지금 여기서 하늘의 방식인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하늘에 분명한 비젼이 있고 꿈이 있고 소망이 있으면 삶이 분명합니다. 방향이 분명합니다. 분명한 투자를 하는 것입니다.

이땅에서 우리가 날마다 삶을 살면서 항상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 삶의 마지막 지점입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한 것입니다. 전도서 3장에 보면 솔로몬이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때가 있나니 ”라고 합니다. 그때가 보면 날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죽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우니나라 죽음의 가장 비중이 큰 사망 원인은 순환기계 질환으로 전체의 26.3%에 달했고 *암 21.3% *교통사고 등 외인으로 인한 사망 14.3% 등의 순서입니다.

연령별로는 50대의 경우 암으로 인한 사망자수가 2백83.4명으로 이 연령층 전체 사망자수의 34.3%에 달했으며 60대의 사인중 암의 비중은 33.1%나 됐습니다. 40대 역시 암 사망자수가 전체의 25.9%인 96.3명으로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했고 30대 이하에서는 교통사고사, 추락사 , 익사 등 각종 사고로 인한 사망이 가장 높은 비중을 보였습니다.

우리나라의 사망자 수는 인구 10만명당 주요 사인별 사망자수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23개 회원국과 비교할 때 우리나라는 교통사고로 인한 사망이 남자 57.1명, 여자 20.0명으로 각각 1위를 차지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또 간암으로 인한 사망자수(남자 33.4명,여자10.2명)도 가장 많았으며 남자의 위암사망자수 (33.2명)는 일본(50.2명), 포르투갈(33.5명)에 이어 세번째로 빈도가 높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사고없이 질병없이 장수하면서 사는 것이 우리의 소원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우리 앞에 전개될 운명에 대해서는 우리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성 프란체스코가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이 옆에서 울고 있습니다. 프란체스코가 넌지시 물었습니다. “왜들 그렇게 슬퍼하느냐.” 한 제자가 대답했습니다. “섭섭해서 못견디겠습니다.” “너는 그럼 내가 얼마를 더 살았으면 좋겠느냐.” “지금까지 사신 것 만큼 더 사셨으면 좋겠습니다.” “그건 욕심이다.” 프란체스코가 다른 제자 보고 또 물어보았습니다. “너는 내가 얼마나 살았으면 좋겠느냐.” “일년만 더 사셨으면 참 좋겠습니다.” 그러자 “너는” 하고 또 다른 제자에게도 물었습니다. “하루만 더 사셨으면 좋겠습니다.”
프란체스코는 마지막으로 수제자에게 물었습니다. “너는 내가 얼마나 더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느냐.” “한 시간 더 사셨으면 좋겠습니다” “그 한 시간에 뭘 하려고.” “선생님과 함께 찬송하며, 하나님 앞에 한번 더 경건하게 예배를 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이 이런 경우를 만났다면 얼마를 더 요구하시겠습니까? 죽음 앞에서 당신은 어떻게 살겠습니까? 영원한 상을 소망하면서 영원한 것들을 소망하면서 살기를 바랍니다.


2. 상얻기를 위하여 자신의 몸을 쳐서 훈련하셔야 합니다.

27절에 “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다”라고 합니다.
여기 바울은 그리스도인과 자신의 삶이 운동장에서 운동하는 경주자에게 비유합니다. 그러면서 상을 위하여 운동선수들이 얼마나 절제하고 자신의 몸을 훈련하는가를 설명합니다.
상을 받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 이 몸을 어떻게 훈련하는가? 이것이 관건입니다. 여러분 믿음이란 훈련하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에 우리는 결단합니다. 여러분 베드로가 얼마나 멋잇게 결단하였습니까? “나는 주님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다른 사람은 다 떠날지라도 나는 떠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기도의 훈련이 없었습니다. 베드로에게는 의욕은 있엇지만 능력이 없었습니다. 우리의 몸은 훈련할 때 능력이 일어납니다.

이번 올림픽에서 여자양궁이 5연패했습니다.그런데 그 선수들이 말하는 훈련은 그야말로 지옥훈련이라고 합니다. 담대함을 키우기 위해서 해병대훈련,공동묘지훈련을 한다고 합니다. 하체의 근육을 키우기 위해서 엄청난 행군을 한다고 합니다. 담력을위해서 높은 다이빙 대에서 뛰어내리게 하기도 한다고 합니다. 사람들의 고함 앞에서 집중하기 위해서 사람들이 잔뜩 모인 야구장같은 곳에서 훈련하기도 합니다. 마음을 집중하기 위해서 수십시간을 명상훈련하게도 합니다. 이것은 비단 양궁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비단 운동경기는 단 몇분이지만 그 훈련시간은 수만번 수천배의 시간을 훈련합니다. 여러분 이것이 우리 영적인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그대로 적용이 됩니다.그러나 종종 선수들중에 이런 훈련의 과정을 잘 못하여 실패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몸의 체중관리를 못하여서 실패하기도 합니다. 먹지 말아야 할 약을 먹어서 실패하기도 합니다.

먼저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우리의 몸은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사실입니다.
고전3:16“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라고 합니다. 우리의 몸이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고 하나님이 이땅에서 주시는 가장 큰 복 중에 하나가 바로 우리의 몸에 성령님이 함께 하신다는 사실입니다.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성령님을 좇아 의의 병기로 사용되어집니다. 우리의 몸으로 찬송합니다. 우리의 몸으로 복음을 증거합니다. 우리의 몸으로 예배드립니다. 우리의 몸으로 봉사합니다. 얼마나 귀하고 값진 일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이렇게 성령님이 우리와 함께 계셔서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원하는 우리의 몸은 옛사람의 소욕도 여전히 갖고 있다는 사실입니다.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속에는 성령님의 소욕과 옛사람의 소욕이 다 같이 있습니다.문제는 이 소욕이 서로 대적관계에 있다는 것입니다. 갈5: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함이라”고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우리의 몸을 영적으로 훈련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내 안에 내 옛사람의 소욕이 나를 주장하지 못하게 하고 오직 성령님의 소욕이 일어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기위해서 여기 중요한 것은 27절에 “내 몸을 쳐”라고 합니다.이것은 결국 나의 옛사람의 방법,생각,자신감들을 제치고 하나님의 소욕이 나에게 익숙하도록 나를 구비하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들이 날마다 지속적으로 나의 몸을 쳐서 주님의 말슴을 읽어보십시오. 지속적으로 기도하면서 훈련하여 보십시오.그럴때마다 주님을 위한 마음이 불일 듯 일어납니다. 그러나 훈련하지 못하면 우리가 넘어지고 실패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 실패의 거울로 삼을 수 있는 경우가 바로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고전10장에 보면 실패한 이스라엘 역사가 소개됩니다.
우상숭배의 실패했습니다.간음의 실패했습니다. 하나님을 원망하고 모세를 원망하는 실패했습니다.
왜 실패했는가? 한마디로 자기의 몸을 쳐서 복종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다수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훈련되지 못한 몸으로 결국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이런 실패의 역사를 성경에 기록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고전10: 11 “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고 합니다.

오늘 당신은 당신의 몸을 쳐서 훈련하고 있습니까?
여러분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믿음 선수생활에는 은퇴가 없습니다.세상 선수들은 나이가 들어가고 그러면 은퇴를 합니다. 은퇴와 동시에 그의 놀라운 운동실력들이 녹슬기 시작합니다.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우리는 믿음에 현역이 되어야 합니다. 만일 과거만 회상하고 과거만 말하면 안됩니다. 지금 여기에서 내 몸을 쳐서 훈련해야 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보십시오. 생전에 주님은 끝까지 하나님으로서 자기의 능력을 과신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자신을 쳐서 복종하면서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 바울도 그렇습니다. 바울은 빌3:12절에 고백합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여러분 우리는 경주자처럼 내몸을 쳐서 복종하면서 달려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고 우리에게 상을 주실 것입니다. 상을 받고 기뻐할 그 날을 소망하시기 바랍니다. 오직 인생의 주되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모두가 면류관을 받아쓰고 영광돌리면서 기뻐하실 그 날을 꿈꾸면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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