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은혜의 광산에서 캐내는 보석 (빌 1:1-2)

  • 잡초 잡초
  • 379
  • 0

첨부 1


- 황금성 목사 (멋진교회)

설교는 크게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먼저 성경 본문을 먼저 정하고 본문이 말씀하시는 바를 해석하는 설교가 있습니다. 이것을 강해설교라고 합니다. 또 하나는 주제를 먼저 정하고 그 주제와 연관된 본문을 연결하는 설교가 있습니다. 이것을 주제설교라고 합니다.

강해설교와 주제설교는 각기 장단점이 있습니다.

주제설교는 한 가지 개념만 가지고 이끌어가기 때문에 논리적입니다. 설교의 기승전결을 구성하기에 좋습니다. 그러나 설교자의 생각이 말씀을 넘어서는 잘못을 범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강해설교는 본문에 충실한 메시지를 전달하게 됩니다. 설교자가 청중에게 말하고 싶은 것보다, 성경 말씀이 뭐라고 말씀하시는지를 먼저 봅니다. 본문이 오늘 우리에게 어떤 말씀을 하고 있는지를 살핍니다. 그래서 설교자 개인의 생각이 끼어들 여지가 좁습니다. 그러나 설교 내용이 산만해질 수 있습니다.

주제설교와 강해설교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좋은가를 따질 수는 없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강해설교 같은 주제설교를 좋아합니다. 이제까지 수요일에 강해설교를 해왔습니다. 요즘에는 기도학교를 진행하면서 주제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오늘부터 주일 설교를 빌립보서를 강해합니다. 이 빌립보서를 연말까지 4 개월 동안 설교하려고 합니다. 빌립보서는 비교적 짧은 서신입니다. 그래도 나눠서 설교를 14편 내지 15편을 하려고 합니다. 빌립보교회는 우리 멋진교회와 닮은 점이 많습니다. 그래서 빌립보서의 말씀은 우리 멋진교회에 커다란 힘과 유익을 주게 될 것입니다.

빌립보는 지금 올림픽이 열리고 있는 그리스에 있는 도시입니다. 그리스반도 북부에 있습니다. 바로 위에는 불가리아가 있습니다.

빌립보는 주전 365 년에 알렉산더 대왕의 아버지인 빌립 2 세에 의해 세워졌습니다. 그는 마게도니아와 이웃하던 드라케 땅을 빼앗아 도시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자기 이름을 따서 빌립보 성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빌립보는 주전 168 년에 로마에 의해 점령되었습니다. 그 때부터 빌리보는 로마의 영향 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

특히 주전 42 년에는 로마에 내전이 일어납니다.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의 군대가 부르투스와 카시우스 공화국 군대를 무찌릅니다. 그 전쟁의 공로를 세운 군인들이 이 빌립보에 머물렀습니다.

이 때부터 삼두정치가 시작됩니다. 옥타비아누스는 서방을, 안토니우스는 동방을, 레피두스는 아프리카를 다스립니다. 그러다가 옥타비아누스가 삼두정치를 반대합니다. 먼저 폼페이우스와의 전쟁으로 레피두스를 추방하고 아프리카를 차지합니다.

그리고 다시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가 서로 전쟁을 합니다. 이 전쟁은 주전 31 년에 악티움 해전에서 옥타비아누스가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연합군을 쳐부수면서 전쟁이 끝납니다.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의 여왕이었습니다. 로마인들은 클레오파트라는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옥타비아누스는 이집트에 선전포고를 하고 1 년 후에 승리를 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옥타비아누스는 로마 전체를 정복한 통치자로 황제에 오릅니다. 1 세기 동안 끌어오던 내전이 그쳤습니다. 그리고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취합니다. 아우구스투스는 ‘존엄자’라는 뜻입니다.

전쟁에서 승리한 옥타비아누스는 빌립보여 자신의 군대를 정착시킵니다. 그래서 빌립보 시민들은 로마와 같은 법적 혜택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로마 시민들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특권을 누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빌립보 시민들은 로마에 대한 충성심이 대단했습니다. 그들은 로마 황제에 대한 숭배와 로마 정신을 그대로 따랐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바울이 처음 빌립보에 들어와 선교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때 바울은 억울하게 감옥에 갇혀 고생을 합니다. 이 때 바울을 고소한 내용이 나옵니다. 사도행전 16:21입니다. “로마 사람인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치도 못할 풍속을 전한다 하거늘”

빌립보 사람들은 아예 자기들이 로마인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바울이 전하는 것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전하는 구원은 로마 황제인 가이사 외에 다른 왕인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라는 것으로 오해되었습니다. 바울이 전하는 내용은 곧 로마에 대한 반역 행위로 여겨졌던 것입니다.

빌립보는 아시아와 유럽이 맞닿은 곳에 있습니다. 먼저 아시아 지역을 선교하던 바울이 유럽 지역인 빌립보에 도착했을 때 특이한 점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유대 회당이 없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언제나 회당을 거점으로 복음을 전해왔습니다. 회당은 이스라엘이 나라를 잃고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을 때 만든 것입니다. 성전 대신 회당을 지어 그 기능을 대신했습니다. 이 회당은 제사 대신 예배를 드리는 곳이 되었습니다. 또 유대 어린이들을 교육하는 학교의 기능도 했습니다. 이국 나라에 살면서 본토의 역사와 언어를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교육은 중요했습니다. 이 때 세워진 교사가 바로 랍비입니다. 또 회당은 나그네의 여관과 같은 기능도 했습니다. 회당은 유대인 남자 10 명 이상이 되면 만들어집니다. 유대인들이 여행 중에는 이 회당을 찾아 음식을 제공받으면서 숙박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일본을 여행해보면 이 같은 사정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일본 교회는 어디를 가나 여행객들을 받아들이는 게스트 하우스 기능이 있습니다. 교회 한켠에 다다미방이 있습니다. 캐비닛에는 이부자리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일본에는 교회가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들끼리 각별히 통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교인들 간에 호의를 베풀어 줍니다.

유대 회당도 그런 분위기입니다. 각 국 나라에 흩어져 사는 유대인들이 회당을 세워 민족 문화를 유지하며 삽니다. 그러다 나그네 유대인이 방문하면 호의로 맞는 것입니다.

바울은 전도하면서 회당의 혜택을 많이 누렸습니다. 그래서 빌립보에 처음 도착했을 때 회당부터 찾았습니다. 회당이 있으면 자연히 그곳에는 유대인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먼저 복음을 전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빌립보에서는 회당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빌립보에 정착한 사람들은 대부분 로마 시민들이라 유대인이 적응하기 힘든 도시였습니다. 그래서 아예 유대 회당이 없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빌립보에서 선교의 어려움을 많이 겪게 됩니다. 바로 아래 도시인 데살로니가에서도 많은 핍박과 고난을 겪습니다. 그런 것이 모두 완전 이방 도시에서 겪는 선교의 어려움이었습니다.

빌립보서는 대표적인 옥중서신입니다. 바울이 감옥에 갇혀서 재판을 기다리는 중이었습니다. 바울은 재판의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몰랐습니다. 그러나 처형이라는 극단적인 판결이 나올지 모른다는 긴장감이 돌았을 때가 분명합니다. 편지 중간에 죽음을 예감하는 내용이 여러 번 나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기도하는 중에 석방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더 쓰시기 위해 반드시 석방할 것을 믿는다는 소망을 나타냅니다.

“이것이 너희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내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 <빌 1:19>

여기서 ‘내 구원’이란 단어는 헬라어로 ‘소테리아’입니다. 이 단어는 신약 성경에서 대부분 구원이라고 번역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어려운 처지에서의 구출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더구나 내 구원이라고 개인적인 용어를 사용했습니다. 이것은 감옥에서의 석방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석방을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이내 21 절에서 죽음을 각오합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빌립보서를 읽다가 보면 바울이 급하게 서두르는 장면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모두 죽음을 예감하면서 자기가 없어도 교회가 든든히 서도록 준비시키는 것입니다. 바울은 빌립보서를 쓰면서 죽음의 시간이 다가옴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절박한 상황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빌립보서를 ‘기쁨의 서신’이라고 부릅니다. 그 이유는 빌립보서 이 짧은 글 속에 ‘기쁨’, ‘기뻐하다’라는 단어가 무려 16 번이나 나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으로는 ‘그리스도’라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빌립보서는 온통 기쁨과 그리스도로 가득찬 편지입니다.

빌립보교회도 많은 시련이 있었습니다. 고린도후서에는 이들이 극한 가난을 겪고 있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고후 8:1-2>

여기서 마게도냐교회들이란 빌립보교회와 데살로니가교회를 말하고 있습니다. 마게도니야 지역이라면 베뢰아교회도 여기에 속할 수 있습니다.

또 빌립보교회는 내분을 겪고 있었습니다. 4:2 을 보면 유오디아와 순두게라는 두 명의 여성 지도자들이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지고 갈려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빌립보교회는 한 마음을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즉 빌립보교회는 외부로부터 심한 핍박을 받고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가난했습니다. 환경이 나쁠 때는 내적으로 똘똘 뭉쳐 대처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내분까지 겹치는 삼중고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 자신이나 빌립보교회는 기쁨이란 말을 서로 나눌 처지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 속에서도 바울은 빌립보서를 통해서 예수를 믿는 사람이 어떻게 위기 속에서 잔잔한 평화와 기쁨을 누릴 수 있는가 가르쳐줍니다.

저는 이번 피정에 빌립보서를 집중적으로 공부했습니다. 제가 빌립보서를 특히 좋아합니다. 빌립보서에는 주옥같은 성경 구절들이 많이 있습니다. 특히 위기 속에서 잔잔한 평화와 은혜를 누리는 비결이 이 서신에 가득한 것을 깨달았습니다.

바울 서신은 언제나 이렇게 인사로 시작을 장식합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빌 1:2>

은혜는 ‘카리스’라는 헬라식 인사용어입니다. 평강은 ‘샬롬’ 하는 히브리식 인사 용어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안녕’이라고 인사합니다.

여러분 은혜가 먼저 일까요, 평강이 먼저일까요? 평강은 은혜로부터 나옵니다.

은혜가 무엇입니까? 은혜는 대가 없이 거저 베풀어 주신 구원의 선물을 뜻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분에 넘치게 그런 선물을 주셨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분에 넘치게 대우해 주십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 은혜를 입으면 우리는 평강을 누리게 됩니다.
우리는 죄인입니다. 하나님 앞에 감히 나서지 못합니다.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 앞에 설 면목이 없습니다. 그럴 자격을 잃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그 죄를 대속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릴 용서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먼저 손을 내미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다시 회복되었습니다.

죄를 지었을 때 우리에게 평화가 없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서지 못하고 늘 불편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가 회복되고 나니 그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는 바로 평화인 것입니다.

빚진 자가 빚을 갚으면 평화를 얻습니다. 나는 빚을 갚을 능력이 없는데 누가 대신 갚아주면 그게 은혜입니다.

이혼까지 다다른 부부가 화해를 하고, 서로 용서하고, 사랑을 확인하면 다시 행복이 찾아옵니다. 부부 사이에는 이미 깊은 상처가 있어 당사자들은 해결을 못합니다. 이 때 누군가 나서서 두 사람이 다시 만나도록, 서로 용서하도록, 서로 이해하도록 중재해 주면 그게 은혜입니다.

환자는 치료약을 찾거나 명의를 만나 회복하면 평화를 얻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은혜는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은혜를 입으면 평강을 얻게 됩니다. 은혜가 있는 곳에는 평강이 있습니다.
여러분 이 은혜를 아십니까? 이 은혜를 받으셨습니까? 이 은혜를 누리고 계십니까?

은혜가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척 보면 은혜가 없는 모습이 온 몸에 나타납니다. 화를 잘 냅니다. 걸핏하면 토라집니다. 좋은 말이 안 나옵니다. 뭐든 트집을 먼저 잡습니다. 자기 자랑이 많습니다. 그러니 자연 감추는 것도 많습니다. 약점이 너무 많은데 잘난 척하려다 보니 감춰야 합니다. 그러나 그 감춘 것이 어설픕니다. 자기만 모르지 남들은 다 압니다. 자기자랑이 많습니다. 남들 앞에서는 그럴 듯하게 꾸미지만 뒤 돌아서면 초라합니다. 이것저것 거절을 잘합니다. 마음이 차갑고, 웃어도 공허합니다. 이 사람 저 사람과 잘 싸웁니다. 사람을 넓게 사귀지 못합니다. 인사를 잘 안합니다. 인사 받기를 좋아합니다. 하나님보다 돈을 더 사랑합니다. 이런 사람은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예배를 구경만 합니다. 은혜가 없기 때문에 이렇게 힘겹게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은혜를 어떻게 받는 줄 아십니까? 이 은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이 안 주시면 모를까 이미 주셨습니다. 받아야 하는 사람이 두 손을 내밀어 받으면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이 은혜를 깨닫는데 있습니다. 아 이것이 은혜로구나 하고 깨달으면 그게 은혜입니다. 은혜를 받고도 은혜로 모르고 있으니까 은혜를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미 2000 년에 예수님이 나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이 은혜는 이미 허락된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며 감격해야 합니다.

빌립보서의 보석은 기쁨입니다. 그리고 그 기쁨은 평화 속에서 누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평화는 또한 은혜로부터 나옵니다. 그러므로 은혜는 광산입니다. 은혜의 광산에서 우리는 평화라는 보석과 기쁨이라는 보석을 깨낼 수 있습니다.

바울은 극한 고난 속에서 우리에게 잔잔한 평화와 기쁨을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여자 양궁 선수들이 아테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습니다. 특히 여자 단체전 마지막 결승전 장면은 아찔했습니다. 마지막 한발을 남겨 놓고 10 점 과녁을 쏘지 못하면 금메달을 놓치는 상황입니다. 어떻게 거기까지 가게 되었는지, 한 발을 남겨 둔 상황은 정말 숨이 꼴까닥 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시간도 흘러 10 초 이내로 쏘지 않으면 지는 상황입니다. 보고 있는 제 심장도 어찌나 벌렁거리는지 모릅니다. 저는 그 마지막 순간을 보면서 내가 활을 쏴야 하는 선수가 아닌 게 감사했습니다. 활은 떨리면 끝입니다. 마음이 흔들리면 절대로 명중시킬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여자인 박성현 선수가 듬직하게 10 점 과녁을 명중시켰습니다.

나중에 인터뷰를 하는데 박성현 선수 말이 마지막 화살을 하나님께 맡기고 활을 당겼다고 고백했습니다. 박성현 선수는 크리스천이었습니다. 역시 하나님의 딸이었습니다.

저는 이 마지막 화살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봅니다. 위기의 순간에도 흔들리지 않은 신앙의 힘이라고 믿습니다. 은혜는 그런 것입니다.

오늘 성찬식이 있습니다. 오늘 성찬은 주님이 차려주신 은혜의 상입니다. 주님의 성찬을 받으면서 은혜를 함께 받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