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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 양을 먹이라 (요 2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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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이한규목사(분당샛별교회)

< 사랑을 주고받는 삶의 중요성 >

사람에게 비전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비전이 있어야 발전도 있습니다. 그러나 비전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주님을 위한 비전’보다 ‘주님을 향한 사랑’이 더 중요합니다. 마르다는 주님을 위해 일했고, 마르다는 주님을 향해 마음을 드렸습니다. 마르다도 소중한 여인이었지만 주님은 마리아가 더 좋은 편을 택했다고 하셨습니다(눅 10:42). 신앙생활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영화 ‘지붕 위의 바이올린’을 보면, 너무 살기 힘드니까 주인공 테빗에게 아내가 갖가지 불평을 했습니다. 그때 테빗이 묻습니다. “Do you love me?(당신은 나를 사랑하오?)” 그 말에는 대답도 하지 않고 아내는 계속 25년 동안 자기가 힘겹게 산 얘기를 했습니다. 그러자 테빗이 또 묻습니다. “I know that. But do you love me?(그것은 알고 있소. 그러나 당신은 나를 사랑하오?)”

무슨 말입니까? 문제는 힘든 삶이 문제가 아니라 사랑이 식어진 것이 문제라는 말입니다. 사랑이 있다면 수고 자체가 기쁨이 될 수 있고, 고통도 즐거움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랑 하나만 있으면 불행을 얼마든지 행복으로 소화해 낼 수 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사랑이 식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큰 과제는 사랑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 일하는 것도 소중한 일이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행복감을 주시려고 일을 맡기신 것이지 일을 시키려고 우리를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가 주님의 일을 하는 것보다 먼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을 원하십니다. 사랑이 없는 사명은 야욕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베드로의 사명을 회복시키기 전에 먼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질문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질문은 결국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말씀입니다. 자기가 사랑도 하지 않으면서 “너 나를 사랑해?”라고 묻는 사람은 없습니다. 저도 가끔 자녀들에게 묻습니다. “은혜야! 한나야! 엄마 아빠 사랑해?” 그 말은 “내가 너희들을 정말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그처럼 사랑을 나누는 삶이 얼마나 큰 힘과 용기와 희망을 줍니까?

사랑은 기적의 출발점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도 주님이 백성들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출발했습니다. 사랑 받는다는 생각 하나로 병을 딛고 일어서는 사람이 많습니다. 사랑 받는다는 말 한 마디로 시련을 극복하고, 웃음을 되찾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처럼 사랑을 주고받는 삶에서 엄청난 일들이 일어납니다.

기도할 때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성령님의 음성을 듣고 “주님! 저도 사랑해요!”라는 이 한 마디만 해도 온 몸에 생명력으로 가득하고 모든 문제가 다 사라지는 것을 느낍니다. 그 생명력이 나를 변화시키고 환경을 이기는 힘의 원천이 됩니다.

< 주님께 과감히 사랑을 고백하십시오 >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베드로는 조용히 대답했습니다. 본문 15절 말씀을 보십시오.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이 대답을 보면 평소 베드로의 모습과는 달리 진지하고 침착합니다. 옛날 같았으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을 것입니다. “주님! 섭섭합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시는 것을 정말 모르십니까? 누구보다 사랑합니다. 다른 사람은 다 떠나도 저는 떠나지 않습니다. 저는 주님 앞에 뼈를 묻겠습니다.”

옛날에는 그렇게 대답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얼마 전에 그렇게 말하고 배신했기 때문에 그는 신중해지고 겸손해졌습니다. 그래서 사랑을 고백하는 대답 자체도 주님의 판단하심에 전적으로 위임했습니다. “주여!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을 주님이 아실 것입니다.”

사실 우리 중에도 베드로처럼 대답하는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정말 주님을 사랑하지만 그 마음과는 달리 주님의 뜻을 외면하는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분명히 주님을 사랑하지만 마음에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도 있고, 형식과 위선도 있고, 가끔 거짓말도 하고, 자기 일을 더 우선시합니다. 그것도 큰 의미로 보면 주님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런 경우를 당할 때마다 마음속에 성령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때에 과감히 우리는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 제가 사랑하는 줄 주님이 아시지요?” 그 고백에는 “용서해주세요. 저의 연약함 때문에 또 주님을 실망시켜 드렸지만 저의 마음만은 정말 주님을 사랑합니다.”하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그런 고백이 있을 때 우리에게 다가오는 죄책감을 이기고 또 그런 대로 얼마간 살아갈 힘을 얻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주님 아시지요? 제가 사랑하는 줄 아시지요?”라는 고백은 최고의 능력 있는 기도 중의 하나입니다. 찬송가 405장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을 부를 때 우리는 가끔 가사를 이렇게 바꿔 부를 때가 있습니다. “아시지요? 아시지요? 아시지요? 주님!” 그 고백을 하면 가슴의 맺힌 것이 뻥 뚫리는 것 같고, 죄책감의 사슬이 풀리는 것 같고, 무거운 짐으로 억눌린 어깨가 펴지는 것 같습니다.

지금도 주님은 너무 자주 실패하는 우리에게 묻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때 우리가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이 아시지요? 제가 어떤 비참한 모습을 보여도 저는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라고 하면 급속히 우리의 상처가 치유되고, 마음이 꽂힌 사단의 화살이 뽑히게 될 것입니다.

< 겸손은 축복의 전령입니다 >

그리고 또 한 가지 “주님이 아시지요?”하고 대답의 주도권까지 주님에게 넘겨버린 베드로의 모습에서 무엇을 배웁니까? 겸손함을 배우게 됩니다. 한때 베드로는 정말 자신만만했었습니다.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마26:33).” 그러나 그는 철저히 무너졌습니다. 자신을 믿고 자신만만하면 반드시 넘어집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라고 했습니다.

어느 날, 신상을 실은 나귀가 동네를 지나가니까 사람들이 다 공손하게 절했습니다. 그때 나귀가 착각했습니다. “내가 이렇게 위대한 존재인 줄 몰랐는데! 앞으로 나는 짐을 안 질 거야!” 그리고 짐을 벗으려고 앙탈을 했습니다. 바로 그때 주인의 매가 볼기짝을 사정없이 쳤습니다. 나귀는 자존심이 상했습니다. “이 사람이 나를 물로 봐!” 하고 뻗대고 가지 않다가 더욱 죽도록 얻어맞았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사람에게는 울타리가 되어주시지만 교만하면 더 이상 울타리가 되어주시지 않습니다. 그 순간, 그의 앞날에는 무서운 일이 벌어지게 됩니다. 은혜와 교만은 상극입니다. 은혜 받기를 원하면 자신을 낮춰야 합니다.

실력을 갖추려고 힘써야 하지만 진짜 실력 있다고 착각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능력 있는 성도가 되려고 해야 하지만 진짜 능력 있다고 착각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사람의 실력과 능력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다 무덤 위에서 잠깐 춤추는 인생의 칼춤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주님은 능력 있는 사람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순종하는 사람을 원하십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고, 겸손은 축복의 선봉입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기도의 주도권도 다 주님께 넘겨드려야 합니다. 열심히 기도한 후에 이렇게 기도를 마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이 문제를 풀어주시기를 원합니다. 내 자녀가 이렇게 되기를 원합니다. 이 사업체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도구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기도의 결과에 대한 주도권까지 다 주님께 넘겨드리면 기도 후에 무엇이 찾아옵니까? 놀라운 평강과 감사가 찾아옵니다. 반면에 기도를 끝낸 후에 여전히 불안과 집착이 있으면 그것은 아버지의 뜻대로 기도한 것이 아닙니다. 기도한 후에 평강과 감사가 있어야 아버지의 뜻대로 기도한 것이고, 그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최상의 길을 허락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합니까? 어떤 분은 하나님을 만나겠다고 신령한 분을 찾고, 신령한 산을 찾고, 신령한 방법을 찾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는 방법은 아주 간단합니다. 우리가 겸손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됩니다.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듯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는 겸손한 자에게 흘러 들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철저히 우리의 주도권을 주님께 넘겨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과 섭리에 항상 “예!” 하는 자세를 가져야 하고, 기도도 “내가 이것을 원합니다”라고 요구만 하지 말고, “주님! 무엇을 원하십니까?”라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기적은 ‘요구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인정하고,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내 뜻보다 앞세워서 사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축복 받으려면 겸손해야 합니다.

< ‘내 어린 양’을 먹이라 >

결국 베드로의 겸손한 사랑의 고백을 받고 주님은 바로 말씀하셨습니다. 15절 하반부 말씀을 보십시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이 주님의 말씀에는 몇 가지 중요한 교훈이 담겨 있습니다.

1. 양은 주님의 양입니다.

주님은 ‘내 어린 양’이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목자에게 양은 자기 양이 아니라 주님의 양입니다. 심지어는 자기가 낳은 자녀도 자기 자녀가 아니라 주님의 자녀입니다. 그래서 감정적으로 맘대로 때려서는 안 됩니다. 야단치거나 매를 들 때도 기도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존중하면서 야단치고 매를 들어야 합니다.

자녀뿐만 아니라 사실 내 배우자도 내 배우자가 아니라 다 주님의 신부들입니다. 그러므로 배우자를 주님의 신부처럼 여기고 사랑하고 존경하고 잘 돌봐야 합니다.

꽤 오래 전에 TV에서 96세 된 할아버지와 92세 된 할머니의 결혼 70주년 인터뷰가 있었습니다. 아나운서가 물었습니다. “할아버지! 다시 태어나도 할머니하고 결혼하겠습니까?” 할아버지가 대답했습니다. “생각해봐야겠는데...” 이번에는 할머니에게 물었습니다. “할머니! 다시 태어나도 할아버지와 결혼하시겠습니까?” 할머니가 대답했습니다. “내가 돌봐주어야죠.” 그 돌봐준다는 말이 “사랑한다.”는 말보다 더 감동을 줍니다. 우리는 배우자를 사랑해서 결혼했지만 더 나아가 주님의 신부로 생각하고 힘써 돌봐주어야 합니다.

자녀와 배우자뿐만 아니라 모든 소유도 자기의 소유가 아니라 주님의 소유입니다. 우리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겨주신 것입니다. 내 몸도 내 것이 아니고 주님 것입니다. 잘 돌봐야 합니다. 자기 몸 관리도 못하는 사람에게 큰일을 맡길 수 없습니다. 내 사업도 내 것이 아니라 주님의 사업입니다. 최선을 다해 경영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 내 것은 없습니다. 내 것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의 미래에는 저주와 불안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게 됩니다. 반대로 모든 것이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위임받아 잠시 맡은 것이라고 생각하면 놀라운 평안과 신비한 축복이 찾아오게 될 것입니다.

2. 사랑의 폭을 넓혀야 합니다.

주님이 “내 양을 먹이라!”고 표현을 한 것은 구체적인 필요를 채우는 행동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양떼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마음만 사랑하고, 구체적인 필요를 채우지 못하는 것은 감상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랑은 감상이 아니라 실천입니다. 물론 누구나 어느 정도의 사랑은 있습니다. 누구나 자기 자녀는 사랑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 사랑의 폭을 넓히는 것입니다.

가끔 주님께서 하신 “내 양을 먹이라!”는 말을 오해해서 내 가족만 생각하고, 내 교회만 생각하고, 내 주변만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물론 가까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필요합니다. 가까운 사람들에게는 무한책임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그 손길이 확대되어야 합니다. 그 손길이 확대될수록 주님의 축복도 확대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교하는 마음이 얼마나 소중한 마음인지 모릅니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자꾸 사랑의 폭을 좁히려고 합니다. 그래서 파당이 생깁니다. 자칫 잘못하면 그 파당이 하나님 나라에 가장 큰 해를 끼칠 수 있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십계명에 한 계명을 추가해서 11계명을 만들었습니다. 그 열한 번째 계명은 “교회에서 계모임을 갖지 말라!”라는 것이었습니다. 교회에서 권사 2명, 집사 8명, 평신도 2명, 그렇게 해서 1년 한 바퀴 돌고, 다음 해에는 누구 끼워주고, 안 끼워주고 해서 3년쯤 돌면 그 모임에는 아무도 끼지 못합니다. 그러다가 그 계판이 깨지면 개판이 되고 교회에 큰 해가 됩니다.

하나님은 파당을 제일 싫어하십니다. 지나친 개 교회주의와 지나치게 교단을 따지는 태도는 전체 교회를 생각하시는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파당을 짓는 모습이 될 수 있습니다. 고린도교회에 있었던 아볼로파, 바울파, 베드로파, 그리스도파의 모습이 오늘날 교단 간에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교회와 성도는 선교 마인드를 가지고 사랑의 폭을 힘써 넓힐 수 있어야 합니다.

3. 양을 잘 양육해야 합니다.

가끔 보면 양을 잡아먹거나 양털을 깎아 팔아서 돈을 벌려고 양을 먹이는 분도 있습니다. 동물 양은 그렇게 해도 좋지만 사람 양은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주님은 “내 양을 잡아먹으라!”고 하지 않고 “내 양을 먹이라!”고 했습니다. 양을 잘 먹이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자기가 먹이가 되어주어야 합니다. 내가 먹이가 되고 남을 배부르게 하는 삶이 바로 십자가의 삶입니다.

가끔 보면 잡아먹겠다고 달려드는 분이 있습니다. 인터넷을 보면 익명을 이용해 가끔 잡아먹겠다고 노골적으로 달려드는 분이 있습니다. 그런 분들을 맞이해서 굳이 되치고 같이 싸울 필요가 없습니다. 먹이가 되어주겠다는 심정으로 서면 마음에 평안도 오고, 하나님께서 더욱 큰 축복으로 갚아주실 것입니다.

결국 “내 양을 먹이라!”는 말은 “십자가를 지라!”는 말입니다. 사실 십자가에서 죽는 것이 진짜 사는 길입니다. 그런데 신기한 일은 십자가에서 죽음을 선언할 때 내 상처도 치유되고, 내 아픔도 치유되고, 내 분노도 사라지고, 내 과거도 치유된다는 것입니다. 죽어야 치료가 됩니다.

어떤 분이 수술을 위해 마취를 받는데 마취 후에 누가 바늘로 마취 부위를 찔렀습니다. 그분이 “아야!” 하니까 의사 선생님이 “어! 아직 안 죽었네!”하고 수술을 늦췄다고 합니다.

죽지 않으면 수술도 못하고 치료도 못합니다. 죽어야 수술도 하고 치료도 받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를 맞이해서 아프다고 소리 지르면 힘들다고 소리 지르면 치유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죽은 줄 알고 가만히 있으면 그때 놀라운 치유의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우리가 살아 있으면 병도 살아있지만 우리가 완전히 죽으면 육신적인 병균과 영적인 병균도 다 죽습니다. 그러므로 내 속의 육신적인 병과 영적인 병을 치료하려면 무엇보다 “십자가 안에서 죽었다! 십자가를 지고 죽겠다!”고 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바로 그때 우리의 모든 상처와 불행, 우리의 모든 저주와 아픔이 다 사라지고 육신의 병도 치유될 것입니다.

< 희생하면 천국의 주인공이 됩니다 >

어느 날, 요단강 계곡에 있는 큰 나무 셋이 서로의 비전을 나눴습니다. 첫째 나무의 비전은 예루살렘 성전의 기둥이 되는 것이었고, 둘째 나무의 비전은 로마를 오가는 큰 범선의 노가 되는 것이었고, 셋째 나무의 비전은 황제가 지닌 칼의 칼집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원대한 비전과는 달리 첫째 나무는 베들레헴 말 밥통이 되었고, 둘째 나무는 갈릴리 호수의 작은 돛단배가 되었으며, 셋째 나무는 사형수를 묶는 십자가 형틀이 되었습니다. 세 나무는 다 자기의 처지를 탄식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말 밥통이 된 나무에 아기 예수가 놓였습니다. 얼마 후에 돛단배가 된 나무에는 예수님이 올라타셨습니다. 또 얼마 후에 십자가 형틀이 된 나무에 인류의 모든 죄를 지고 예수님이 달리셨습니다. 이 나무들은 처음에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했지만 예수님을 위한 영광스런 도구가 되어 나중에는 어떤 나무보다 기뻐했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인생이 보잘것없어 보여도 예수님을 내 안에 모시고 십자가를 지고 살면 우리는 누구보다 영광스런 존재가 될 것입니다.

1936년, 영국의 에드워드 8세가 왕이 된지 채 1년이 되지 않았을 때, 미국의 이혼녀인 심슨 부인과 결혼하려고 왕의 지위를 포기한 일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사건을 ‘세기의 러브 스토리’라고 하며 전 세계가 칭송했습니다. 그는 왕위는 잃었지만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처럼 많은 믿음의 선배들은 예수님과의 러브 스토리를 위해 그들이 가진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내버렸기에 그들은 이 땅에서 행복하게 살았고, 천국에서는 대 환영을 받았을 것입니다. 우리도 기쁘게 십자가를 질 때 이 땅에서는 행복하게 살고, 천국에서는 누구보다 영광스런 존재로 입성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주님의 양떼를 사랑함으로 큰 은혜를 예비하는 삶을 살지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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