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다윗의 일생(11) : 하나님 한 분으로 기뻐한 사람 (삼하 6:12~23)

  • 잡초 잡초
  • 504
  • 0

첨부 1


- 설교 : 홍문수 목사 (신반포교회)

여러분에게 질문을 하나 드립니다. 지금까지 일평생 살아오면서 가장 기뻤던 때가 언제였습니까? 한번 기억을 더듬어 보시기 바랍니다. 아마 사람에 따라 여러 가지 대답이 나올 겁니다. 시험에 합격했을 때 ... 취직이 되었을 때 ... 결혼했을 때 ... 돈을 많이 벌었을 때 ... 승진했을 때 ... 학위를 받았을 때 ... (운동 선수 같으면) 금메달 땄을 때 ... 여러분은 언제였습니까? 아마 비슷한 이야기를 하실 수 있을 겁니다.

그러면, 다윗의 경우는 과연 어떨까요? 그에게 직접 질문해 볼 수는 없지만 한번 상상 속에서 그에게 인터뷰를 해 보십시오. “미스터 다윗! 당신은 평생을 살면서 언제 가장 기뻤습니까?”라고 물어보십시오. 그러면 그는 뭐라고 대답할까요? 정확히 알 수야 없겠지만, 어느 정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어느 때였을까요? 골리앗을 때려눕혔을 때 ... ? 전쟁에서 승승장구함으로 군대장관에 등용됐을 때 ... ? 왕의 사위가 됐을 때 ... ? 이스라엘의 왕으로 추대됐을 때 ... ? 이런 경우들을 생각해 보면, 그 하나하나가 정말 큰 기쁨의 순간들이었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런데 성경을 잘 연구해 보면 이보다 훨씬 더 크게 기뻐했던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왕으로 즉위했을 때가 아닐까 생각되지만, 그보다 더 기뻐한 때가 있었습니다. 여러분, 언제였을까요? 벌써 힌트가 나왔죠. 본문에 기록된 대로 법궤를 다윗 성 즉 예루살렘 성으로 운반 안치했던 그때였습니다. 법궤는 성전이 건축되기 전 성막의 지성소에 두던 궤짝입니다. 성막은 간이 성전으로 성전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임재의 처소입니다. 특히 법궤의 뚜껑 부분인 속죄소는 아주 중요합니다. 바로 거기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만나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출25:22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법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 그래서 법궤를 언약궤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와 비슷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훨씬 후의 일입니다만, 역대상 29장을 보면 그 아들 솔로몬이 성전 건축을 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마친 후였습니다. 대상29:9 보면 다윗이 백성들과 함께 성전 건축에 필요한 모든 자재(금은보화, 목재 등)를 준비해 놓고 몹시 기뻐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백성이 자기의 즐거이 드림으로 기뻐하였으니 곧 저희가 성심으로 여호와께 즐거이 드림이며 다윗 왕도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니라” 이상하죠? 대개 세상에서는 뭐가 생겨야 기뻐하는 법인데, 물질을 잔뜩 바치고도 좋아하다니! 이것은 하나님 때문에 기뻐한 겁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운반할 때 다윗이 훨씬 더 기뻐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역시 하나님 때문에 기뻐한 것입니다. 이 기쁨은 세상의 조건이 주는 기쁨이 아닙니다. 세상의 그 어느 것으로 인한 기쁨보다 더 큰 기쁨입니다. 이것이 곧 다윗이 일평생, 모든 형편 가운데서도 기뻐하며 살 수 있었던 비결입니다. 그 기쁨을 함께 살펴보시고, 저와 여러분도 하나님으로 인한 그 기쁨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1] 다윗의 기쁨 : 하나님 한 분으로 인한 기쁨

다윗이 왕으로 즉위할 때까지도 법궤가 잘 관리되지 못하고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법궤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심을 상징하는 아주 중요한 물건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엘리 제사장 당시 전쟁터에 갖고 나갔다가 블레셋에게 빼앗기고 맙니다.(사무엘 上 5장~7장 참조) 그 후 다시 돌려받았지만 챙기는 사람이 없어서 오랫동안 기럇여아림(삼하6:2 바알레유다의 원래 지명) 아비나답의 집에 무려 70년 동안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은 그만큼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 있었고, 하나님도 그들로부터 멀리 떠나 계셨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왕이 되자 무엇보다 이스라엘의 신앙을 다잡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방치된 법궤를 수도로 옮겨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삼하6:1~11 보니까, 처음 운반 과정에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하나님의 법에 어긋나게 하다가(민4:15 규정에 보면, 법궤는 절대 손대면 안 되고, 레위인 고핫 자손들이 채로 꿰어 어깨에 메고 운반해야 되는데 법궤를 싣고 운반하다 튀니까 손으로 붙잡음) 그만 웃사(아비나답의 아들)가 즉사하고 맙니다. 두려움에 질린 다윗은 법궤 운반을 중지하고 오벧에돔의 집에 임시 보관하게 됩니다.

그로부터 3개월 후 소식을 들으니까 하나님이 오벧에돔의 집을 축복하셨다는 겁니다.(12절) 다윗은 이제 하나님의 진노가 가셨구나 안심하고 법궤 운반을 다시 시도합니다. 이번엔 하나님의 법대로 조심조심 운반합니다. 조심스러워하면서도 다윗은 매우 기뻤습니다. 그 모습을 마음 속에 그려볼 수 있습니다.
* 12절 → “ ... 기쁨으로 메고 ... ” 다윗은 기쁨으로 법궤를 운반하고 있습니다.
* 13절 → “ ... 소와 살진 것으로 제사하고 ... ” 기쁨으로 감사의 제사를 드렸습니다.
* 14절 → “ ... 힘을 다하여 춤을 추는데 ... ” 너무 기뻐서 덩실 덩실 춤을 추었다는 겁니다. 20절 보면, 심지어 몸을 드러냈다고 했습니다. 배꼽이 나왔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것은 아주 특별한 일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일상생활 중에 혹은 예배 중에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자주 춤을 추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경우는 또 다른 경우입니다. 국가 경축 행사의 경우 백성들이 열을 지어 행진하는데, 맨 앞에 광대를 세워 춤을 추게 했다고 합니다. 이때 광대는 옷이 반쯤 벗어질 정도로 우스운 몸짓으로 덩실 덩실 춤을 추면서 행진했습니다. 그러니까 다윗이 광대의 입장에서 춤을 춘 겁니다. 왕이지만 체면불구하고 덩실 덩실 춤을 추었습니다. 옷도 ‘베 에봇’을 입었다고 했는데 왕복을 벗어던지고 예식에 참여할 때 입는 평복을 입은 겁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 앞에서 한 어린 아이처럼 기뻐했던 것입니다.

* 15절 → “다윗과 온 이스라엘 족속이 즐거이 부르며 나팔을 불고 ... ” 환호성을 지르며 기뻐했다는 겁니다.
* 16절 → “ ...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서 뛰놀며 춤추는 것을 보고 ... ”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좋아하는 다윗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 18절 → “다윗이 ...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백성에게 축복하고 ... ” 다윗은 그 큰 기쁨을 주체할 수 없어 백성과 기쁨을 나누며 축복합니다.

여러분, 다윗이 어떻게 이렇게 크게 기뻐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어떤 세상적인 물질적인 조건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오랜 세월의 시련에서 벗어나 왕이 된 것도 기쁘지만, 이때 다윗의 기쁨은 그 이상이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신령한 기쁨입니다. 세상이 주는 기쁨과 전혀 다른 것입니다. 비교해서 살펴보죠.

① 세상이 주는 기쁨 :

세상이 주는 기쁨은 무엇이 생겨서 기쁜 것입니다. 돈이 생겼다든지, 권세가 생겼다든지, 재밋거리가 생겼다든지 ... 그럴 때 기분이 좋은 겁니다. 이런 것들은 다분히 조건적이며 상대적입니다. 일시적이고 가변적입니다. 그 무엇이 없어지면 기쁨도 안개처럼 쉬이 사라집니다. 혹시 그 무엇이 그대로 있다 해도 금세 더 큰 욕심이 생기므로 마음속에 불만이 치올라옵니다. 가지면 더 갖고 싶고, 되면 더 되고 싶은 게 인간의 본능입니다.

이런 말이 있죠. “바다는 메워도 사람의 욕심은 못 메운다.” 채울 수 없는 것이 사람의 욕심이라는 말입니다. 한강투석(漢江投石)이란 말도 있죠. 한강에 돌을 아무리 많이 던진다 해도 어느 세월에 메우겠습니까? 이처럼 인간의 욕심은 무한합니다. 솔로몬은 이런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고 이렇게 고백합니다.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 어느 곳으로 흐르든지 그리로 연하여 흐르느니라...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아니 하는도다”(전 1:7~8)

그렇습니다. 세상이 주는 기쁨을 따라가다 보며 반드시 실망할 때가 옵니다. 채울 수 없는 마음을 부여잡고 탄식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이 주는 기쁨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을 구해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행복의 길입니다.

②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 :

무한한 인간의 마음은 오직 하나님만이 채우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마음은 죄로 인해 ‘밑 빠진 독’과 같이 되었습니다. 세상의 그 무엇으로 채우고 또 채워도 항상 공허합니다. 그러나 십자가 은총으로 죄에서 구원받은 영혼은 하나님으로 채움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기쁨으로 충만해집니다.

하나님은 진정한 기쁨의 원천입니다. 다윗은 그 사실을 깨닫고 시편의 구구절절 그 기쁨을 노래했습니다. 그 구절들을 몇 개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시43:4 “그런즉 내가 하나님의 단에 나아가 나의 극락의 하나님께 이르리이다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수금으로 주를 찬양하리이다” 극락(極樂)이란 불교도들이 말하는 극락이 아니고, 최상의 기쁨이란 뜻입니다. 그러니까 다윗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최상의 기쁨이 되신다는 겁니다. 시16:11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오직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기쁨이 충만할 수 있다는 겁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요4:14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요7:38~39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 ”

그런데 이런 사실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은 우리에게 이런 무지한 말을 합니다. “도대체 예수 믿는 사람들은 도대체 무슨 재미로 사나?” 자기들 생각에는 정말 재미없죠. 술을 마시나 담배를 피우나, 그렇다고 이런 저런 짓을 하나 ...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들이 모르는 재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기쁨을 맛보면 재미있는 게 너무나 많습니다. 예배드리는 게 재미있고, 찬양하는 게 재미있고, 봉사하는 게 재미있고, 전도하는 게 재미있고, 선교하는 게 재미있고, 성도 간에 교제 하는 게 재미있고 ... 모든 생활이 재미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은 세상의 조건으로 잠시 기분이 좋은 것과 전혀 다릅니다. 세상이 주는 것보다 엄청 더 풍성한 기쁨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이렇게 노래합니다. 시4:7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저희의 곡식과 새 포도주의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 농부에게 가장 기쁜 순간이 언제입니까? 당연히 수확할 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은 그때의 기쁨보다 더 크다는 겁니다.

요즘 올림픽 경기 중계방송을 시청하면 흥미로운 장면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특히 메달을 따는 선수들의 모습을 보면서 여러 가지를 생각해 봅니다. 그 중에 한 가지는 메달을 획득하는 순간 선수들의 표정입니다. 그 기쁨 얼마나 큰지 ... 특히 금메달을 따는 선수들의 얼굴을 보면 환희 그 자체입니다. 얼마나 기뻐하는지 펄쩍 펄쩍 뜁니다. 그동안 얼마나 오랜 시간 피땀을 흘렸을까요? 그 결실을 보는 순간 얼마나 감격스럽겠습니까? 그러나 ... 김 빼는 소리인지 모르지만 이런 생각도 해봅니다. 그런데 그 기쁨이 얼마나 오래 갈까 ... ? 세상의 기쁨은 안개와 같습니다. 어느 새 사라지고 맙니다.

올림픽 경기 때마다 따라다니면서 선수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한 선교단체가 있습니다. 그 단체가 내거는 캐치프레이즈가 있습니다. More Than Gold ! 금메달보다 더 좋은 게 있다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 기분이 주시는 기쁨은 금메달에 비할 바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은 그렇지 않습니다. 변치 않습니다. 사라지지 않습니다. 설사 세상의 조건들이 결핍되어도, 상실되어도 ... 게다가 시련과 고난까지 몰아닥쳐도 그 모든 것을 극복하고 누릴 수 있는 신령한 기쁨입니다. 하박국 선지자의 고백이 바로 그겁니다. 합3:17~18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사도 바울은 많은 고난을 겪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가 그 모든 것들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 즉 신령한 기쁨 때문입니다. 고후1:5,9~10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 ... )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시리라 또한 이후에라도 건지시기를 그를 의지하여 바라노라” 얼마나 큰 고통이면 마음에 사형선고를 받았다고 말합니까? 정말 죽을 지경이었다는 건데 ...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신령한 기쁨이 있기에 승리할 수 있었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그 기쁨은 절대로 빼앗기지 않는 완전한 기쁨입니다. 요16:22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그러기에 다윗은 오직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했습니다. 그의 짤막한 고백에 그의 기쁨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시23: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이 구절을 북한 성경으로 보면 색다른 맛이 납니다. (작년 북한 방문 시 한 권 얻은 것인데, 이따금 우리 성경과 비교하면서 읽어보면 흥미롭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아쉬울 것 없어라” 그렇습니다. 내게 하나님 한 분만 함께 해 주시면 정말 아쉬울 게 없어집니다. 다윗은 그 놀라운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그래서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운반해 올 때 하나님을 모시는 심정으로 그처럼 기뻐했던 것입니다.

누가복음 19장을 보면 삭개오의 기쁨이 나옵니다. 그는 여리고의 세관장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로마 식민치하에서 친 로마 행위로 돈을 많이 벌었던 관계로 부자이기는 한데 늘 마음 한 구석에 죄책감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자기 동네에 오신다는 겁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면 인생의 고민을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이 설레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찾아갑니다. 인산인해였습니다. 그는 키가 작아 예수님 얼굴을 보기조차 힘들었습니다. 궁리 끝에 뽕나무에 올라가서 봅니다. 그때 예수님과 눈이 마주칩니다. 눅19:5~6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 ” 예수님이 삭개오의ㅡ 집에 가시면서 선물 보따리 갖고 간 게 아닙니다. 오히려 대접을 받으셨을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모신 것 자체가 기쁨이기에 삭개오는 너무 좋았던 겁니다. 주님을 모신 기쁨!

이 기쁨이 있으면 어떤 형편 가운데서도 행복한 인생이 됩니다. 찬송 시인 화니 크로스비를 기억하시죠. 그가 작시한 찬송이 많습니다. 우리 찬송가에도 여러 곡 있죠. 그의 대표적인 찬송시가 바로 434장 “나의 갈 길 다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 ... ” 입니다. 주님을 모신 사람의 기쁨을 노래합니다. 그런데 그는 맹인이었습니다. 시술하던 의사의 실수로 눈이 멀었습니다. 생각만 해도 치가 떨릴 일이죠. 그러나 그에게는 주님이 주시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내 육신의 눈은 멀었지만 하나님께서 내 영안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의 영광을 기뻐하며 살아가게 해 주셨습니다.” 여러분, 얼마나 위대한 고백입니까? 하나님이 주신 기쁨이 있는 사람은 다 이렇게 살 수 있습니다.

[2] 미갈의 비극 : 하나님으로 인한 기쁨을 맛보지 못한 사람

다윗은 하나님 한분으로 기뻐하는 사람이었는데, 반면 미갈은 부부라도 전혀 달랐습니다. 다윗이 법궤를 운반 안치하고 너무 기뻐하면서 귀가합니다. 식구들에게 축복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들어오자마자 미갈이 다윗에게 바가지를 긁습니다. 삼하6:20(하) “ ... 이스라엘 왕이 오늘날 어떻게 영화로우신지 방탕한 자가 염치없이 자기의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오늘날 그 신복의 계집종의 눈 앞에서 몸을 드러내셨도다” 왕의 체통을 지키지 못하고 경망스럽게 춤을 추고 난리를 피웠다고 빈정거리며 비난합니다.

다윗이 얼마나 황당했을까? 그는 그 말을 듣고 이렇게 대답합니다. 삼하6:21~22 “ ... 이는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니라 저가 네 아비와 그 온 집을 버리시고 나를 택하사 나로 여호와의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를 삼으셨으니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 내가 이보다 더 낮아져서 스스로 천하게 보일지라도 네가 말한 바 계집종에게는 내가 높임을 받으리라 ... ” 하나님 앞에서 자기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어린 아이같이 얼마든지 뛰놀겠다고 말합니다. 더 낮아져도 좋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다 아이와 같습니다. 세상의 조건, 소유, 계급장, ... 다 별 게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다 내려놓아야 합니다. 계급장도 다 떼어놓아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아니, 하나님으로 인한 신령한 기쁨을 맛본 사람은 시키지 않아도 그렇게 합니다. 세상 것들이 별 게 아님을 몸소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미갈은 그 기쁨을 체험해보지 못했기에 큰 실수를 범한 겁니다. 그것은 다윗 일개인만 무시한 게 아니라 하나님을 무시한 행위입니다. 참 답답하죠? 부부라도, 부모 자식 간이라도, 가족, 친구라도 그럴 수 있습니다. 직접 체험하고 맛보기 전까지는 도대체 모르는 겁니다. 신앙은 맛을 봐야 아는 겁니다. 그래서 다윗은 시34:8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을 한번 맛보라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얼마나 좋은지 알게 된다는 겁니다.

이게 안 되면 정말 답답합니다. 설명해도 안 되고 ... 제가 대학생 시절 예수를 믿고 나니까 정말 너무 좋았습니다. 기 기쁨을 말하고 싶어서 만나는 친구마다 간증하며 예수님을 전했습니다. 그래도 잘 모르는 거예요. 이상하게 생각하고 심지어 슬금슬금 피하는 친구도 있고 ... 그런데 아주 친한 친구 하나가 마침 군에 입대해 있었습니다. 장문의 편지를 썼습니다. 내가 예수 믿게 됐는데, 군대에도 교회가 있다 하니 꼭 가서 예수 믿으라고 ... 그랬더니 얼마 후 답장이 왔습니다. 장문의 편지인 듯 봉투가 두툼했습니다. 기대를 갖고 열어보니 빈정거림과 욕지거리였습니다. 군대에서도 보니까 예수 환자 많던데, 너도 예수 환자 됐구나 ... 냉수 마시고 속 차려라 ... 그렇게 마음과 생각을 터놓고 지내던 친구였지만 전혀 통하지 않았던 겁니다. 그때는 화가 났는데, 나중에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당연해요. 맛을 보지 못했는데 그룰 수밖에 없죠. 맛을 봐야 맛을 알지 ... 그러니까 우리는 전해 주고, 성령님이 그들의 마음을 열도록 그 영혼을 위해 기도해야 됩니다. 그 수밖에 없습니다. 설명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어쨌든 중요한 사실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으로 인한 기쁨을 맛보지 못하면 자기만 손해라는 겁니다. 특별히 신령한 것을 조롱하고 무시한 사람은 축복 대신 저주를 받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미갈이 그 후 어떻게 됩니까? 삼하6:23 “그러므로 사울의 딸 미갈이 죽는 날까지 자식이 없으니라” 요즘이야 자식을 일부러 안 낳는 사람들도 많아서 오히려 문제지만 당시는 자식이 없는 게 저주였습니다. 미갈은 정말 불쌍한 사람입니다. 우리 주변에 이런 사람 없도록 기도해야 되겠습니다.

성도 여러분!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과연 무엇으로 기뻐합니까? 세상 것들로 기뻐하나요? 물론 세상의 조건이나 환경들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기뻐하려고 한다면 반드시 실망한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늘 환경과 조건을 따라 흐렸다 갰다 합니다. 세상이 주는 기쁨은 안개와 같이 쉬이 사라지는 겁니다. 우리는 영혼 깊숙한 곳까지 적시는 신령한 생수를 맛보기 바랍니다. 아무쪼록 다윗처럼 오직 하나님 한 분으로 기뻐하고, 그분만을 찬양하며 그 기쁨으로 어떤 형편 가운데서라도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