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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안식의 은혜 (히 4: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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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용호 목사 (영천교회)

  휴식과 안식

  여름휴가를 많이 떠났고 또 가졌습니다. 휴가는 휴식을 얻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휴식은 오늘 우리가 설교 주제로 삼은 안식과는 다릅니다. 휴식은 육체가 쉬는 것입니다. 그러나 안식은 영적인 강조가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안식의 개념에는 하나님의 위로가 있고 회복이 있고 보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휴가를 갔다고 하면서 회복을 받고 오는 것이 아니라 망가져 오는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위로를 받고 오는 것이 아니라 상심하고 오는 경우도 많고, 보람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후회하는 휴가도 더러 있습니다. 그래서 휴식과 안식은 전혀 다릅니다.

  성경은 안식을 많이 말하고 있습니다. “제 칠일에 그의 모든 일을 쉬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창조 때부터 안식일을 지으셨습니다. 칠일을 안식일로 지으시고 손수 하나님이 친히 그날을 통해서 쉬셨다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11장 28절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여기서 ‘쉼’은 사죄와 회복, 죄 사함의 은혜입니다. 네가 짊어지고 있는 무거운 짐을 내가 벗겨주겠다, 그리고 쉼을 주겠다는 말씀입니다. “주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너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죽음은 안식입니다. 죽음은 슬픔이나 공포가 아니라 죽음도 하나님은 안식으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우리가 안고 있는 고통, 질병, 우리의 노쇠함, 우리 육체의 연약함은 치료되지 않습니다. 늙음을 어떻게 치료합니까? 질병을 어떻게 치료합니까? 죽음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질병을 완전히 치료하는 하나님의 안식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우리에게 안식에 관한 말씀을 많이 하고 계십니다.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입니다. 그러나 이 안식일은 자기백성을 위해 주셨습니다. 마가복음 2장 27절에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안식일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고, 안식일을 누리는 주체는 우리입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이야말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 중에 값진 것입니다. 하나님이 십계명을 주셨을 때 만약 안식 계명을 포함하지 않았다면 그 계명들은 우리에게 무거운 짐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안식일을 은혜로 주시고 이 안식일을 지키게 하십니다. 창조 때부터 안식일은 지어졌고, 이 안식일은 아담, 에녹, 노아, 아브라함, 모세로 내려져 온 것입니다.

  그러나 안식일이 계명으로 명문화되어 주어지기는 십계명부터입니다. 출애굽기 20장에 보면 십계명으로부터 안식일이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생활 속에서는 이미 안식일을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온 이후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을 때 하루에 하루 분의 만나를 내려 주셨는데 엿새 되는 날에는 이틀 분을 내려주셨습니다. 왜냐하면 “내일은 성일이니 곧 안식일이니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너희들이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서는 엿새 되는 날에 이틀 분을 거두어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거룩한 안식일

  안식일은 우리에게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줍니다. 왜 하나님이 십계명 가운데 안식일을 주시고, 왜 천지를 창조하시던 이레 되는 날에 안식일을 지으셨는가? 그것은 거룩한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 백성들의 믿음을 훈련시키고, 믿음을 키워가기 위해서입니다. 만약 주일이 없다면 우리 믿음을 키워갈 근거가 없습니다. 우리 믿음이 키워질 근거가 없습니다. 그만큼 안식일은 하나님 백성들에게 믿음을 키워가는 하나님의 목적이 있습니다. 이 날에는 하나님이 세 가지 큰 의미를 언약하셨습니다. 첫째, 안식일은 거룩한 날이라고 했습니다. 예배하는 날이라는 뜻입니다. 만약 안식일 날 예배를 잃어버리면 거룩한 날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두 번째는 복 주신 날이라고 했습니다. 그날은 복을 받는 날이고, 그날 자체가 복이라는 말입니다. 세 번째는 자유하는 날입니다. 육신의 고통으로부터 자유합니다. 육신의 일로부터 자유합니다.

  알콜 중독자를 알콜릭(alcoholic)이라고 하는데 일 중독자를 워콜릭(workaholic)이라고 합니다. 일 중독자들이 굉장히 많다고 합니다. 우리는 일을 하되 일 중독자가 되면 안 됩니다. 일하는 보람이 있어야 하고, 열매가 있어야 하고, 그 일의 의미가 누려져야 하고, 그 일을 통해서 우리가 행복해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일 중독자가 되고 맙니다. 우리는 밖의 일을 집으로 가져 와서 하는 그런 일중독자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저는 될 수 있으면 교회에서 할 일을 집으로 가져가지 않습니다. 어쩌다가 급할 때는 집에서도 글을 쓰지만 집에 가면 먹고 자고 놀고 TV보는 일 밖에 안 합니다. 교회에서 할 일을 집에 가지고 가서 책상 앞에 앉아 있으면 서로 힘이 듭니다. 책을 볼 일이 있으면 서재에 가서 보고, 글을 쓸 일이 있으면 서재에 와서 하고, 기도할 일이 있으면 서재에 와서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도 밖의 일을 집으로 가져 와서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일 중독자가 되지 말기 바랍니다.

  요즘 유행하는 말이 ‘Know how’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Know how’가 현대사회에 대단히 강조되는 말이지만 실제로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이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해답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왜 사느냐? ‘Know Why’가 중요합니다. 이것이 바로 안식의 문제입니다. 이것이 인생의 근본 질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Know how’를 먼저 묻지 않으셨습니다. 왜 사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왜 사느냐? 하는 문제의 답을 가지고 ‘Know how’를 추구하기 바랍니다. 왜 사는지도 모르고 돈을 버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왜 사는지도 모르고 출세하고 있습니다. 출세해서, 성공해서 뭐 할 것인가? ‘Know Why’의 답을 갖지 못한 인생들이 대단히 많습니다. 왜 사느냐에 대한 답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주일과 안식일

  안식일은 우리에게 의미상으로 주일과 똑같습니다. 그러나 안식일을 지키는 그 방법은 주일과 전혀 다릅니다. 몇 년 전에 우리나라에 유대인 랍비 두 사람이 와서 세미나를 가졌습니다. 한국 목사님들이 물었습니다. “우리가 볼 때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지킬 때 고행처럼 엄격하게 지킨다고 하는데 요즘도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그렇게 지킵니까?” 랍비의 대답은 “그렇습니다. 우리는 24시간 안식일을 지킵니다. 회당과 집에서 지키는데 주로 세 가지를 합니다. 첫째는 안식일 예배가 있고, 율법공부가 있고, 교육이 있습니다. 자녀교육을 안식일에 시킵니다. 전화 받는 일 전혀 없고, 신문 보는 일 전혀 없습니다. 우리는 온 종일 그 세 가지를 하는데 시간이 모자랍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휴식의 날입니다. 우리는 안식일 날 아무 일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직 그것만 집중합니다. 안식일은 성전 밖을 염두에 두지 않습니다. 오직 회당 안에서 안식일 예배를 아주 중요시합니다. 그리고 안식일날 가는 거리도 정해져 있습니다. 200규빗인데 이것은 900미터입니다. 안식일날 산보를 하더라도 900미터 이상 걸으면 안 됩니다. 그렇게 금욕적으로 안식일을 지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주일을 그렇게 지키라고 한다면 아마도 다 도망가고 말 것입니다. 24시간 온 종일 예배와 말씀공부로 여러분을 붙잡아 놓으면 다음 주일날 와서 견딜 수 있겠습니까?

  주일은 안식일과 똑같이 거룩한 날이고, 복된 날이고, 육신으로부터 자유하는 날이라는 뜻에서 의미는 같습니다. 그러나 주일을 지키는 형태는 전혀 다릅니다. 안식일의 주인은 예수님입니다. 주일의 주인도 예수님입니다. 안식일은 주인에 의해서 주일로 예배일이 바뀌어 진 것입니다. 그러나 안식일에 준 하나님의 언약과 약속은 그대로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가 안식일을 완성하시고 주일을 창조하셨습니다. 주님이 십자가 지시기 전에는 안식일을 지켰습니다. 그러나 그가 십자가를 지신 후 부활한 그날부터는 주님 자신이 부활한 그날을 주일로 지켰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이 주일로 바뀐 것입니다. 안식일은 토요일이며 주일은 우리가 현재 달력으로 말하는 일요일입니다.

  예수님은 주일을 안식일처럼 지키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주일날에 여행을 많이 했습니다. 주님은 주일에 열두제자에게 나타났다가, 또 개인에게도 나타났다가, 성도들이 모인 자리에 나타났다가 여기 저기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은 주일날 성전에 머무시는 주님이 아니셨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주로 회당에 머무르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주일날 부활하셔서 제자들이 모인 곳에, 성도들이 모인 곳에 안식일에 하시던 그 모습과 전혀 다르게 여기 저기 여행하시면서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주일날을 예배일로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꼭 주님은 주일날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그날이 공식적인 예배일이라는 것을 몸소 시행해 주셨습니다.

  원형적 모범

  그러면 이제 한걸음 더 나아가 우리가 안식을 누리는 주일날은 어떤 형태로 지켜지는가? 그 모범이 사도행전 2장에 나타났습니다. 초대교회는 우리에게 주일을 어떻게 지켜야 한다는 그 원형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원형적 모범이라고 합니다. 오늘 우리가 주일을 통해서 신앙생활을 하는 그 모범이 예루살렘 교회의 모범으로 원형을 삼아야 합니다. 거기에는 네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예배가 있습니다.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말씀을 통해서 은혜 받는 예배입니다. 안식일예배는 율법과 선지자의 글을 읽고 지혜서를 읽는 예배이지만 주일예배는 사도들이 말씀을 선포하는 설교가 그때부터 일어났습니다. 두 번째는 떡을 떼며 교제했다는 것이 강조됩니다. 교제가 일어났습니다. 이것은 안식일에 없는 예배입니다. 세 번째는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필요를 따라 나누어 주었습니다. 구제입니다. 구제가 초대교회 안에 일어났습니다. 네 번째는 전도입니다. “백성들에게 칭송을 받으니 날마다 믿는 수가 더하더라.” 그러므로 예루살렘 교회는 네 가지를 지향했습니다. 네 가지를 향하여 앞으로 전진했습니다. 강력한 말씀의 역사가 있는 예배, 성도들끼리 떡을 나누는 적극적인 친교와, 성도들이 가진 것을 서로 나누며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구제와, 세상을 향하여 복음을 지향하고, 전도를 지향하는 교회가 바로 초대교회의 주일생활, 신앙생활의 원형입니다. 이것은 불변합니다. 많은 교회 선교학자, 성장학자들이 예루살렘 교회의 원형을 벗어나서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바람직한 신앙생활은 초대교회에 가서 배워야 합니다. 우리가 영구히 본받아야 할 원형입니다.

  오늘 우리들의 신앙생활을 검토해 보면 예배생활은 그런대로 성립이 됩니다. 오늘도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예배도 온전한 예배생활을 하는데 많은 부족함이 있습니다. 예배는 우리가 드리고 있는데 초대교회의 원형 가운데 우리가 잃어버리고 있는 것들이 그 다음 순서입니다. 초대교회는 서로 떡을 떼는 적극적인 친교가 중요한 교회의 프로그램으로 등장합니다. 여기 떡을 떼었다는 것에는 주석가들이 여러 가지 설명을 합니다. 떡을 떼는 것은 성찬의 의미도 있지만 여기서 일반 식사를 나눈 것을 강조합니다. 그 다음 떡을 뗀다는 것은 단순히 식사만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유대인들이 전승하고 있는 성경공부, 즉 말씀을 공부하는 것도 곁들여 있다고 설명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리고 초대교회가 성도들이 가진 그 재산을 교회에 드리는 것도 혁명적인 일입니다. 안식일날은 그런 일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교회가 주일예배를 시행하고는 헌금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 헌금이 바로 신약교회로부터 강력하게 교회프로그램으로 등장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나누어주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므로 초대교회가 전도를 열심히 했는데 그 전도를 가만히 보면 바로 교인들이 구제를 하면서 백성들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오늘날도 우리가 전도를 할 때 전도비가 동행되지 않는 전도는 전도가 되지 않습니다. 이 구제를 가지고 세상 사람들을 감동시켰습니다. 백성들에게 칭송을 받았다는 것은 선행이 따랐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세상을 대항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물질로 도와주면 감동은 하는데 그것을 통해서 도움만 받고 믿음을 갖지 못하면 교회를 핍박합니다. 그래서 초대교회는 구제와 전도가 함께 갔습니다. 이것이 안식일에는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굉장한 변화입니다. 이것이 예루살렘 교회에서 획기적으로 일어난 일입니다.

  오늘 우리들에게 친교, 구제, 전도에는 상당히 함량이 미달되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평가를 합니다. 우리에게 교제가 필요합니다. 성도들에게 강력하고 적극적인 교제가 필요합니다. 주일날은 잠복하는 날이 아닙니다. 몰래 교회에 왔다가 몰래 가고, 교인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주일날을 우리가 어떻게 지킬 것인가? 내 자신을 완전히 오픈하는 것입니다. 예배에 참여하고 친교의 주체가 되는 것입니다.

  제가 24년 전에 뉴욕 근방에 있는 윈체스터 한인교회에서 한 달간 설교를 한 적이 있습니다. 담임목사님이 수술을 받고 입원하고 계실 때 제게 부탁을 했습니다. 그래서 예배인도를 4주간 했습니다. 그 한인교회는 150명 정도 모이는 교회인데 미국의 연합장로교회 계통이기 때문에 미국교회 전통이 함께 섞여 있는 교회입니다. 거기서 제가 눈여겨 본 것은 오전에 예배를 드리고 거의 예외 없이 집에 갈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예배를 마친 후 거의 모든 사람들이 식사를 합니다. 거의 매 주 그렇습니다. 식사를 마친 후 곧 이어서 성경공부를 합니다. 반별로 나누어 공부합니다. 그렇게 마치면 2시 30분 정도 됩니다. 미국교회 전통은 우리처럼 남전도회, 여전도회로 부르는 것이 아니라 클럽으로 부릅니다. 남전도회를 맨스클럽(Men's club)이라 부릅니다. 구역조직도 있습니다. 그런데 구역예배가 대부분 주일에 있습니다. 구역예배를 드리는데 제가 4주간 초청을 받아 갔습니다. 지역이름을 따서 구역이름을 정합니다. 구역예배에 가보니 10여 가정이 구역인데 거의 모든 가정이 다 왔습니다. 차를 타고 30-40분 걸리는 거리입니다. 모여서 거기서 배드민턴, 골프도 치면서 쉽니다. 그리고 반드시 저녁식사를 그 집에서 합니다. 점심식사는 예배당에서 하고, 저녁식사는 구역예배를 드린 가정에서 합니다. 이것을 매 주마다 순회합니다. 그렇게 해서 밤늦게 까지 놀고 집에 옵니다. 신앙이 있든지 없든지 해외에 이민을 가면 교회를 찾게 되는 점이 바로 이런 점입니다. 함께 식사를 하고, 모이고, 놀고, 교제하는 이것 때문에 그런 효과가 있는 것입니다.

  교제와 사역

  우리도 구역예배가 있습니다. 구역예배는 날짜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주일에 하든지, 평일에 하든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날짜는 전혀 염두에 두지 마시고 한 가지는 염두에 두십시오. 구역예배를 예배당에서 하지 말고 반드시 구역의 가정에서 하십시오. 구역이라는 공동체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교인을 만날 수 있는 공동체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우리의 신앙생활은 내가 교인들 가정을 몇 가정 보는가에 따라 평가가 됩니다. 내가 1년이 지나도 교인의 가정에 예배를 드리러 가 본 적이 없다면 교제에 큰 손실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도들 가정에 예배를 드리고 성도들이 함께 모이는 일을 위해서 가정을 방문하는 횟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그 사람은 성도와 교제가 많다는 것입니다.
  요즘은 결혼식 할 때 예식장으로 가고, 장례식 때 영안실에 가지만 옛날에는 결혼식, 장례식을 집에서 했습니다. 그래서 그 집에 한번 가는 것이 큰 부조였습니다. 길흉사 때 방문해서 부조를 하는 것이 우리에게 굉장히 좋은 풍습입니다. 우리 성도들의 가정도 그렇습니다. 여러분이 좋은 집을 많이 사십시오. 그리고 성도들이 자주 오는 집으로 오픈하기 바랍니다. 활짝 여십시오. 교인들이 자주 오는 집이 되게 하십시오. 친척도 자주 오는 집으로 만드십시오. 그리고 나도 성도들의 집을 자주 방문하는 횟수가 많아지는 교제가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또 하나 우리 공동체 중에 중요한 교제의 장은 전도회입니다. 남전도회, 여전도회입니다. 구역은 남녀노소 차별이 없는 곳이지만 전도회는 나이가 비슷비슷한 사람들이 모인 일체감이 있는 공동체입니다. 그러므로 전도회 모임에 참여하고 전도회 회비를 내고, 전도회가 하는 일에 함께 교제하고, 구역활동을 하고, 성도들의 가정과 교제가 이루어지는 이 두 가지만 제대로 하면 우리의 교제는 더 이상 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것만으로 우리의 교제는 충분합니다. 거기에 힘이 더 남거든 다른 일에 참여하시면 됩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내가 그리스도인으로 교회를 섬긴다 할 때는 전도회의 회원으로서의 의무를 다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구역을 통해서 성도들이 우리 집에 오기도 하고 나도 성도들의 집에 가서 예배를 인도하면서 교제하는 이 공동체가 이루어진다면 교제로서는 두 공동체를 통해서 충분히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두 가지 활동에 제로가 된 사람들은 신앙생활에 중대한 하자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 교제를 회복하기 바랍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교회의 면전에 드러나십시오. 교회봉사 앞에, 교회가 하는 일 앞에 여러분 자신을 드러내십시오. 교회는 잠복하는 장소가 아닙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내 자신을 헌신하는 곳이지 내 자신을 숨기고 내 모습을 감추는 곳이 아닙니다. 전도지향적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새 성전을 지어놓고 중요한 목회의 주제는 초대교회의 원형적 교회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있어서 초대교회 신앙생활의 원형은 우리에게 안식을 주는 중요한 원리입니다. 신앙생활을 통해서 우리는 보람을 얻어야 하고, 성과를 얻어야 하고, 우리 주 앞에 영광이 되고, 나 자신이 복 된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안식의 개념입니다. 안식은 그저 쉬는 것이 아닙니다. 안식은 일을 하지 않고 그저 노는 개념이 아닙니다. 안식은 주님 앞에서 누리는 보람의 개념입니다. 신앙생활은 보람이 있어야 합니다. 보람이 있는 곳에는 아무리 고되게 일을 해도 그 고됨이 우리를 피곤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새로운 용기와 위로의 자리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제가 캄보디아에 가서 그곳 현지 선교사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곳에 고아원을 하나 세웠는데 처음에 그 고아원 부지를 샀을 때는 길이 없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길이 없는 땅이 얼마나 힘이 듭니까? 거기는 길이 없는 땅이 대부분입니다. 우리나라는 큰 도로가 있고 샛길이 있지만 우리가 가본 그 곳에는 길이 없었습니다. 땅을 사용하려면 길이 내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길을 내려면 지뢰가 많기 때문에 아주 어렵다고 합니다. 하도 전쟁을 오래 했기 때문에 전 국토에 지뢰가 깔려 있어서 길을 내기가 그렇게 어렵다고 합니다. 그 고아원 터는 2000평 정도 샀는데 그 땅을 사용하려면 길을 내어야 했습니다. 누가 길을 내었을까요? 단기선교를 왔던 사람들이 길을 내었습니다. 그리고 땅을 골라야 합니다. 숲, 늪, 풀밭이기 때문에 밖의 흙을 수십 트럭 싣고 와서 그 땅에 부어서 땅을 만들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렇게 작업하는 것이 굉장히 힘이 든다고 합니다. 그런데 단기선교팀이 와서 그 작업을 많이 했습니다. 나무심는 것을 했습니다. 그래서 금년 여름에도 여섯 교회 팀이 오기로 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단기선교 가서 쉽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여행합니까? 거기에서 몸이 쓰러지도록 노동만 하고 갑니다. 그들에게 무슨 휴식이 있습니까?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단기선교 왔다가 기간을 연장해서 한 달 더 있다가 가는 사람도 있고, 또 고국에 돌아가서 학교와 가정을 정리하고 준비해서 1년간 봉사를 더 하고 가겠다는 사람도 있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보람 때문입니다. 그 보람을 알기 때문에 고생스러운 봉사 속에 그들은 안식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감동적인 이야기를 현지에서 들을 때 ‘아, 정말 하나님의 나라가 놀라운 면이 있다’고 감탄했습니다.

  맺는 말

  여러분, 안식은 쉬는 것이 아닙니다. 노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이 구하는 휴식이 아닙니다. 산골짜기 물가에서 휴가를 즐긴다고 사람들이 온 종일 물가에 있지만 뭐하고 놉니까? 낮잠을 자거나 고스톱, 술 마시고 놉니다. 그리고는 시간 있는 사람들은 2차갑니다. 2차가면 망가져 옵니다. 그것을 가지고 우리는 논다, 쉰다고 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안식은 그런 개념이 아닙니다. 초대교회의 신앙생활의 원형을 회복해야 하나님이 주시는 안식을 누릴 줄 믿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보람을 누릴 줄 믿습니다. 이 축복 안에 충만히 거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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