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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시 25:8~10, 요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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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성희 목사 (연동교회)
 
  두 주일 전 서울에서는 세계한인입양인대회라는 모임이 있었습니다. 해외로 입양된 입양아들 가운데 15개국에서 430명이 참가하였습니다. 이번에 참석한 입양인 가운데 몇몇 성공사례가 신문에 소개되었습니다. 미국에 입양된 스티븐 모리슨씨는 미국 우주항공연구소 수석연구원이었습니다. 그의 한국명은 최석춘이라고 합니다. 그는 어릴 때 미국의 어느 가정에 입양되었고 훌륭하게 잘 자라서 성공한 입양아가 되었습니다. 그를 입양한 미국인 아버지도 참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아버지는 미국 어느 대학교의 부총장인데 그가 대학을 졸업할 때에 그랬답니다. “내 생애 가장 위대한 결정은 하나님을 만난 것, 네 엄마를 만난 것, 그리고 널 입양한 것이란다.” 저는 이 신문을 읽으면서 큰 충격 같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정말 눈물이 핑 돌고, 코끝이 찡했습니다. 우리의 삶은 순간순간 결정하는 삶입니다. 우리의 모든 결정이 위대한 결정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이미 위대한 결정들을 하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릅니다. 그렇게 보면 내 생애 가장 다행한 일은 길을 아는 것, 진리를 만난 것 그리고 생명을 얻은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요한복음 14장에서 17장까지는 ‘다락방 강화’라고 불리는 예수님의 강화입니다. 마태복음 5장에서 7장의 산상보훈과 대조되는 말씀입니다. 산상보훈과 다락방 강화는 각각 3장씩입니다. 산상보훈은 예수님의 공생애 초기에 그리고 다락방 강화는 말기에 주신 말씀입니다. 산상보훈은 그 말씀의 대상이 일반 무리들이었지만 다락방 강화는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산상보훈을 말씀하신 장소는 북방 갈릴리지방이었지만 다락방 강화는 남방 유다지방입니다. 산상보훈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길을 말씀하지만 다락방 강화는 구원의 약속을 말씀합니다.

  요한복음 14장은 예수님의 위로와 애처로움을 잘 표현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곧 잡히시고 돌아가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실 것입니다. 제자들을 남겨두고 홀로 가는 스승의 안타까움과 조바심이 있습니다. 이것을 예수님은 다 말씀하시고 제자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시려는 것입니다.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마시고 죽는 날 친구들이 감옥에 찾아와 위로하였답니다. 그는 자신의 친구들에게 최후의 말을 던집니다. “이제 헤어질 시간이 되었습니다. 당신들은 살러가고, 나는 죽으로 갑니다. 그러나 우리 둘 가운데 누가 더 행복한지는 오직 신만이 아십니다”. 철학자로서 할 수 있는 말입니다. 그리스도는 그 이상의 말씀으로 위로를 주십니다.

  메시야가 주시는 그 이상의 중요한 말씀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예수님은 가는 곳을 인도하는 길이고 진리이며 생명이라는 비밀을 공개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다락방 강화에서 “내가 가는 곳에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고 하십니다. 그 때 의심 많은 도마가 나서서 말합니다.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 의심 많은 사람이 그 길을 알 리가 없지요. 도마는 목적지도, 길도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 때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목적지로 인도하는 길되심을 증거하십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하나님으로서의 자기 증거입니다.

첫째, 예수님은 유일한 길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다”고 하십니다. 도로 표지판은 참 유용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도로 표지판이 아니라 도로 그 자체입니다. 예수님은 많은 길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바로 그 길, “the way”입니다.
  요한복음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우리말에 “말씀”이라고 번역한 단어는 헬라어 원문에는 “로고스”입니다. 이 단어는 오래 전에는 “도”(道)로 번역하였습니다. 이 말은 “태초에 길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지으시기 전에는 혼돈과 공허밖에 없었습니다. 혼돈과 공허이지만 그 가운데 길이 있었습니다.

  여러 친구들이 모여 세상에서 가장 먼저 생긴 직업이 무엇일까 하고 서로 토론이 벌어졌습니다. 외과의사가 제일 먼저 생긴 직업이라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갈비뼈를 뽑아 여자를 만든 것을 보면 의사가 최초의 직업이라고 하였습니다. 다른 친구는 설계사가 최초의 직업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지으실 때 설계를 하였기에 설계사가 최초의 직업이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다른 친구는 철학자가 최초의 직업이라고 하였습니다. 공허의 개념이 어디서 왔겠습니까? 분명히 철학자가 만든 개념어라고 하였습니다. 그 때 다른 친구는 정치가가 최초의 직업이라고 하였습니다. 태초에 혼돈하다고 했는데 혼돈은 누가 만들었겠습니까? 정치가가 만들었습니다. 얘기는 여기서 끝납니다. 그런데 그 전에 이미 길이 있었습니다. 세상이 지어지기 전에 이미 길은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토목기사가 최초의 직업일까요? 예수님은 길을 만드는 분이 아니라 길 그 자체입니다.

  공자는 “조문도 석사가야(朝聞道 夕死可也)”라고 했습니다.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말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인생의 행복의 길은 선행하는데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들은 모두 자신이 길이 아니라 길을 들으려고 하였고, 길을 가르치는 자들이었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길 자체이십니다. 세례요한은 길을 예비하고, 평탄케 하기 위하여 온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입니다. 그도 길이 아니라 길을 예비하는 사람입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길이 있습니다. 세상의 수많은 길 가운데 바른 길을 택하고 제대로 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많은 길 가운데 한 길이 아니라 유일한 길입니다. 예수님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입니다.
  어떤 젊은이가 군대에 갔다가 제대를 했어요. 군대에서 어디 근무했느냐고 물어보니 전차부대에서 근무했답니다. 어떤 부대냐고 물어보니 전차부대는 버스 전용차선 감시부대랍니다. 예수님은 전용차선입니다. 예수님 외에 그 길을 갈 수 없습니다. 유일차선입니다. 예수님 외에는 길이 아닙니다.

  우리나라의 옛말에는 지혜로운 말이 많습니다. 아는 길도 물어서 가라고 합니다. 길이 아닌 곳은 가지 말라고 합니다. 이런 말은 다 조상의 슬기가 담겨 있습니다. 흔히 요즘에는 ‘오프로드’(off-road)라는 레저가 있습니다. 문자 그대로 길을 벗어나서 가는 것입니다. 길을 벗어나는 재미는 차를 타고 험한 길을 가는 레저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에도 잠재되어 있습니다. 길을 벗어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평생에 예수님을 벗어나지 말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길은 불과 구름 기둥이 길잡이였습니다. 길이 없는 곳이지만 불과 구름은 길을 만드는 길잡이였습니다. 하나님이 백성들을 위하여 즉시에 만들어주시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함께 하면 모든 곳은 길이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으면 모든 곳이 길이 아닙니다.

  모든 것에는 길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혼의 길은 예수님이 유일한 길입니다. 진리를 따라가는 유일한 길입니다. 이 길은 진리의 길이며 이 길만이 생명의 길입니다. 천상병시인을 아시지요? 오래 전에 우리 교회에 나오신 분입니다. 그 분의 시 가운데 “귀천”이란 유명한 시가 있습니다. 그분의 시 가운데 “바람에도 길이 있다”는 시가 있습니다. ‘바람에도 길이 있다. 강하게 때론 약하게 함부로 부는 바람인줄 알아도 아니다! 그런 것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길을 바람은 용케 찾아 간다. 바람 길은 사통팔달(四通八達)이다. 나는 비로소 나의 길을 가는데 바람은 바람 길을 간다. 길은 언제나 어디에나 있다’. 사실은 길은 어디에나 있습니다. 어디에나 계시는 주님이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인간의 역사는 하나님이 그 배후에서 일하고 계십니다. 알렉산더 대왕은 그 지역을 정복하여 그 곳 사람들에게 헬라어라는 공용어를 사용하게 했습니다. 로마인들은 그 뒤에 탁월한 도로망을 건설했습니다. 이 모든 인간의 작업이 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오래 전 대만에 가서도 선교사에게 똑같은 말을 들었습니다. 중국 대륙이 공산화되었기에 참 감사한 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공산화되었기 때문에 큰 중국 대륙이 언어가 통일되었고, 구석구석까지 길을 닦아서 도로망이 생기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선교에 가장 필수적인 도구라는 것입니다. 이 도로망으로 길이신 주님은 지금도 힘차게 전파되고 있습니다.

둘째, 예수님을 통하여 진리를 만납니다.

  예수님이신 그 길을 따라가면 진리를 만납니다. 예수님은 “내가 진리다”라고 선포하십니다. 진리가 무엇입니까? 빌라도의 법정에서 예수님은 빌리도와 진리에 대하여 변론하십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8:37에서 말씀합니다.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으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내느니라”. 예수님의 진리에 대한 증거는 자신에 대한 증거입니다. 이 때 요한복음 18:38에는 빌라도가 묻습니다. “진리가 무엇이냐?” 빌리도는 진리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빌라도가 진리를 모르는 것은 예수님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진리란 어떠한 개념이나 원칙이 아니라 한분의 인격체입니다. 이것이 진리를 아는 핵심과제입니다. 예수님을 알면 이것도 알고, 예수님을 모르면 이것도 모를 것입니다. 마하트마 간디는 “진리가 신이고 신이 진리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참 지혜는 진리가 그리스도인 것을 알게 합니다.

  불교의 대의는 석가가 법을 깨달음으로 부처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석가는 법 그 자체는 아닙니다. 법을 깨달을 때 인간인 석가가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진리를 깨달아 그리스도가 된 것이 아니라 진리 그 자체이십니다.

  캄보디아의 앙코르왓은 세계 7대 불가사의 가운데 하나라고 합니다. 힌두교의 사원인데 웅장하고 신비한 곳입니다. 어떻게 그 당시에 이런 조각이 가능할까 하는 신비감이 있는 곳입니다. 그런데 앙코르톰이나 앙코르왓에 가보면 뱀의 조각이 많습니다. 그들은 뱀을 신의 화살 혹은 무지개라고 생각했습니다. 뱀은 세상과 하늘을 연결해주는 도구로 여겼습니다. 앙코르톰의 입구에는 54신이 뱀을 잡고 있는 조각이 있습니다. 양쪽에 54신이 있으므로 합이 108신입니다. 108은 불교적 숫자이지요. 힌두 사원인 앙코르왓도 불교적 영향을 많이 받고 있었습니다. 어디에 가나 뱀 조각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뱀이 하늘로 가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산스크리트어로 뱀을 ‘나가’라고 합니다. 사실은 뱀이 길이 아니라 뱀이 나가야 길이 생기고, 진리를 만납니다. 뱀이 ‘나가’인데 나가지 않고 사원마다 틀고 앉았습니다. 진리를 모르는 사람들은 길도 모릅니다.

  맥스 루케이도는 “가장 추구하기 힘든 것을 하나만 꼽는다면 진리와 사랑이다”라고 했습니다. 진리는 추구하기 힘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아는 사람들은 진리를 쉽게 합니다. 요한복음 8: 31-32에는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합니다. 진리는 자유케 하는 영입니다. 정말 진리가 여러분을 자유케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진리가 불편케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진리가 번민케 하고 있습니까? 진리 때문에 불안하고 진리 때문에 불편한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이 성경의 말씀을 이렇게 패러디 했습니다. “너희가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어색케 하리라”. 진리는 모르는 사람이나 역행하는 사람에게는 참 어색하고 불편하고 귀찮은 것입니다.

  문호 도스토예프스키는 말했습니다. “모든 개미는 개밋둑을 쌓을 줄 알고, 모든 벌은 벌집을 만들 줄 안다. 그놈들은 우리 식이 아니라 나름의 방식으로 살아가며 그것을 체득한다. 오직 인간만이 사는 법을 모른다”. 어쩌면 인간만 진리를 모릅니다. 모든 생물은 자연법대로 살아갑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질서대로 삽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찬양이 됩니다. 물론 본능적이고 본체적인 영광이지만 영광이 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법도 알고, 진리도 알고 영광도 돌립니다.

  마틴 루터는 ‘돈은 강하다. 왕은 더 강하다. 여자는 좀더 강하다. 그러나 진리는 가장 강하다’고 하였습니다. 가장 강한 것은 진리입니다. 그래서 그가 지은 찬송에는 “진리는 살아서 그 나라 영원하리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강하시고 영원히 살아 계시는 진리이십니다.

셋째, 예수님을 통하여 생명을 얻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생명이다”고 하십니다. 그 진리이신 예수님을 통하여 생명을 얻습니다. 요즘에는 생명 연장에 많은 관심을 가집니다. 생명 복제도 활발히 연구되고 있습니다. 생명공학도 많이 발달하여 이제는 산업적으로 활용되어 생명 산업이라 부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아무 것도 없는데서 생명을 생성하지는 못합니다.
  예수님은 생명 그 자체입니다. 그 자체이기에 생명을 치료하시고 연장하시고 죽은 자도 살리고 생명을 친히 부여하십니다. 생명 자체이시기에 스스로 얻고, 스스로 버리기도 하십니다. 요한복음 10:15에는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고 하십니다. 요한복음 10:18에는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 있는 것 아니라 내 스스로 버리노라 나 버릴 권세 있고 다시 얻을 권세 있으니”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생명이시기에 마음대로 얻고 버릴 수 있습니다.

  생명은 누구에게나 귀한 것입니다. 희대의 살인마라고 하는 유영철은 10개월 동안 21명이나 살해하고도 검찰 조사 과정에서 잡히지 않았으면 100명은 죽이려고 했다고 진술했답니다. 그리고 그는 네 사람의 인육도 먹었다고 했답니다. 그는 살인을 자신의 유희로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자기 불만 해소의 도구로 살인을 사용한 것 같습니다. 자기가 볼 때 다른 사람의 목숨은 파리 목숨같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누구에게나 생명은 귀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6:25에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고 하십니다. 또 마태복음 16:26에서는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고 하십니다. 가장 귀한 것이 생명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생명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통하여 이 귀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로마의 한 원로가 자신의 집에 황제를 초대하였습니다. 온 집의 노예들이 바삐 황제를 맞을 준비를 합니다. 그런데 한 노예가 너무 긴장한 나머지 황제가 있는 자리에서 그 집의 가보로 내려오는 도자기를 건드려 깨트리고 말았습니다. 이 원로는 자신의 신하에게 명하여 당장 그 노예를 연못에 집어넣으라고 합니다. 그 연못에는 악어가 득실거리는 곳입니다. 떨고 있는 노예가 불쌍하여 황제는 원로에게 그 노예를 한번 용서해 주라고 합니다. 그러나 원로는 그것이 그 집의 엄격한 가율이기에 어쩔 수 없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다른 노예들을 부릴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 때 황제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그 집의 또 다른 가보를 일부러 떨어트려 깨트렸습니다. 그리고 원로에게 그렇다면 나부터 연못에 넣으리고 하였습니다. 아무리 가율이지만 황제를 연못에 넣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할 수 없이 원로는 노예를 용서해 주었다고 합니다. 하찮은 노예의 생명을 구하기 위하여 황제가 스스로 생명을 담보로 준 것입니다. 생명의 부여자이신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생명을 버리심으로 참 생명이 되신 것입니다.

  빌레몬서라는 신약의 책은 오네시모라는 종이 주인의 돈을 훔쳐 도망했다가 바울을 만나 새로운 사람이 되고 다시 자신의 주인에게 돌아갈 때에 바울이 주인인 빌레몬에게 오네시모의 선처를 부탁하는 편지입니다. 당시에 종의 신분으로 주인의 돈을 훔쳤다는 것은 죽어야 마땅한 잘못입니다. 그러나 바울도 빌레몬도 죽을 목숨을 용서하였습니다. 새로 생명을 얻은 오네시모가 복음으로 생명을 얻었습니다. 성경에는 자세히 나와 있지 않지만 아마 그 다음부터 주인을 위하여 생명을 버려 충성했을 것입니다. 생명을 얻었으니 생명을 버릴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브리스가와 아굴라도 그런 생명의 열정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로마서 16:4에는 바울이 브리스가와 아굴라에 대하여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놓았나니”라고 말합니다. 생명을 만나고, 생명을 얻은 사람은 이런 생명을 바치는 마음도 얼마든지 기꺼이 가능할 것입니다. 이 생명의 감격이 있기를 바랍니다.

결론

  얼마 전 신문에 화제가 된 소년이 있습니다. 이 소년은 길을 잃었다가 홀로 찾아온 초등학교 4학년인 정희재라는 어린이입니다. 이 아이는 아빠와 함께 지리산 천왕봉에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길에 아빠와 떨어져서 길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이 아이는 침착하게 사흘 만에 길을 찾아 살아서 돌아왔습니다. 혼자서 이틀 밤을 지내고 비를 맞으면서도 아빠가 평소에 얘기해준 산에 대한 얘기를 침착하게 되새기며 돌아온 것입니다. 이 아이는 아빠가 해준 대로 길을 잃자 개울을 따라내려 갔습니다. 개울을 따라가면 산 아래로 내려갈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깊은 산에서 길을 잃어도 물소리 나는 쪽으로 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물이 있는 곳에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런 침착한 자세가 그를 다시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게 한 것입니다. 길을 잃었지만 길이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유일한 길입니다. 유일한 진리입니다. 유일한 생명입니다. 길을 찾으면 진리가 보입니다. 진리를 발견하면 거기에 생명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길과 진리와 생명을 따로따로 찾고 얻으려고 합니다. 우리는 이 셋을 한분으로 말미암아 함께 찾고 얻습니다. 한분을 통해 셋을 동시에 얻은 것이 다행입니다. 주님을 통해 바른 길로, 진리로, 생명으로 살기를 바랍니다.

  길이신 예수님을 꼭 붙잡고 우리의 길에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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