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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궁극적인 관심사 (약 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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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근두 목사 (울산교회)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복된 예배의 자리에 함께 나오신 사랑하는 구도자 여러분, 태풍이 지나가고 나니 무덥던 더위도 한 풀 꺾이고 이제는 가을이 성큼 다가오는 느낌입니다.

이번 가을에는 우리의 신앙을 새롭게 하기 위해 “목적이 이끄는 삶 40일” 전교인 훈련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기도로 준비하는 남은 40 여일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이번 주일도 계속해서 야고보서 말씀을 살펴봅시다.

4장 1절을 읽으면 마치 3장하고 전혀 관계가 없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사실 4장 1절은 3장 18절의 연속임을 기억하십시오. 야고보 선생이 이 편지를 기록했을 때는 장절 구분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의 종으로서 성도들에게 문안을 하고 편지가 끝나도록 계속되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앞에서 두 가지 지혜를 말했습니다. 거짓지혜, 그것은 분쟁과 불화를 가져옵니다. 반면에 참 지혜는 화평을 가져옵니다. 위로부터 난 지혜의 결론으로 18절은 선언합니다.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화평을 인간이 추구해야 할 가장 귀한 것으로 제시합니다. 사람들이 함께 어울려서 살아갈 때에 그 가운데 평화를 추구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아예 인사말이 “샬롬”(평강, 평화)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화평케 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때문에 사람들이 화평할 수 있도록 하십시오. 화평 가운데서 씨를 뿌리는 일이 여러분이 할 일입니다.

화평은 지금이나 그때나 신앙인이 추구해야 할 최고 선 입니다. “화평케 하는 자들은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어디로 좇아나느뇨?”고 묻고 있습니다.

신자가 되는 것은 화평케 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신자로서 하는 일은 화평 가운데 씨를 뿌려는 일입니다. 신자가 거둘 의의 열매는 화평 중에 뿌려진 씨의 결실입니다. “화평”은 신자가 추구할 최고선입니다.

그러나 현실을 보십시오. 현실은 그와 같이 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자신과 주위를 살펴보십시오. 화평과 다툼, 어느 것이 더 특징적인 모습입니까?

오늘 우리는 싸움과 분쟁의 원인을 살피고 이어서 욕망이 지배하는 삶의 결과를 말한 다음 여러분이 추구할 삶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지를 말합니다. 야고보 선생은 평범한 신자들을 향해서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문제를 어렵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보통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말해줄 것입니다.

Ⅰ.싸움과 분쟁의 원인을 찾아봅시다.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어디로 좇아 나느뇨?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 좇아난 것이 아니뇨?” “여러분은 무엇 때문에 서로 싸우고 분쟁을 일으킵니까? 여러분의 지체 안에서 갈등을 일으키는 욕망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까?”

본문은 끝없는 분쟁과 싸움의 근원을 추적합니다. 인류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개인 삶 역시 끊임없는 살기 다툼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개인적 차원이나 사회적, 국가적 차원의 모든 투쟁과 불화의 원인은 무엇입니까? 궁극적으로 “너희 인간 속에 갈등을 일으키는 욕망”때문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문제에 대한 기독교의 대답은 여기 있습니다. 기독교는 인간의 인격 바탕에 문제를 찾는 종교입니다. 구조나 제도 이전에 근본 문제는 인간 자신에게 있다고 봅니다. 부부가 싸우는 것은 월급이 적어서도 아니고 생활공간이 쾌적하지 못해서가 아니란 말씀입니다. 월급액수가 많아진다고 부부 싸움이 줄어드는 것은 아닙니다. 생활공간이 넓고 쾌적해져도 가정불화는 줄어들지 않습니다.

성경은 가장 근본 원인을 인간의 본성자체에서 찾고 있습니다. 그것을 원죄라고 합니다. 인간의 성품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봅니다. 문제는 “너희 지체 중에 있다”고 합니다. 문제는 “너희 인격 가운데 있다”고 합니다. 너희 마음 속에서 갈등을 일으키는 욕망 그 자체가 모든 문제의 근원이라고 지적합니다. 

심지어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결실치 못하는 것은 이 세상에 대한 욕망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이생의 염려와 재리와 일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치 못하는”(눅 8:14)것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생의 염려”- 가난한 자는 가난한 대로 먹고 살기 위한 걱정을 하고 있습니다. IMF때 보다 더 어려워지는 것을 사람들이 경험하고 있습니다. 올 들어서는 작년과 확연하게 다르게 어려운 사람들이 더 어려워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심지어 예배자리에 나와서도 당장 당면한 먹고사는 문제를 가지고 걱정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부자가 되면 이런 고민에서부터 벗어나나요?

“재리와 일락”이라고 하는 것도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치 못하게 합니다. 씨가 결실치 못하게 하는 원인으로 ‘재리와 일락’도 말하고 있습니다. 돈을 잘 버는 사람들도 예배의 자리에 나와서 어떻게 하면 돈을 더 벌까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역시 말씀을 제대로 듣지 못하게 하고있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번 돈 가지고 어떻게 즐길 것인지를 가지고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하필이면 이 자리에 나와서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 사람대로 부한 사람은 부한 사람대로 씨가 온전히 결실케 하지 못하는, 세상에 대한 욕망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욕망과 쾌락에 노예가 되면 다른 사람과 비교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을 부러워하게 됩니다. 그 다음에는 시샘하게 됩니다. 그 다음에는 또 증오하게 됩니다.

“왜 나는 못 가졌는데 너는 가졌느냐?”고 생각합니다. 재리와 쾌락에 지배당한 삶에 반드시 이러한 것들이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은 더 자세하게 우리가 세상적인 욕망을 따라 살 때에 어떠한 결과가 초래되는지를 보여줍니다.

Ⅱ. 욕망이 지배하는 삶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나니 너희가 다투고 싸우는 도다.” “여러분은 욕심을 부려도 얻지 못하면 살인을 하고, 탐내어도 가지지 못하면 다투고 싸웁니다.”삶에 달관한 사람이 우리 모습을 보면 정말로 한심할 것입니다.

그렇게 욕심내고 시기하고 죽이고 한다고 그게 자기 것이 되지 않는데 왜 그렇게들 살아가는지 야고보 선생은 답답했던 모양입니다. 이게 사람들의 보편적인 모습인 동시에 때때로 현실적인 그리스도인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욕망이 지배하는 삶은 자신의 마음속에 갈등이 끊이지를 않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 투쟁으로 번져납니다. 같은 것을 서로 추구하다 보면 가진 사람과 갖지 못한 사람 사이에 갈등이 생깁니다.

너나 할 것 없이 더 많은 돈을 가지고 싶어 하는 경우를 생각해 보십시오. 분명히 많이 가진 사람과 적게 가지는 사람이 있기 마련입니다. 너나 할 것 없이 자기 자식이 일등 했으면 하는 바람을 부모는 가지고 있습니다. 금메달을 놓고 서로 각축하다 보면 자칫 젊음의 축제가 되어야 할 곳에 아름답지 못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인생살이는 치열한 다툼의 장소로서 전락해 버리고 맙니다. 서로 짓밟고라도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달려듭니다. 어떠한 수단을 써서라도 경쟁자를 제거시키려고 하는 살벌한 자리가 되고 맙니다.

여기가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만 모여 살면 세상은 생지옥이 될 것은 자명합니다. 하찮은 물건 때문에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소유하고 싶은 사람이 나타나면 다른 사람의 생명을 죽이기도 망설이지 않을 것입니다. 북한에서 넘어온 젊은이들이 그렇게 대담하더라고요. 이쪽에 오니까 참 이상하대요. 한 동네 살면서도 아는 척도 하지를 않고 말이죠. 그리고 돈 몇 십 만원 때문에 자살도 하고,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요 남쪽도 낙원이 아닙니다. 이런 일들을 무슨 특별한 악한 사람들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윗의 경우를 생각해 보십시오. 이스라엘 왕 들 가운데서 가장 존경받는 聖君 아닙니까? 그가 쓴 신앙의 시들을 한번 읽어 보십시오. 탁월한 시들을 남겼습니다. 훌륭한 임금이고 하나님을 사랑했습니다. 그런 사람이지만 그도 목욕하고 있는 아리따운 여자를 보았을 때에 남의 여인인데도 자기 것으로 삼았습니다.

자기 것으로 소유하고 나서 폭로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전쟁에 나간 남편을 불러 들었는데 그 남편은 자기 아내와 잠자리를 같이 해주기를 바랐지만 그 남편은 충직한 군인이었습니다. 다른 군인들이 모두 전선에 있는데 자기만 아내와 같이 하룻밤을 지낼 수 없다고 생각하고 그는 궁궐 밖에서 하룻밤을 보냈습니다. 

완전범죄를 의도했지만 뜻대로 되지 아니하니까 그 충성스런 장군을 가장 치열한 전투가 일어나는 장소에 내보내서 거기서 죽도록 만듭니다. 그리고는 자기 아내를 삼습니다.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것이 있으면 사람들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나봇의 포도원 이야기를 아시지요. 아합은 이스라엘의 임금이었습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왕궁 문 앞 길옆에 있는 나봇의 포도밭이 탐이 났습니다. 그것을 자기 소유 나물 밭으로 갖고 싶어 했습니다. 뜻대로 되지를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조상을 통해 유업으로 주신 것을 내가 팔수는 없다”고 대답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아합 왕은 착한 데가 있었던 모양이죠. 고민만하고 끙끙 앓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부인이 나타나서 물었지요.‘당신 도대체 무엇 때문에 끙끙 앓고 있소. 나에게 말해 보시오.’ 그래서 사실대로 털어놓았습니다.

‘나봇의 포도원을 내가 가지고 싶어 하는데 아무리 거금을 주고 사겠다고 하는데도 팔지를 않는다’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때 이세벨이 말합니다. “아니 이스라엘의 임금이 되어서 그런 것 가지고 고민합니까? 나한테 맡기세요” 그래서 거짓 증인을 내세워서 나봇이 하나님과 임금을 욕했다는 죄를 뒤집어 씌워서 사람들로 하여금 돌로 쳐서 죽이도록 합니다. 그리고 그 포도밭을 빼앗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거기 나봇의 피를 흘린 곳에서 이세벨의 피를 개들이 핥으리라고 전했습니다.

손에 넣는다고 영원히 가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죽이고 까지 손에 넣지만 얼마 못가서 그 신세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욕심낸다고 꼭 소유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샘낸다고 다른 사람처럼 되는 일도 아닌 것 가지고 사람들은 서로 아귀다툼을 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갈등과 분쟁만 일으킬 뿐 입니다. “너희가 다투고 싸우는 도다.” 욕망에 지배당한 처절한 결과를  말한 다음 참된 만족에 이르는 길을 제시합니다.

Ⅲ. 생의 궁극적 선택은 무엇입니까?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

왜 그렇게 서로 시기하고 싸우고 하는지 도대체 야고보 선생으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정말 갖고 싶은 것이 있으면 아버지 보고 달라고 하면 될 것인데, 왜 그렇게 싸우는지 아이들 키워보면 이해가 안 될 때가 있습니다. 적어도 두 아이는 키워봐야 알 것 같습니다. 하나만 키우면 모릅니다. 엄마가 얼마든지 줄려고 하는데 왜 동생이 가진 것을 꼭 빼앗아야만 됩니까?

야고보 선생도 교회를 생각할 때 그랬던 것 같습니다. 교회 안에는 부자도 있고 가난한 사람도 있게 마련입니다. 좀더 특권을 누리고 살아가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습니다. 세상만 고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신앙공동체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의도하신 세상은 어떤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똑같이 갈라먹자는 세상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세상을 의도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지금 사는 것처럼 가진 사람은 가지고 못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세상을 하나님께서는 의도하고 있습니다. 왜? 불공평이 영원히 지속되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가진 사람들로 하여금 갖지 못한 사람들과 나눌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터인데”그렇죠? 왜 가난한 사람들을 우리와 함께 있도록 하십니까?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들을 섬길 수 있는 기회가 되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아이들 하는 것 보고 한심해 하듯이 야고보 선생은 신앙공동체를 향해서 한심해 하고 있습니다. ‘달라고 하면 얼마든지 줄 건데 너희들끼리 싸우냐?’고 아이들한테 말하면서도 우리는 잊어버립니다. 서로 남의 손에 있는 것을 넘겨보면서 시기하고 질투합니다.

삶의 참된 만족은 타락한 인간 욕망의 충족에 있지 않습니다. 삶의 궁극적인 선택은 내 욕망 성취인가 하나님의 뜻을 실현인가에 있습니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잘못 구함이니라.”

왜 기도 안합니까? 기도하는데도 안 되니까 그렇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러면서도‘왜 다른 집은 편안하고 무사하고 좋은데 왜 나한테만 이런 어려운 일이 닥칩니까? 기도하는 데도 나는 왜 안 됩니까?’라고 묻기를 좋아합니다. 뭐라고 대답합니까? “구하여도 받지 못하는 것은 네 욕구를 충족하려고 구하기 때문이다”라고 합니다.

성경은 아주 시원하게 대답을 해 줍니다. 좀 다독거려가며 부드럽게 이야기를 해주면 좋은데, 야고보 선생은 섭섭하리 만큼 정확하게 직선적으로 말합니다.

왜 그렇게 한심한 짓 하느냐? 하나님께 구해라 구하지 않기 때문에 받지 못하는 것이 아니냐? 구하여도 얻지 못하는 것은 자신의 욕망을 위해 기도하니까 하나님은 들어주지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3일 금식이 아니라 일주일 금식해도, 열흘 작정 기도가 아니라 40일 작정기도를 해도 자기 욕망을 성취하려는 기도는 하나님이 들어 주시는 기도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핵심은 내 욕망을 충족 할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뜻을 이룰 것인지 그게 늘 문제인 겁니다. 생의 궁극적 선택은 자신을 기쁘게 할 것인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인가에 달려 있습니다. 나를 지으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 것인지 되는대로 욕망을 따라 살 것인지 택일하셔야 합니다.

성경은 어려운 선택을 우리에게 요구하지 않습니다. 아이큐가 높은 사람들만 선택 할 수 있는 것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단순한 양자택일 입니다. 너무 쉬운 겁니다. 너희들이 어둠 속을 헤맬래, 빛 속에 살아갈래? 너희들이 서로 미워하면서 살래, 서로 사랑하면서 섬길래? 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의 마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생은 우주 속에 내동댕이쳐진 존재가 아닙니다. 민족중흥의 역사적인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창조주 하나님이 이 세상에 보내면서 뜻 없이 보낸 사람은 없습니다. 모든 인생은 자기를 지은 창조주 하나님의 뜻이 그 삶에 있습니다.

하나님 뜻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느끼면서도 자기 뜻대로 하고 싶은 욕망 그것이 우리의 문제입니다. 우리의 자체 속에는 한 부분도 선한 부분이 없습니다. 어느 한 부분도 이 부분은 안전하다 할 부분은 없습니다. 우리의 이성도 예외 없이 우리 욕망의 포로가 됩니다.

욕망의 포로가 되면 사람은 사리를 분별하지 못합니다. 생각뿐만 아니라 감정도 그렇습니다. 우리 감정도 쉽게 우리 욕망의 수종을 듭니다. 우리 의지도 어이없이 욕망의 종노릇을 합니다. 내가 갖고 싶은 것이 있으면 마치 그것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양 합니다. 우리 육신은 한 부분도 무너지지 않는 성벽이라고는 없습니다. 그냥 욕망의 명령대로 무너져 내립니다.

살아가야 할 기준을 설정하면 어이없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 도다.”

조용히 생각해 보십시오. 누구라도 다 압니다. 자식을 어떻게 키워야 될 것인지 알고 있잖아요. 그렇게 화를 내서 소리친다고 자녀 교육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면서도 화가 나면 또 절제가 안 되는 것입니다. 시어머니, 며느리 사이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그것도 믿음의 가정에서 어떻게 서로 처신해야 될 것인지를 모르는 게 아닙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자기 욕망에 휩싸이면 여지없이 실패하고 맙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자신을 볼 수 있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자기가 세운 수준에도 채 미치지 못하는 자신을 볼 때에 우리는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외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해야 되는 일보다 얼마나 자주 우리는 하고 싶은 일을 하는지 살펴보셨습니까? 일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면 해야 될 일을 먼저 해야 되는데 우리는 해야 될 일보다 자주 하고 싶은 일을 먼저 해 버립니다.

인간의 문제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르는 것만이 문제가 아닙니다. 알면서도 되지 않는다는 것이 우리의 문제입니다. 꼭 해야 할 일은 제쳐두고 하고 싶은 일에 시간을 소모합니다. 시간뿐입니까? 관심과 정력을 쏟습니다. 돈과 열심을 바칩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때로는 기도까지 동원됩니다.

사랑하는 울산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의 신앙생활을 점검해 봅시다. 한 주간 168시간 중에서 어디에 가장 많은 시간을 바치고 있습니까?

여유시간만 났다하면 하고 싶어 하는 일이 무언지 그걸 보면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습니다. 무엇을 위해서 돈을 쓰는 게 아깝지 않은 건지 보면 우리가 누구인지 압니다. 우리는 시간과 정력과 관심과 돈을 내가 원하는 것을 위해 바치기 때문입니다. 그게 우리 자신들을 위한 우상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녀일 수 있지요. 아이들 원하는 것 사 줄때는 만원도 아깝지 않습니다. 하지만 주일 연보 만원하면 큰 실수라도 하는 것 같습니다. 같은 만원인데 어떻게 그렇게 커 보이는지요.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도대체 무엇을 위해 기도하는지 기도제목을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무엇을 위해 기도드리고 있습니까? 내 하고 싶은 일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이루시고자 하는 그 일 때문입니까?

욕망 추구에는 불화와 싸움만 남습니다. 두 사람이 만나도 이해가 서로 상충하기 때문에 충돌이 일어나게 마련입니다. 세 사람이 모이면 거기에도 충돌이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먼저 구하십시오. 그때 사람사이에 화목이 옵니다.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서로 사랑하고 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갈구하게 되면 거기에는 화목이 옵니다. 자기 욕망을 추구하면 부끄러운 일들만 따라옵니다.

하나님의 뜻을 간절히 사모하는 사람은 기도하게 됩니다. 욕망추구의 가장 큰 비극은 기도조차 안하는 것입니다.

첫째 이야기는 기도 안하는 사람들을 향하고 있습니다. 바로 3절 이야기로 뛰어 들어 가면 기도 안하는 사람이 오히려 자만하게 될지 모릅니다.‘기도 많이 한다고 되나? 바로 해야지 기도하려면 하나님 뜻대로 해야지.’라고 말입니다.

야고보 선생은 우리를 환히 알았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처음 시작은 왜 기도하지 않느냐고 책망하고 있습니다. 왜 기도하지 않고 서로 시샘하고 서로 다투고 서로 분쟁하느냐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기도 했는데요? 기도해도 안되요”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3절이 말하고 있습니다. 기도했는데도 들어주지 않으면 욕망을 따라서 기도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욕심을 추구하다 보면 참된 기도가 드려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욕망의 시녀로 변해버립니다. 때로는 기도할 때 소원하던 것 하고 눈 떠서 갈망하는 것 하고 달라지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전지전능한 하나님도 헷갈리잖아요. 눈감고 기도 할 때는 이것 주십시오 해놓고 눈 뜨고는 저것 쳐다보고 있고 그러면 하나님이 어느 것을 들어주셔야 되겠어요?

여러분의 주된 관심사가 무엇입니까? 특별한 소원 없이 되는대로 사는 사람 있습니까? 하나님은 그런 삶에서부터 벗어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실 때는 자기 피로 우리를 사가지고 열심 있는 친 백성이 되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사셨습니다.

살아갈 때에 자나 깨나 잊을 수 없는 소원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남편진급, 출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소원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울산교회가 울산지역에서 진리의 빛을 밝히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 기도해야 됩니다. 나는 교회를 위해서 어떻게 기도할 것인지를 기도해야 됩니다. 소원을 두고 기도하는 사람이 성숙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일단 기도를 해야 잘못할 가능성이라도 있지 기도도 안했는데 어떻게 잘못하고 잘 하고 할 게 있습니까? 그래서 기도하지 왜 기도하지 않느냐고 책망하는 것입니다. 제가 20년 전에 어떤 교회를 처음으로 개척을 했더니 장로님들이 모이면 하는 말이 “홍정일 목사님 프라이드를 사줬는데 안받았다고” 그때는 차도 없을 때 아닙니까? 차를 하나 타라고 사드렸는데 그것을 안받았다고 이야기를 자주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속으로 “나한테도 한번 사줘보지 그러면 내가 받을 건지 안 받을 건지”나는 결정할 기회가 없더라고요. 그런 제의를 안 받으니까. 기도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기도를 열심히 해야 잘못 기도하는 사람도 있고 잘하는 사람도 있지 기도를 아예 안하는 사람들한테는 잘못할 여지도 없지요.

그래서 먼저“기도하라”고 권면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욕심을 추구하게 되면 참된 기도가 되지를 않습니다. 그냥 하나님을 우리 욕망의 시녀로만 삼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알아 가면 우리가 그렇게 기도할 수 없습니다. 거룩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양심적으로 생각해도 요구하지 못할 것을 하나님 앞에 어떻게 구합니까? 제가 아는 대전의 어떤 목사님이 그랬다 그러더라고요. 옛날이야기 입니다. 차가 꼭 필요해서 차가 하나 있으면 좋겠는데 그걸 목사님이 그런 것까지 기도하기가 부끄러웠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아이들보고 너희들이 한번 해봐라 그랬답니다. 어떤 것은 고한다고 하는 것이 부끄럽기도 하지요. 우리 양심조차도 허용하지 않는 것을, 우리 이성조차도 용납하지 않는 것을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계속 기도하는 그런 무리한 일을 하지 마십시오. 

삶의 관심사가 무엇입니까? 마음에 두고 기도하는 소원이 무엇입니까? 내 욕망의 충족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는 것입니까?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십시오. 그리하면 먹고 입고 사는 모든 것을 덤으로 주십니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의 목표입니다. 그러면 나머지는 하나님께서 알아서 공급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정말로 중요한 것만 구하면 나머지는 보너스로 주실 건데 부수적인 것만 자꾸 붙들고 있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기도가 교회에서 드리는 기도하고 절간에서 드리는 기도하고 산신령 앞에 빌던 것 가고는 내용이 달라져야 합니다. 신자는 먹고 입고 사는 욕망 충족을 위해 살진 않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먹기 위해 사는 사람들입니다.

살기 위해서 먹는 사람들은 그런 것에 매달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면 나머지는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실 것입니다. 내일은 제가 어렸을 때 다녔던 고향교회를 가게 됩니다. 그래서 옛날 생각이 가끔 떠오르더라고요. 어머니께서 어떻게 기도하셨는가? 한번도 우리 자식들을 위해서 시험에 합격 하게 해달라는지, 좋은 성적을 얻게 하는 그런 것 가지고 기도하는 것 한번도 못 들어 봤어요. 다만 울면서 기도하는 것 들어보면 “하나님 이 아이들이 제대로 안되면, 하나님의 이름에 욕이 돌아가지 않도록 해 달라”고 그것 말고는 기도하시지를 않더라고요. 신자는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살아가는 자입니다. 불타는 소원을 가슴에 담고 살아가십시오.

그 소원을 기도로 아뢰십시오. 바른 소원의 기도는 반드시 응답하십니다. 시기 질투 대신 기도하십시오. 남이 가진 것, 남이 누리는 것 때문에 시샘하지 마십시오. 그것 때문에 속상해서 한숨쉬지 마십시오. 그것은 자기 영혼에게도 좋지 못하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까지도 파괴시킵니다. 참 만족은 기도로 성취됩니다. 하나님만이 참된 만족을 주십니다.

자신의 욕망에 따라 지배되는 삶에는 만족이 없습니다. 지난 한 주간의 삶은 어떠했습니까? 태풍이 불고 비가 내리지만 그 빗방울 듣는 소리에서도 감동할 수 있는 삶을 살아야 됩니다. 산다는 것은 황홀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행복한 것입니다. 참 사는 보람과 만족을 누립니까? 이 대답에 자신이 없다고 하면 여러분 자신의 삶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자신을 자기 욕망의 늪 속에 빠뜨리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자기 욕심의 수레바퀴 속에 자신을 내던지고 있는지 살펴보십시오. 그런 삶에는 평강이 없습니다. 그런 삶에는 참 만족과 보람이 없습니다. 진정한 평화를 원하십니까? 만족과 기쁨을 원하십니까? 오직 하나님께서 주십니다.

구하라 그러면 주시리라고 약속합니다.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고 도전합니다. 

이 가을에는 후히 주시는 하나님을 풍성히 알아 가십시오. 하나님의 약속이 실현되기를 사모하십시오. 거기에 참 만족이 있습니다. 삶의 궁극적인 선택은 둘 중 하나입니다. 자신의 욕망충족이냐 하나님의 뜻의 실현이냐 입니다.

우리는“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뜻이 이루어지기를”기도합니다. 누구 뜻입니까? 내 뜻이 아니라 하늘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이 우리 신자가 드리는 기도의 핵심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궁극적인 선택을 하십시오. ‘아버지여 당신의 뜻이 내 삶을 통해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그런 사람은 살면서 서로 다투고 싸우지 않습니다. 필요한 것을 아버지께 구하고 풍성하게 주시는 아버지께 감사하면서 나를 위해서 조금씩 나머지 부분을 다른 사람을 위해서 내어놓게 될 때에 사는 것이 기쁨이 될 수 있습니다.

이 가을에는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뜻이 이루어지기를”기도하는 울산교회 성도 여러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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