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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시고 알게 하시고 보이시옵소서 (단 2: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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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유관지 목사 (목양교회)

오늘 본문은 지금으로부터 약 3,600년 전의 일입니다.
이스라엘은 이 때 사사시대 말기, 나라가 세워지기 전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시작 부분은 그 때가 매우 답답하고 어두워 가고 있음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 때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을 전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는 뜻입니다.
아모스는 하나님께서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을 이 땅에 보내실 것이라고 했는데(암8: 11) 바로 그런 상태가 된 것입니다.
사사기의 제일 끝 절인 21장 25절은

  그 때에 이스라엘이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해지면 사람들은 더욱 자기 멋대로 행하게 됩니다.

그 때는 이상도 흔히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상은 비전을 말합니다.
답답해도 내일은 잘 된다는 비전이 있으면 그것을 이길 수 있습니다.
이 때는 그런 것이 없었습니다.

제사장 엘리는 늙었고 아들들은 행실이 매우 나빴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엘리의 눈이 점점 어두워 가서 잘 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엘리는 사사였습니다. 사사는 재판관과 장군의 일을 했는데 엘리는 그런 것들 위에 제사장의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엘리가 잘 보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지도자의 건강은 그 지도자가 이끌고 있는 사람들의 사기와 바로 연결됩니다.

우리 나라도 지금 여러 가지 어려운 처지에 있습니다.
용인지역사회신문인 「용인시민신문」 이번 호 톱기사는 용인지역 음식점이 올해 700여 곳 문을 닫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형편이기 때문에  답답하고 어두워 가는 모습을 우리에게 전해주는 본문의 시작 부분은 아주 강하게 우리에게 와 닿습니다.
‘그 때만 그랬던 것이 아니야!’ 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이  답답하고 어두워 가는 가운데 있는 우리가 해야 할 일 세 가지를 알려 주고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등불을 발견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1절과 2절은 답답하고 어두워 가는 그 때 형편을 말해주는데 그 다음에 나오는 한 마디 말씀이 우리를 시원하게 만들고 마음이 밝아지게 합니다.
‘성경을 읽는 즐거움, 성경을 읽는 유익이 이런 것이로구나!. 알게 해 줍니다.
어떤 말씀입니까?
3절 앞부분의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아니하였으며”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의 표면적인 뜻은 아주 간단합니다.
성막 안에는 순금으로 된 등잔대가 있었습니다.(출25: 31~40) 이스라엘 사람들은 감람으로 된 순수한 기름으로 끊이지 않게 등불을 켜고 아론과 아들들이 저녁부터 아침까지 등불을 보살피게 되어 있었습니다.(출27: 20~21, 레 13: 11, 24: 1~4)
이 말씀은 아직 아침이 되지 않아 그 등불이 꺼지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나아가서 영적으로, 상징적으로 우리에게 큰 교훈을 줍니다.
그 시대가 아무리 답답하고 어두워져도 여러분, 하나님의 등불은 꺼지지 않는다는 교훈을 줍니다.
개인적으로 아무리 어려운 형편 가운데 있더라도, 그 어려움이 해결되지 않고 산 넘어 산과 같은 형국이라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등불은 꺼지지 않는다는 교훈을 줍니다.

말씀이 하나님의 등불입니다.
믿음이 하나님의 등불입니다.
소망이 하나님의 등불입니다.

이 등불은 꺼지지 않습니다!

김경수(金京洙)라는 목사님이 계셨는데 시를 쓰는 분이었습니다. 이 분이 지은 ‘진리가 우리를 자유하게 하나이다’라는 찬송시가 있습니다.
그 내용은 진리, 믿음, 소망, 진리의 말씀이 우리를 자유하게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진리, 믿음, 소망, 말씀은 우리를 답답함에서, 염려에서, 어두움에서 자유하게 합니다.

「표준새번역성경 개정판」을 보니까 3절 앞부분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아니하였으며”라는 말을 더 적극적으로 “이른 새벽 하나님의 등불이 아직 환하게 밝혀져 있을 때에”라고 번역했습니다.
우리의 형편이 답답하면 답답할 수록, 어두우면 어두울 수록,  하나님의 등불은 더 밝게 빛납니다.

어제 장기 투병하고 있는 성도님 한 분을 심방해서 히브리서 6장 11절과 12절,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함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 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

라는 말씀을 읽어드리는데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라는 말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라는 말을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투병기간이 길어지면 길어질 수록 소망이 더욱 풍성하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오늘 본문의 표현으로 바꾸면 어려움과 어두움이 심할 수록 소망의 등불이 더욱 밝아지게 해 달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여러분, 답답합니까?
우리 나라가 빠른 속도로 어두워 가고 있는 것, 위기감이 날로 커가고 있는 것, 양심적으로 이 시대를 바라보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도 부인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아직 꺼지지 않는 하나님의 등불을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말씀에 매달리고, 믿음을 새롭게 하고, 소망을 풍성하게 갖는 것은 이 등불의 심지를 올리는 일입니다.
개인적으로 어려운 처지에 있는 분들도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교회가, 성도들이 하나님의 등불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아직 까지지 않은 하나님이 등불, 환하게 빛나는 등불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마5:14~15

하신 주님의 말씀을 우리 삶에 적용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로마로 호송될 때 그가 탄 배가 유라굴로 광풍에 쫓겨서 파선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구원의 여망을 가지지 못할 때 바울은 그들을 격려했습니다.
이것이 그와 같이 한 바울을 본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찬송가 “하나님의 진리 등대”(276장) 가사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진리 등대 길이 길이 빛나니
우리들도 등대되어 주의 사랑 비추세

우리 작은 불을 켜서 험한 바다 비추세
물에 빠져 헤매는 이 건져내어 살리세

죄의 밤은 깊어가고 성난 물결 설렌다
어디 불빛 없는가고 찾는 무리 많구나

우리 작은 불을 켜서 험한 바다 비추세
물에 빠져 헤매는 이 건져내어 살리세

너희 등불 돋우어라 거친 바다 비춰라
빛을 찾아 헤매는 이 생명선에 건져라

우리 작은 불을 켜서 험한 바다 비추세
물에 빠져 헤매는 이 건져내어 살리세

불을 밝히는 작은 등대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6년 전에 이 건물을 착공했을 때 성전건축의 노래를 만들어 예배가 끝날 때마다 불렀습니다. 기억하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제가 작사를 하고 당시 시온 찬양대를 지휘하고 있던 김진성 집사님이 작곡을 했는데 제목이 ‘새 시대의 등불’입니다.
1절 가사가 이렇습니다.

하나님께 이끌리어 찾아온 이 땅
우리 귀에 들리는 생생한 주의 음성
새 역사를 열어 갈 새 성전을 지어라
기도 헌신 기쁨으로 이루오리라
푸른 풀밭 새 성전 목양교회
새 시대의 등불이 여기 빛난다

2절 가사는 이렇습니다.

예수님이 인도한 광교산 자락
선한 목자 음성이 울려 퍼진다
세계 선교 심장 될 새 성전을 지어라
통일 기원 북한 선교 등대되오리
맑은 시내 새 성전 목양교회
새 시대의 등불이 여기 빛난다

이런 노래는 좀 가볍고, 간단해야 사람들의 사랑을 받습니다.
대치동 성전을 지을 때는 이영후 장로님이 작사한 ‘할 수 있다 하신 이는 나의 능력 주 하나님’ 이 복음성가를 열심히 불렀다고 합니다. 
그런 식으로 해야 하는데 그 때는 그럴 분위기도 아니었고, 그런 재주도 없어서 좀 무겁게, 비장하게 많은 내용을 담으려고 했더니 성도들이 군가 같다고 하더군요.
여하튼 이 교회는 새 시대의 등불 되기를 원하는 교회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10년 전 쯤에 어느 지방에 있는 선교기관 책임자로 부임했는데 숙소가 좀 떨어진 곳에 있었습니다. 대전 월평동이었는데 처음 얼마 동안은 길을 몰라서 애를 먹었습니다. 특히 퇴근해서 밤에 돌아올 때는 더 힘들었습니다.
숙소를 찾는데 하나 도움이 되는 것이 있었습니다. 숙소 앞에 교회가 하나 있었는데 이 교회 간판이 유난히 크고 밝아서 멀리서도 잘 보였습니다. 그 간판을 기준으로 숙소를 찾아오곤 했었는데 어느 날은 숙소를 지나쳐서 엉뚱한 곳으로 가서 한참 헤맸습니다.
왜 그랬는지 아세요? 그 교회 간판에 불이 켜져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찰 집사님이 스위치 올리는 것을 잊었던 모양입니다.
이것은 아주 사소한 일이지만 교회의 불빛이 꺼지면 여러분 이렇게 여러 사람이 길을 잃고 고생합니다.
이 시대가 길을 잃고 엉뚱한 데로 가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 아직 꺼지지 않는 하나님의 등불을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그 등불이 환하게 빛나고 있는 것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작은 등불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 예배실을 보면 전구들이 수없이 많이 달려 있습니다. 대강 세어보니까 100개가 넘습니다.
대성전 예배실에는 천 개가 넘는다고 합니다.
때로는 그 가운데 깜박이는 전구, 까진 전구가 생겨서 예배를 방해합니다.
여러분, 그런 전구들이 되지 마시고 불이 환하게 켜져 있는 전구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라고 사무엘을 부르셨습니다.
아직 꺼지지 않은 등불로서, 환하게 켜져 있는 등불로서, 우리들도 빛이 되라고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둘째, 다른 곳으로 가지 말고 하나님께로 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사무엘을 불렀을 때 사무엘은 엘리에게 달려갔습니다.
세 번이나 엘리에게 가서 “당신이 나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였습니다.(5절, 6절, 9절)
엘리가 제사장이었고 자기의 스승이니까 심부름시킬 일이 있어서 부르는 줄 알았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하느라고 사무엘은 그 날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고 늙은 엘리도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어서 사무엘을 불렀는데 사무엘은 자꾸 다른 데로 갑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어떻게 하셨습니까?
10절 보세요. “하나님이 임하여 서서” 하나님이 친히 나타나셨습니다.
다급해지신 것 같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답답하게, 다급하게 만들어드려서는 안 됩니다.

7절을 보면 사무엘이 아직 여호와를 알지 못하고 여호와의 말씀도 아직 그에게 나타나지 아니한 때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가지 않고 엘리에게 갔다는 뜻인 것 같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압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이 답답하고 어두워 가는 때에 다른 데로 가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로 가야합니다.

사무엘이 엘리에게 세 번이나 갔기 때문에 엘리가 하나님이 사무엘에게 무엇이라고 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엘리의 집을 영원토록 심판하실 것입니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미 하나님의 사람이 엘리에게 와서 전해 준 내용이었습니다.

제사장 엘리는 한없이 무능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악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엘리가 악하고 교활한 사람이었다면 ‘하나님이 이 아이에게 무엇이라고 말하는지 내가 엿들어야겠다.’ 하고 사무엘이 자는 곳 문밖에 와서 귀를 쫑긋 세우고 염탐을 했을 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너는 나 있는 곳에 와서 자거라.’ 했을 지도 모릅니다.
엘리는 그렇게 하지 않고 사무엘에게 ‘하나님이 부르시면 이렇게 하라.’ 일러주었습니다.

아침이 되어 사무엘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하신 말씀을 숨기지 않고 자세하게 엘리에게 그대로 전했습니다.
엘리는 “이는 여호와이시니 선하신 대로 하실 것이니라”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니 어쩔 수 없다.’ 한 것입니다.
자기의 부족, 자기의 허물, 자기의 한계를 알고 그에 따르는 하나님의 조치를 숙연하게 받아들였습니다.
자기의 부족과 무능을 인정하지 않고 자꾸 편법을 써서 일을 더 어렵게 만드는 지도자도 있는데 엘리는 그보다 훨씬 낳았습니다.

만일에 엘리가 악한 사람이었다면 사무엘의 말을 듣고 ‘이 놈 건방지다!’하고 사무엘을 여호와의 전에서 추방했을 지도 모릅니다.
또 ‘악하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내 두 아들 가운데서 하나를 후계자로 세워야겠는데, 이 사사 자리, 제사장 자리를 세습시켜야하겠는데 하나님은 이 아이를 세우려고 하는구나! 내가 미리 손을 써야하겠다! 걸림돌을 제거해야 하겠다.’ 이런 마음을 먹었을 지도 모릅니다.
만일 그렇게 되었다면 사무엘은 위험한 일을 겪게 되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은 다른 데로 나가지 말고 하나님께로 바로 나가야할 때입니다.
다른 데로 많이 나가보았지만 소용이 없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모두 깨달았습니다.

동방박사들은 아기 예수님을 찾아올 때 베들레헴으로 가지 않고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유대인의 왕이니까 당연히 수도인 예루살렘에서 출생했을 것으로 인간적인 판단을 한 것 같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유대인의 왕으로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마2: 2) 소문을 내고 다녔습니다.
이 때문에 헤롯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두 살부터 그 아래 사내아이들이 다 죽이는 참극이 벌어졌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나가지 않고 다른 데로 간다면 우리도 피곤해 질 것입니다.
그리고 혼란과 위험한 일이 벌어질 것입니다.

소명장인 이사야서 6장은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이사야가 성전에 나가 하나님을 만나는 이야기로 시작이 됩니다.
웃시야 왕은 기원전 790년에서 739년까지 52년 동안 유다를 다스린 왕입니다.
유능한 왕이었습니다. 웃시야가 다스릴 때 유다는 매우 번성했습니다.
웃시야 왕은 특히 외교를 잘 했습니다.
이사야서 7장을 보면 웃시야가 죽은 다음에 북왕국 이스라엘과 아람이 연합해서 유다를 침공하고 그 때문에 백성의 마음이 숲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 같이 흔들리는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다는 주변 나라들 틈에 둘러싸여 그럴 위험을 언제나 안고 있는 처지였는데 웃시야 왕은 뛰어난 외교력으로 그런 것을 막아냈습니다.
그런 웃시야 왕이 죽었습니다. 일종의 위기입니다.
이사야는 다른 데로 가지 않았습니다. 성전으로 갔습니다.
거기에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자기가 부정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고 그것을 용서함 받는 영적인 체험을 했습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선지자로서 사역을 시작합니다.
이 감동적인 일들이 이사야가 다른 데 가지 않고 성전으로, 하나님께 갔기 때문에 일어났습니다. 

여러분, 답답하고 어두워 가는 때에 다른 데로 가지 마세요. 
하나님께 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가서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나는 이렇게 할 것이다.’ 알려주실 것입니다.

다른 데로 가지 않고 하나님께로 나아가 하나님의 계획을 알고, 내가 가지고 있는 문제 해결의 길을 찾는 성도들이 되기 바랍니다.

셋째, 새 시대를 준비하는 사람으로 살아야합니다.

사무엘은 어머니의 서원기도로 태어났습니다.
이해심이 깊은 아버지와 기도를 열심히 하는 어머니 밑에서 자랐습니다.
어머니가 ‘너는 여호와께 드려진 아이다.’하는 것을 수없이 일러주었을 것입니다.
어려서부터 성전에서 지냈습니다.
사무엘은 경건한 성품을 지니게 되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일이 사무엘이 몇 살 때 있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1절을 보면 “아이 사무엘”이라고 하였는데 이스라엘에서 “아이”라고 하는 말은 범위가 아주 넓었습니다.
역사가 요세프스는 이 때 사무엘이 열두 살이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하튼 이 체험을 한 다음에 사무엘은 더욱 더 경건한 삶을 살기 위해서 힘썼을 것입니다.

그 결과로 사무엘은 영적인 권위를 갖게 되었습니다.
19절 뒷부분을 보면 그의 말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사무엘이 한마디 말을 하면 온 이스라엘 백성이 귀를 기울여 들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온 이스라엘이 사무엘은 여호와의 선지자로 세우심을 받은 사람인 것을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습니다.
사무엘의 말은 온 이스라엘에 전파되었습니다.

그 뒤에 이스라엘은 큰 위기를 계속해서 만납니다.
블레셋에게 대패를 하고 이스라엘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언약궤를 빼앗깁니다.
제사장 엘리의 두 아들이 전사하고 엘리도 죽고 며느리도 죽습니다.
이스라엘이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어떻게 하실 것을 미리 알고 영적으로, 경건함으로 준비해 나간 사람 사무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이 있었기에 이스라엘은 이 위기를 극복하면서 사사시대를 마감하고 왕국시대를 열어갑니다.
위기를 기회로 바꾼 기록을 세웁니다.

지난 주간 저는 청년부 여름 수련회에 가서 개회 설교를 하면서 예수님이 설흔 살 이전까지어떻게 지냈는지 성경에는 기록이 없지만 성실하게 배우고 부모와 형제를 돌보았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공생애를 잘 준비하는 삶을 살았을 것이라고 하면서 청년의 때는 이와 같이 잘 준비하는 때라고 했습니다.
청년 수련회 주제가 ‘열매 맺는 삶’이었는데 청년 때 잘 뿌리고 가꿔야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새 국면, 새 처지, 새 환경, 새 시대를 바라보면서 준비하는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윤동주 시인의 ‘쉽게 씌여진 시’라는 시 가운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라는 구절이 있는데 여기에 나오는 ‘나’가 되어야합니다.

먼저 개인적으로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건강을 위해 기도하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건강해진 다음에 어떻게 할 것인가 계획을 세우고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믿음의 배우자를 위해 기도하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의 배우자를 허락해 주신 다음에 어떻게 할 것인가 계획을 세우고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어려운 일, 억울한 일을 만나 기도하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그 문제가 해결된 다음에 어떻게 할 것인가 계획을 세우고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군대생활 하는 청년들도 그렇게 해야합니다.
전역을 앞둔 사병들이 사고를 내는 일이 많다고 합니다.
긴장이 풀어지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나는 전역을 한 다음에 이렇게 하겠다.’ 하면서 준비를 하는 사람들은 사고 내는 일이 적다고 합니다.

주보 10면을 보면 제가 박사학위 받은 광고가 있습니다. 학위를 준비할 때 목회학 박사 과정이 아닌 신학박사 과정(Ph. D. in Theology)을 택했습니다. 저와 같이 시간이 부족하고 학문을 전문으로 연구하는 처지가 아닌 사람에게는 힘들고 매우 위험한 일이기도 합니다.
해방 이후 북한교회사에 대한 학술적인 논문을 한 편 써야하겠다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논문 쓰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고, 목회하면서 논문 쓰는 것은 더 힘든 일인데 이런 주제는박사학위 논문으로 처음이었기 때문에 정말 힘들었습니다.
이 논문이 발표된 것을 계기로 해방 이후 북한교회사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지는 것을 기대하면서 썼기에 부족하지만 끝낼 수 있었습니다.

국가적으로도 지금 나라가 매우 혼란하지만 이 혼란 뒤에 경제적인 회복과 바른 가치관과 새로운 질서가 허락될 것을 믿으며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특별히 교회적으로  꼭 그렇게 해야합니다.
대 성전 시대가 눈앞에 다가 왔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합니까?
본문 앞에 2장 35절에 그 답이 있습니다.

내가 나를 위하여 충실한 제사장을 일으키리니 그 사람은 내 마음, 내 뜻대로 행할 것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견고한 집을 세우리니 그가 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앞에서 영구히 행하리라

여러분, 하나님의 충실한 제사장이 되기 위해 힘쓰시기 바랍니다.
기독교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 제사장이라고 가르칩니다.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 힘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견고한 집을 세워주는 사람이 되기 바랍니다.
제사장 엘리의 집은 견고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되어 하나님께서 개인적으로, 국가적으로, 교회적으로 열어 주실 새 시대를 이끌어 가는 일꾼들이 되기 바랍니다.

매우 답답합니다. 어두워 갑니다.
이 때 꺼지지 않고 밝은 빛을 내고 있는 하나님을 등불을 바라보며, 다른 데로 나가지 않고 하나님께 나가며, 새 시대를 준비하는 일꾼들이 되기 위해 힘쓰는 여러분이 되고 제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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