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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느 편에 설 것인가? (행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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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흥준 목사 (전주광성교회)

바울과 바나바의 제1차 전도여행이 본격적인 궤도에 올라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전도여행이 결코 순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복음이 전파되는 곳엔 반드시 방해 세력이 있었고 그 방해 세력은 보통의 핍박이 아닌 감당하기 힘든 엄청난 핍박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이 보여 준 모습은 오로지 예수님이었고 오로지 복음 전파였습니다.

바울은 예수님만 알기를 원했습니다. 예수님도 알고 다른 것도 알기를 원한 게 아니라 오로지 예수님만 알기를 소원했습니다. 
고리도전서 2:2절에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바울은 또한 예수님만 자랑하기로 했습니다. 예수님 외에 자랑할 것이 없어서가 아니라 예수님 외에 그 어떤 것도 자랑할만한 값어치있는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갈라디아 6:14절에서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더 나아가 바울은 예수님을 위해서 죽기로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죽을 수 있는 충분한 가치가 있다는 것입니다.
생명은 사람에게 가장 귀한 것입니다. 생명은 하나뿐입니다. 유일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죽을 수 있다고 고백했습니다. 
사도행전 20:24절에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 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예수님만 알기를 원하고 예수님만 자랑하기를 원하며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죽을 수도 있다는 태도. 바울의 그 자세가 여러분의 자세가 되기를 바랍니다.
저는 사도행전 20:24절을 살피면서 그 말씀 앞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일 하면서 여러 가지 핑계를 많이 댑니다.
<힘들다, 피곤하다, 환경이 좋지 않다, 이제까지 열심히 했으니 이제 좀 쉬어야겠다, 쉬지 않고 일하다 건강을 잃어버리면 큰 일이니 쉬는 것도 하나님의 일 하는 것이다, 교회보다 가정이 더 우선이다, 영적 재충전을 위해선 안식년이 필요하다 등등등> 하나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사도행전 20:24절 앞에서 모든 핑계거리가 순식간에 완전히 무너짐을 알았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죽어 버린다는 고백 앞에 건강이라는 말이 고개를 내밀 수 있습니까? 피곤하다는 말이 통하겠습니까? 안식년이 통하고 가정의 행복이 우선이라는 말이 통하겠습니까?

지금 우리 교회는 사도행전을 공부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교회 부흥입니까? 맞습니다. 성령충만입니까? 맞습니다. 전도의 불붙이고 기도의 불 붙여서 한국 교회가 살아나는 것입니까? 맞습니다. 선교입니까? 맞습니다.
그러나 궁극적인 목표는 사도행전 20:24절입니다. 예수님을 위하고 복음 전파를 위해서라면 죽을 수도 있다는 자세를 교회와 모든 성도들이 갖게 될 때 그때 비로소 사도행전 프로젝트는 성공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는 희생입니다. 보통의 희생이 아니라 피의 희생 곧 생명을 희생해야 일어서는 게 기독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상에서 피를 흘리셨습니다. 제자들도 피를 흘렸습니다. 바울도 피를 흘렸습니다. 피 때문에 복음이 왕성하게 전파됐고 피 때문에 교회가 부흥됐던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교회든 부흥되기 위해선 예수님을 위해, 복음을 위해 생명을 건 사람들이 있어야합니다.
여러분! 교회가 부흥되길 원하십니까? 그러면 여러분 가운데 복음 전파를 위해 생명을 건 사람이 나와야합니다.
복음 전파와 생명을 바꾼 사람이 있을 때 부흥다운 부흥을 맛볼 수 있습니다.
누가 그 일을 해야합니까? 목사? 전도사? 장로? 집사? 아닙니다. 내가 해야합니다. 누구라고요? <나!>.
내가 할 일을 남에게 미루지 마십시오. 내가 할 일을 남에게 기대하지도 마십시오. 나는 못하면서 <아무개는 왜 안 하는가> 그러지 마십시오.
모든 충성, 모든 헌신, 모든 전도는 나로부터 출발되어야합니다.
사도행전의 목표라 할 수 있는 사도행전 20:24절에까지 여러분 모두 다 이르시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입술로만 20:24절을 부르짖지 않았습니다. 그의 모든 전도 여행을 살피면 그의 고백이 조금도 거짓이 없고 행동으로 보여 주는 고백임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도 역시 20:24절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이고니온 사역과 루스드라와 더베 지역의 전도를 보여줍니다.

1. 첫째 바울과 바나바가 이고니온에 복음을 전하자 무리가 양분됩니다(1-4).

1) 이고니온의 회당에 들어가 복음을 전하자 유대인과 헤라인의 허다한 무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었습니다.

1절 보세요 <이에 이고니온에서 두 사도가 함께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말하니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믿더라>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복음을 전했고 그 곳의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자 시기한 유대인들의 핍박에 의해 쫓겨나 이고니온에 이르렀습니다.

①사도들이 이고니온에서 한 일이 무엇입니까?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서 말했다>고 했습니다.
회당 예배는 구약 성경을 읽고 그에 대한 교훈 하는 시간을 가졌음으로 전도자들이 유대인과 유대교에 입교한 이방인들을 상대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에 회당은 아주 적절한 장소였습니다.
회당에 들어가서 무엇을 말한 것입니까?
예수님에 대해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해 말했고 그 결과로 허다한 사람들이 예수님을 받아 들였습니다.
바울과 바나바의 자랑은 오직 예수님뿐이었습니다. 가는 곳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것 즉 동일한 내용만 전했습니다.
여러분도 예수님만 전하십시오. 예수님에 대한 내용 자체가 능력이기 때문에 전파하면 듣고서 믿는 자가 많아집니다.

<허다한 무리가 믿었다>고 했습니다. 허다하다(풀뤼)는 말은 많은 무리를 말합니다. 허다하다는 것은 믿는 무리가 얼마나 많았는지를 강조하는 말입니다.
예수님만 전하면 복음의 계속적인 확장이 이뤄집니다. 누구도 복음 확장을 막지 못합니다.
구브로 섬에서 총독의 믿음,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믿음, 그리고 본문의 이고니온에서 허다한 사람들의 믿음. 복음이 계속 확장되지 않습니까? 핍박이 계속됐습니다. 그러나 복음 확장은 더욱 더 계속됐습니다.

여러분이 전도해도 똑같은 결과가 나타남을 믿으십시오. 예수님을 전하기만 하면 복음은 반드시 확장됩니다. 전도하는 사람을 누구도 막지 못합니다. 어떤 핍박도 복음 확장을 막을 수 없습니다.

2) 그러나 순종치 아니하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선동하여 믿는 형제들에게 악감을 품게 했습니다.

2절 보세요 <그러나 순종치 아니하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하여 형제들에게 악감을 품게 하거늘>
복음이 확장되면 뒤따르는 게 있습니다. 핍박입니다. 사단이 왕노롯하는 이 세상에서 전도하게되면 마귀가 가만있을 리가 없습니다.
여기 <순종치 아니하는 유대인들이>란 <믿음을 거부하고, 생명력 있는 복음을 받아드리지 않고, 인본주의인 유대교에 깊이 빠져있는 유대인들이>을 말합니다. 이들이 이방인들을 선동하여 바울 일행에게 반기를 들게 합니다.

하나님 일 하는 것을 막는 자들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치 않는 자들입니다. 순종하는 사람들, 말씀대로 살려는 사람들이 어찌 하나님의 일에 브레이크를 걸겠습니까? 내가 불순종할 때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의 일 열심히 하는 게 눈에 거슬립니다. 그래서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해서 반대를 합니다.

2절 중간에 보시면 <선동하여>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교묘한 말로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여 자기편으로 만들어서 함께 반대하고 배척하고, 핍박을 합니다.
여러분! 나를 정당화시키기 위해 다른 사람을 끌어들이지 마십시오. 하나님 일하기 싫으면 가만히 있으면 됩니다.
선동하여 수많은 사람을 내편으로 만들었다 할지라도 틀린 것은 틀린 것입니다. 나를 지지하는 사람이 많다하여서 옳은 것은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의 명령,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이 옳은 사람입니다.
전도는 주님의 가장 큰 명령입니다. 전도의 명령에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주변에 전도를 못하게 방해하는 사람이 있을지라도 전도하십시오.
명령을 따르는데 있어선 이유가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라 하시면 무조건 해야합니다.
<핍박하는 사람이 없을 때, 방해하는 사람이 없을 때 전도하겠다>하면 평생 전도할 기회를 갖지 못합니다.
좋은 여건이 주어지기를 기다리지 마십시오. 평생 좋은 여건은 주어지지 않습니다.
전도는 영적 전쟁이라고 하였습니다. 피할 일이 아니고 싸워서 물리치고 승리해야 하는 일입니다.
핍박 속에서 바울과 바나바가 계속 전도하지 않습니까? 베드로가 예수님의 수제자였지만 그에게도 핍박이 있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전도는 계속 했습니다.

여러분이 전도할 때 가족들이 도와 줄 것 같습니까? 다른 사람들이 수고한다고 위로해주고 갈비탕 한 그릇이라도 대접해줄 것 같습니까?
그런 것 기대하지 마십시오. <주님이 명령하셨으니 나는 그저 순종한다>는 자세 가지고 쉬지 않고 복음을 전파하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그럴 때 주께서 반드시 힘 주시고 위로 주심을 믿습니다.

3) 바울과 바나바가 복음을 증거할 때에 주께서 표적과 기사를 행해하심으로 복음을 확증케 하셨습니다. 

3절 보세요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께서 저희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거 하시니>

핍박 앞에서 두 사도가 보여 준 모습이 무엇입니까? 3절에서 배워야 될 3 가지 교훈이 있습니다.
①첫째는 <두 사도가 오래 있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선동하여 배척했음에도 불구하고 이고니온에 오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이고니온에 오래 있는 다는 것은 무척 힘든 일입니다. 고난과 핍박 가운데사도 좌절하지 않고 자기 일신상의 안전을 도모하지 않고 오로지 복음 전도에만 전념하는 바울 일행의 철저한 헌신을 보여줍니다.

핍박 자들이 얼마나 괴롭혔겠습니까? 일하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인내하면서 오랫동안 그 곳에 있었습니다.
이유는 하나입니다. 견딜 수 있을 때까지 견디면서 한 영혼이라도 더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주님의 재림이 늦어지는 것도 한 영혼이라도 더 살리기 위해서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힘들다고 증거 하는 삶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전도 대상자가 쉽게 돌아서지 않는다고 포기하지 마십시오. 인내가 없으면 아무 일도 못합니다.
한 가지 일을 맡았으면 그 분야의 전문가가 되도록 오래오래 충성해야합니다. 쉽게 포기하지 마십시오. 편하게만 일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쉽게 바꾸지도 마십시오. 할 수 있는 한은 하십시오. 끈기를 가지십시오.

바울 일행은 오래 했습니다. 그러다가 목숨의 긴박한 위험 앞에서 더 이상 일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을 때 이고니온을 탈출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힘들어서 포기하고픈 사람이 있습니까? 어느 정도나 힘이 듭니까? 생명의 위협을 가져 올 정도로 힘이 듭니까? 그 일을 더하면 죽을 것 같습니까?.... 힘들어도 참을 때 천하보다 더 귀한 영혼을 살릴 수 있습니다. 고통스러워도 참고 잘 감당할 때 교회가 든든히 서갑니다.

목사가 교인들을 향해서도 10년이고 20년이고 참아야하는 것 같습니다. 한 사람이 예수님 믿고 교회에 발을 들여놓으면 그 즉시 좋은 일꾼이 되는 게 아닙니다. 그 사람의 실패와 부족함을 보면서 포기하지 않고 5년을 기다리고 10년을 기다릴 때 결국은 좋은 일꾼이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년, 2년 기다리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포기해 버린다면 누가 좋은 일꾼이 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도 제자들을 3년 이상 가르치며 기다리지 않으셨습니까? 저는 지금도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제껏 5년, 10년을 기다렸다 할지라도, 또 앞으로 5년, 10년을 더 기다려야한다 할지라도 기다릴 것입니다. 어느 때인가는 여러분 모두가 반드시 제가 원하는 수준 이상의 신앙인이 되어짐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받는 훌륭한 제자가 되어지리라 확신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꿈이 있습니까? 1년 만에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꿈을 포기치 마십시오. 하나님이 꿈을 주셨다면 하나님이 반드시 이루십니다.
아브라함은 25년을 기다렸고, 요셉은 13년을 기다렸습니다.
참고 참고 또 참다보니 25년이 지나 꿈이 이뤄졌고, 기다리고 기다리고 또 기다리다보니 13년이 지나 꿈이 이뤄졌습니다.

교회도 기다릴 줄 아는 교회가 승리합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셨다면 반드시 힘있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기간은 1년이 될 수도 있고 10년, 20년, 30년이 될 수도 있습니다. 1년, 2년 목회 하다가 부흥되지 않는다고 교회 문 닫는다면 문 닫지 않을 교회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하나님이 10년을 정하셨다면 10년을 기다려야하고 20년을 정하셨다면 20년을 기다려야합니다.
교회 성장학자들이 흔히 하는 말이 있습니다. 개척하여 2년, 3년  안에 부흥시키지 못하면 부흥은 끝났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저는 10년 동안 부흥되지 못해 쩔쩔매다가 십 수년만에 크게 부흥된 교회들을 보았습니다.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때가 이르매 드디어 부흥의 축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십니까? 그렇다면 어떤 경우도 포기하지 마십시오. 부흥이 될 때까지, 약속이 이뤄질 때까지, 좋은 일꾼으로 바뀔 때까지, 전도 대상자를 구원시킬 때까지 오래 기다릴 수 있는 여러분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② 둘째는 3절에서 배워야 할 두 번째 교훈은 무엇입니까?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하였습니다. 서도들은 오직 주를 위하여 주의 복음만을 담대히 전했던 것입니다. 
무엇을 말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십자가와 부활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그럼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하게 말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주를 힘입었기 때문입니다. 항상 담대하십시오. 복음을 전할 때 특히 담대하십시오. 두려워 할 이유가 없습니다.
사단은 약자에게는 강하고 담대한 자에게는 약합니다. 주눅들지 마십시오. 더 힘있게, 더 자신 있게 전파하십시오.

전도는 주님이 가장 좋아하시고 가장 기뻐하시는 일인데 그 좋은 일 하면서 두려워하고 부끄러워하면 되겠습니까? 더군다나 우리는 주님을 힘입고 전도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내편이고 내가 주님을 의지하는데 누가 막겠습니까?
주님 의지해서 내 축복이나 더 받겠다는 게 아니고 천하보다 더 귀한 영혼을 살리겠다는 것이라면 더욱 더 담대해야 할 자격이 있는 게 아닙니까?
사단을 물리치고 영혼을 살리겠다는 목표가 담대할 만하지 않습니까? 가로막는 사단이 태산처럼 높아 보일지라도 담대하게 외치십시오.

그리하면 <산을 명하여 바다에 던지우라 할 때 그렇게 되리라>고 말씀하신 주님께서 태산을 무너뜨려 주심을 믿습니다.
산처럼 높은 파도가 몰려온다 할지라도 풍랑을 잔잔케 하시는 주님을 의지하며 담대하게 외칠 때 성난 파도가 호수처럼 잔잔해짐을 믿습니다.
주를 힘입으십시오. 주님께서 세상 끝 날까지 함께 하신다고 약속하지 않으셨습니까? 악한 사단을 물리쳐 주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하나님의 품에서 그 누구도 뺏어가지 못하도록 지켜 주신다고 맹세하지 않으셨습니까? 그 정도의 약속이라면 주님을 힘입어 담대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대장 되신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앞서가시며 악한 원수를 물리쳐 주십니다.
여러분은 큰소리치며 그저 뒤만 따르면 됩니다. 나머지는 주님께서 다 알아서 해주십니다. 결론은 오직 승리뿐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③셋째 주님께서 보증해 주십니다.
주를 힘입어 담대히 선포하면 주님께서 많은 표적과 기사를 나타내 주십니다. 이는 사도들이 전한 복음이 진리인 것을 확증하고, 나아가 더 많은 사람들이 그 복음을 믿도록 하기 위해주십니다.
표적과 기사는 누가 나타내주십니까? 주님께서 나타내주십니다.
왜 나타내주십니까? 복음의 내용이 사실임을 보증해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의 시대에 우리 광성교회에서, 또 여러분을 통해서 수많은 이적이 나타나길 소원합니다.

어떻게 해야 나타납니까? <기적아 나타나라, 나타나라>하며 소리친다고 해서 나타나는 게 아닙니다.
전도자를 통해 나타남을 믿습니다. 주를 힘입어 담대하게 복음을 전파할 때 그때 이적이 나타남을 믿습니다.
전도 열심히 하십시오. 그러면 많은 이적을 체험할 것입니다. 믿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이적을 보여주십니다.

전도하는 여러분을 혼자 보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함께 해주십니다. 필요한 때에 기적을 통해서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보여주십니다.
전도 열심히 할수록 그런 체험이 많아지니 전도의 맛을 아는 사람은 절대로 전도를 포기하지 못합니다. 전도하면서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는 것보다 더 신나는 일이 있겠습니까?
여러분과 우리 광성교회가 전도와 선교에 힘을 씀으로 하나님의 이적을 마음껏 체험하는 축복을 누리시길 간절히 축복합니다.
4) 복음이 전파되면 두 가지의 반응이 나타납니다.
4절 보세요 <그 성내 무리가 나뉘어 유대인을 좇는 자도 있고 두 사도를 좇는 자도 있는지라>
바울과 바나바가 복음을 전파한 결과 이고니온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드려 믿는 사람들과, 믿지 않는 유대인들을 추종하는 무리로 나누어지게 되었습니다.
호의적인 반응과 적대적인 반응입니다. 복음이 들어오면 빛과 어두움이 갈라집니다. 호의적인 반응을 보인 사람들은 사도들을 따랐습니다. 반대로 적대적인 사람들은 핍박하기 시작합니다.
공동체의 분란을 일으키는 사람들은 복음을 배척하는 자들입니다.

2. 둘째 바울과 바나바가 핍박을 피해 루스드라와 더베 일대에서 전도했습니다(5-7)

1) 마침내 복음에 적대적인 이방인, 유대인, 관원들이 두 사도를 돌로 치려고 음모를 꾸몄습니다. 
5절에 <이방인과 유대인과 그 관원들이 두 사도를 능욕하며 돌로 치려고 달려드니>
그냥 핍박하는 정도가 아니고 극도의 핍박, 극단적인 핍박입니다. 돌로 쳐서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그런 음모를 알고 바울 일행은 도망쳐서 다른 곳으로 향합니다.
끝까지 받아들이지 않으면 다른 곳으로 방향 전환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10:23절에서 <이 동네에서 너희를 핍박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일을 해야하기 때문에 피신해야할 필요가 있을 때는 피신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전도하는 것은 그 사람을 통해서 무엇인가 이익을 보겠다는 게 아닙니다. 단지 그의 영혼을 살리겠다는 것뿐입니다.
전도하는 사람이 오히려 손해를 봅니다. 시간 손해, 물질 손해, 또 얼마나 많은 기도를 해줍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은혜를 모른 체 끝까지 거절한다면 어쩔 수 없는 게 아닙니까? 죽어 가는 다른 영혼에게 시선 돌려서 빨리 구원시키는 게 더 현명할 것입니다.

2) 두 사도가 이를 알고 루스드라와 더베 근방으로 피하여 복음을 전했습니다.

6,7절에 <저희가 알고 도망하여 루가오니아의 두 성 루스드라와 더베와 및 그 근방으로 가서 거기서 복음을 전하니라>
새로운 지역에 가서 무엇을 합니까? <거기서 복음을 전하니라>. 쉬지 않았습니다. 피로 풀겠다고 잠시 중단하지 않았습니다.
새로운 곳에 가자마자 또 복음을 전했습니다. 핍박 앞에서 전도를 중단한 게 아니라 새로운 지역에 전도하기 위해 장소를 바꾼 것입니다. 쉬지 않고 전도합니다.

동쪽을 막으면 서쪽으로 가고 서쪽이 막히면 남쪽으로, 남쪽이 막혔으면 북쪽으로 동서남북 사방이 막히면 배타고 다른 지역으로, 환경이 어렵다고 쉬지 않았고, 전도의 길이 막혔다고 핑계대지 않았습니다.
길이 없으면 길을 만들어 나가면서 전도를 했습니다. 쉬지 않고 장소에 상관없이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핍박이 있든지 없든지 오로지 전도, 전도, 전도였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남편(아내)이 반대하면 못하죠? 손님 찾아와도 못하고, 몸 상태가 안 좋아도 못하고, 기분 나빠도 못하고, 여하튼 조금만 핑계거리가 있어도 못합니다. 아니 못하는 게 아니라 안 합니다.
복음이 쉽게 확장됩니까? <죽으면 죽으리라>의 각오가 없으면 전도의 승리는 없습니다. 죽기를 각오하고, 아니 목숨을 내어놓고 전도한 사람들의 덕분에 지금 여러분이 믿게 됐음을 알아야합니다. 여러분에게 쉽게 전파된 게 아닙니다.

스데반의 순교가 있었고 제자들의 순교가 있었습니다. 바울의 순교가 있었고 그 순교가 계속 줄을 이어 오면서 우리나라에까지 연결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수많은 순교가 있지 않았습니까?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 일제시대와 6, 25전쟁 때의 순교 그런 순교 덕택에 지금 우리가 이처럼 믿음의 축복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들의 피 흘림이 우리에게 복음을 연결시켜 주었고, 여기서 복음이 더 확장되려면 우리도 죽기를 각오하고 전도해야만 후대에까지 복음을 연결시킬 수 있습니다.

내가 복음을 받았다면 큰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의무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나에게 연결시켜준 복음의 줄을 이제는 내가 또 다른 사람에게 복음의 줄을 연결시켜 주어야합니다.
2000년 동안 연결되어진 복음의 줄이 나에게서 끊어지지 않도록 하십시오. 평생 한 명 전도했다면 복음의 줄을 한사람에게만 연결시킨 것입니다. 그 사람이 전도하지 않으면 나를 통한 전도의 줄은 영영히 끊기고 맙니다. 그러나 평생 여러 사람에게 복음의 줄을 연결했다면 한 두 줄 끊어져도 문제 될 게 없습니다. 

두 종류의 사람들!,
①생명을 걸고 전하는 사람들과, 사람을 죽여서라도 복음을 전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②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아들인 사람들과, 복음을 들었음에도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핍박하는데 앞장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편에 설 것입니까? 하나님 편이십니까? 마귀편이십니까?
하나님편이 되시기 바랍니다.
교회편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편이 되시기 바랍니다.
전도에 생명을 거는 편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 시간에 예배드리는 여러분 모두가 다 21세기의 바울이 되시고 바나바가 되시어 놀라운 복음 확장을 이루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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